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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 생명은 사랑이다 2부

LNCK 2014. 4. 12. 13:06

◈생명은 사랑이다 2부           롬12:15, 벧전5:10                    특강 녹취

 

 

 

▶내가 젊을 때 결혼을 했어요.

사실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문학청년들, 내 또래의 문학청년들은,

그 당시에는 두 가지의 뭔가 다 가지고 있는 습성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나는 천재이기 때문에, 모차르트나, 천재 시인 이상처럼, (전혜린처럼)

또는 예수님처럼, 30대를 못 넘기겠구나.. 하는 소위 ‘천재 병’.

요즘에는 공주병하고 왕자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천재 병’이 있었어요.

 

적어도 문학하는 사람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학의 길을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들이, 자기 천재성을 안 알아주는 거예요. 자기가 작품을 못 쓴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나는 100년 후에 알아 줄 거야.’ 이러면서 계속 작품을 씁니다.

 

당시 문학가의 길을 추구했던 저도,

그래서 ‘나는 30세를 더 넘긴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30살 이후면 죽는다, 나는 천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결혼을 할 생각을 안했어요.

여러분들 콜럼버스가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잔뜩 있으면.. 어떻게 배를 타고 가겠어요.

 

그러니까 뭔가 이 세상에 해 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을 안 한 거예요.

그리고 작가들보면 독신주의자가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결혼한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또 30세에 죽을 사람이, 결혼을 해서 뭐 하겠어요.

그런 사람이 제가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처음으로 낯선 사람과 한 방을 쓰기 시작 하면서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혼한 사람이

서로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어쨌든 셋방살이로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는 다 셋방으로 시작했어요. 625 때니까.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까

625전쟁 직후, 피난 직후에, 그 와중에서 겪었던 고생한 것들이 거의 생각이 안 나고,

일제 때 식민지 통치에서, 그 가혹한 시절의 기억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결혼해서 처음 작은 셋방 속에서 겪었던 겨울의 추위,

그 기억이 지금 50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남는 거예요.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인데...

 

그 생명이 가득 차 있는 수풀에서는, 너무 많아서 그런지,

그런 곳에서는 생명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

고속도로 아스팔트 틈새에 핀 작은 풀잎 하나에서, 비로소 생명을 보는 것처럼..

 

그 많은 6.25 때의 체험, 전쟁, 별걸 다 체험 했지만..

그 와중에서 ‘생명’을 생각해 보지는 못했는데,

50년 전에 제가 결혼을 해서, 막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

‘생명’(의 신비)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너무 추워서 그때 연탄을 뗐어요.

그때는 연탄이라고 안했어요. 구공탄이라고 했어요. 연탄에 구멍이 9개 뚫려 있었으니까요.

그걸 태워서, 겨울에 셋방의 난방을 했지요.

 

그때 우리 집사람도, 나도, 대학을 갓 나와서 고등학교 선생을 할 때.

그러니까 집사람도 나도 직장을 다녀야 하니까

가사에 있어서 역할분담을 해서

요리는 당신이 해라. 그 대신 연탄 관리는 내가 한다.. 이랬죠.

 

그런데 글 쓰고 책을 읽는데 집중하다 보면, 깜빡하면 연탄이 꺼지는 거예요.

제때 새 연탄으로 갈아주지 못한 것이지요.

연탄불이 꺼지면 어떻게 돼냐 하면.. 방안의 잉크병이 얼어요.

 

나는 그때 이미 문단에 등단해 있을 때니까, 늘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지요.

그 당시에는, 대부분 만년필에 잉크를 넣어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잉크병 속의 잉크가 얼어붙었다가 다시 녹으면,

그 파란 색깔이 안 나와요. 잉크를 병 채로 그냥 버려야 되요...

 

▶그런데 잉크병이 어는 일이 몇 번이 있었는데도, 별 충격을 안 받았는데..

동네 문구점에 가서 새로 하나 사 오면 되니까요.

