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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자가 받는 보상 ✝9

LNCK 2014. 1. 11. 15:00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자가 받는 보상    고전9:16~18, 막10:29~30     십자가시리즈 9회

 

※꼭 끝까지 다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그러셨는데

우리 신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성실하게 주님을 좇았을 때

어떠한 보상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장래 저 천국에서의 보상 말고요,

지금 이 <현실 세상에서의 보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고전9:16~18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이것이 키포인트지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라고까지 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전한 다음에 ‘내 상이 무엇이냐?’ 묻고는, 스스로 대답하십니다.

 

18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복음을 전해놓고 사도바울은

‘내가 이렇게 애쓰고 수고했으니, 30배 60배 100배로 주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그런 물질적인 보상, 현세적 축복을 내가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고, 대신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복음을 열심히 전한 그 자체가 나에게 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고,

자기만족이 있고, 주님의 임재가 자기와 동행하고..

 

그런 자기만족과 기쁨이 있으니까,

굳이 어떤 보상을 바랄 마음이, 굳이 보상을 청구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정말 누가 값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역자도 먹고 살아야지요.

 

그렇지만 바울은, 정말 ‘믿음 선교 faith mission’을 한 것입니다.

오직 자기 모든 필요를 주님께 맡기고, 자기는 값없이 전했다는 겁니다.

 

(본문에 이 내용이 적시된 것은 아니지만, 행간에 이런 뜻이 있습니다.)

‘복음을 값없이 전할 수 있었던’ 그것 자체가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한 이후에, 자기가 받는 상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서 얻는 기쁨과 만족..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자기의 보상이었다는 거지요.

 

▲우리는 ‘기복주의 신앙’을 교정해야 합니다. 기복주의 신앙이란,

-내가 복음을 얼마만큼 전했으니.. 내가 30배를 받아야 마땅하고,

-내가 봉사를 얼마만큼 했으니.. 내가 60배를 기대해야 함은 당연하고,

-내가 헌신과 헌금을 이러이러하게 했으니.. 내가 100배로 돌려받아야 된다..

이렇게 기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기대한 대로, 꼭 그대로 돌려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딜레마에 빠진다는 겁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데.. 딜레마에 빠져서, 몇 년을 허비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럼 딜레마에 빠지느냐.. 가만히 살펴보니,

‘이렇게 헌신하면.. 30배로 받고, 저렇게 봉사하면.. 60배로 받는다’는 식의 설교를

우리가 어려서부터 너무 귀따갑게 많이 들어서, 세뇌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결과, 그냥 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면 될 터인데,

계속 하나님께 투정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겁니다.

‘왜 내가 투자한 만큼, 주님이 되갚아주지 않으시느냐?’는 심리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10년~20년 믿었지만, 아주 초등학교 수준의 신앙에서, 계속 뱅뱅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제를 말씀드립니다.

내가 주님을 열심히 따르고, 섬기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성스럽게 따라간 그 삶 자체,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이 땅에서의 보상으로.. 우리가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쉽지 않다는 거예요.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과 봉사.. 주님이 내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그렇게 못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열심히 따라가며,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을 사는 것.

-그건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내 힘만으로 하기 힘듭니다.

 

▲솔직하게 분별해 보십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 사역자들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뭔가 불만족스러워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자기가 주님께 헌신했는데도, 큰 부자가 안 되고, 여전히 궁핍하다는 이유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출세를 못 하고, 명예를 얻지 못해서.. 힘들어 합니다.

 

그럼 헌신하고, 주의 종의 길을 가면,

세상 복을 받는다고.. 누가 가르쳤나요? (거짓선지자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너희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내가 주는 (쓴)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주님은 ‘너희가 나를 따를 때, 고생과 고난이 당연히 따를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럼 주님은, 구원해 주신다는 핑계로,

신자들이나 주의 종들을 심하게 부려 먹는, ‘악덕고용주’ 같은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그 자체로 감동이 있다는 겁니다.

-희생하고, 봉사하는 데서.. 삶의 만족이 있다는 겁니다.

 

고난과 영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둘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의 영광, 그 고난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서

엉뚱한 세상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못 얻었다고, 하나님께 늘 투정부리고 있습니다.

완전히 ‘십자가 신앙’하고는 180도로 배치된, 그런 ‘바알 신앙’을 갖고 있는 거죠.

