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급진적 교회 RADICAL CHURCH

LNCK 2014. 3. 25. 12:50

◈급진적 교회 RADICAL CHURCH                빌1:27-30                   출처보기

 

◑도입

 

▶오늘 말씀이 여러분을 무척 불쾌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늘 복음을 선포하실 때

불편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혹 우리는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 불편한 복음을 우리가 진지하게 대면할 수 있다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일단 오늘 설교하는 제가 제일 불편합니다.

 

신광은 교수는 <메가 처치 논박>이라는 책에서,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계속 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암세포’라고 말입니다.

 

건강한 몸은 어느 정도 자라면 세포분열을 통해 적정선을 유지하는데

크기의 환상, 규모의 신화에 사로잡힌 교회는 암환자와 다름없다’고 말입니다.

 

이번 주에 읽은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이란 책에 보면,

“현대 교회의 말하는 성장의 문제는, 느린 성장이 아니라

급히 서둘러 성장하려는 것에서 온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하늘 나그네의 사계>라는 책에서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대형 집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청중과 교인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대중광고나 홍보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 구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고객 확보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누룩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있는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부풀게 하고 숙성하게 하려고 여러분이 클 필요는 없습니다.

힘과 능력이 거주하는 곳은 누룩입니다. 힘과 능력은 반죽 덩어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능력은 소수의 사람,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불타오르는

소수의 마이너리티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아니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뜻은, 그러한 소수자 중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yeast minority’의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소수의 누룩

 

◑급진적인 교회 Radical Church

 

▶하늘나라의 백성 즉 교회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커진다는 것,

자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을 발효시키는 것입니다.

 

래디컬한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습니다.

비록 소수이고 힘이 없는 것 같지만, 큰 것에 타협하지 않고 누룩이 되어

우리가 변화시킬 세상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능력은 우리의 힘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How small we are. How amazing God is.”

(우리는 얼마나 작지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십니다)

아주 멋진 말입니다.

 

▶우리가 참 많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교회도 성장해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우리가 많이 가지고, 커지고 성공해서 남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그 생각 속에는 점점 하나님의 여지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힘을 가지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영광을 가로채려는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고민은 ‘사이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떠나버린 공동체는, 본질적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우리가 가장 힘이 없고 연약할 때, 가장 신앙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급진적인 radical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얼마 전 “Are you ready?”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현재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많은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기에,

그들의 신앙의 순수함과 열정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Radical Church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유명한 선교학자는

‘성도’와 ‘성경’을 ‘번역’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으로 번역되었으나, 동시에 성도의 삶으로도 번역됩니다.

 

세상의 10%는 성경을 보고, 세상의 90%는 그리스도인을 봅니다.

성경의 번역보다는, 번역된 우리의 삶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참 두렵지 않습니까? 내 삶이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오역할까 봐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와 교회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성 프란시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항상 설교하라, 그리고 혹 필요하다면 말을 써라!”

이게 무슨 말인가요? 삶으로 하는 설교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무엇인가요? 본질적 교회가 무엇인가요?

삶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교회에 대하여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그려줘야(몸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이제 교회의 급진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를 이제는 아프리카나 오지로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나를 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더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

바로 우리 교회가 일해야 할 사역의 터전입니다.

 

radical church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 우리가 드러내야 할 복음을 묻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본문 빌1:27절이 말하는 의미가 아닐까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급진적 교회의 특징

 

‘급진적 radical’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급진적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오늘날 우리 교회는 행위와 신앙 중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요?

 

올바른 신앙을 갖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행위가 따르지 않는 올바른 신앙이란, 위선과 독선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가리켜 왜 세상은 손가락질하고 ‘위선적’이라고 말할까요?

교회 안에 올바른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올바른 행위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2천 년 동안 교회는 끊임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고, 서로 함께 떡을 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기본에 충실했다면,

원수도, 소외된 이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수많은 원수가 존재합니다.

야고보서 2장 18~19절에 아주 극단적이 말씀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그 믿음으로 무엇을 하느냐 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도 성경지식과 교리에 대한 지식으로 넘쳐납니다.

너무나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귀신들도 이같이 믿고 떠느니라!”

 

참된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진리를 바른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바른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닌 ‘오랜 연습’이 필요합니다.

 

운동경기를 해 보면, 우리가 안다는 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운동 규칙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면, 경기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경기하면서, 규칙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규칙이 몸에 익숙하게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규칙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이 완벽하게 나타날 수 있을 시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2. 설명만 하고 있지 않은가요?

 

급진적 교회의 특징은 교인들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급진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교인들의 마음이 상할까 봐 주저한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도들이 삶과 부딪치는 내용에 대하여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에 따라오는 특권은 이야기하지만, 그 대가는 말하기 꺼립니다.

 

설교를 듣고 성전을 나서는 교인들이 들은 말씀은

마치 씹다 버리는 껌처럼 뱉어 버리고 맙니다.