 

신혼살림에 그래도 사랑해서 첫 신혼부부인데,

방 안에 뭔가는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돈은 없으니까, 원고료를 처음 받아서 내가 사온 것이 뭐냐 하면

금붕어, 길에서 파는 금붕어를 사왔어요.

 

여러분들 ‘아 그냥 그렇구나..’ 하겠지만,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나는 그때 제일 값싼 양미리만 먹었거든요. 쉽게 말하면 제일 싼 반찬이에요.

건어물인데, 사람들이 너무 싸니까, 아예 잘 안 먹는 수산물이죠.

 

그 싼 양미리만 조려서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서,

신혼 방 한 옆으로는 제법 돈을 줘서 금붕어를 사서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내가 금붕어 먹이까지 사다주면서 키웠어요.

그래도 집안에 ‘생명’이 살아서 헤엄친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던 것이죠.

 

가뜩이나 자기 먹을 것도 넉넉지 못한 사람이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타 와서, 왜 금붕어를 사왔을까요? ..

 

그때 아마 이런 생각들을 한 것 같아요.

 

‘그래, 성서에서도 사람이 밥만으로는 못 산다고 했어’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

 

그렇게 가난했어도 뭔가 사치를 하고 싶은 것,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여유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이 있었겠지요?

 

거기에다 금붕어는, 살아서 유유히 헤엄치고 다니니까,

뭔가 좀 생명, 생기가 있으니까

신혼에 둘만 살기에 적적한 가운데, 정서적으로 도움도 되는 것 같고,

그래서 살아있는 금붕어를 하나, 관상용으로 사놓은 거예요.

 

그 외엔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금붕어 세 마리가 든 어항은, 우리 집의 유일한 재산이요, 귀중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연탄불이 꺼져서 방이 막 추운데

이게 어항도 꽁꽁 얼은 거예요.

딱 보니까, 금붕어 어항이라는 것은 돋보기 효과가 있어서

실물보다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는데

 

‘걔들’ 눈이 원래 큰데, 완전 얼음 속에 갇혀버린 거예요.

얼음 속에서 동태처럼 갇혀 있는 거예요.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어요.

꼼짝도, 미동도 하지 않고, 얼음 속에서 가만히 있었으니까요.

 

잉크병이야 얼었으면 내 버리면 그만이고, 다시 새 것을 사오면 그만인데

이건 뭐예요, 잉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인데

나는 그때까지 살아있는 존귀한 생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물고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얘들하고 나하고 같은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느낀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얘들이 죽는 것을 보고, 집 사람도 나도 “안 돼, 안 돼” 하면서

본능적으로 집사람이 나가서, 우리 방도 추운데, 방의 난방을 해결할 생각보다는,

주전자에다가 물부터 끓이는 거예요.

 

그 데워진 물을 가지고 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언 어항에다가, 더운 물을 넣으면 산다는 것은, 어떠한 가능성도 없거든요.

그냥 한 번 시도해 본 거였죠.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그저 해보는 거예요.

 

어항 속으로 더운 물을 살살 따르니까

놀랍게도 그 얼어붙었던 금붕어들의 꼬리가 조금씩 움직여요.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약간의 생명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경이로움과 놀라움은요,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놈들이 조금씩 움직이는데

꿈틀꿈틀 거리는데, 어항 물이 녹았을 때,

 

그 빨간 금붕어의 비늘 하나하나가 꼬리까지 가면서

생명이 흘러가는 하나의 동선을 느끼면서 그것들이 헤엄칠 때

비로소 나는 죽음이 뭔지, 부활이 뭔지, 생명이 뭔지를 느끼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 뭐겠어요?

 

‘아, 나의 추위가 너희들에게도 똑같은 추위였구나.