 

 

◑계14:4절

 

 

계14장 4절에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여자를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여기 두 가지 포인트가 나오는데

- ‘정절이 있는 자라’.

-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입니다.

 

우리가 사실 신앙생활을 일평생 하지만,

신앙의 정절을 깨끗이 지키기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탈선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자기의 정절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세속에 타협해서, 이렇게 타락할 때가 많이 있는데

 

- 그렇지 않고 정절을 갖고 주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

-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 하는대로 따라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열심히 진 신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위 두 가지를, 자기의 말년에 침상에서, 자기가 그렇게 살았노라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진짜 상이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무슨 부자 된 것 보다요! 그때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구약 성경 신명기 28장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되고,

들어오고 나가도 복을 받고’ 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만

 

구약은, 신약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풍성하다’는 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를 믿은 12사도들이나 사도바울,

또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

그들은 바위 굴(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며 방황했지만,

그들이 큰 부자가 되었다는 성경 구절은,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 가운데, 만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의 풍성함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먹을 게 많아서, 먹고는 토하고, 먹고는 토하여 버린 당대의 로마 귀족들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 가운데서, 만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족하며 살았으니까,

그 바위굴에서, 또는 지하굴(카타콤)에서, 수 십 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이죠.

아니면 몇 달 살다가, 그만 뛰쳐나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 쉽게,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고,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30배 60배 100배로 되갚아 주시겠지..

이러한 기복적 신앙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기복주의요, 현세주의요,

정결한 신앙이 아니라, 타협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소원 비는 신앙으로 일관하면,

소원 빌다가 도리어 망할 수 있습니다.                              ☞소원 빌다가 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꼭 그러한 현세적/물질적 보상을, 깡그리 안 해주신다는 것은 아니고요.

주님이 보상을 주시던지/ 안주시던지.. 그게 큰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기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

그러한 ‘기복적 보상심리’로 예수를 믿으면                 *기복 : 복을 기원함. 祈福

다 좋을 것 같지만, 안 좋은 점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뭔가 하면, 자기가 기대한 만큼 보상을 못 받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험에 들어서, 신앙생활을 오래 쉬거나,

늘 주님께 시험들어서, 1년 365일을 투정하며 지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할 신자들이

항상 우울하고, 쉬지 말고 불평하고, 범사에 시험들어서 지낸다는 겁니다.

 

이렇게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복적 신앙을 버리고, 십자가 신앙으로 리오리엔테이션(초기 재설정)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그것에 대한 주님의 보상은

<저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갚아주시고 보상해 주시겠지만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뭔가 30배 60배로 되돌려 받는다는 그러한 구절은

‘복음’인, 신약성경에는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단 한군데에 그렇게 오해할 수 있을만한 구절이 있어요.

 

막10장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버린 자는, 내세가 아니고 금세에 있어서

여러 가지 버린 그것들을 백배로 되돌려 받는다는 데요,

 

그래서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 구절을 들기를 좋아합니다.

‘봐, 신약성경에도 나와 있잖아. 신약에도 백배로 받는다 했는데 무슨 잔소리냐’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보면, 정말 우리 가운데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매나 자기, 토지를 버린 자가 100배로 받습니까?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 주변에 100배로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형제자매를 백배로 받으면, 형제가 갑자기 뭐 백 명으로 늘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자매가 집에 2남 1녀, 1남 1녀 이런데,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자녀가 백 명으로 늘어나고,

엄마가 백 명으로 늘어납니까? 아니잖아요.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풀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풀면,

형제를 백배로 받는다.. 이것은 믿음의 형제가 백배로 늘어나는 것이 되고,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을 백배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와 신앙의 교제권 안에서, 영적인 부모나 자녀가 백배로 늘어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좋아하는 ‘집이나 전토는’ 뭐냐?

집이나 전토가 백배로 늘어난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거짓말 하실 리도 없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또 뭐 여러 가지 봉사도 하고,

헌금도 힘껏 드리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면,

 

주님께서 나를 100배까지는 아니더라도, 60배, 아니 30배만 되더라도

우리가 벼락부자가 되고, 돈 방석에 앉아서,

돈 걱정 안하고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인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한때 그러한 헛된 희망을 갖고 살아갔습니다.

