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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한 장소의 네 마음

LNCK 2013. 12. 4. 13:50

◈한 장소의 네 마음                 왕상22:29-40           출처보기

 

 

▲본문을 보면, 우리 인생의 한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속도로를 가다가 휴게소에 들어가면 언제나 짧은 순간이지만,

우두커니 앉아서 반복해서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공교롭게도 한 장소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습니다. 마치 똑같은 목적지를 가는 사람들처럼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옆 테이블에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한 장소에서 밥을 먹고 있어요.

 

그 마음속에 목적지, 도착하려고 하는 곳의 방향이 다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뭔가 생각에 잠시나마 잠기게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 다른 마음들이 전쟁터에 모였습니다.

세 가지의 마음이 모여 있습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각기 다릅니다. 同床三夢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하는 바가 다르고, 그 네 가지의 마음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우리 인생의 삶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국경지대입니다.)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남북 연합군이,

-아람의 벤하닷 왕과 전쟁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아합의 마음.

그런데 전쟁에 나가기 전에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왕복을 그대로 입고 전쟁에 나가십시오.

나는 왕복을 벗고,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을 하고 전쟁터에 들어가겠다.’

 

일종의 꼼수지요. 왕이라고 하는 위치가 부각돼서

적 공격의 포커스가 될까봐 술수를 쓰는 겁니다.

 

그리고 아람의 벤하닷과, 이스라엘의 아합과의 관계는 아주 숙적관계에 있었습니다.

 

바로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아합이 이기면서 벤하닷이 아합 밑으로 꿇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길르앗 라못을 내주지 않게 되면서, 또다시 서로 적이 되고 원수가 돼 버립니다.

 

그래서 분명히 자기를 강하게 공격해 올 것을 예측하고

아합은 변장을 하고, 들어가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자기가 전쟁에 나가면 죽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도 들었던 터였습니다. (왕상22:28)

그 상황에서 나름 꾀를 낸 것이, 아합이 왕의 군장을 벗고, 일반 장교처럼 군복을 입었습니다.

 

▲2. 벤하닷의 마음

아람 왕 벤하닷은 32명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말합니다.

‘큰 자나 작은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 아합과만 싸워라.’

 

이스라엘 군대 안에도 천 부장, 백부장, 오십 부장이 있고

그 밑에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32명의 장군 모두가

다 아합 왕에게 집중포화를 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를 악물고 아합 왕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겁니다.

 

▲3. 여호사밧의 마음

반면에 여호사밧은 어떤 것도, 성경상의 기록을 보면

뭐 뚜렷한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관계상 아합을 따라서 전쟁터에 나왔던 것입니다.

 

앞서 여호사밧은 말합니다. ‘내가 아합 당신을 돕기는 돕겠다.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는 것을 위하여, 형제의 나라 입장에서 내가 돕겠다.

그러나 먼저 이 전쟁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물어야 되지 않겠느냐?’

 

아합 왕과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의무감 때문에,

아합 가문과 인간관계 때문에, 그냥 지금 따라 갔다가,

 

32명의 벤하닷의 장군들이, 자기를 (아합인줄 알고) 집중적으로 공격해오자

깜짝 놀라고 두려움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아합 왕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공격을 멈춥니다.

 

▲한 번 볼까요?

-여호사밧 왕의 마음은, 이 전쟁이 하나님의 뜻인지/아닌지..에 관심이 가 있었고,

-아합은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벤하닷은 이를 악물고 아합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를 더 추가하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결국은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더라.. 이겁니다.

 

우리 인생은 항상 이렇게 4가지 마음이 함께 공존하는 삶의 현장,

매순간 내가 가족들과 있을 때도 그렇고, 직장에 나갔을 때도 그렇고

항상 4가지의 마음 중에 어느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항상 결과는,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뜻대로 아무리 술수를 부려도.. 결과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점심에 추어탕을 먹을까, 잡채밥을 먹을까.. 그건 자기가 결정하겠지만,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 결정적인 사건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됩니다.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최대한 맞추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1. 아합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합은 철통같이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변장을 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아람군대의 한 사람이 화살을 쏘았습니다.

‘우연히 쏘았다’ 라고 했는데,

누구 한 사람을 겨냥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와- 몰려오니까,

거기다 대고 그냥 공중에 대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내려오면서 아무에게나 맞겠지?

하는 마음으로 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맞혔다고 합니다.

갑옷 솔기란, 갑옷의 이음새 부분을 말합니다.

그 사이를 비집고 화살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자기 목숨을 지키겠다고

왕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변장을 하고 발버둥 쳤지만

‘여호사밧 왕 당신이 왕의 복장을 하고 나가라.’ 그래서 자기를 피하게 만들고

그냥 일반 장교 갑옷을 입었는데, 그 이음새 사이를 비집고 화살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화살이냐? 아합 왕인 줄 알고 겨냥해서 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나 맞아라. 하고 쏜 화살이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시쳇말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아예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그 정도 믿음을 가지기란 사실 쉽지 않거든요...

 

▲2. 아람 왕 벤하닷의 마음을 한 번 봅시다.

벤하닷의 마음은, ‘오직 아합을 사로잡든지 죽이든지 하겠다’ 이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32명 장군한테

너희는 어찌하든지 ‘아합 왕 하나를 죽여라. 집중적으로 찾아내서 공격을 해라.’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코믹하게, 코미디 같이

벤하닷이 있는 힘을 다해서, 군대 전체를 모와서 아합을 공격해서 죽이려 하는데,

이 사람들은 여호사밧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합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터 상황이, 가히 아수라장입니다. 좌충우돌 하는 것이지요.

