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기쁨의 이유 약1:2-4 13.09.29.설교스크랩, 출처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본문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우리의 눈에 띠는 단어는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라’고 했으니, 이 말씀은 기쁘지도 않은데,
억지로라도 기뻐해야 (흉내라도 내야) 온전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시험이 다가와도 기뻐할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consider it pure joy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기뻐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래 3절과 4절에서 살펴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며 힘겹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consider it pure joy’ 라는 이 말씀은
그다지 실감이 나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래서 종종 설교단에서 기뻐할 수 있을 때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일 자체가 명령이므로 그럴 수 없을 때에라도
두 말없이 순종해야 함을 뜻하는 것으로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정말 본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기뻐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으로 기뻐하는 그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왜 기뻐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 단지 말씀에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순종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기쁨이 아니라 슬픈 기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하게 되는 멋진(?) 핍박과 환난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모든 시험을 총 망라하여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해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환난과 핍박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스스로 욕심에 미혹되어 시기와 질투와 다툼에 빠지는 시험일 수도 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일 수도 있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당하게 되는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내적이든, 복음의 명분이든, 자신의 약함이든, 이웃의 탓이든,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든
모든 어려움, 즉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정말 모든 기쁨으로 기뻐해야할 이유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당연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종교, 사회, 문화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로마의 변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흩어진 주님의 교회들에게 선포하는
기쁜 소식의 첫 외침입니다. (야고보서의 첫 외침)
과연 이런 시험들 속에서 성도가 온갖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대담한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시험이 주는 좌절과 고통을 압도하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앎이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3
▶앎이라
그 답은 3절 끝의 "앎이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겪더라도
정말 큰 기쁨으로 압도할 수 있는 이유와 방법으로서
그들이 “알아야” 할 세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믿음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믿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이와 더불어 이미 그들 안에 인내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3. 이 믿음과 인내는 그 정해진 목적이 자신의 온전함이라는 사실,
또한 그것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여러 가지 시험의 해결책,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쁨의 이유1. 믿음의 시련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어떤 시험을 만나더라도 그 시험이 주는 고통과 아픔,
불안과 좌절을 압도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를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시련 - 도키미온’은 연단, 검증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평소에는 쉽게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본질이
시련(도키미온)과 같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 진정성이 비로소 드러나, 보다 온전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 흔들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은 그의 속에 있는 믿음이
비로소 그 진위를 드러내는 기회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그릇이 깨어지면 그 그릇 안에 담겨 있던 것이 다 쏟아집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이 깨어졌다면 향유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먼지나 잡스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면, 그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불신앙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때로는 분노와 절망과 허무와 원망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부터는, 다른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처음에는 비슷한 것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참된 믿음의 사람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나는
부인할 수 없는 소망의 근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을 진실로 찾게 됩니다.
그렇게 가까이 계신 줄 정말 몰랐던 그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입으로 고백했지만 막연했던 믿음이
드디어 시험을 통해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가장 믿을만한 것이며
가장 실제적이며 가장 놀라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이 모든 시련의 힘겨움보다 더 가슴 벅찬 발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감춰 있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됩니다.
그 보화를 모르고 지나갔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 가운데서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시험을 당할 때,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함께 하시며,
지금 여기서 적극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검증받으면서, 기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험의 고난을 이겨낼 비밀의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련과 연단의 과정은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계속됩니다.
◑기쁨의 이유2. 인내를 만듦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시련을 통과할 때
믿음이 발휘하는 그 인내가
내가 참고 억누르고 견디는 나만의 인내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인내는 단순히 인간 스스로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인내 스스로가 역사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견인’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인내라는 말은 스스로 펼쳐지는 그 무엇인데,
성도는 원래의 그 목적하는 바, 곧 온전한 상태를 향하여
스스로 작동하는 인내(견인)로 하여금, 그 일을 다 하도록 해줄 것을 요구받는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에서
'온전히'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인내의 작용이 갖는 궁극적인 목적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그 결과로서
성도의 온전함이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둘은 혼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자에게 있는 믿음은, 시험을 만나서 드디어 진가를 드러내고
또한 인내를 발휘하여 견딜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그 인내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시험을 만났을 때, 정해진 목적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기나긴 과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이 기나긴 인내가 그 작용을 모두 마친 후에,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온전함'이란
신자의 바깥에 놓인 외적 기준을 달성하는 것에서 오는 무엇이 아닙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함은 기나긴 과정을 전제합니다.
말하자면 인내는, 당사자의 허락 없이 그 사람을
이미 정해진 그 사람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인데, 이런 인내는 믿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과 의지만으로 하는 인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장장이가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었다가
두드리고 또 찬물에 넣었다가 다시 용광로에 넣고 하는 긴 과정을 거쳐
어떤 물건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철이 이 모든 과정을 지나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장장이가 뜻하는바 목적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예는, 씨앗이 땅에 심기는 것입니다.
