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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날마다 지는 것

LNCK 2014. 1. 9. 12:40

https://www.youtube.com/watch?v=C8eDFil-BA4 

 

◈십자가는 날마다 지는 것              눅9:23                    십자가 시리즈 8회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daily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는 매일 져야 합니다.

 

▶여기서 강조해서 살펴보고 싶은 말이 “날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죄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요.

 

예수님이 ‘날마다 성경을 읽어라’고 하신 적은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물론 성경을 매일 우리가 읽어야 합니다만,

또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 한다는 말씀이 시편 1편에도 나오고,

여호수아 1:8절에도 나오지만,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너희는 매일 성경을 읽어라’ 라고 말씀하신 적은, 사복음서에는 안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매일 하라”고 당부하신 적이 없는데,

유독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는 “매일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도바울은 자기 십자가를 “매일” 순종해서 지고 살았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냥 어쩌다가 한 번 죽는 것이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십자가 지는 것도 아니고,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설교 말씀은 잭 푸닌, 인도 목사님의 설교를 번역한 것인데요)

잭 푸닌 목사님이 어린 신자였을 때,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를 드려라.’

‘매일 성경을 읽어라.’

‘매일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라.’

‘매일 전도하라.’ 이런 권면들을 늘 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굉장히 좋은 권면이고, 매우 귀한 신앙인의 습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라는 그런 가르침은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상 직접적으로 매일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날마다 죄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은 교회에서 강조해서 가르치지 않고,

대신에 다른 것들,

즉 기도생활, 성경 읽는 습관.. 이런 것들은 매일 하라고 강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매일 해야 되지만, 예수님의 말씀인 눅9:23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너희가 십자가를 지되,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잊어버리면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매일 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자기 십자가 지는 일’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에,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명이 필요하고, 그 생명이란 부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날마다 ‘부활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 삶에 (부활)생명이 나타나지 않느냐?

그것은 매일 십자가에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번 죽는 사람은, 한 달에 한번만 부활 생명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죽는 그러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일 부활생명이 그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는

그러한 계명에 등한시하거나 무관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말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성경읽기.. 조금 괴롭지만 할 수 있습니다.

기도.. 뭐 조금 힘들지만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 매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이 죽는 것’,

그것은 참 “매일” 순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많이 강단해서 강조하지 않다보니까,

우리 일반 생활에서,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의 역사가 아주 희귀하게, 아주,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직하게 우리가 현실을 돌아보면

오늘 날 현대 크리스천들 가운데에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주님을 따른다는 그러한 예수님의 계명에는

아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것처럼, 무시하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십자가 신앙’ 자체가, 교회에서 너무 가르쳐지지 않고, 강조되어지지 않다 보니까,

‘그런 것이 뭐에요? 그런 것이 있었어요? 금시초문입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아마 대부분일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역사는, 반드시 십자가를 진 후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예수님이 주신 열매들,

사랑, 기쁨,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열매들이 참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서,

-싸워야 할 때에.. 끝까지 악착같이 싸우고

-내 이익을 챙겨야 할 때에.. 한 번도 양보하지 않고, 자기 이익 다 챙기고

-내가 싫은 소리 한마디 들으면.. 꼭 또 한마디 되갚아주고

-내가 약간 손해를 보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 상응하는 손해를 상대방에게 입히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서 (부활)생명의 역사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세상 비신자와 비슷한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진정 구원 받고 변화된 사람이라면,

나를 통해서 뭔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되요.

반드시,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통해) 은혜를 받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좀 더 잘 믿게 되고,

-내가 그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신앙 성장을 돕고 이끌게 되고,

-내가 제자 양육을 하게 되고, 또 전도를 하게 되고,

 

이러한 많은 이러한 생명의 역사가

예수를 믿으면 나 자신의 삶에서부터

또한 내 주위에서

내가 하는 (직장, 사역) 일 가운데서

막 이렇게 일상적으로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거의 안 일어나거나, 전혀 안 일어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란 쉽게 말해서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나에게 죽음이 있고

-나에게 손해가 있고

-나에게 고통이 있고

-나에게 시간적 희생이 있고

-나에게 괴로움이 있고

-나에게 고통이 있을 적에,

 

그 혜택이, 반드시 주위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의 역사입니다.