 

믿음도 없고, 성경도 안 보는 사람은.. 그런 희망을 품지도 않아요.

믿음도 있고, 성경도 잘 보는 사람이.. 그런 헛된 희망을 품습니다.

 

‘내가 금년에는 좀 쪼들리고 빈한하게 살지만

그래도 머지않은 장래에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야,

주님께서 반드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 주실 거야.’

 

이렇게 신앙생활에 희망을 걸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리엔테이션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프레임이 잘못 짜여져 있으면,

주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약속하여주신 모든 풍성함과 그 은혜의 영광은,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엉뚱한데서 엉뚱한 것을 구하고, 찾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집과 전토가 100배로 늘어난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자기가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가, 100배로 확대된다..입니다.

 

실제로 부동산 등기부 등본의 평수가 100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천 명 중에 한 사람 꼴로, 실제로 로또 맞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불신자도 로또 맞아요)

자기가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넓게 퍼져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랬지요. 자기 집 한 채 없었지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마5:5절,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넓은 땅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된다.. 는 뜻입니다.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요.

 

우리가 부동산 재벌은 될 수 없지만,

넓은 땅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더욱이 인터넷 세상 아닙니까. 전국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주님을 좇았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보상이 무엇이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삶,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에 은혜가 있고

-그 자체에 권세가 있고

-그 자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그 마음속의 그 온유함과 그 모든 능력과 사랑이 넘치는 가운데

세상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기만족도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경제 수준에 관계없이요.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쫄쫄 굶기신다는 것이냐? 그건 아니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은행 잔고가 넉넉해서, 기도도 하지 않고 영적으로 태만하게 사는 것보다는

-일용할 양식 가운데서, 늘 비우는 삶을 살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 주시는 섭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넉넉하게 살게 하시면.. 넉넉한 가운데서 주님을 찾으면 되고요,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으로 살게 하시면.. 그 현실에서 주님을 찾으면 됩니다.

풍부에나 궁핍에나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서, 거기에 너무 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얼마나 할 일이 많고, 사명 감당해야할 일이 널려 있는데,

먹고 사는 일에, 자기 정력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되겠습니까! 주의 일도 못하면서요.

 

우리가 뭐 큰부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자기 형편에서 만족하고,

-주님 주시는 십자가 은혜와

-주님을 섬길 때에 따르는 그 모든 하늘의 영광과 마음의 감사와 감격!

이런 것으로 우리가 만족하며 살아가야하는데.. 이것이 정상적 크리스천의 삶인데,

 

우리가 너무 기복주의에 물들어서,

내 만족의 소원을, 세상 불신자들과 똑같이,

명품 가방이나, 남자로 치면 뭐 골프채, 뭐 비싼 오토바이 같은 것 들을 타고 달려보는 그런 것에

우리 소망을 두고 있다가는..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에 대해서는, 별로 갈급함이 없고,

-신자가, 불신자와 똑같이, 고급 외제 승용차 타고 다니는 일에 갈급함이 있는데요,

문제는, 설교가 자꾸 그런 세상 소망을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아주 옛날에 그랬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적에,

일평생 마치고 모두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누가 가장 복 된 사람이냐,

 

-뭐 이렇게 부자로 산 사람이 아니라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자기 신앙생활을 정결하게 일평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중국에 가니까,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나의 일평생 소원은,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평생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라고요.

그의 말을 들을 때, ‘우리나라 신앙인하고는 다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에 그런 게 있죠.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정혼부터 합니다.

먼저 정혼을 해서, 결혼할 때까지 6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1년도 걸리는데,

 

그 기간 동안 신랑으로 정혼된 사람은, 신부를 데려오기 위한 지참금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지참금이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다 모아지면

그것을 갖고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데, 바로 그때부터 혼인잔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혼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구름타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재림으로 다시 오실 그 날은, 우리가 신랑과 결혼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지금 정혼상태, 약혼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뭐냐,

그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정결한 가운데서,

정절한 신앙을 갖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뭐 큰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아파트 백 평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할 적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고, 또 뭐 교회 봉사도 하고,

나아가서 전도까지 할 수 있습니다만,

 

그 봉사하고 전도하는 목적이

무슨 내가 이 세상에서 좀 팔자 고치고 위에서 돈벼락이라도 쳤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하는 그것은,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보상은 주님이 약속하신적도 없고, 실제로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기의 헛된 기대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는 보상은 무엇이냐?,

-정말 그 사람이 일평생 자기 자신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어떤 물질욕이나, 권세욕이나, 정욕에

자기 자신을 이렇게 음녀(세속을 통칭)와 더불어 방임하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며, 정혼한 신부로서 자기 자신을 준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가장 큰 복인데.. 진짜 그것이 복이겠죠?