그 진리를 가지고 살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시고 사단의 시험을 당하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설교가 아주 간결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이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때가 다 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너희 삶을 고치고 메시지를 믿어라”

 

아주 강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아주 시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으므로,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3. 교회 밖을 향한 교회인가? 아니면 교회를 위한 교회인가?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세상에서의 사명보다는

세상에서 쉽게 도피하는 사교클럽이 되지 않았는지요?

교회가 내부 사람들을 향하는 한, 절대로 급진적 사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교회 중심적인 교회는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 안전을 추구합니다.

교회를 위해 최상의 시설을 갖추는 이유가, 교인들을 위해서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많이 생각했던 것이 ‘소비자 중심적인 교회’였습니다.

저는 교회에 사람이 모이기 위해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모여진 사람들의 삶이, 급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집중하는 교회에서 경쟁자는 늘 다른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경쟁력을 가져야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급진적인 교회에서의 경쟁은 다른 교회가 아닌 세상의 영적 세력입니다.

이제 교회는 다른 교회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합 전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연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너무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개교회주의)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교회와 경쟁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보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교회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목적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몸만 커진다면,

고도 비만으로 언제 쓰러질지 몰라 버티고 있다면

작은 교회가 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커지지 않는 한,

크기는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유치함으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신병교육대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필요한 인재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신병교육대가 귀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그들을 위해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곳에서 배출되는 인재들이 없이

계속 교육만 하고 있다면 얼마나 사치스러운 낭비를 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마치 신병교육대와 같습니다.

교회가 투자해야 하는 것은, 신병들을 교육해 경쟁력 있는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는 신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동맥경화에 걸린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4. 혹시 세상의 불의함에 대하여 가졌던 분노가, 무관심이 되지 않았는지요?

 

월드비전의 창시자 밥 피어스가 드린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들로, 제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우리의 삶과 교회의 사역을 가장 급진적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아픈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아프고, 교회가 고민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셨던 그 마음으로 교회가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

예수님이 아끼시고 가치 있게 보셨던 일에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분노하셨던 일에 대하여 우리도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실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가장 분노하실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참 유치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서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아

권력을 누리겠다고 싸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노라고 하자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위한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포장된 욕망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한 자리 차지하려는 세속적 욕망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노하셨던 세속적 권력에 대하여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급진적이지 못한 교회가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많아지고 교인이 많아지면서 언제부터인가

교회를 상대로 장사하고 돈을 버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온갖 비즈니스가 성행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온갖 동물들을 팔고, 돈 바꾸는 이들로 성전이 더럽혀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던 것은 ‘돈을 바꿔주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돈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을 대상으로 돈을 벌려고 눈이 시뻘겋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분노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림 받은 공동체에서 서로가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혈안이 되어

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 급진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분노의 채찍을 휘두르시던 주님을 따르던 공동체가

언제부터인가 질책의 대상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요즘 우리의 마음을 참 많이 아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들이 무리한 건축을 하다 문제들이 생깁니다.

교인들의 돈, 집을 담보로 건물을 짓다 문제가 생깁니다.

 

왜 이런 일들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까요?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건물이 성공의 상징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데 필요했던 건물이

언제부터인가 모이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우고, 자랑하기 시작한 것이죠.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공간을 보며 참 좋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왠지 죄송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졌는지 말입니다.

 

급진적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왔느냐가 아니라

이제부터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5. 혹시 급진적 삶을 살기보다는, 제도를 우선시하지 않는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말의 요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더는 세상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으므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교회가 세워진 것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명을 감당하는 급진적 공동체가 아니라

이제 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그리고 교회를 세워주기 위해 만들어졌던 제도들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제도적인 교회들이 정작 해야 할 일 때문에 분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제가 너무 급진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를 보면서 개탄했던 일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나는 베드로파고, 나는 아볼로파고, 나는 예수파고, 나는 바울파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로 바꿔버린 공동체가

얼마나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요?

 

지금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감리교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리교단을 공고히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장로교회를 위해 어디로 이사를 가든 장로교회를 찾아가라고 가르치는 사람들,

복음은 순복음이고, 교단은 성결교라고 가르치는 사람들,

세례를 받았어도 다시 침례를 받아야 진짜 교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어떻게 급진적인 삶을 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채찍질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폴 하비라는 방송인은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수족관 관리인이 되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의 제도를 세우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로 ‘어장을 관리’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마치는 말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급진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급진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급진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것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급진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더는 교회가 어떤 건물을 가졌는가?

얼마나 많은 교인이 모였는가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급진적 교회가 이 세상에 있으므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가요?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면

더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선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되는 교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교회,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눈물이 있는 교회.

 

그렇게 바라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우리가 하던 일과는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급진적 교회에서, 우리는 더는 사상가가 아니라 행동가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