◈종교 생활을 조심하십시오 암4:1-13 출처보기, 대강 번역
Beware of Religion by Jason Tarn
◑서론 / 바른생활적 치유 종교 (Moralistic Therapeutic Deism)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의 컬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른생활적 치유 종교’입니다.
‘바른생활 Moralistic’이란.. 수많은 소위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기준은
그저 초등학교 교과서 바른생활에 나오는 정도의 도덕 수준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교과서 바른생활의 수준과 동일시 시킨다는 것이죠.
즉 그저 나이스하고, 외적으로 보기에 그냥 신사적이면,
자기가 괜찮은 크리스천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치유 Therapeutic’이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독교 신앙을 그저 자기의 감정의 치유, 마음의 위안과 평안..
즉 불교나 요가 정도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힐링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서, 자기 마음이 약간 위로받으면, 그걸로 만족한다는 것이죠.
‘이성적 신 Deism’이란, *‘理신론’
쉽게 말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인간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그저 창조해놓고, 손 놓고 낮잠이나 자는
그런 신으로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무신론보다 나은지 모르지만, 거의 무신론과 같다고 보면 되는 거죠.
오늘날 미국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바른생활적, 힐링의, 이성적 신’정도로만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또한 자기 나름대로 믿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큰 일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도, 그런 정도의 믿음 같지도 않은 믿음을 갖고서
자기를 크리스천으로 표방하며, 교회에 다니기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한 마디로, 완전히 문화적인 기독교인이 된 것이죠.
그런데 심각한 점은, 이것이 지금 미국에 대중화 되었다는 점입니다. 대세입니다.
제 Tarn이 보기에, 이런 소위 신자들이, 특히 젊은 층에 있어서
미국교회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 개인적 친밀한 교제관계인데,
그게 전혀 안 되는 소위 이신론자(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18세기부터 늘 있어왔지만, 지금은 완전히 봇물처럼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역사적, 성경적 신앙과는 다른 기독교인데,
문제는 그런 이신론적 기독교인들이 너무 넘쳐나다 보니까..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다 그렇게 대충 믿으니까요!
그들을 향해 ‘치료’(힐링)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그저 교회 와서, 자기 우울했던 기분이 좋아지고, 저하되었던 사기가 다시 높아지면
그걸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자기의 ‘우주적 도우미 집사 Cosmic Butler’ 정도로 여기는 것이죠.
또 ‘바른 생활 moralistic’적이란 개념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적 표준대로 정말 바르게 산다.. 라는 뜻이 아니라,
그저 남에게 민폐 안 끼칠 정도면, 무슨 짓을 하든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아주 낮은 수준의 도덕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적 표준’을 설교하면,
깜짝 놀라며, 그런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멀리하고 거부합니다.
자기는 나이스한 사람인데, 뭐가 문제냐고.. 그들은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 시대마다 늘 있어왔으니까,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런 ‘바른생활적 치유 종교’가 미국 기독교를 완전히 식민지화 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완전히 점령하고, 다스리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식민통치처럼요.
▲모든 시대에, 참된 신앙이 쇠퇴하면,
기독교가 ‘문화적 기독교, 교양적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위에서는 ‘바른 생활적 치유의 종교’라고 표현했는데요..
아모스서가 지적하는 것도,
그런 문화적 기독교에 관한 통렬한 지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기독교 신앙(구약적 표현으론 여호와 신앙)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 아모스는 가르칩니다.
야고보서 1: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들을 방문해서 돌보고,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요.
이제까지 서론이었고요,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Empty Religion 공허한 신앙을 조심하십시다.
▲공허한 빈깡통 신앙이 뭐냐? 제 Tarn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있다고 하는데, 주위의 가련한 사람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Empty Religion입니다.
자기는 신앙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고, 신앙생활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어도
사실 그 속을 뜯어보면, 아무 것도 없고, 빈깡통처럼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교회에는 항상 좀 있는 사람들, 가진 사람들이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좀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그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감당했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무슨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날 때보면,
빈자들이 궁궐을 쳐들어가는가 하면, 동시에 교회도 쳐들어갔습니다.
아니면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진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칼 막스 입니다.
