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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공인 / Sparks

LNCK 2013. 11. 15. 12:17

◈사역의 공인              고후1:8-9, 고전4:1                               출처보기

 

Accredited Ministry by T. Austin-Sparks                    *출처의 영문을 토대로, 재작성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고전4:1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8-9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후3:1

 

▲위 구절들은,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바

<바울의 자기 사역의 권위, 정당성, 교회적 인정받음>에 관련한 구절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기는 했지만,

그는 12사도의 일원도 아니요, ‘당신은 무슨 권위로 사도(교회 지도자) 행세를 하느냐?’고

사람들이 따지고 들 때,

그가 어떻게 대답했으며, 대처했는지에 관해서.. 이 시간에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알면,

오늘날 내가, <내 사역의 권위, 정당성, 교회적 공인>에 대한 해답도

우리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의 서신들을 훑어볼 때 사도바울은

‘내가 사역을 하느라,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도 나는 끝까지 인내했다. 중도포기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활의 승리를 주셔서, 그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내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라고 천명합니다.

 

진짜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는

1. 그의 사역에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마귀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뿐더러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동참하는 길이기에,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만약 고난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이 부르셔서 시키신 사역이 아닙니다.

 

2. 그러나 참으로 부름 받은 사역자는, 그 고난을 인내하며 이겨 나갑니다.

중도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이 곁에서, 이기도록 도와주십니다.

 

3. 그런 다음에, 주님이 부활의 승리를 주십니다.

그 고난을 이기고, 결국은 승리하게 됩니다.

이 승리가, 주님이, 그의 사역을 인정해 주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를 쓸 즈음에, 바울은 자신이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1:8~9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활, 다시 소생’시키셨다고, 연이어 말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고후1:10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특별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1:9

 

즉, 바울은, 아시아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 즉 주님이 주시는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자기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그냥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다시 소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사도바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목회자, 선교사, 교사, 특수목회, 선교단체 등 여러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극심한 고난을 통과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경험상, 2년에 2차례 정도 파도가 친다고 합니다. 한 차례는 약 2주간.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체험이므로,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인정>이 기적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 죽음의 고난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소생시켜 주시고, 그 엄청난 쓰나미 같은 파도를 타고 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사역을 계속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정 Accrediting>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종이 맞아! 네가 하는 일은 내가 시킨 사역이 맞아!’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면, 사람의 인정도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해하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그 사역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역이 아니면,

큰 파도가 치고, 극심한 고난이 닥칠 때..

그 파도를 타고 넘지 못합니다. 파선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 주시니까요.

 

즉,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사역이 아니니까,

파도 한 두 번 치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만 놔둬도 스스로 무너집니다.

내분이 일어나서 무너지든지, 자기 스스로 문을 닫고 포기하든지.. 결국 관두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사역을 뒤흔들고,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늘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는데,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4:24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사역할 때, 주로 그를 괴롭히고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은

동족 유대인들이요,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한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자기 변호가 나옵니다.

 

자기 사도권에 대해서, 자신이 변호를 해야 될 정도로,

바울은, 자기 사역의 정당성 또는 인정 accrediting 에 대해, 공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국적 표현으론 ‘흔든다’는 말을 쓰는데,

어떤 사역자가 교회를 개척하든지, 선교단체를 시작하면,

사방에서 그를 흔들어 댑니다.

그를 공격하고, 그의 사역의 정당성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누가 네게 그 사역을 하라고 시켰니? 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 라는 식이지요.

 

물론 그가 참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라면,

그 뒤흔듦의 배후에는, 반드시 사탄이 역사합니다.

 

그래서 대적은 끊임없이

‘너는 부적격자야. 너희는 그만한 일을 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야,

너희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어...’ 이렇게 마구 흔들어 댑니다. 결국은 포기하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귀의 역사가, 일면 사역자들을 도와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 진짜 자기 마음대로, 부르심도 없는데, 자체적으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 흔들지만, 점점 커지게 되면 흔듦을 당하지요.

그래서 부르심 없이 자체적으로 시작한 사역은, 넘어지고 사라져야 합니다.

 

2) 그런데 진짜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시작한 사역도 있습니다.

그때 마귀의 ‘흔드는 역사. 즉 불인정 discrediting 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런 ‘불인정’은

오히려 그 사역자를, 자기 사명에 대해,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당하는 그 기간 동안은 몹시 괴롭겠지만,

그 기간을 통과하고, 부활에 이르게 되면.. 자신이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탄의 ‘흔들기, 불인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칭찬하는 식으로 나타날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분들입니다.’

귀신이 바울 일행을 향해, 칭찬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미혹되지 않았습니다.

귀신의 인정을 받으면서, 귀신과 제휴해서 사역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교묘한 방식으로 ‘뒤흔들기’가 올 수 있으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뒤흔들기, 또는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아예 뒤흔드는 세력과 손을 잡고, 동화되어버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주님의 뜻은,

그 ‘뒤흔듦, 불인정, 핍박’ 가운데서, 계속 자기 사명을 인내하며 감당해 나가는 것이지,

그 세력과 제휴, 결탁, 동화되어서.. 결국 자기의 고유한 사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뒤흔드는 세력을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9

 

※여담인데, 과거에 한국교회가 중국 선교를 할 때,

그 省의 종교국이나 공안과 사전 결탁해서, 그들의 인정을 받고서 사역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회에서, 무슨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적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서로 적대적이 될 필요는 없지만,

정치적 제휴가 꼭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멀 필요도 없고, 가까울 필요도 없습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정로가 아닐까요?

