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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4편 스크랩

LNCK 2014. 6. 28. 20:15

◈칼럼 4편 스크랩         왕하13:14~19                     모두 인터넷에서 스크랩

 

4편 모두, 뭔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여운이 남는 칼럼이어서, 스크랩해 둡니다.

 

 

◑1. 교회의 자생력을 믿어야

 

▲해외에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교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한국인 몇 사람만 모이게 되면 교회가 생긴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후 얼마 지나면 갈라진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마다

크고 작은 교회들이 세워진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대한민국을 찾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방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 십자가 탑이 사방에 눈에 띌 정도로 많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희한한 현상이다.

 

 

▲교회에는 놀라운 자생력이 있다.

교회가 사방에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자생력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만 갖추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돈이 있든 없든, 자체 건물이 있든 없든,

소속교단이 무엇이든 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가볍게 여행하는 여행자와 같다.

어디를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챙겨야 되는 게 아니고,

많은 수속을 밟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가벼울수록 손쉽고 빠르게 여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도 많은 요건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지난 2,000년 간 많은 핍박과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중국이 공산화 된 후 기독교가 없어졌을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오히려 몇 배로 증가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개신교회의 스캔들과 딜레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염려한다.

이것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몇몇 유명 대형교회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지 않으며

기독교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의 개신교인들은 몇 개의 유명 대형교회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불필요한 일이다. 잘못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뭔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주리라고 기대할 수 도 있으나 없다.

 

개신교의 일부분 큰 교회 만을 바라보아서는, 전체의 사정을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어떻게 감독하시고 인도하시는지

우리는 다 알 수도 없고 다 파악할 수도 없다.

부분적인 안목으로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 점을 믿어야 된다.

 

기독교인들이 주일예배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교회에 대한 믿음이 나온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

 

왜 신조를 고백하는 중에 ‘교회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를 믿는 믿음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교회의 목적과 운명과 궁극적인 승리를 믿는다는 말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교회를 사랑해야 된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세우신 것이 교회다.

당신의 계획에 의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요 원리다.

 

우리는 항상 소박하고 겸손하게 생각해야 된다.

현란하고 화려한 건물이나 프로그램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의 자생력에 의해, 교회는 살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무신론자나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비판만 하면 되기 때문에 입장이 쉽다.

별 책임이 없다.

 

야당만 하던 사람과 비슷하다. 여당을 비판만 하면 된다.

무슨 정책을 책임을 지고 이루어야 될 의무가 없다.

 

반대로 신앙의 변증자들은 책임이 무겁다.

불신자들의 비판에 맞서 기독교의 신앙과 교리를 변증해야 된다.

 

영국 국왕의 타이틀 중에 하나가 "믿음의 수호자"인 것처럼

믿음에 도전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누군가는 신앙을 수호해야 된다.

 

신앙의 변증자의 책임이 한층 더 무거운 이유는,

남들의 질문에 답변을 제시해야 되는 것뿐만 아니고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도 답을 찾아야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불신자들처럼 누구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다.

남들처럼 항의하듯, 싸우듯 자신의 질문이나 의구심을 무책임하게 던질 수 없고

스스로 신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찾아야 된다.

 

신앙인이라고 의문이 없는 게 아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질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지혜를 구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2. 무책임 vs 책임감 있는 자

 

책임을 진 사람과 무책임한 사람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어린 자녀들은 대체로 무책임한 불평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만을 부모에게 알리기만 하면 된다.

권리만 있지 의무는 없다.

 

부모는, 반대로, 불만이 있더라도 무책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에 대해 무책임하게 불만을 던지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에겐 의무도 없고 사명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

하나님은 동네북이고 성직자들도 그렇다.

 

성직자들은 이들의 항의에, 답변을 제시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너 잘 만났다"라는 태도로 항의를 한다.

 

이런 사람들도, 남에게 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설명해 주어야 되는 경험을 좀 해봐야 된다.

인생과 종교의 문제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 봐야 된다.

그렇게 되면 싸우듯이 질문을 던지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탐구를 하게 될 것이다.

 

 

◑3. 믿음과 논리

 

예수님도 12살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거기 학자들과 변론하셨습니다.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눅2:46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그 과정에 많은 ‘질문’들과, ‘의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갈등하다 해답을 얻은 결과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는’ 것이지, 롬10:17

무작정 듣는다고, 아무 의심 없이, 믿음이 다 생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누가 ‘그러한 모든 의문들을 묵살하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가르친다면,

어쩌면 그건, 그의 믿음 성장을 오히려 저해하고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내 이성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요..

 

행7장의 스데반의 설교를 보십시오.