너희들은 말도 못하고, 너희들과 마음도 통하지 않지만

추위로 인해서 너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1. 고통을 나누면서, 하나 된다 

 

여러분들 이게 심각한 말인 것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옆에서 뭐에 찔려서 피를 뚝뚝 흘려도

내가 그 피 흘리는 사람만큼 아파요?

 

내가 열이 막 올라가도, 어머니가 ‘사랑한다’고 하더니

‘조금만 나갔다 올게’ 하고 외출나가 버리죠.

그러면 야속하죠. 인간의 사랑은 그런 거예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그 사람만큼 못 아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로만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그것은 전혀 모르면서, 말로만 하는 소리일 때가 많아요.

 

그런데 추위만은 똑같이 나눌 수 있어요. 안 그래요?

 

이 사람이 아프면, 내가 곁에서 아파해 주지만, 그 아픔에는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추위는, 이 방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배고픈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내가 배부르면,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배고픈 사람의 사정은 몰라요.

 

그런데 추위만큼은

이 사람 추위와 내 추위가 똑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거든요.

그날 아침에 제가 ‘추위의 발견’을 했어요.

우리 집 금붕어를 통해서요.

 

그러니까 금붕어가 얼어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것은 바로 내가 추위 속에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체험을

그 순간적으로 한 거예요.

생명의 동질감, 사랑의 동질감을 체험한 것이지요. 똑같은 추위를 겪으면서요.

 

그리고 막 집 사람이 막 물을 끓여서 살려야겠다.. 했을 때,

생명에 대한 느낌, 경외감을 느낀 것이죠.

 

우리가 매일 아침이면 또 하나의 생명을 깨물어 먹을 텐데 (식사하면서)

왜 금붕어는 그렇게 살리려 했나.

참 묘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또한 금붕어가, 인간이 사육해서 인간의 생활 속에 사는데

왜 일반 붕어들은, 대 자연 속에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강물인데도 안 얼어 죽죠?

 

얼음 속에서. 인간의 문화권에서 사는 금붕어들은, 히팅만 사라지면 얼어 죽는데,

어떻게 자연 속에 금붕어의 조상인 붕어들은

그 겨울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사냐, 이것이에요.

 

‘인간의 문화 문명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자연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제 힘으로 사는데

어떻게 가장 문화/ 문명화 되어서 자연에서 발달했다는

인간 환경 속에서는 금붕어가 죽느냐.. 이 말이에요.

 

여러분들 이렇게 하나 하나 해가면 ‘자, 추위의 의미가 뭐냐.’

‘자연 속에 금붕어들이 얼어죽지 않는 그 강물과 수돗물의 차이가 뭐냐.’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이야기 해보면

어려운 칸트, 헤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 속에 전 과학과 철학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우선 추위 이야기를 하나 해보죠.

여러분들 한국인의 얼굴 윤곽이 이렇게 생긴 것.

성형 수술 하기 전에 쌍꺼풀 있는 사람 별로 없죠? 광대뼈 다 나왔죠.

코도 성형수술 안했으면 납작하죠.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코도 우뚝하고, 얼굴도 허옇죠.

 

그런데,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성형수술을 하려고 하는 것은

가만히 따지고 보면, 서양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거예요.

 

코도 높게 하고, 쌍꺼풀도 하고.

서양 사람들은 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미녀라고 하는 개념은

서양 사람들처럼 생겨야 미녀인 것입니다.

 

동네에서도, 애를 안고 나오면,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보고

‘댁의 애는 한국애 같지 않아요.

아휴, 피부도 하얗고, 코도 오똑하고, 한국 아기 같지 않네요.’ 그러면 되게 좋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어요.

우리의 미의 기준은, 전부 할리우드 배우처럼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 한국인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이것은 영하 40도의 극한의 추위를 돌파한

(네오)몽고인들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추운데 지방이 없으면 눈이 어떻게 되겠어요.

원래는 지방이 많으니까 쌍꺼풀이었는데,

그러니까 눈을 보호하려고, 지방을 점점 소모하다보니.. 쌍꺼풀이 없어진 거죠.

