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려받은 영적 유산 딤후3:14, 히12:1~2 11.08.21. 출처보기
*관련글 / 신앙의 스승들을 그리며
지난 5월 2일 저녁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제가 “우리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그 때 한 설교를 거의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3:14).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누군가로부터 배웁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배웠고,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에게서 배웠고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서 배웠고, 디모데는 믿음의 아버지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다.
저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부모님과 신앙의 스승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로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들로 존재하게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이기 때문이지만
둘째는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들에게 물려 준 영적 유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
우리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물려 받은 값진 유산은
세상적인 축복이나 물질적인 금 은 보화가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 사랑과 눈물, 헌신과 섬김, 희생과 소망과 같은 값진 영적 유산입니다.
이와 같은 값진 영적 유산은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물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것을 전한다고 말하면서
자기에게서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고 그리고 물려주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고전15:3).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4:9).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딤후2:2).
회개와 믿음, 사랑과 눈물, 헌신과 섬김, 희생과 소망과 같은 영적 유산은
도서관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혼자 명상을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육이나 프로그램으로 개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물려받아야 생기고,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물려받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일이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영적 유산을 물려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물려 받은 영적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저는 평양에서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으로부터
순교 신앙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제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의주 제2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목회하시는 동안
일본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다가 여러 번 붙잡혀 가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감옥을 찾아가서
감옥 안에 계시는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담장 밖에서
“뜸북 뜸북 뜸북 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노래를 목청을 높여서 부르곤 했습니다.
김관주 목사님은 후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동안
공산당과 타협하지 않다가 붙잡혀 가서 사동 탄광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순교 신앙이라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보고 느끼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날에도 학교에 오라고 하는 학교와 타협하지 않고
주일을 끝까지 성수하다가 학교에서 벌을 받기도 했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의 뿌리를 내리도록 저를 가르쳐주신 분들은
서문밖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선생님, 명선성 선생님, 최병목 선생님들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사동 탄광에서 감옥살이를 하시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여기서는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바라보시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며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말씀하시던 저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11살 때인 1948년 8월 38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함께 넘어오던 어른들은 모두 인민군들에게 붙잡혔고
저만 혼자서 산과 들과 강을 뛰어넘어 남쪽으로 왔습니다.
남쪽으로 온 후 몇 년 동안, 저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지만
한편으로는 주일을 마음껏 지키며 신앙생활을 마음껏 하게 된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순교 신앙의 영적 유산과
희생적인 사랑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고,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둘째로, 저는 6.25 사변 때 대구에서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피난 시절 대구에서 3년 동안 중학교를 다닐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를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빨아 먹듯이 온 몸으로 받아드리곤 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곤 했는지 모릅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하고,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라고 하면 철야기도를 하고,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면 성경을 암송하고,
안수기도를 받으라고 하면 안수기도를 받고,
이성봉 목사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금요일 철야기도를 마치고 토요일 새벽 안수기도를 받을 때는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저를 알아보시고는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 되는 거지. 고놈 기특하다”
라고 칭찬해 주시면서 기도해주시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회개의 메시지는 저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었고,
은혜 사모의 메시지는 저의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 대구에서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주일 성수를 철저하게 했는데
주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또한 물질에 대한 탐욕이 전혀 없으신 청렴한 분이셨습니다.
▶셋째로, 저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와 전도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와서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김치선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한국의 예레미야이셨고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는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주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 있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게 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셨고,
그리고 (전국) 2만 8천 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2만 8천 여 동내에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그때 남산 아래 회현동에서 살았는데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남산에 올라가서 30여분 동안 더 성경을 보며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와서는 아침 밥을 먹고 서울 고등학교를 30여분 동안 걸어서 다니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삼각산이든 관악산이든 어디든지 따라다녔는데
대구 주암산에까지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연초 마다 3일씩 금식 기도를 하라고 하면 금식기도를 했고,
관악산에 기도원을 지을 때, 산 아래서 돌을 산 위로 나르라고 하면 기꺼이 날랐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갔습니다.