 

그러한 것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자에게

예수님께서 보상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 말씀에 그런 게 나온다는 것이죠.

 

▲거기에 이어서 이렇게 나옵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가는 자며.’ 계14:4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간다’ 라고 할 때,

우리는 무작정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곳은 무조건 다 좋은 곳이야. 편한 곳이야.’

이렇게 쉽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내 상상이고 내 추측이고요.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은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으며, 우리가 늘 지금 말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내가 검을 주러 왔노라.

나를 믿으면 너희가 가족끼리 불화하게 되리라.’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가족이 서로 화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 불화하게 되고

아비와 자식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불화하고 반목하고

그러한 길도 (한 때 일정 기간)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밭길이 있고, 험한 산길이 있고, 고통과 고생의 길이 있지만,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 어린양의 인도를 받아서 꿋꿋이 따라갈 수 있는 은총’,

그것을 십자가를 진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보)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에서 포도를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까지,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서

거기서 일거리가 없어서 서있던 품꾼들을 데려다가, 포도원에서 일을 시킵니다.

 

우리가 다 알듯이, 저녁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하고

똑같은 임금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아침 일찍부터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

이런 말씀의 결론으로, 그들을 책망을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런 뜻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포도원에서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는

기복주의 신앙과, 현세적 물질적 축복의 신앙이 너무나 머리에 가득 찬 나머지

자기는 젊어서부터 예수를 믿었는데,

나중에 끝에 저녁 다섯 시에 와서 예수 믿은 사람과 비교해 보니까,

 

‘자기가 더 받을 줄 알았는데, 크게 부자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크게 물질적 축복을 더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께 화가 난 것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개념과 지식을 갖고 본문을 대할 때,

그 품꾼들이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종일 일한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보상이냐, 자기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일평생 섬기고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큰 복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뭔가 좀 이렇게 데나리온을 많이 받아야 복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나 물질적이고 기복주의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요.

 

그러한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

 

▲‘주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정말 주님을 위해서 내가 오늘도 헌신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 헌신하는 삶 자체가 은총이요, 복이요, 보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실 우리 인생이요, 우리 시간이요, 한 번 뿐인 세월입니다.

 

이 인생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다 내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으며, 그것보다 더 큰 보람된 삶이 어디 있으며,

그것보다 더 큰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물질 조금 더 받아가지고, 아파트 평수 조금 늘리면, 그게 복 받은 거예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헌신하고 드리면, 부자가 될 것 이라고 헛된 기대를 하고

또 자기 기대대로 안 되니까, 시험에 들어서 신앙생활을 멀리하고,

그러다가 허송세월 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인생을 헛되이 보내버리는 것이죠.

 

그 사람들은 애초에 예수를 믿지 않았거나,

애초에 예수를 엉뚱하게 믿은 것이죠. 실제로 따지고 보면, 믿지 않은 것입니다.

 

애초에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런 길을 가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자기 신앙의 목적을 주님께 뭔가 보상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가룟 유다와 옥합을 깨트린 여인이 성경에 비교되어 나옵니다.

연속해서 나오니까요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자기의 소유를 깨뜨려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지만

 

가룟유다는, 자기가 3년 동안 자기 젊음과 인생을 다 투자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봤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돌려주시는 그런 보상이

뭐 물질도 아니고, 세상 출세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복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으면

자기 뜻대로 자기가 부자되지 않으면

결국에는 가룟유다의 길을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기독교를 대적하는 세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

 

마치는 말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받는 보상>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그 헌신의 삶,

그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가장 값있게 쓰는 그 삶 자체가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자기 신앙생활을

신랑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유지하며 사는 그것 자체가 보상이요,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시밭길이든지, 십자가의 길이든지

어느 길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그것!

그것이 참 보상이며,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갖게 된 것,

그것 자체가 보상인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