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으십시오. 전7:21, 시38:13 도서요약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 들에게> 22장 내용을 요약 정리했습니다.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출판사.
▲서론
저 스펄전은, ‘목사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아야 한다’는 말을 평소에 자주 합니다.
남의 쓸데없는 말에, 너무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전7:21
사람들의 혀를 붙잡아 둘 수는 없으니, 가장 좋은 것은,
사람들이 하는 하찮은 말에 내 귀를 닫아버리고,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한가하게 떠드는 말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다 귀담아 듣다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사는 자들조차도, 항상 자기를 칭송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측근의 사람도, 기분이 나빠지면 자기 화를 폭발시키는데,
그럴 때는 ‘한쪽 귀를 닫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전7:21절을 암송하면서요.↑
▲1. 분란이 일어나면, 일단 뒷걸음질 치십시오. 듣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화가 나 있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서 물러서 주고,
함께 뒤엉키기 전에 논쟁을 중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런 성급한 언사를 들었다면,
그것을 내 마음에 고이 담아두지 말고, 속히 지워야 합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시38:13
우리는 이렇게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당신의 혀의 주인은 당신이지만, 내 귀의 주인은 바로 나요”
이사야 33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 말이나 다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잘 가려서 듣겠다는 뜻입니다.
▲2. 그러므로 목회지에 처음 부임할 때는,
그 교회에 남아있는 오래된 문제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기로 결심하십시오.
목회지에 처음 부임하면, 일부 성도들 중에
교회의 논란거리를 거론하면서, 목회자를 자기편으로 삼으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눈과 귀를 닫으시고,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임을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전임자의 식탁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그가 남은 식어빠진 고기를
자신은 입에 대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알리시기 바랍니다.
한 쪽이 부당하고, 한 쪽이 정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의 문제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개입하면..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멀찍이 지켜보면 됩니다. 행18:13~15참조.
안 그러면, 결국은 편파적인 목회가 되어서,
교인들과 자신의 목회를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부임하고 난 다음에도, 교인들 사이에 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도 목회자는, 지혜롭게 처신해야 하는데.. 그냥 멀찍이 지켜보면서,
분쟁 당사자 자기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안 그러고 목회자가 개입되면,
본의 아니게 연료를 끼얹거나,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자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못 본 척 하고, 못 들은 척 하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시시콜콜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 해서는 안 됩니다!’
▲3. 또한 교회 내에 떠도는 풍문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자가 그런 풍문을 거론하면, 자기는 들은 말을 전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그 풍문이 증폭되고, 커지기 십상입니다.
목회자로서 그의 말은, 일반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나간 넬슨 제독은,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전투를 지휘하는 일에만 신경썼다고 합니다.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고, 주위에 흘러 다니는 풍문을 다 듣고 하면
결국 중요한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과는 패배입니다.
어디를 가나, 말이 많은 사람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고 떠들기를 계속하고, 권고를 받고도 중지하지 않으면,
‘당신이 주장하는 바를, 글로 종이에 써서 주시오. 그러면 내가 심사숙고 해 보겠소.’
이렇게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조용해집니다.
정작 자기 말에 진짜 책임을 질 경우에는, 말을 못 꺼내는 것이지요.(종이에 못 쓰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정작 정확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기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사실을
입으로는, 함부로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종이에 적으려고 하면.. 가물가물 하고, 자기 말이 확실치 않은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약3:7~8
현실이 그러하니, 그걸 치료할 수 없다면,
그것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귀담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의 아내는, 오리와 거위의 깃털이 탐이 난 나머지
애꿎게 오리와 거위를 잡아 죽여서, 그 깃털을 취했습니다.
가십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가십하는 그 재미, ‘씹는 맛’ 그 작은 것을 즐기기 위해서
그 말의 대상인 인격이 죽어가는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소문을 퍼트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 대한 험담은, 자기 배우자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4. 그리고 저 스펄전의 경험인데, <의심>도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면, 하나에서 열 가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 출발이 ‘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정죄’하지 않더라도,
‘의심’하는 것 그 자체가 벌써, 서로 간에 불신을 조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가급적 ‘눈과 귀를 닫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의심’이 가져다주는 파괴적인 손해보다는, 차라리 ‘속는’편이 손해가 적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속는 셈치고’ 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다.
안 그러면, 벼룩 잡으려다가, 초가집 태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밤 중에 잠을 자다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 나도 벌떡 일어나서
‘도둑이 들었다’고 난리를 치는 수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흠잡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 (의심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수전노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차라리 속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낌새가 보여도,
아무런 일이 없는 듯 넘어가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5. 물론 교회는 ‘권징’이 있어야 하고, 밝힐 것은 밝혀야 하지만,
괜히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까지, 모조리 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보다는,
‘목회자는 한쪽 눈은 감고, 한쪽 귀를 닫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여러분, ‘격려’와 ‘아첨’의 차이를 아십니까?
둘 다 상대방이 듣기에 기분 좋은 칭찬의 말을 해 주는 것이지만,
‘격려’는.. 자기 이익과 관련 없이, 중립적 입장에서 칭찬을 해 주는 말이고,
‘아부’는.. 자기 이익을 염두에 두고서, 칭찬을 해 주는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떤 ‘가십의 말’을 할 때는.. 자기 손익과 관련이 될 때입니다.
자기 라이벌이거나,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에게.. 가십성 험담을 해대는 것입니다.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의 험담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 자체가 없으니까요.
‘정의’를 밝히고, ‘질서’를 세울 때에도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정말 중립적 입장에서 뭘 파헤쳐야 합니다.
