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면.. 렘20:7~13 출처보기
▲서론/ 복음 전파.. 목적은 고상한데, 현실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고 승천하시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사역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반드시 해야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초기교회 당시 로마인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경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불신자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이들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고 함께 했습니다.
무력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려 하기 보다는
섬김으로 감동시키고, 사랑으로 순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 같은 분들은 순교를 하고
성도 들은 환난을 겪으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주예수를 전파하고, 주의 손이 도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초기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니.. 기독교 신앙을 바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복음대로 그렇게 살기를 힘쓰며
그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러한 삶을 통하여 세상에 복음을 드러내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힘쓰라고,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설명
▲렘20: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8.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주께서 권유하시고 강권하셔서 주의 일을 행했는데 불구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결과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1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하자
그는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은 소명을 거절했지만, 하나님께서 강권하셔서
결국 예언자 일을 했지만.. 존경받음은 커녕.. 오히려 조롱거리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말씀을 대언한 예레미야!
그 결과는 조롱당하고 치욕과 모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적들로부터 죽음의 위협까지 받습니다.
▲20:8절에 (공동번역)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듣기 좋은 말을 안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선포하게 하셨고
그로인해 결국 예레미야는 그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심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란하게 하였다는 말씀이 그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선포하였고
주님의 마음으로 백성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고백합니다.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므로 백성들이 회개하게 되기는커녕
자신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지고, 사람들은 더 악해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던 것입니다.
박해는 계속되고, 선지자로서 사역에 대한 열매는 없는 것 같아서
그만 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9b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누구도 어떤 일로도 핑계대지 말고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렘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새번역)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그들로부터 알게 하자
자신들도 예레미야의 뒷조사를 해서, 그의 죄를 같이 고소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의 친한 친구들도 평소에는 잘 지냈는데도
그가 타락하기를 기다리면서 오히려 원수를 갚자고 할 만큼
자기를 곤란하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렘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이러한 상황이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이 되시므로
결국 그들은 큰 치욕을 당할 것이므로,
자신은, 끝까지 확신을 갖고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렘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하나님 즉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자신의 분을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에 대하여, 주께서 공의를 행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공의를,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소명을 다하려 하고 있습니다.
택함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과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이와 같은 곤란한 일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진리의 말씀을 계속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반드시 핍박/ 위기가 따라 옵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초기교회 성도들에게도, 여호와의 이름을 복음 전하려 하는데
심한 박해와 반대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선배님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초기교회 성도님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복음이 채워지고, 그들의 심령에 예수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면서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면,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9
그 감격스러운 복음이
그들의 삶에 운동력있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다윗은
물맷돌을 던집니다.
사랑의 예수님께서 자신을 감화시키자 이전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데 평생을 바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고난의 주님을 보며 두려워 흩어졌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는 복음에 확신을 갖고 순교의 길을 영광스럽게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천국영생을 선물로 주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주님께서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때마다 일마다 은혜로 채워주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사랑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교회 생활을 통하여 개인적인 바램을 이루고
찌든 삶을 회복시키는데만 관심을 두고 있으신가요?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삶을 불편하게 여기며
특정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나 해야 하는 사명이라 생각하며
소홀히 여기고 계십니까?
이 위대한 사역에 부름을 받고 듣고 있지만
감동이 없고 냉랭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의 일 은사를 맡은 사람의 일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머문다면, 다시 한 번 복음 앞에서, 자신의 냉랭함을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캘리포니아 복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지역은 미국에서도 부유한 곳에 속한다고 합니다.
또한 따뜻하고 기후도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쾌적한 도시라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복음’이란 이러한 풍요롭고 향락적인 삶을 축복하면서
사교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러한 모습의 행복을 전하는 복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음악회나 쇼를 많이 보여주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말과 행사를 진행합니다.
사람들에게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고
희생과 고난을 요구하지도 가급적 말하지도 않습니다.
양심의 부담도 갖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낭만적인 삶을 베푸는 선물이 되고
우리가 따라야할 하나님의 계명 그리고 종말의 심판은 거의 말하지 않거나
매우 부드러운 표현으로 스치듯 지나칠 뿐입니다.
