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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후퇴

LNCK 2013. 11. 28. 12:26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후퇴        고후2:1~17           설교 스크랩, 정리

 

 

성경을 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겉핥기로 읽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오늘은 제가, 한 번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도전!

 

 

◑고후2: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개인적으로 본문 고후2장의 서두는, 공동번역이, 이해하기에 더 쉽습니다.

 

(공동번역) 다시는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본문의 배경. (맨 아래 더 자세한 배경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즉 고린도전서를 써 보내고 나서, 후서를 써 보내기 전에

 

제 3의 편지를 써 보내서 (소위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지금 안 내려옴. 순서적으로 두번째)

고린도 교회를 눈물로 책망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전서’라고 하는 편지를 다 읽었을 겁니다.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교회내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다 짚어가면서

신앙적 원리들을 펼쳐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거에 맞추어서 잘못된 것이 보이면 시정하고

회개하고 뉘우치면 되는 것인데,

(일부) 고린도교회의 상태가 더 악화돼 버린 것 같아요, 고린도전서를 읽고 나서.

 

그러니까 그 소식을 접해들은 사도바울의 마음이 다급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소위 ‘눈물의 편지’를 보냅니다. *‘눈물의 편지’는 지금 전해지지 않습니다.

 

디도가 그것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반응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디도가 늦게 오는 겁니다.

 

고후2: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갔노라.”

 

그런데 기다리던 디도가 드디어 마게도냐에 도착합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드디어 고린도교회가 회개했습니다.

 

고후7: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서 소식을 듣고서 안도하는 마음으로,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1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시간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는 겁니다.

이 정황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본문의 줄거리 중에서 핵심입니다.

 

왜 미루고 있냐 하면,

다음구절 2절에,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후2: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공동번역이 더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썼습니다.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설교의 요지는,

지금 사도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고린도전서를 보냄으로 인해, 긴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일부 고린도교회가 반발한 것입니다. 서로 껄끄러운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터지면,

우리는 마치 5분대기조처럼, 즉각 출동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를 조정하고, 중재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뒤로 물러나 버립니다.

1절에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고후2:3, '나는 만나서 기뻐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보고

오히려 내 마음이 슬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기뻐야 여러분도 기뻐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찾아가는 대신에 그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공동번역)

 

▶‘오히려 내 마음이 슬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

사도바울이 아차! 한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고린도교인들에게도

그 누구의 마음에도, 기쁨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교인들의 잘못을 교정하다가.. 자기의 잘못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들을 야단치다가.. 자기 자신에게 은혜가 고갈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급하게 자신을 뒤로 후퇴시킵니다.

 

급하게 방문을 해서, 자기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먼저 기쁨을 잃어버린 자지 자신을 먼저 수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찾아가는 대신에 그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3

 

 

◑고후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위 4절에 보면, 바울이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정심을 되찾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눈물의 편지’가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실종된 그 편지가 (디도가 전달했음) ‘눈물의 편지’로 불립니다.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자신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용

 

▶이렇게 신앙인의 기쁨이라는 것은,

만나는 교우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 걸 보고 기쁘게 되고,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상대방이 보면서 상대방이 기쁘게 되고,

이렇게 서로 안에 하나님이 계신 걸 보면서 기쁨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야 되는데,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영적상태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자기 마음속에 기쁨이 사라진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란 겁니다.

 

‘내가 이거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이게 이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구나,

고린도교회 상황이 더욱 악화 일로를 걷는다고 해서

그 상황을 내가 호전시키겠다고 그 상황으로 진격해 돌격해 들어와 가지고,

이 상황을 내가 마음으로 붙잡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거구나!’ 깨달은 겁니다.

 

그걸 깨닫고 쓴 게 눈물의 편지인데,

그러자 비로소,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가 회개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

 

▶이 사실은 무엇과 비슷하냐 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민수기 20장에 므리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 그러지 않습니까?

 

아론과 모세가 총회를 모아 놓고 반석 앞에서

‘이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면 너희가 어떡할 거냐?

그러면 너희가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던 게 완전히 쥐구멍을 찾을 일이 되지 않겠냐 하면서,

화가 나가지고 손을 들어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은 나왔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그러므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은 일어났지만, 모세와 아론은 실패합니다.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여러분,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상태가 패역한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에,

자기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느끼기 전에, 하나님이 알고 계세요.

어차피 이스라엘 자손을 끄집어낸 것도, 자기 힘으로 끄집어낸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상황을 보고, 끄집어내신 거 아닙니까?

영적으로 패역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겁니다.

 

모세를 세우신 이유가 뭐냐 그러면, 그 이스라엘 패역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로 세우신 겁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로.

 

‘너희가 (모세, 아론이) 믿지 않았다’는 얘기가 뭐에요?