즉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만, 그런 심판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기와 손익이 걸린 일에 대해서는,
판단과 심판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나설 때는
불의한 판단이 되기 쉽고 (자기 손익과 관련되다 보니)
그 결과, 더 높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판단은 내 권한이요, 내 자유라고 말할지 모르나,
아닙니다. 그 위에 더 높은, 완벽하게 정의로운 재판장이 계시고,
우리는 자기의 모든 판단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가급적 판단을 안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 심판 받는다니까요!
▲6. 또한 ‘내가 판단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내 설교에 대해서, 내 외모에 대해서, 내 업적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 주나?’ .. 거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내 눈을 크게 뜨고,
남들의 나에 대한 평가를 듣기를 원합니다.
깨놓고 말하면, ‘좋은 평을 듣기를 원합니다.’
남의 평가를 겸허히 듣기 바란다지만.. 그 속마음은 ‘좋은 평’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죄성을 타고 난지라,
남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평을, 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혹평, 냉혹한 평가’는 잘 해 줍니다.
자기는 ‘칭찬’ 듣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혹평’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면서, 같이 맞받아치게 됩니다.
이 시간의 주제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아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돌아다니는 헛소문에 대해서도 .. 내가 차단해야 하고,
-나에 대한 근거 없는 혹평에 대해서도.. 내가 스스로 눈을 감아야 하고,
-나에 대한 좋은 평가에 대해서도.. 내가 귀를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한 가지가,
‘내가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서, 내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었다가..’
오히려 혹평을 듣고,
내 스스로, 내가 판 올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7. 더 나아가, 지도자는 <비판을 참고 견디는 사람>입니다.
비판을 참고 견디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요.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악한 사람도 일부 있습니다만,
처음에는 자신이 미숙한 관계로,
처음 보는 지도자에 대해서, 함부로 혹평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그걸 묵묵히 듣고, 감수하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대자, 비판자가 점점 자기 마음을 열고,
그 지도자 편이 되어 갑니다. 목회자로 존경하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판을 참고 견디지 못하는 지도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교인들의 자기에 대한 비판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결국 자기가, 교회의 분란과 소용돌이의 중심에 처하게 되고,
그런 지도자에게는, 결코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한 명씩, 소리 소문 없이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정당하고, 그 비판이 근거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지도자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98%인 제 삼자들은, 부담을 갖게 됩니다.
목회자가 막 자기 변호를 하니까요.. 또 상대방을 헐뜯기도 하니까요..
결국은 목회자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한쪽 귀를 닫고, 한쪽 눈을 감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저 스펄전도, 제게 대해 어느 정도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어쩔 수 없이 거론해야 될 상황이 되기 전에는, 그것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는 더욱더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상황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혹시 제게는 지금 친구가 아니더라도,
주님께는 저가 친구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 마음을 다독거렸습니다.
그에게 저는, 이런 저런 일을 맡겨서,
제가 그를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었고,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점점 저와 가까워졌고, 신실한 동역자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8. 너무 중요하니까, <의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왕이 의심을 품게 되면, (왕은 정말 의심을 많이 품게 되는 위치입니다)
폭정으로 이어지고, 실패한 왕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성공한 왕으로 마치려면, 의심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할 상황이야, 주위에 수 백 가지가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 쪽 눈을 감고, 한 쪽 귀를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의심을 품어보십시오.
하나에서 열 가지.. 모두가 의심스럽습니다. 의심스럽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의심을 품도록 만든 상대방도 책임이 있지만,
가급적 ‘한 쪽 눈을 감고’ 넘어가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로운 처신이 됩니다.
한 번 <의심>에 빠지면, 자꾸 의심하다보면 ‘의심 강박증’에 걸리게 되지요.
남을 파멸시키기 이전에, 자기가 스스로 파멸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한다..’ 라는 의심이 들어오면,
밑도 끝도 없이 깊은 나락으로 스스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귀를 열어두지 말고, 눈과 귀를 닫고서
무조건 자기가 받은 사명을 향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범인을 잡는 형사의 눈으로 성도들을 쳐다본다면,
어떻게 그 목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보면, 목회자가 의심의 정신병에 걸리면,
정보를 수집하느라, 돈을 써서 스파이를 고용하게 됩니다. (책의 521쪽 첫째 줄)
※그리고 그 스파이가 전달해주는 정보가,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 정도 수준까지 가면.. 끝장 난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목회자의 품격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9. 마치는 말.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16:28
이간질을 잘 하는 역할은, 배우자나 측근이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역할이나 위치가, 이간질에 아주 적절한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어야지, 불을 더 붙이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도둑놈도 죄인이지만, 장물을 중개해서 사고파는 사람도 똑같은 도둑놈입니다.
마찬가지로 험담을 지어내는 사람도 죄인이지만,
그 험담을 옮기는 사람도, 결코 결백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살아서 역사하는데 그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을 통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지요.
다만 우리가 거기에 동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한쪽 귀를 닫고, 내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칭찬이든, 혹평이든
목회자는, 양떼들의 평가에.. 멀찍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삶의 지혜’입니다.
큰 거짓말은, 마치 육지로 나온 큰 물고기 같아서
자기 혼자 지느러미와 몸통을 꿈틀거리다가, 곧 죽어버리고 맙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과민하게 반응/변호하다가는.. 오히려 사탄이 승리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변호하다가, 자기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 마십시오!
-자기 스스로 교정자 The Corrector 로 자처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도자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정말 개입할 상황이 이르기 전에는
그저 눈과 귀를 닫으십시오. 못 본 척 하고, 못 들은 척 하십시오.
그러면 왠만한 문제는, 분쟁 당사자 자기들끼리 해결되거나
또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도 사사건건 다 끼어드신 것은 아닙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면서
만왕의 왕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지도자로서, 꼭 무슨 말을 해야 될 때는,
반드시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난 후에 하십시오.
한쪽 말만 들어보고서는, 절대 말 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