어쨌거나 1단락의 요지는,
기독교가, 빈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관심, 도움에 무관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결국 ‘공허한 신앙’입니다.
▲나아가 오히려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한다’는 오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본문 아모스 시대의 교회가 (성전이) 그랬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에는 주로 중산층 이상이 항상 주축을 형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다니지만, 교회의 주축은 중산층 이상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움과 베풂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곧 자동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가 되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하거나 괴롭히는 형국’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가진 자들이, 약자들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가 되어 있는데,
그들이 대거 성전에 나오니까, 자연적으로 성전이 마치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의 아모스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런 사회적 중산층이, 사회적 책임은 거의 무관심한 가운데서
성전에 제사 드리러 정기적으로 다니다보니까...
성전이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본산’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래 저래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인 개인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또는 그게 형식적 겉치레 도움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공허한 신앙, 빈깡통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아니 더 나아가 ‘빈자를 압제하는 공동체’로 전락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그 성전에 가득 모여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모스가, 그것을 (즉 사회 정의를) 쳐서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가 무슨 고상한 어조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논해도,
내 주위의 약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내가 등한시하고 있다면,
나는 ‘경건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또한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저 교회에서, 초등학교 바른생활 수준의 ‘착한 삶을 살자’ 정도만 논하고,
사회적 약자나 빈자에 대해서, 거의 외면하고 있다면,
아니면 겉치레 수준으로만 돕고 있다면,
그건 그들이 ‘아모스 시대의 타락한 종교’를 답습하고 있다는 것인데,
오늘날의 오래된 교회들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매 시대마다 그랬지만요)
▲본문 암4:1~3절을 보십시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찌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즉 여로보암2세 당시는, 솔로몬 이후로 가장 부유했고,
국력도 매우 강했던 시대였습니다.
혹시 부유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더욱 사치에 열을 올렸지, 빈자와 약자에 대해서는 전혀
사회적 관심이나, 사회적 책임이 없었습니다. 암2:6-8, 3:9-10참조.
그게 바로, 아모스가 통렬히 지적하는바 소위 ‘공허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종교적 열심은.. 아주 습관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암4:4~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위 구절에서 벧엘과 길갈은.. 종교적 성지를 뜻합니다.
그들은 성전 생활에 충실했으며,
십일조, 수은제, 낙헌제 등 제사 생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신앙을 만족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
▲그러자 하나님은, 몇 가지 작은 재앙으로 그들을 치셨습니다.
작은 재앙이 닥칠 때,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구절인 4:7~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각자 찾아서 읽어보세요.
그러나 그들은, 결국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껍데기 뿐인 신앙, 공허한 empty religion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모스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찌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4:2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을 “맹세”하셨는데, :2,
결국 그 맹세대로 된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약 20년 후부터, 앗수르가 침입하기 시작해서,
앗수르는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갈 때, 갈고리와 낚시로 사람의 코를 꿰어서 갔다는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 우리들 중에 일부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부유하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빈자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유함과 풍부함을.. 자기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랑만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인, 빈자와 약자를 돌아보는 일에는.. 거의 무관심한 것입니다.
오늘날 왜 신자들이 그렇게 삽니까?
‘바른생활적 치유의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그저 초등학교 바른생활적 도덕 교훈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기의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기분을, 한 번 업 시키는 격려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Moralistic Therapeutic Deism이 오늘날의 미국 기독교의 트렌드(경향)입니다.
우리는 이런 공허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작은 재앙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큰 심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들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인터뷰로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미국의 대부분 젊은이들은, Moralistic Therapeutic Deism을 갖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주요 현상 중 한 가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실현, 자기 성공 이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그런 일을 직접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더욱이 국제사회의 어려움을 돌아보는 일에는.. 더더욱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적 신앙을, 자기에게 강요하지는 말라고 말합니다.
저 설교자는, 이것이 신앙문제 때문이라고 봅니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니까, 그런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4장, 또는 아모스서 전체를 두루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공허한 빈깡통 신앙’을 두고 보고 계시지만 않으십니다.
작은 재앙을 보내시고, 나중에는 큰 재앙을 보내셔서,
결국 택한 자는, 회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작은 심판을 받고 돌이킨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실력이요, 내 믿음인 것입니다.