 

그러니까,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보면서,

당연히 이성이 있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분노가 생기는 거예요.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근데 모세가, 자기 마음을 뺏겨 버린 겁니다.

 

마음을 뺏긴다는 게 뭐에요?

이스라엘 민족의 패역한 믿음 상태로 인해, 자기 마음이 빼앗겨버려져 갔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내가 지금 영도자의 입장에서 이끌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나쁜 모습,

악한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모세는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돼요.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야 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사도바울이 비슷한 일탈을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냈는데, 편지를 읽었으면 나아질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더 악화 일로를 걸은 거예요.

 

그러니까 견디질 못하고, 마음이 그만 고린도교인들의 패역함에 휩쓸려버려서,

방문을 해갖고 자기가 진격하고 돌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랬다가 깜짝 놀란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서조차도

하나님이 나타나고 있지를 않는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 기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평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울은 깜짝 놀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이 나타내는 말이 바로 이 말씀이에요.

 

그리스도의 승리, 향기처럼 퍼져나가는 승리의 향기.

도대체 이 향기를 피우게 되는 승리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이냐?

 

고린도교회 상황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져질 때까지

멀리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거기 머물러 있는 겁니다, 지금.

이게 바로 삶의 원리요, 승리의 원리라는 거예요.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사람의 상황이든 사건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무작정 돌격하고 진격하고 전진하면 안 됩니다.

 

그 상황을 호전시키는 게 내 생애의 승리가 아니라,

이 상황을 앞두고 있는 내가 마음을 상황에 뺏기지 않고,

그 상황으로부터 무한히 후퇴함으로써,

 

어떻게? 십자가로 죽는 거예요.

 

내 자아가 십자가에 죽어 무한히 후퇴함으로써,

마음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승리를, (즉 기쁨과 평강을)

우리가 반드시 쟁취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주어진 상황에 대해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무조건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 더 읽으실 분 ...................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는 말도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습니다마는,

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비유되고 있는 본문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승리입니다, 승리.

 

근데 왜 이런 비유를 드느냐?

 

로마에서 전쟁터에 나간 장군이 이겨서 개선장군이 되어 귀환할 때에,

로마시내로 들어오면, 황제한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카피톨리누스’라는 산이 있는데

그 개선 행진이 그 산에 있는 주피터 신전으로 직행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승리의 향을 피우게 됩니다.

 

근데 이 향불이 얼마나 크고 향이 짙었는지 온 로마시내 주변에 향이 진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개선의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면 마지막에는 포로 중에

우두머리를 끄집어내서 처형을 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향은, 개선한 장군에게는 승리와 영광과 명예의 향기인 반면에,

죽게 될 운명에 놓인 포로들에게는 사망의 악취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인데,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구원받을 자에게는 승리의 향기인 반면에,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바로 사망의 악취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승리를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그 승리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영적상태를 시정해 주기 위해서,

편지로 주고받고 왕래가 있고 지금 이러한 와중에 있는데,

승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것이지요.

- 어떠한 상황에서도, 먼저 자기 마음의 평강, 기쁨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배경   (추천)

 

▶행20:1,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바울은 3차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 추종자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바울은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를 향해 떠납니다. ↑

 

그가 북쪽 마게도냐로 가는 이유는, 거기 교회(빌립보, 데살로니가 등)를 돌보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린도교회로부터 소식을 갖고 돌아오는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행20:1에는,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곧 바로 간 것처럼 보입니다. ↑

 

▶그러나 사도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기 전에 먼저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고후2:12절 이하를 보십시오.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기 전에, 먼저 드로아에 들렀다고 나와 있습니다.

 

고후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2절에, ‘전도의 문이 열렸으나’

13절에, 바울은 거기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마게도냐로 갔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져올,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디도가 ‘눈물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에 갔는데,

그 눈물로 책망하는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가 회개하고, 사도바울을 다시 사도로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아올지..

아니면 편지를 보고, 오히려 더 바울을 반대하고, 멀리 떨어져나갈지..

바울은 크게 염려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일로 얼마나 많이 근심했는지

고후2:1~8절에, ‘근심’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리적으로

고린도와 드로아 중간에 마게도냐(빌립보)가 위치해 있었던 겁니다. (아래 지도 보세요)

 

▶드디어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바울은, 디도를 만납니다. 고후7:5~7

디도는 희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고린도전서’를 받고는, 분란이 일어났지만

‘눈물의 편지’를 받고는

바로 정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 속에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후서를 읽어야, 이해됩니다.

 

    고후1장을 보면, ‘위로받았다’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고후7: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러니까 고린도후서는, 그 동안 사도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있었던

    불편한 관계가 해소된 소식을 듣고서,

    그간의 염려를 접고, 기쁨 가운데 쓴 편지가 그 배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