 

그런데 우리 조상들의 내력을 추적하면,

저 코카서스 산맥 아래에서, 코카서스 산맥을 북쪽으로 통과해서, 시베리아, 내몽고

그러니까 오랜 세월에 걸쳐 툰드라지방을 통과하고,

결국은 아래로, 한반도까지 내려온 것이거든요.

 

그 추운 신빙하기에 그 추위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그 추위를 견디고 내려와서 결국 한반도까지 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인의 얼굴은, 추위를 견딘 자들의 얼굴인 것이에요.

영하 40도의 혹한을 견딘 얼굴 형태. 쌍꺼풀(눈의 지방)도 없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밋밋한 얼굴이 된 거예요.

입체적으로 되면 안 돼요. 추위를 못 버텨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소위 ‘생명권’이라는 거예요.

말하자면 ‘생명의 동질성’이지요.

 

‘아, 금붕어든, 붕어든, 인간이든 살아있는 것들끼리는 서로의 생명권이 있구나.

똑같은 추위를.. 사람이든 물고기든, 다 같이 함께 견뎌낸 데서 오는 동질성, 그 힘!’

 

그 ‘추위’라는 의미가 뭐냐?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면 ‘고난, 시련’입니다.

 

우리 민족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추위/ 그 고난/ 그 고통 안에서

서로가 서로 수 천 년 동안, 함께 동거동락 해 온데서, 생겨난 어떤 공동체 정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바로 이런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추위(인생의 고난)를 함께 겪은 자만이,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거예요.

생명의 소중함을, 그 존귀함을 피부로 느낀다는 뜻이지요.

또한 이웃이/사랑이/공동체가 뭔지를 아는 거예요.

 

◑2. 고난의, 극한의 자리로 나아가는 정신력

 

지구상에서 제일 추운 남극의 극지까지,

그 마지막 지점까지 쳐들어가는 것이 누구에요? 바로 펭귄이에요.

 

*황제펭귄 : 남극의 겨울에 알을 낳고, 얼음 위에서 알을 부화하는 동물.

부서질 위험이 없고, 너무 추워서 상대적으로 천적이 없는 남극의 얼음 위에서 번식, 부화, 새끼 양육을 한다.

 

다른 짐승들은 겨울이 오면, 다 따뜻한 곳으로 피신을 가요.

그런데 거꾸로, 펭귄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그 빙판에서 뒤뚱거리면서 더 남쪽으로, 더 추운 곳으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이런 것을 다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왜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나, 나는 왜 교회에 갔나.. 알게 돼요.

교회에 행복하려고 가는 사람들은, 황제펭귄이 못 돼요.

 

진정한 제자는, ‘추위’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 고통의 추위를 찾아가는 거예요.

 

거기 남극에는 독특한 폭풍우가 불어요. 눈폭풍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추운 거예요.

그냥 영하 40도, 50도에.. 거친 바람까지 불어서 체감온도가 더 내려가는데.. 거기에 눈보라까지 쳐보세요.

정말 견디기 어려워요.

 

다른 동물들은 다 도망치는데,

황제펭귄들은, 그것을 향해서 가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눈보라를 뚫고서, 한반도까지 찾아왔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는데.. 그 코카서스의 험준한 얼음산을 넘지 못하고,

그 시베리아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데..

 

우리 네오 몽골인이나, 황제펭귄이나 비슷해요.

거기(극한 지역, 고난의 장소)를 가면 천적이 있겠어요?

 

모든 생물들이 다 피해갔어요. 왜, 추위를 견디지 못해요.

그런데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짐승은,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노마크 찬스’입니다.

여기에서 애를 낳고 알을 낳고 여기서 까면 천적이 잡아먹을 수가 없고, 안전했습니다.

(요즘 말로, ‘블루 오션’이죠.)

 

▲그러면 그 극한의 땅에 가면

저 고난, 영하 40도, 가장 저주스러운 추위 같은데..