◐2. 분주한 종교 생활을 조심하십시오. Beware of Busy Religion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개인적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이유도, 그 친밀한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바쁘게 종교 활동을 분주히 하면서도,
전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신앙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신앙입니다.
▲그럼 신자들이, 왜 그렇게 외적인 종교 활동에만 바쁘게 열중할까요?
그건 바로 ‘사람에게 칭찬과 영광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암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보십시오. 종교적 성지를 찾아다니며, 즉 성전에 열심히 다니면서
매 사흘마다 십일조도 드렸지만,
자기 죄는 전혀 돌이키지 않고, 자기 죄악된 생활은 계속 반복하면서도
성전 생활(신앙 생활)도 동시에 계속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신자들은, 벧엘과 길갈 같은, 어떤 유명한 곳에 다닌다는 것 자체로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벧엘과 길갈에는, 큰 건물도 있었을 것이고, 여러 가지 형상들도 세워져 있어서
종교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일부는 금으로 칠해져 있어서, 매우 화려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예레미야가 마찬가지고, 아모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 다니는 불신자들을 향하여, 예언하지 않습니다.
성전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그것도 아주 열심히 다니는
십일조와 예물도 바치는.. 그런 신자들을 향하여 예언하되.. 아주 통렬히 합니다.
‘외적인 종교 행사에 바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면적/개인적 신앙을 등한시하고, 외적 종교행사에만 열광한다면..
그건 타락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등 헌금을 듬뿍 드리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면적 친밀한 신앙 없이,
종교 행사에 열광해서, 자기 돈까지 들여서 그 일에 열중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며, 그런 명예를 쌓는 일에, 하나님은 오히려 가증히 여기십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공동체에 가 보면, 주중에도 바쁘게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일부 열성적인 신자들은 목회자보다 더 바쁘게 활동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영적 지도자는,
무엇이 참 신앙생활이며, 무엇이 분주한 종교활동 인지.. 명확하게 구분해 줍니다.
그저 공동체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만이.. 참 신앙의 특징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은, 좀 사람들이 붐벼야 뭐가 되는 것 같겠지만요!
물론 어떤 순수한 감정으로, 열정으로 봉사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만
계속 정기적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 봉사를 통해서, 정말 내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분주한 종교행사에 불과하고.. 그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오래 계속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므로,
선지자들이 계속 외쳐야 하고, 신자들은 계속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부흥’에 목적을 두기 이전에, ‘하나님’에 목적과 초점을 두십시오.
‘교회 부흥’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자기 교회 부흥’말입니다.
오직 우리 교회에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잘못된 의미의 ‘부흥’)을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분주한 종교 생활’로 몰고 가는.. 거짓선지자들이 되지 마십시다.
▲본문 암4:6~11절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한 잘못된 종교 생활을,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재앙과 심판을 내려서, 그들을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매를 맞고서, 돌이킬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미국에, 규모가 큰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주중에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그들은, 하나님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하나님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란,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Moralistic Therapeutic Deism 신자들입니다.
그들을 돌이키게 하여,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방향만이라도 올바로 잡고 나가야지,
그저 예배당 건물에 사람들이 붐비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런 방향으로 애쓰시는 분들이 일부 있고, 그분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정말 더 기준을 낮추어서 최소한의 목표를 잡는다면,
우리가 그 거대 물줄기를 돌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돌리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우리가/ 또는 자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라도..
최소한 깨닫자는 것입니다.
그것도 못 깨닫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서도 전혀 문제의식조차도 없다면,
그거야 말로 큰 재앙이며, 또한 선지자들의 책임 유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무감각한 신앙생활을 조심하십시다. Beware of Benumbing Religion
하나님의 경고, 심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인지,
몰라서 무시하는 것인지,
심판이 오든지/ 말든지.. 전혀 그런 것에 대해 생각도 못할 만큼
사람이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양심과 신경이 마비된 상태이죠.
본문 암4:6~13절에도,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모스 시대뿐만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대에, 사람들은,
선지자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너는 닥치고 조용하고 잠잠하게 있으라’고 하면서,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재난이 닥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로 보고,
참 여호와 신앙, 참 본질적 신앙,
즉 회개하고, 하나님과 개인적 친밀한 관계를 맺는 그 신앙으로
빨리 되돌아 올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 너무 타락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까지도, 무감각하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처지에 이르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못 들으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경고부터 하십니다.