 

◑세상은, 자아의 죽음이 아닌, 자아의 충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늘 이렇게 전도를 받는 TV연속극을 오래 시청하다 보면

거기에서 한 번도 자아가 죽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경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TV 연속극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TV 연속극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아 충만, 자아 강화’를 계속 주입식으로 교육합니다.

 

시어머니에게 한 소리 들으면, 며느리가 뒤 돌아서서 또 복수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물고 물리는 그러한 많은 ‘자아 충만’의 행실을,

너무나 우리가 TV를 통해서, 너무 많이 습득 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받고,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그런 것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에요.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주님을 좇으라는 말씀’은

그나마 희귀하게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다보니까,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예를 들어서 1%라고 한다면,

TV 연속극이나 또 사회생활 가운데서 교육 받는 것은 99%,

 

그 세상적인 영향력, 즉 자아의 죽음이 아닌 자아의 확립, 자아의 강화,

이러한 것들을 99배로 더 많이 교육을 받다 보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십자가 신앙이라고 하는데

정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그러한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개인적 삶 속에서, 또 자기 주변에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

아무런 부활생명, 아무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그러한 경우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누가복음 9장 23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여러분, 구약의 제사(번제)는, 신약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거기서 짐승을 잡아서 죽이는 제사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제사를 예표하는데,

그 구약의 제사도 “매일”드렸습니다.

 

히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사실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제단에서 불을 피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성막은, 이스라엘 12지파의 회중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지파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장막의 제단에서 피워 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그들은 “매일” ‘구약의 십자가’ 즉, 짐승이 자기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주님의 십자가를 “매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이요

또한 주님의 자취를, 우리가 “매일” 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정말 그 부활생명을 살기 위해서라도,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그러한 신앙을 실제로 몸으로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적으로 행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누가 갑자기 나의 오른 뺨을 쳤을 때, 그때 자기 왼뺨을 순순히 돌려 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5리를 가자고 할 적에, 정말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10리까지 순순히 함께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늘 ‘십자가, 십자가’ 말은 하면서도,

그 십자가의 삶을 실제로 살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자라고 말 하는 성 프란시스, 또 장기려 장로님,

이런 분들은 왜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느냐 하면

실제로 이러한 십자가의 삶을, 자기 삶에 그대로 몸으로 살아내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5년 걸리고, 10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결국은 천천히

우리 몸으로 살아내어야 하는, 신앙생활의 목표인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아를 못 박는 사람의 예를 들어 봅니다.

들은 이야기인데,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들 중에, 고집형 아이 Strong willed child 가 있습니다.

아주 자기 의지가 강한, 즉 고집이 센 아이들이 있어요. 선천적으로 타고 났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걸음마 떼기 전부터,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집에서 애를 먹이고

뭐든지 자기 고집대로 하는 그러한 ‘고집형’ 아이들이

학자들은 세 명 중에, 적어도 한 명은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세 명 중에 한명은, 반대로 ‘순종형’입니다.

공부하라고 말 안 해도, 공부 착실히 하고, 뭐 시킬게 없어요.

어려서부터 어른들 말에 잘 순종을 하니까요. (세 명 중에 나머지 한 명은 그 중간)

 

그런데 이 고집형 아이, Strong willed child는,

그 자아가 선천적으로 강한 아이들은, 정말 청개구리 같습니다.

 

-이것 하라 그러면 저것 하고

-먹으라, 그러면 안 먹고 (자기 먹고 싶을 때,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이 옷 사주면 그거 안 입고, 다른 옷을, 자기가 사서 입고 다닙니다. 십대인 경우

 

그런 아이들이 특별히 언제 더 애를 먹이는가 하면,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 때는 완전히 자기 세상이 되는 것이죠.

 

‘손님이 계시니까, 엄마가 체면상 나를 혼내지 못 할 것이다.’

그 4~5살 아이가, 그것을 아는 것이에요. 자기 경험으로.

 

그래서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날은 특별히 더 난동을 부립니다.

엄마 뒤에서 머리 잡아당기고, 뭐 고함을 지르고, 울고, 막 음식 집어 던지고,

더욱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분이 그 부목사 집에 심방을 가니까,

그 집 아이가 이제 ‘물 만난 고기처럼’ 행패를 부리는 것이에요.

