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미가서는 미가 선지자의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장이 첫 번째 설교,
3-5장이 두 번째 설교,
6-7장이 셋째 설교입니다.
미가서 세 편의 신탁은 시작하는 메시지가 “들을지어다”로 다 동일합니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미 1:2).
“청컨대 들으라” (미 3: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미 6:1).
그러므로 “들을지어다”가 나오면, 새로운 설교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세 편의 설교는 내용구성이 동일합니다.
전반부는 죄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고, 후반부는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각각 심판과 구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왜 세 번씩이나 반복하느냐?
왜냐하면 설교마다 다른 관점에서 심판과 구원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미가 1-2장에 나오는 첫 번째 설교는 무슨 내용이냐?
미가 1-2장은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의 멸망과
남왕국 수도인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멸망 가운데서도 야곱의 남은 자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가 1:1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시대는 B.C. 8세기입니다.
그 당시에 네 명의 유명한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있었는데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호세아, 아모스가 활동했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 미가가 활동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 1장을 보면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에 활동했다고 나와 있고
미가는 웃시야를 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에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그러므로 이사야가 먼저 활동을 시작했고 조금 뒤에 미가가 등장해서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 함께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선배고 미가가 후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의 별명이 “작은 이사야”입니다.
미가는 워낙 대선지자인 이사야에게 가려져서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 년 뒤에 나온 예레미야 선지자가 미가를 칭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렘26:18
예레미야는, 히스기야 왕이 미가의 예언을 듣고도 미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회개하여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구원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렘26:18)
자신이 동일한 예언을 하는데,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을 통해 히스기야 왕이 회개의 기도를 하고
나라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대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 1:2~7
첫 번째 설교 가운데 특별히 미가 1장 2-7절까지는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5, 6절.
▶미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찌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들을지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들을지어다”가 뒷부분에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샤마”(들으라)가 가장 먼저 나와 있습니다.
“샤마”라는 단어는 귀로만 듣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귀로는 듣지만 마음으로는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집회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으라고 했더니
한 사람이 계속 싫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자기 아내를 따라 교회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가 하는 설교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샤마”가 아닙니다. “샤마”는 귀로도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 말씀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세계 모든 사람뿐만이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다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1)가 죄짓다가 망한 것을 왜 우리가 들어야 되느냐?
사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최후 심판하실 때를 대비하여
견본으로 심판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법대에 다닐 때, 형사모의재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법과대학생들이 모여 학생들 중에서 변호사, 검사, 피고인을 뽑아 모의로 재판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사마리아를 심판하시는 것은 온 인류를 최후의 심판하실 때
이런 방식으로 한다는 견본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들으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들으라는 말씀일까요?
재판정에서 증언을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고
판결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판결문을 들으라는 것이고
검사로써 고소하시는 하나님의 송사를 들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인도 되시고 재판장도 되시고 검사도 되시며
일인삼역으로 재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나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서시는데 유리한 증언을 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고 음행했던 것을 불리한 입장에서 증언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언하시는 것은 거짓된 증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솔로몬이 지은 지상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성전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시 11:4).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사람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관찰하며 검토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증언을 반박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1:3-4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3-4절에서의 하나님은 재판장입니다. 밀이라는 것은 양초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 앞의 양초처럼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판사들은 판결을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1).
3절에 보니까 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처소에서 나오십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에 계실 때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처소에서 나오시면 그때부터는 재판하시고 진노를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사 26:21).
하나님께서 처소에서 나오시면 인간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소에서 나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밟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누르고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높은 곳은 무엇이냐? 높은 곳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지리적으로 높은 곳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우산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비해 가운데 지역이 높은데
이스라엘의 수도들도 모두 이런 높은 지역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그렇고 사마리아도 높은 곳에 있어 적들이 공격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밑에서 올라오시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와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든 사마리아든 하나님께서 밟으시면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착취하고 등쳐 먹는 통치계급을 의미합니다.
카다피가 리비아에서 수십 년 동안 백성을 누르고 착취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통치계급도 하나님께서 밟으시면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으로 높은 곳을 성경에서는 산당이라고 번역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임시로 산당에서 제사를 받아주셨습니다.
솔로몬도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지혜와 부와 권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7년에 걸쳐 성전을 완공한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계속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같은 거짓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높은 곳’인 산당입니다. *high place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것과 우상 숭배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되고 하나님을 찬양해도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소에서 나오셔서 높은 곳을 밟으시는데,하나님의 발은 불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 12:29).
하나님의 불 같은 발이 닿으니까 산이 녹아버리고 골짜기가 갈라져 버리는데
마치 불 앞에 양초가 녹아버리듯이 비탈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이 구절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언어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상징이다."
여러분, 하나님 발에 밟히는 인생이 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한번 밟으시면, 양초가 녹듯이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발에 밟히지 마시고 은혜를 받는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1:5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하나님께서는 5절에서 판결을 내리시는데
이제는 검사가 되셔서, 왜 그런 판결을 내려야 되는지 공소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처소에서 나와 발로 밟으실 수밖에 없으시냐?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허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반항했다는 것이고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의도적으로 어겼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언약을 맺었는데,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벌주시는 것입니다.