윤리나 치리 징계는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 무뎌지고, 절대적인 가치관은 버리고, 자신의 평안과 더 좋은 삶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들은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제시한 듯이
많은 교회들이 배우러 갔던 시절이 한 때 있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성향이 달라지므로
복음을 전하는 ‘그릇’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외적 형식)에만 집중한 나머지
성도들의 마음에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그들의 죄를 언급하지 않는 등 교회의 본질을 희미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어떤 것 보다도 그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사명을 불편해 하며
자신의 편의와 바램을 이루는데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십자가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하고 감사드리면서도
주님 십자가 지시느라 고통당하시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나를 위해 지신 것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생각에는 다른 길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 길은 불편합니다. 그 길은 저 말고 다른 은사있는 사람들,
열심 있는 사람들이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정도로 이런 일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하며
주님을 무안하게 해드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는 말씀에는 아멘하면서도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모진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성도들이 흩어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복음을 증거했다는 말씀 속에서는 감동하고 훌륭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선교사님들의 일이라고만 여길 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평신도를 무장시켜야 합니다.’ 그 말이 제게 복음처럼 다가왔습니다.
나는 전도현장에 나가지 않고, 나는 영혼구원에 관심이 없고,
그런 가운데서, 평신도를 무장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가서 네 입을 열어 증거하지 못할 만큼, 내가 부끄러운 거냐?
그 정도로 자랑할 만한 존재가 못되는 거냐? 그러고도 네가 목사냐?
그리고 입을 열어 증거하지도 않으려고 하면서,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고 있냐?’
제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은 전하라는 명령 앞에 과연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물질과 시간을 드려서 섬기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봉사와 섬김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매주 찬양으로 영광돌린다고 하더라도
결국 교회 밖으로 나가서 입을 열어 증거하지 않고 복음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통회자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봉사의 일로 분주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다하더라도
복음을 살아내는 것과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에 겨워서 선포하지 않고서는 전하지 않고서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우리의 주변을 복음으로 적셔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도
옥에 갇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입을 열어 증거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하더라도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십자가의 은혜를 삶으로 증거했던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들을 적셔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주시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회복된 이들은 그 은혜와 사랑을 가슴속에만 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가 나사렛의 청년이 나를 낫게 해주셨고
그는 메시야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분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전히 믿고 따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대부분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입을 열어 증거했던 것입니다.
▲또한 온전해진 그들을 보고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어떻게 나았는지 어떻게 이렇게 온전케 되었는지 궁금해서
회복된 사람 곁에 오게 되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답이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내가 주님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 주님앞에 온전케 되기를 힘쓰는 동안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은 우리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감화시키고 그 은혜로 나를 채우시며
그 능력의 말씀이 나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그 은혜를 깊이 새기고 있다면
성령께서 날마다 도우심을 믿고 있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그 위대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예레미야와 같이 사방이 막혀 있는 상황이라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답답하여 탄식하고 계십니까?
복음의 가치를 믿고 알고 있다면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주님을 의지하여 증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 앞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람의 많고 적음을 자랑하고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한명의 잃은 양에게 다가가는 열정과
한 생명에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가야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거룩한 열심과
복음을 말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성도들로 채워져가고
그렇게 한 분, 한 분이 세워져 가야할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유럽교회가 고난의 복음을 거부하고
문화적인 기독교로 전락하면서 힘을 잃어 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고 빛이 광체를 잃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정반대의 가치관과 윤리까지도 가르치고 선포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타협하다보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는, 결국 교회다움을 잃게 될 것이고
영적인 갈급함에 모인 교인들은, 서서히 교회를 떠나고 세상을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는 복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정비하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 앞에 담대하게 반응하십시오.
부담스럽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살아내려고 할수록, 사단은 우리를 위협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신 속에서 고백합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2
그리고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대로 복음을 선포할 때, 예기치 않는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러했고 초기교회 성도님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간구하는 것처럼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있지 않고, 주님을 바라고 있지 않는다면
그 주님의 손길을, 지나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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