씨앗 안에는 이미 그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그 안에 DNA가 들어 있습니다.
곧 정해진 목적, 온전한 상태에 대한 그림과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시간과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화, 변모되어
서서히 그 모습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함’을 구원의 근본 목적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내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분이 주신 인내가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서의 인내(견인)에, 뒤따르는 것이
성도 자신의 인내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정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온전함이라는 목적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통하여 드디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어도, 우리는 지금 그렇게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함을 정하셨고, 지금 이 불가마 속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인내,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가진 능력을 다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기쁨의 이유3. 온전하고 구비함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언제나 믿기에는 너무나 좋은, 그래서 더욱 잘 믿어지지 않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복음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뭐라 하든지, 깊은 속에서는 자기에게 그렇게 좋고,
그렇게 엄청난 기쁜 소식이 주어질 리 없다고 믿습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고 다시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병은, 모든 것을 받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삶이 기쁠 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받고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구걸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는 성도들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것의 온전함을 계획하셨습니다.
내 속에서 인내가 솟아나고, 그 인내를 따라 인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변할 수 없는 목적(온전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막을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온전하다는 말, 구비한다는 말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하나의 상태를 세 가지 측면으로 거듭하여 강조한 표현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원래의 목적에 다다랐다는 뜻입니다.
-‘구비하다’는 말은 그 최종적인 원숙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잠재되어 있던 모습들이 비로소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족함이 없다’, 즉 ‘빠짐이 없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시 온전함의 긍정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서 오랜 성장 기간을 거쳐
이목구비를 갖춘 건강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 안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으로 받은
온전한 자신의 새로운 생명을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원은 긴 여정입니다. 그 시작과 과정은 전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시작은 원래부터 그 안에서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과도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을 이해하고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도
우리가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산모는 몸이 무겁습니다. 많은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데
입덧으로 먹을 수가 없기도 합니다.
태중에 아이를 위해, 병이 나도 약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산모는 태중의 아이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태어날 미래를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현재의 어려움들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지만
내 몸 안에서 자라는 아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가 꿈틀거릴 때, 산모는 신기하고 행복합니다.
그 아이가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있지만
그 아이의 존재로 인해 내가 더욱 존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면,
산고라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 형언할 수 없는 산고의 고통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가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알아야’
시험 가운데서 자유와 능력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늘 세상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늘 사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모든 시험의 초점은, 우리가 과연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골머리를 앓는 세상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것도,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도,
이 세상을 다시 창조하시는 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세상을 다스릴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담도,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 안에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온 세상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시험은 없어야 할 장애물이자 불행의 원인입니다.
부와 번영의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늘 우리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표로 삼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함께 그것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고 그에 따르는 것, 그것이 곧 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인생 가운데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 인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솟아나는 인내가 있습니다.
그 인내는 우리가 주님께서 계획하신 목적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새로운 생명의 완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완전히 무너지는 자가 아닙니다.
뼈아프게 무너지는 것 같지만, 우리는 점차로 온전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주님의 이끄심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새로운 생명의 완성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쁜 삶을 주님께 감사의 예물로 드리고
산제사로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서론/ 탐욕의 복음을 버리고
고든 피 교수는 그의 책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기독교는 부와 건강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그 속에 복음의 특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악성 질병에 빠르게 감염되고 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기독교를 장악하고 있는 부와 건강의 복음은 고든 피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의 특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악성 질병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역시
건강과 부의 복음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실제로 우리가 따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이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에 가까운 부와 건강의 가짜 복음입니다.
부와 건강의 복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악성 질병인 가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지적할 때마다
사람들은 ‘부와 건강의 복음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하면서
부와 건강의 복음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저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들은 들은 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왜 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맨 나쁜 이야기만 하고 나름대로 노력하여 높은 자리에 오른 훌륭한 목사님들을 비난한다"며
부와 건강의 복음에 대해 지적하는 저에게,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제 말에 동의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와 건강의 복음을 믿고 따릅니다.
그것이 나눠진 마음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쉽사리 깨닫지 못합니다.
또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부와 건강의 복음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 속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이란 두려운 곳이고 동시에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불확실하고도 커다란 모험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사는 동안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닥칠 때 부와 건강의 복음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 속에서 속수무책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의 세상 속에서 극소수의 승자들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부와 건강의 복음 역시 극소수의 믿음의 승자들을 위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부하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고, 잘 나가는 때이건 어려운 시련의 시기이건
모든 상황에 대한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의 복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성경적 복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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