▶1:6-7, 판결의 집행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세상에서는 판사가 판결을 내려도 집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정확히 집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우상 숭배자를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둘째, 우상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B.C. 721년 앗수르 왕 살만에셀과 사르곤이 쳐들어와서
결국 사마리아는 폐허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는 폐허가 되어서 온 세계로 흩어지고
사마리아는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도 다 파괴되었습니다. 바알 신전에는 창기가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바알신을 섬기고 오겠다는 것은 바람을 피우고 오겠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알 신전이 창기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상도 다 파쇄하고 우상 숭배자들은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포로가 되어 그렇게 좋아하던 우상을 마음껏 섬겨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모든 심판 과정을 묵시로 본 미가 선지자는 너무 마음이 슬퍼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한다고 했습니다. 1:8
미가가 사마리아를 견본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주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심판을 받으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천국에 갈 만큼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피해야 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우리에게 심판을 피할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첫째, 변화산에서 베드로, 요한, 야보고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 17:5).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죄인들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됩니다.
변호사를 잘못 만나면 없는 죄도 뒤집어씁니다.
우리의 변호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증인도 되시고 변호사도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히 7:25).
예수님을 변호사로 삼는 사람들은 100% 승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변호사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죄 없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변호사를 잘 만나서 천국 가는 것입니다.
◑남왕국의 심판 미1:8~16
1절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라고 시작했다가
2~7절까지, 사마리아 북왕국에 관한 예언이 선포되고
8~16절까지, 예루살렘 남왕국에 관한 예언이 선포됩니다.
이것을 질병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깊어서 치료할 수 없는 암입니다.
그리고 전염성이 강해서 사마리아도 걸리더니
유다와 예루살렘까지도 걸리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
우리는 죄의 전염을 조심해야 합니다.
<책망의 올바른 자세> 1:8~10
▶1:8~9,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
미가의 책망하는 자세는
첫째, 애곡하고 애통하면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미가는 유다백성을 책망하지만 교만한 고자세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미가는 자기 스스로 울고 애통하고 애곡하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동네에서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과 옷도 입지 않은 벗은 몸으로
큰소리로 울면서 돌아다니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엄청나게 슬픈 일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는 이처럼 애통하는 마음으로, 유다 백성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진실이라도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미가가 유다를 책망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책망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본문에서 배울 자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하지만 미가는 거만하게 이것을 말하지 않고
애통해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책망하고 비판할 때는, 진실한 애통의 마음 없이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울면서 증거하였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렘8:18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렘9:1.
그는 눈물 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9장 41절에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읍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34).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 19:43-4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눈물로써 말씀하셨습니다.
눈물과 애통과 사랑이 없는 책망은
그 책망의 내용이 진리이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에 전혀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1:10,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둘째, 미가는 동족의 허물이 이방인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미가는 책망 할 때 자기 가족을 책망하는 자세로 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자기 동족의 허물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반부에 보면 가드에 고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1장 20절에서 직접 인용된 것입니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삼하 1:20).
이것은 다윗의 말입니다.
다윗의 선왕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그런데 사울 왕이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망하자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왕은 자기의 선왕 사울이 그렇게 죽은 것을 슬퍼하고
사울을 위해서 슬픈 노래를 지어 야살의 책, '활의 노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무엘하 1장 19-27절의 말씀입니다.
그 소위 ‘활의 노래’를 보면
가드에 고하지 말고 아스글론에도 고하지 말고 블레셋 사람들이 즐거워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사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방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와 허물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미가는 가드에 사마리아가 멸망한 소식도 알려주지 말고,
예루살렘이 심판받을 예언도 말하지 말고,
그 근처에 가서 애곡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지도자들이, 교회에서 문제가 있어 감옥에 가고 망신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너무 떠벌리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편 여러 곳에서 자기 원수가 다윗의 고난을 기뻐하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 25:2).
<미가의 슬픔> 1:10b~16
미가 선지자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 열 성읍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열 성읍의 이름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과는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가의 예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
예루살렘만 겨우 남고, 다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직전에 북 이스라엘과 사마리아가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요)
다행히 예루살렘은, 히스기야의 기도로, 건질 수 있었습니다.
▶1:10b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찌어다
첫째, '베들레아브라'는 티끌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들레아브라 사람들은 전쟁에 패하여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11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찌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둘째, '사빌'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성읍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빌 주민들은 벌거벗은,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아난'이란 진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아난 주민들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벧에셀'은 쉬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정류하거나 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12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다섯째, '마롯'이라고 하는 것은 쓰다, 비통하다는 의미입니다.
마롯 주민들이 예루살렘에 도움을 청해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씁쓸하고 비통한 심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찌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여섯째, '라기스'는 준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기스는 애굽에서 말을 수입하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시온의 죄의 근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라기스 사람들이 준마를 타고 도망하려고 해도
결국은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도망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찌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일곱째, '가드모레셋'이란 가드의 소유물이란 뜻인데
가드의 소유물이 아니라 앗수르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악십'이라는 말은 거짓말인데,
악십 주민들이 거짓말을 해서 유다 왕을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침공해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고 유다 왕을 속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15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아홉째, '마레사'는 상속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상속물을 모두 다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열째, '아둘람'이란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영원하기는커녕, 지도자들이 다 아둘람 동굴로 도망쳐 피신 오는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 이름과 심판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우상숭배를 해서 결국 예루살렘만 남고
나머지 성읍들은 다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남유다는, BC 587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하고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남자는 다 끌려가고 여자는 겁탈당하고 아이들은 다 바위에 던져서 죽이고,
그 현장을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입니까?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 되는 슬픔을 기록한 것이 16절입니다.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시드기야 왕은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자기 자식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봐야 했고,
그것을 다 본 후엔 그 두 눈이 뽑히며 끌려갔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사람들이 머리를 밀어서 독수리처럼 만들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머리카락을 밀어 대머리가 되는 것은, 극한의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유다는 극한 슬픔을 겪는 포로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질병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깊어서 치료할 수 없는 암입니다.
그리고 전염성이 강해서 사마리아도 걸리더니
유다와 예루살렘까지도 걸리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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