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LNCK 2014. 6. 30. 09:13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갈5:16~17                인터넷설교, 스크랩, 녹취

 

오늘날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신앙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편.

 

◑서론

 

▶제가 호주에 살 때, 시드니 시의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가 있습니다.

거기 관광객 중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사진을 열심히 찍고 가시는 것입니다.

인증 샷입니다.

다른 곳에서 아무리 찍어도 표가 안 나지만, 거기서 찍고 가면

호주에 왔다 갔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많이 찍고 갑니다.

 

-두 번째 부류는, 가이드를 통해서 인사이드, 내부를 구경하는 투어가 있습니다.

바깥도 굉장히 아름답지만, 오페라 하우스는 사실 안이 더 중요하죠.

 

내부를 들어가 보면, 콘서트홀이 있고,

굉장히 많은 홀들이 특별하게 설계자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그 안에 있는 오페라의 콘서트 홀들의 위용을,

건물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맛이 납니다. 그것을 보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세 번째 부류가 있는데, 티켓을 사서 저녁에 오페라 공연을 보는 것입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오페라와 콘서트홀이 두 곳에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을 하는데, 세계적인 작품들이 공연을 하죠.

 

그 공연에 참여하면 굉장한 감동이 있죠.

기가 막힌 그 곳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지고

그 곳에서 그 공연을 본다는 것은 환상적인 것입니다.

 

또 오페라에는 중간휴식 시간이 있는데,

그 밤에 나와서 오페라 하우스를 보는 전경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똑같이 오페라 하우스를 다녀왔지만 감상평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건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내부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거기서 울려지는 아름다운 음악과

그런 환상적인 오페라에 관한 감동을 이야기 합니다.

 

오페라 하우스의 외향이 멋있지만, 그것만 보고 온다는 것은

마치 레스토랑에 가서, 다른 사람이 먹는 것만 구경하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토론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신앙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는 것이 참 많이 늘어났습니다.

정보사회, 검색사회입니다.

 

요즘 건강에 대한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건강에 대한 지식’이 꽤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 지식을 아는 것과,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죠.

 

오늘 같은 지식의 폭주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피상적인 앎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진리를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머리로 진리를 아는 것은

마치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인증 샷을 찍고 내가 오페라 하우스에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지만, 아는 것으로 끝나는 때가 많습니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사람은 번뇌케 한다’는 말씀을 잠언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 진리에 내 삶을 걸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과 진리가, 내 삶을 걸 수 없다면

그 진리와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3: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 8절 전후문맥을 보면,

 

그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자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겼다.

예수를 위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가 옛날에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자기 삶과 목숨을, 그 ‘지식’에 걸었다는 뜻이지요.)

 

그가 옛날에 기를 쓰고 추구했던 것들이, 지금은 배설물로 여길 만큼

그 찬란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에 그 진리에/ 그 사실에

내 인생 전체를 걸 수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진정 성경이 말하는 앎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2:11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이어지는 14절에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세계를 본다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사람들이 믿을까요? 성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이 수 없이 일어나도 믿음이 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기적이라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출애굽 할 때 바로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수없는 기적을 보지만, 그의 마음은 더욱 더 강퍅해져 갔습니다.

 

신기한 일이죠. 여러분 성경을 읽는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성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1. 본론/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무엇을 약속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바로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당신은 육체로 이제 승천하시지만,

성령으로 제자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와 항상 24시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자 이게 새로운 단계입니다. 영적 세계의 새로운 단계!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영으로 임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이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귀중한 요소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나 홀로 살아가는 삶과, 성령과 함께 사는 삶은 전혀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막 혼자 열심히 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 혼자 열심히 하는 신앙은, 금방 한계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성령과 동행함.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령과의 생활은 매우 실제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닙니다.

철학과 어떤 이념적인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로마서 8장에서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죠.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신 내용이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14: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러분 제자들에게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죠.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시에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 이름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지상에서의 마지막 삶을 마치고 하신 말씀이 뭐였냐 하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고아로 살지 않게 하시고

영으로 찾아오신 성령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고아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고아와 아버지가 있는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양자의 영을 받지 않으면 늘 불안합니다. 안식이 없어요. 눈치보기 바쁩니다.

세상과 교회를 오고가지만 평안이 없습니다.

고아와 같은 삶을 살면 늘 배고프죠. 두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자는 고아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제는 고아와 같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아↔양자)

 

▶그런데 고아같이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도 여전히 불안하고 쫓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뭘 하나라도 얻어가려고 막 떼를 쓰는 것 같은,

그래서 마치 안 줄 것 같은 그 두려움에 빠져있는,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아같이 살아간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성령에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안에서 살면 고아의 영이 떠나가요.