예고 없이 심판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경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양심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계속적으로 죄를 짓다 보니, 자기 영혼에 마비가 와서
심판의 경고를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을 잃게 된다는지..
경제가 나빠진다든지 (7, 9절)
또는 대적이 일어난다든지 (10절)
우리가 당하는 모든 재난이 다 하나님의 심판은 물론 아닙니다.
즉 살다보면 우연히 당하게 되는 재난도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의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섭리는 재난도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주어지는 재난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신경이 마비된, 무뎌진 영혼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재난을, 죄의 징계인줄 알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우연이야, 네 잘못 때문이야’ 하다가
결국 최후의 징계를 당하여, 앗수르에 포로로, 굴비처럼 꿰어져 갔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20년 후, 베가 왕 때부터 시작해서 40년 후에는 완전히 패망하고,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 받고 만 것입니다. 4:11
결국 아모스의 예언이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고성 예언은, 적중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안 섬기는, 불신자에게 임하는 재앙이 아니라니까요.
신자에게 임하고, 그것도 성전 제사에 충실한 신자들에게 임할 재앙이 선포되었는데도,
애석하게도 끝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도.. 경고적인 부분은.. 건너뛰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하거나 들을 때도.. 위로하는 말만 하거나,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경고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경고에 따르는 심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귀에 듣기 싫은 소리일수록, 골라서 듣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마비된 사람, 신경감각이 없어진 사람은,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읽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Moralistic(바른 생활적) Therapeutic(치료적) Deism(이성적 신앙) 신자들입니다.
그저 문화 활동 정도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죄인은 반드시 심판하시니까, 죄를 멀리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것 자체를.. 잔소리요, 종교적 학대 행위로 여깁니다.
▲반대로, 오늘날 하나님이 당신을 늘 괴롭히십니까?
당신은 늘 주님으로부터 징계와 재난을 당하십니까?
어쩌면 그게 지금 잘 가고 있는 신앙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당신은 ‘마비된 신자, 무감각한 신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징계와 고난을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개인적/인격적으로 친밀한 신앙으로 섬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4. 여호와께서 만나러 오시는 날을 조심하십시오.
암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는 예언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만나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임재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하나님을 잘 섬긴 자들에게는.. 좋은 만남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계속 거부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즉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비하라”
예,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삶은,
언제나 원하든/원치 않든.. 예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날을!
그 날이 복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날이 재앙의 날이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아모스는 “그 날을 예비하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보통 신자들은, 이 날을 예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는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너무 도적같이 닥치기 때문입니다.
결국 늘 깨어 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신앙이란.. 늘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깨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바른생활적 치유 종교 (Moralistic Therapeutic Deism)에
서서히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것, 성령 받는 것.. 그것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실 때는.. 즉 하나님이 임하실 때는,
먼저 깨뜨리십니다.
먼저 그 가운데 악을 먼저 제하시고, (즉, 심판을 행하시고)
그와 함께 은혜와 성령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실 때는, 항상 그러합니다.
물론 언제나 ‘하나님 만날 준비’를 정결하게 하고 있는 사람은, 예외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더라도, 여전히 ‘너희 하나님’이 되십니다.
“네 Your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12절
지금 문맥상,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만나러 오실 터이지만,
축복을 주시기보다는, 심판을 하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날을 예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기서 ‘네 하나님, Your God’ 이란 표현을 쓰십니다.
‘네 하나님, Your God’이란 표현은, 친밀한 표현이며
언약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더라도,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시겠다는..
‘너희가 징계를 받겠지만, 여전히 내 자녀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출6:7, 레 26:12.
▲‘네 하나님, Your God’이란 표현은, 아모스서의 맨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쓰입니다.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9:15
이 마지막 구절 역시, 회복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시면서
‘네 하나님, Your God’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과 무감각함과 죄악을 심판하시지만,
영원히 내버리시거나, 언약적 관계에서 완전히 내치시지는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죄인(언약 백성)들에게, 최후의 희망이라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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