 

그런데 그 추위가 누굴 보호하고 있어요?

펭귄들의 생명을 잉태하게 해주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면, 뭐 다들 죽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종교에 가면, 부처님도 이렇게 척 평화스럽게 앉아 계시고

    뭐 이렇게 공자님, 다 평화로운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십자가 신앙’인데,

    옆구리에서 피가 나고, 십자가가 형틀 아니에요?

    거기에 못이 박히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우리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교회 가면 왜 그렇게 늘 죽는 이야기, 형벌 이야기, 피 흘리는 얘기가 많은지요..

 

존경스러운 사람은 다 제명에 못 죽은 사람들이에요.

12사도.. 제대로 산 사람 있어요?

거의 다 제 명을 못 살고, 순교하고, 죽었어요.

그런 종교를 왜 믿어요?

 

그것은 황제펭귄을 보면, 안다는 것이죠.

그 고통이 사랑이고, 우리를 지켜준 거예요. 진짜 생명을 지켜준 거예요.

 

‘그러니까 천적이 오지 않나, 내 알을 누가 빼 먹지 않나?’

이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왜, 영하 40도가 지켜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들을 밤낮 시험하는 것 같고, 치는 것 같지만..

그게 오히려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손길인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 믿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아세요?

나는 기독교 믿기 전에는 참 행복하고 평화로웠는데

믿는 그 순간부터 딸도 잃고, 외손자를 잃고, 내가 뇌 수술까지 받고..

이전에 평생 나는 병원에 가본 사람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믿다가

귀한 내 딸 잃고

뭘 잘못했다고 외손자 데려가시고

마지막에는 나까지 뇌를 뚫는 수술해야하느냐.

‘나는 이런 하나님 안 믿을래..’ 그랬을 거예요.

 

물론 내 신앙심은,

아직도 내가 남 앞에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들하고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욕하고, 저주하고, 도망쳐도 시원찮은..

그 <신앙에서 오는 고통>을 내가 왜 받아들이느냐..

 

황제펭귄을 보면 알고,

우리 집에서 얼었다가 살아난 금붕어를 보면,

그 의미가 그 속에 들어있어요.

 

여러분들이 뭐 젊은데,

젊은 사람들은 시련이나 고통 같은 것을 별로 심각하게 안 하지만

여러분이야 말로 죽음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 가장 생이 강하기 때문에,

그 생을 느끼려면 죽음이 없으면 안돼요.

 

▲그러니까 이 생명처럼

역설적이고,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맹목적으로 여러분들의 가치관이 다 다르고

서양 사람하고 우리하고 생활하는 것이 다 달라도

딱 하나 공통점이 있어요.

 

뭔가요? ‘죽고 싶지 않다’입니다.

생명이 뭔지 몰라도, 죽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 한 대로, 금붕어가 죽다가 살아 난 것은, 일종의 부활이죠.

죽음까지 갔다가 살아난 그와 같은 체험을,

내가 못 했지만

 

같은 추위 속에서,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그 생각을 했을 때

비로소 옆에 수백만이 죽어가는 625 전쟁을 겪었을 때 몰랐던

그 아무 것도 아닌 금붕어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생명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같이 겪는 고난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3. 함께 고난을 견뎌내는 팀 스피릿..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 했던 대로,

추위라는 것이 뭐냐.

펭귄을 이야기 했는데, 이 펭귄들은요.

이 바람이 많이 불고 눈보라가 치면, 그러면 절대로 혼자 못 견뎌요.

 

여러분들이 혼자 아무리 잘났어도, 추위는 혼자 절대로 못 견뎌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 이것들이 서로의 생명의 체온을 가까이 붙여서

자기 몸을 덥히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죠.

 

그래서 이 펭귄들이 한 마리 두 마리들이 모여 수 백 마리가 함께 똬리를 틀면서 있으면

바깥 온도보다 10도가 높아져요.