그 집 부목사 부부는,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젊은 아이 엄마(부목사 사모)가

계속 자기 혼자 입속으로, 자기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더랍니다.

 

그게 뭔가 들어보니까 ‘나는 십자가에 죽었어. 나는 십자가에 죽었어.’

그 말을 계속 혼잣말로 반복해서, 그 아이 엄마가 중얼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 성질 같았으면, 아이를 그냥 등짝을 한 대 팍 쳐서 야단을 치든지,

애를 잡아서, 발을 질질 끌도록 끌고 가서, 저기 문간방에 집어넣어서 혼을 내고 할 것인데,

그 아이 키우는 엄마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러한 장면이

그날 심방으로 방문한 손님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너무나 화가 나는 일이 많고,

너무나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일이 많고,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고나면

반드시 또 곱하기 2, 곱하기 3으로, 내가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억울하다고, 또 한 방 먹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분쟁이 끝나지 않고

고부갈등, 동서갈등, 심지어 부부갈등 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갈등이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은 모두가 자아가 펄펄 살아있고,

그리고 TV 연속극을 가만히 보면, 전부 다 ‘자아 충만’ 이에요.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연속극은, 제가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자기 몸으로 살아내어서

‘자아가 날마다 죽는’ 설교를, 생동감 있게 전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십자가 설교는, 자기 몸으로 이렇게 살아낸 사람이 가장 능력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1년 만에 되지 않고, 5년 만에 되지 않고, 어쩌면 10년만에도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자기가 죽는 가운데서,

자기가 손해보고, 자기가 욕먹고, 자기가 다 참고, 자기가 희생하고,

꿋꿋이 말없이 묵묵히 남의 고통에 동참하고,

이러한 삶은 정말 10년 살아도 살기가 어려운데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을 공부하는 이유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것이라도 알고 가자’ 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목표라도 제대로 잡고 가면,

아무리 느리게 거북이처럼 가더라도, 결국은 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토끼처럼 빠르게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목표를 엉뚱하게 설정하고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십자가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요. 모든 시험의 해결책이다.’ 라고 말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다, 그러면

자기는 딱 ‘십자가 모드’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저자세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지요.

그게 모든 문제의 해답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큰 문제)이 자기에게 닥쳤다 그러면

자기는 자기 항복, 자기 죽음을 선언하고

(안 좋게, 말하면 복지부동이라고 그럴까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이 때리면 맞고, 물에 빠뜨리면 빠지고,

이렇게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감내하고, 감당하고, 돌에 맞고 했을 적에

결국에는 그것이 해결책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죠.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부당하게 공격 받는다고 여길 때,

뭐 반대성명 내고, 자기를 옹호하고 이렇게 하잖아요.

자기 편을 규합해서, 또 대응팀을 조직하고, 합니다.

 

(그것이 때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혹시 그렇게 대응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아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고/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보면, 참 안타까운 것은,

훌륭한 주의 종인데, 대적들하고 싸우다가, 같이 마귀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귀와 싸우다가.. 자기가 같이 마귀가 된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대적들이 자기를 너무 괴롭히고, 자기를 너무 음해하고,

자기를 너무 이렇게 어디에 빠뜨리니까

자기도 똑같이 뭐 성명서내고, 악착같이 싸웁니다.

 

정의를 위해서 싸우든지, 아니면 악을 제어하기 위해서 싸우든지,

그런데 그렇게 같이 싸우다보니까,

결국 누가 승리하느냐 하면 ‘마귀가 승리하고’ 양쪽 다 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뭐 공격하는 쪽이야 원래 영력이 없었으니까, 크게 손해 볼 것 없는데

공격을 당한 쪽이, (십자가 지지 않고) 맞받아치다가

자기의 영력을 다 잃어버리고, 자기의 은혜를 다 소진해버리고,

힘이 빠진 삼손처럼 되는 경우를, 저는 가끔 목격했습니다.

(십자가 지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거기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데,

자기가 죽지 못하고 끝까지 살아서 같이 싸우다보니까

대적들과 같이 비슷하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

마귀가 그런 방식으로, 신령한 주의 종들을 타락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신령한 종들을, 타락시키는 마귀의 ‘특수한’ 궤계입니다.

 

우리 자신은 그러한 마귀의 싸움에서 이기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도 십자가를 지는 자세로 나아가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