더 이상 피곤하거나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 주일 성수나 혹은 십일조, 봉사생활,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이라고 규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우 힘든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사진 찍고 다니는 것과 똑같아요.

주일 날 교회를 갔다 온 것 만으로만 만족하고 있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그 이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활동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주일 날 예배에 참여하는 것들, 봉사하는 것들, 십일조를 내는 것들은

아주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게 마치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오페라 건물에서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2.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영의 활동입니다. 영의 세계의 일이에요.

신앙은 광활한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표면과 이면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죠.

성령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영과 육체의 일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되는 것이죠.

 

마치 바깥 건물과 그 안에 벌어지는 엄청난 무대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영에 살아가는 것과, 육체에 살아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갈5:16절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늘 바울은 육체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이전에는 이런 것에 대한 고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시자, 육체와 성령의 구분을 지금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눈이 띄어지면

거대한 힘의 대결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갈5:17절에 보니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우리 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충돌을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대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뚜렷한 증상이 뭐냐 하면.. 깊은 갈등입니다.

우리 안에서 날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싸움은 연중무휴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에 이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나이와 상관이 없고, 신앙과 상관이 없고, 훈련의 유무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우리는 초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죽을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어요.

늘 계속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나 정도 예수 믿었으면 이제 뭐 얼마든지

자기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큰 코 다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소욕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속성이 드러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죄의 힘이란, 하나님께 반역하게 만드는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에너지에요.

 

우리 안에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스르고자 하는 욕구, 에너지가 늘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 힘을 얕보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여m 육체로 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 생활에 방심은 금물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의외로 낙오자들이 참 많습니다.

 

누구나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시작을 했지만

어느 날 보면 영적으로 지지부진하고 기본도 유지하지 못하고

나중에 아주 엉뚱한 곳에 밀려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봅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이 무엇입니까. 오늘 16절의 말씀처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구는 강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려고 합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욕망하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나쁜 것을 욕망하는 것도 문제지만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과도하게 욕망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강한 욕구를 이길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죠. 그래서 죄를 이기는 특별한 비법이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 외에 욕심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성령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일시적인 어떤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임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령을 의지하는 영적인 습관을 길러야

죄의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면 성화입니다.

회개를 우리가 강조할 때, 회개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회개를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성화의 삶이 목표인 것입니다.

 

회개는 일평생 해야 되지만, 회개의 질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는 일이 나타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의 결과는 성화입니다.

성령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성령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내 안에 있다면, 내 안에 누가 있다는 증거입니까.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신자라면 죄를 멀리하고 깨끗이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마음이 들게 되어있습니다.

 

성령은 거룩의 영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명령하십니다.

 

◑3. 성도의 목표는 성취, 업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하느냐, 얼마나 다양한 활동에 열심을 내느냐,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면 위험합니다.

 

마치 우리는 굉장히 어떤 외적인 과업을 이루어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한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거룩한 삶은 강조되지 않고 외적인 활동이 더 높이 평가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무슨 일을 어마나 잘 하느냐 보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신앙의 핵심에 거룩이라는 단어, 성결이라고 하는 단어,

경건이라는 단어, 성화라고 하는 단어들이 사라져버렸어요.

여러분 우리 신앙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의 중심의 핵심이 뭐냐 하면

이런 것들이에요. 거룩, 성화, 성결, 이런 것들이 주된 관심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단어들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이 틈 사이로 세속주의로 밀고 들어왔어요. 기독교 안에 관용주의가 들어오고

세상과 타협하며 죄의 여러 가지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에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과 한국 교회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임무중 하나는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는,

거룩을 놓치지 않고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결과 거룩의 이 단어는 우리의 신앙에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동안 굉장히 많은 큰 일, 어떤 외적인 일을 수행하는 일을 하다가

결국에는 거룩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단어를 놓쳐버렸어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랬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이지

세상을 닮아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성결은 소극적으로는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 이게 무엇입니까? 성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 이것이 우리의 삶에 목표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신앙의 중심으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갔습니다.

이전에는 육체가 살고 싶은 욕구에 우리가 시달렸어요.

 

이제는 우리가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영이시고

우리를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갈5:25~26절을 보게 되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그랬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성령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시고

당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누르던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거예요.

죄의 힘에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을, 성령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확신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분류 없음 > 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복음, 다른 교훈  (0) 2014.07.03
기도로 영적전투를 수행하라! / Hymers  (0) 2014.07.02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  (0) 2014.06.29
칼럼 4편 스크랩  (0) 2014.06.28
지도자는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0)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