 

과거 역사는 ‘정교 분리’가 항상 정답이었습니다.

가까워져서 무슨 선한 역사가 일어났던 적은.. 글쎄요, 기억 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역은, 자기 단체가 강해져서, 그 힘으로 정복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주님은 우리들을 낮추시고, 오히려 약하게 만드십니다.

심한 경우, 죽음의 골짜기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부활시키시는 주님만 간절히 의지하게 하시고,

거기서 (내가 약하니까)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열매... 그게 기독교 사역의 본질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의 정체성 문제를 걸고 나왔습니다.

저 스팍스는, 그것이 고후1장에서,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의 이유/ 섭리 라고 봅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 사도권 문제, 정체성 반박을 극복할 수 있었느냐 하면,

자기 강함으로, 자기 지혜로, 자기 훌륭함으로 극복하지 않고, (우리는 보통 그렇게 접근합니다만)

 

오히려 자기 약함으로, 죽을 고생하다가 겨우 살아남으로,

자기 힘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으로 살아난 상태..

즉 자기 힘/능력/외모/정당성..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진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바울은,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나는 거의 다 죽었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나를 살리셨습니다. 자 나를 보십시오!’

 

▲고난을 많이 당할수록, 그는 큰 그릇이 됩니다.

금속도, 그 두께와 강도에 따라,

제련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강도가 약한 금속, 또는 두께가 얇은 금속은.. 약간만 제련하지만

강도가 강한 금속, 또는 두께가 두꺼운 금속은.. 아주 심하게 제련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탱해 내어야할 무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탱해야 할 무게가 큰 사람에게는.. 극심한 ‘흔들기’를 허락하시고,

지탱해야 할 무게가 가벼운 사람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흔들기’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몇 번 통과하고 난 사람은,

이제는 죽음도 불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몇 번 다 겪어봤거든요.

 

당신의 사역이 더욱 무거운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게 될수록,

하나님은, ‘사탄이 당신을 흔들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더 강한 영적지도자가 되도록.. 섭리해 나가십니다.

 

물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는.. 정말 괴롭겠지만,

그러나 <부활의 영광>을 허락받은 다음에는.. 당신은 큰 용사로 변모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당신과 당신의 사역은.. 더욱 정결하게 되지요.

 

 

▲오늘날 신학공부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잘 갖춘 지도자들이 많은데,

제 스팍스가 보기에, 한 가지 그들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말한 ‘극심한 반대, 극심한 고난, 흔들기’ 등을 당해보지 못해서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죽을 고생을 해 보거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 보지 못해서

그냥 고만고만한 사역 밖에 못하는 사역자들이.. 안타깝게도 꽤 있습니다.

 

사망의 불 가운데를 통과해 보지 못하여,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사역이 더욱 깊이 빠져들수록,

주님은 그 그릇에 합당한 고난과,

그것을 기꺼이 통과하는 사람에게 부활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정녕 부름 받은 사역자라면,

반드시 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편하게 지내는 것만으로.. 만족/ 자족할 것도 아니요,

반대로 남달리 극심한 고난만 당한다고.. 불평/ 탄식만 할 것도 아닙니다.

 

▲마치는 말

예수님도 ‘흔들기, 정체성 시험’을 끊임없이 당하셨고요,

사도바울도,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체성 시험 accrediting 을 끊임없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그가 부르신 종들에게는

‘부활의 영광’으로, 그것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 시험 과정에서 거의 죽을 뻔하고,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몇 차례 통과한 사역자는,

‘인정 accrediting’만 획득할 뿐 아니라,

자기가 아주 강해지는 것입니다. 백전불굴의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께도 ‘사망의 고난’이 다가올 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각 문화권마다 ‘성인식’이 있지요?

그 성인식의 고난을 통과한 사람만.. 그 사회의 성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받는 길은,

그가 치르고, 통과해야 할 성인식 같은 ‘고난의 흔들기, 사망의 골짜기’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로 그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건 여담인데, 아무리 부모가 자녀에게 사업체를 물려주어도,

그걸 통과하는 자녀가 있고, 그걸 통과 못 하고 기권하는 자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 자기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성인식’ 안 치르고, 성인으로 인정 받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래 내용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다'는 말씀은,  히5:8~9

언뜻 보면, 그 이전에는 온전치 못 하시다가, 고난을 받으시고 비로소 온전케 되셨다..고 이해됩니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는 원래 온전하신 분이신데,

그의 온전성이 언제 드러났느냐.. (그 전에는 감춰져 있다가, 약간만 드러나다가)

고난을 당하실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난세가 되면, 지도자가 누구인지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고난을 당하실 때 보니까, 예수님이 온전하신 분이셨다는 것을.. 아버지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분이심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 하는 것은

고난의 때에..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평소에는 누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