왕십리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 5,6십 명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한양제일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달았습니다.
어른들도 4~5십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고3과 대1학년 시절 2년 동안 철없이 개척목회를 했는데
이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적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와
전도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넷째로, 저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역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고
특히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순교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아침 남대문 네거리에 있던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사 들고 남산에 올라가 숲 속에서 하루 종일
저녁이 될 때까지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나병 환자들을 그렇게도 극진하게 섬기며 사랑한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 같은 공산당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한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순교를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고 본 받고 싶은 신앙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의 유산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와 주일 성수와 십일조의 신앙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또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나환자 사랑과 섬김 그리고 원수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손양원 목사님이 지어서 부르시던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노래의 가사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깊은 감동을 받곤 합니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마당에서 총살을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가슴으로 안재선을 품으면서
그를 살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또한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순교를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는데
저는 그 노래의 가사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사모하게 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사람인데
손양원 목사님 내외분으로부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영적 유산의 부스러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보물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족하지만 모두를 향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과 희생을 몸에 지니고 순교의 길까지 달려가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다섯째로, 저는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그리고 협력과 화평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1살 난 애기 때부터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한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큰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온유와 겸손과 부드러움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무례한 부탁을 드린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부드럽게 들어주시곤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또한 맨날 우시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린 눈물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자기 죄와 민족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시면서 맨날 우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또한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두를 받으시고 모두를 사랑하신 긍휼과 포용과 사랑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원수도 없었고 분노도 없었습니다.
독재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고, 자기에게 해를 끼친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마지막까지 눈물로 기도하시다가 가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또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모두와 협력하시면서
화평을 추구하신 협력과 화평의 목사님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결국 물욕을 내어 던진 삶이 깨끗한 청빈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곤 했습니다.
제가 남한산성으로 한 목사님을 찾아 뵐 때마다 한 목사님은 제 손을 붙잡고
“(네) 아버지, 아버지” (과거를 회상) 하시면서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를 부르시곤 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언제나 “좋아, 좋아” 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한 목사님을 돌아보시던 백운경 장로님은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 오면 제일 좋아하시지요.”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그리고 협력과 화평의 부스러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영적 유산은 교육이나 프로그램으로 개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물려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저는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섯째로, 저는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말씀,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받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힌 분이었습니다.
총신대학교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박 목사님을 흉내 내며 두 달 동안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박 목사님 가까이에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습니다.
박 목사님은 1979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기도로 일관했습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서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합신에서 교수하실 때도 기도로 일관했습니다.
교수 세미나를 주로 기도원에 가서 하시곤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한 평생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힌
그래서 하나님께 붙잡힌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설교에는 언제나 가슴과 영혼을 움직이는 성령의 감동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인격으로 나타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가식과 꾸밈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과 미소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특별한 믿음과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신 분이었습니다.
저에게 자주자주 전화를 거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질문도 하시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저에게 말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박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소통이 잘 되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박목사님께서 기도로 일관한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박목사님께서는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시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일이 기도해 주시셨습니다.
그리고 “소위 박(윤선)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고 호소하시면서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 사신 저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저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합니다.
▶일곱째로, 저는 방지일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눈물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받고 있습니다.
저는 방지일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뵈면서 방 목사님께서 순수하고 섬세하고
정확하고 따뜻한 영적 통찰력을 지니신 분이시고
지치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달려가면서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순수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는 분이심을 발견합니다.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를 정확하게 진단하시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시는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명을 수행하고 계시는 귀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방 목사님은 또한 부족한 저에게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시는
너무 고마운 분이십니다. 몇 달에 한 번씩 저에게 전화를 거시고
식사를 ‘대접’하시겠다고 하시고 일산으로 강화도로 고양시로 퇴촌으로
이곳 저곳으로 저를 데리고 가셔서 음식을 사주시는 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 많은 선교사들에게 깊고 섬세한 관심을 가지고
매일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내시면서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방 목사님은 다윗처럼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우시는 분이십니다.