순전히 살아있는 생명의 따뜻함으로. 서로서로 몸을 맞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장치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체온을 서로 합치면

똑같은 체온과 똑같은 개체인데

개체들이 모여서 집단을 만들어서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것을 뭐라고 했어요. 기독교에서는 코이노니아.

 

그리고 사람들은, 안에 들어있는 자는 힘이 센 놈들이죠.

권력도 있고, 힘도 있고, 돈도 있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힘이 약해서 너 나가, 해서 희생되니까.

 

적어도 남극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펭귄 새들이 집단으로 똬리를 틀었을 때

내부에 있는 사람은 따뜻하지만, 외벽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춥겠어요.

 

요즘 ‘소외’라는 이야기를 많이 쓰는데

인간은 똬리를 튼 채로 외벽을 친 펭귄과, 안에 있는 펭귄들이

10년, 100년 가도 위치가 변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펭귄들은, 하나님이 만들어준 질서를 알기 때문에, 얘들은 똬리가 돌아요.

그러면 안에 있는 놈은 바깥으로 나가고

바깥에 있는 놈은 안으로 들어가요. 서로 교대를 하는 거죠.

 

그게 바로 공평한 사회다. 그것을 누가 일러줬어요?

펭귄들이 교회 다녔어요? 저희들이 스스로 안 거예요. 다 함께 살려고!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은, 자기 머리로,

펭귄보다 못한 사회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펭귄들은 어떻게 해야 사는지 알기 때문에

강한 펭귄이던 약한 펭귄들이, 똬리를 틀어서 돌아요.

그것을 뭐라고 하냐, 허들링이라고 해요.

 

허들링이 것이 뭐냐 하면, 미식축구 할 때 스크럼을 짜서 돌죠.

스크럼을 짜서 돌면서, 안과 밖 사람이 서로 서로 교대를 해 주는 겁니다.

바깥이 제일 힘드니까, 그러는 거죠.

 

펭귄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맨 바깥에 선 펭귄이 가장 추우니까, 안쪽에 있는 펭귄이 교대를 해 주는 겁니다.

 

▲무당벌레도, 극한지역으로 스스로 찾아가는 지혜가 있어요.

 

산불이 나면 20km 바깥에서 열 센서로

어디서 산불이 났다는 것을 탐지하는 무당벌레가 있어요.

그러면 얘들이, 산불이 났다고 하면, 그쪽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왜 날아갈까요?

 

산불이 나면, 거기에 천적이 없어요

다 타 죽거나, 다 다른 데로 도망갔어요.

그런데 무당벌레는, 오히려 거기로 날아가서, 알을 낳는 거예요.

 

펭귄이 천적이 없는 곳에 가서 살듯이,

남들이 불행하다고 생각 하는 추위를 찾아가는 것처럼

 

산불이 나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곳에

무당벌레는 거기에 생명을 심으러 가는 거예요. 놀랍잖아요.

 

여러분들이 왜 우리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남을 도와주고 자기 살기도 힘든데

이웃까지 사랑하라고 하고 험한 길이고

순교자들이 되라 하고..

자기는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사도바울 보세요. 지식도 있고, 권세도 있고, 다 있는 사람이

아시아 지역을 돌면서. 남들이 볼 때 이해가 되요?

 

펭귄 남쪽으로 가는 것, 눈폭풍이 부는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도 길을 잃으면 혼자 가다가 죽어요.

 

하나의 생명의 질서, 은총이라는 것이 뭔가요?

 

우리는 은총이라고 하면 아주 따뜻한 곳에, 햇빛 속에 있는 줄 알지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하 40도의 사랑이다. 불타는 화산 속의 사랑이다.

거기에 날아가면 악령들이 다 없어지고

거기다가 성령의 씨를 박을 수 있는 거예요.

 

과거에 한국의 상황이, 가장 불행한 남극이었고, 불타는 화산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독교가 꽃 피울 수 있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