무조건 믿어라.. 는 식이 아니라,

구약부터 말씀을 차근차근 풀어내면서, 생각과 논리에 근거한 믿음을 가질 것을,

청중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래 영어칼럼 요약)

 

The role of critical thinking in faith

 

When Jesus was 12 years old, He went to visit the temple in Jerusalem and remained there when His parents returned home. His parents went back to Jerusalem looking for Jesus, and found Him in the temple. Jesus was sitting among the docto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them questions, and everyone who heard Him was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Hearing the word of God produces not only understanding but also questions. So Jesus was both listening AND asking question. It is natural for us to ask questions. If we are not asking questions about anything, and not just the word of God then we are not understanding properly.

 

Who says there's no place for logic and critical thinking in religious matters? Anyone who thinks like that doesn't understand religion. Stephen, the first Christian martyr, spoke about faith so well that no one was able to stand up against the wisdom and the spirit by which he spoke.

 

If any preacher demands blind faith from his congregation, he is a false preacher and a bad Christian. There is plenty of room for critical questions and answers. one should not be ashamed of his questions. A good question answered well produces progress in the faith. Jesus stayed in the temple only for three days conversing with the doctors, but I'm sure it was a time of great learning for Him. It was probably like earning a doctor's degree in 3 days!

 

 

◑4. 한 시대의 종말 왕하13:14~19

 

요즘 용기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며

그래서 엘리사 사후 즈음에, 소심했던 요아스 왕의 시대와 같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제의 글

 

 

▲엘리야는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지만, 엘리사는 병들어 죽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떠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엘리사 선지자가 떠나면서, 한 시대를 장식했던 선지자들은 다 떠나갔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나오지 않았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엘리사가 병석에 누웠을 때 요아스 왕이 찾아와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한다.

 

이 말이 우리 귀에 익숙하다.

일찍이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보고 엘리사가 외쳤던 말이다.

 

하지만 엘리사의 경우는, 엘리야와 달리

하늘에서 겉옷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엘리사의 영감을 이어받을 사람도 없었다.

엘리사가 죽으면서, 자기 시대는 끝나고 만다.

 

요아스 왕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눈물을 흘려야 된다.

이와 같은 선지자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에 대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요아스 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회를 일군, 주의 종들이 점차 은퇴를 하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다.

그 분들은 한 시대를 장식한 분들이다.

70년대에 교회를 개척해서 키운 분들이다. 한국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낸 인물들이다.

 

교회의 부흥이 그냥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시대를 대표했던 거의 모든 분들이 은퇴하거나 돌아가셨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연 선배 목사님들의 영적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이어받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알 수 없다.

 

신세대 목사들은, 이전 세대 목사들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고 지적 수준이 높다.

유학도 다녀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적 파워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엘리야와 엘리사가 떠나간 후, 이스라엘의 분위기와도 같다.

 

▲우리가 요아스 왕처럼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 될 부분이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은 뭘 모르고 있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여론이 영적인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무조건 비판만하면 되는 줄로 생각한다. 눈물 흘려도 부족할 판에..

 

마치 과거 군부독재를 비판만 하면 칭찬을 받을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영적 능력이든 믿음의 능력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남의 실수에 대해 비판만 할 줄 아는 사람 천지다.

영력=비판력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는 말은 이제 효력이 없다.

그 말은 엘리야가 승천할 때 딱 한번 효력이 있었다.

그 때는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간 지금 이 말은 추억거리가 됐을 뿐

더 이상 똑같은 역사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 말은, 엘리야가 처음 했을 때는, 능력이 임했으나, 한 세대가 지나서 요아스가 똑같이 따라했을 때는.. 낫싱 해픈드) 

 

요아스는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찾아야 되는데, 그는 그만한 재목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담대함이 부족하다.

 

엘리사가 두 가지 상징적인 세러모니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다.

하나는 활을 쏘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화살로 땅을 치게 하는 것이다.

 

왜 땅을 치게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아스는 땅을 세 번 치고 그친다.

(그는 소극적이었고, 담대함이 부족했다.)

 

그걸 보고 엘리사가 노한다.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사건이다.

요아스의 소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요아스 왕의 입장이었다면,

우리 중에 화살로 땅을 치라고 했을 때,

엘리사가 바라던 대로 오륙 번을 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대부분은 오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대충, 적당히 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적당히 하면 안 된다.

소심해서도 안 되고, 용기를 상실한 겁쟁이 이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는,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요아스와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

 

요아스의 그러한 생각이 엘리사를 노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이 적은 것을 볼 때 분노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엘리야, 엘리사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 뒤로 겁쟁이, 소심한 자, 소극적인 자들만 남아서는.. 아무 소망이 없다.

담대하고 용맹한 인물들이.. 다시 출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