방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방 목사님께서 하신 주옥과 같은 말씀들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므로
방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 하려고 합니다.
“우리 존재의 모든 오관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상황이나 전략이나 계획 등을 바라보는 대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2005년 10월 도미니카선교대회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인데
부름 받은 자들은 이 임무를 맡았어요.”(2008.12.3 63빌딩 한국교회의 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서 모든 더러운 것들을 녹여버려야 하고
그리고 채소가 햇빛을 받아야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주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2010.1.1).
“전에는 주일 아침 예배나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문제야요.
그리고 주일 아침에 예배 보고 교인들이 헌금 낸 돈으로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보고 집으로 가니 참 문제야요.
우리 영등포교회도 오후 예배로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데
방 목사 죽은 다음에 바꾸자고 해요, 나 참!”(2010년 1월 23일 저에게 하신 말씀).
“김 목사, 나는 어제 아침 모임에서 어느 분이 회개 기도를 하면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문제들을 조목, 조목 고발하는 듯한 기도와
한국 교회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설교하는 듯한 기도를 하는데
나는 ‘아멘’ 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2011.1.22 전화 통화에서).
“길선주 목사님은 사경회 때마다 찬송가 177장을 부르면서 회개와 자복을 강조했어요.
그때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은 각종 프로그램과 음악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어요.”
"한국교회가 분쟁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야곱처럼 브니엘을 거쳐야 합니다.
야곱처럼 병신이 되어야 합니다."(2011.4.8 한복협 월례모임).
“삼합리교회에서 흘린 눈물의 바다를 본 후로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가
내 기도 제목이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나 혼자 있을 때면 우는 때가 많다. 깊은 밤 중에 일어나 우는 때도 있고
혼자 길을 걸으면서 우는 때도 적지 않다.
나는 말씀을 보다가 종종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원고를 쓰면서 찾은 성구에 도취되어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기도 한다…
어린 아이는 잘 운다. 배가 고파도 울고, 보고 싶어도 울고, 기저귀가 젖어도 운다.
어린 아이는 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말을 못해도, 울기만 해도 아버지는 우리의 소원을 아신다.
어린 아이는 우는 것이 그의 장기요, 유일한 방법이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고 통달하려고 하다 보니 울지 않게 된 것이다.
기도의 최고봉은 눈물의 기도이다. 기도 가운데 눈물의 기도가 제일인데,
우리는 어린 아이 한데서 이 기도를 배워야 한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pp. 27, 28, 41, 43, 44).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 영적인 유산인지 모릅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과 막달라 마리아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녔던 눈물의 유산을
방지일 목사님이 지니시고 우리들에게 그 유산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은
세상의 유행도 아니고 세상의 가치관도 아닙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멋진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할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닮기를 소원하며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준
값진 영적인 유산들을 귀하게 여기고 고이 간직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두 우리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의 영적 유산을,
순교 신앙의 영적 유산을, 회개와 은혜 사모의 영적 유산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영적 유산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순교의 영적 유산을,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협력과 화평의 영적 유산을, 기도와 말씀,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적 유산을,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눈물의 영적 유산을 물려 받고 고이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물려 받은 값진 유산은
회개와 믿음, 사랑과 눈물, 헌신과 섬김, 희생과 소망과 같은 값진 영적 유산입니다.
이와 같은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영적인 유산을 물려 받고 고이 간직하시는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2편 (0) | 2014.02.07 |
---|---|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1편 (0) | 2014.02.05 |
미가서 1장 (0) | 2013.11.16 |
미가 신학의 3대 원리 (0) | 2013.11.07 |
단12:4~7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 (대)환란을 이긴다 (0) | 2013.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