아합을 찾느라 헤매는데, 아합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합인줄 알고 쫓아가다가, 여호사밧이 으악-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놀래서 ‘어, 이거, 아합이 아니잖아?’ 이러면서 아합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아합이 죽는 것은, 엉뚱하게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벤하닷이 아합을 죽이려고 했지만,

이 벤하닷의 마음의 뜻대로, 아합을 죽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합은, 우연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전사한 것이지요.

 

벤하닷은, 자기 32명의 장군들과 온 군대를 합하여,

자기 뜻을 이루려고 북새통, 아수라장을 연출하면서 전쟁터에서 난리, 소란을 피웠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수 만~ 수 십 만 군대를 동원해서 난리를 칠 필요가,

애당초 없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뭡니까? 하나님의 마음대로 돼 간다는 것입니다.

 

아합을 죽이려고 하는 벤하닷의 마음이 적중한 게 아니라,

벤하닷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아합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죽인 것이지,

벤하닷이 죽이려고 해서 죽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마음대로이지 사람이 지키려고 해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아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책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표를 세워라.’ 그 목표를 세워서 그것을 이루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룬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이루시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공격하려고 했고, 우리가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니까 얻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아합은 지키려 해도 지켜지지 않고,

벤하닷은 얻으려 해도 얻어지지 않고,

오직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마음만이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내가 지금 지키려고 해서 가정이 지켜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지키고 계시니까 지켜지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3. 여호사밧

여호사밧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다가

사실 이 상황자체를 보면 어리버리한 상태에서 전쟁에 참여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의 모습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분명치 않으면 가지 말아야지요.

아무리 동맹군 아니라 형제의 나라라고 해도 가지 말아야지요.

 

치열한 전쟁터에서 이 여호사밧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라야 될 텐데? 뜻이라야 될 텐데?’ 라며 반신반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리버리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벤하닷의 부하 32명의 장군들이 몰려왔을 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전쟁터에 나간 왕이 왜 놀라서 소리를 지릅니까?

전쟁을 하기 위한 다부진 마음가짐이 안 돼 있는 겁니다.

 

이렇게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는 아람왕 벤하닷을 제거할 것을 바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벤하닷은, 그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벤하닷은 결국 마지막에 자기 밑에 있는 장관 중의 한 사람인 하사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것은 엘리아의 예언대로 된 것이지요. 왕상19:15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벤하닷의 이야기를 잘 묵상하셔야 됩니다.

 

내가 목표를 세워서 얻게 되었다고 해도

아합을 죽이려는 게 목표였다고 하더라도

벤하닷이 세운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는,

네가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가 나와 관계없이

내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세운 내 계획을 이루었다고 해도,

 

나와 아무 상관없이 나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중에

내가 세운 목표가 이루어진 것이지

내가 목표를 세웠다고 내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지키려 해도, 못 지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중요한 포인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식을 지키려하고, 내 사업을 지키려하고, 내 건강을 지키려 합니다.

 

아니면 돈을 얻으려하고, 인생의 성공을 얻으려하고

공격형 아니면, 수비 형으로 살아가요.

 

한 사람의 생애를 보아도, 공격적일 때가 있고, 방어적일 때가 있습니다.

지키려할 때가 있고, 얻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키려 한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마음만 성취되어가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져 가는데

그 하나님의 뜻이 여호사밧 왕처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려는 사람에게는,

은총으로 자비로 불쌍해서 그냥 살려주는 것입니다. 큰 재앙은 면케 하십니다.

 

내가 방어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공격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게 착착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합 왕은 이렇게 죽습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했던 자기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흐른 마차병거를 사마리아에 있는 연못에서 씻는데

이 연못이 창녀들의 목욕장소 이었습니다.

거기서 병거를 씻는데 그 아합 왕의 피가 섞인 물을 개들이 핥아 먹었습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것입니까? 왕으로 살았던 인생이

개가 핥아버릴 정도의 비천한 생애가 돼 버렸다는 것입니다.

창기가 몸을 씻는 곳에서 그의 피가 묻은 병거를 씻었다는 것은

그만큼 아합이 더러운 창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해 주는 사람과, 친하게 지냅시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주님께서 오셔서 아합 왕도 부활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다 합시다.

 

그럴 때 이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때에,

이세벨도 있고 400인 선지자와 시드기야도 있고

자기에게 흉한 예언만 했던 미가야도 있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이제 판도가 어떻게 바뀌었겠습니까?

심판대 앞에 서고 보니까 자기인생 최대의 원수가 이세벨입니다.

자기인생 최대의 원수가 자기의 숙원,

자기의 소원을 늘 긍정적으로 말해 주었던 선지자 시드기야,

그리고 400인의 선지자가 아주 천하에 악마 같은 놈들이었다는 겁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다니까, 이세벨이 ‘내가 갖다 줄게 걱정하지 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기의 소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는 최대의 악마 중의 악마였다는 것입니다.

원수 중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미가야, 이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을

계속 얘기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에게 친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된다고 외치는 제가 훨씬 더 친할 걸요?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아주 친하지요? 아주 가깝지요?

 

그러나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그래도 태 목사가 십자가에서 죽어라. 죽어라 했던

그 때가 좋았던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아합 왕의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렇게 미웠던 미가야, 하여간 뭘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던 그 미가야.

 

그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서

아합 왕의 비참한 처지가 나나, 우리가족이나, 누구에게도 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