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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기 / Poonen

LNCK 2014. 7. 31. 11:22

https://www.youtube.com/watch?v=W0jBtJsG4L8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기           렘17:8, 계19:8           출처, 영어 편역

Living as Jesus Lived by Zac Poonen

7장. LIVING BY THE POWER OF GOD

 

◑‘혼의 능력’으로도 행할 수 있습니다.

 

 

 

아담(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혼의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짐승들이 가지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soul-power

 

 

 

아담은 그 힘을 발휘해서, 모든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수 천 가지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 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만

 

아담은 그 일을 해냈습니다. ‘혼의 능력’도 상당하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이 ‘혼의 능력’을, 하나님을 의지한 가운데서 올바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혼의 능력’을 잘못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뜻으로 사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후로도 에덴에서 쫓겨나

 

이제 자기 ‘혼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혼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반드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soul-power   vs    Holy-Spirit power

 

왜냐하면 종종 신자들은, 자신의 ‘혼의 능력’으로 행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마귀가, ‘성령의 능력’이라고 선전하면서, 많은 미혹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진짜 ‘성령의 능력’도 있지만, 실제로는 ‘혼의 능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혼의 능력’도 대단하기에, 생길 수 있는 오해입니다.

 

 

 

사탄이 틈타는 것은, ‘혼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적들을

 

쉽게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기적이라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분변하지 않으면,

 

“일부” 은사집회가, ‘혼의 능력’에 의해 인도되는데, 그것은 마귀의 속임이 됩니다.

 

그걸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자꾸 과장하니까요.

 

 

 

정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분들께 피해가 갈 수 있어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런 ‘혼의 능력’이 가장 쉽게 활동하는 영역이 바로 <치유 영역>입니다.

 

 

 

▶19세기부터, 인간의 ‘혼의 능력’을 과학적으로 탐구해 오고 있습니다.

 

일례로 최면술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 외에도 ‘마인드 컨트롤’, ‘꿈은 이루어진다’, ‘생각의 힘’

 

이런 분야가, 지금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니까요.

 

그래서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유망주들도,

 

매일 아침, 언젠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꿈을 꾸면서, 연습에 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효과가 어느 정도 있습니다.

 

 

 

이런 ‘혼의 능력’, ‘마인드 컨트롤’이

 

기독교 신앙에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성령의 능력’과 매우 유사해서, 대단히 구분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측을 잘 하고, 점을 용하게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맞지는 않아도, 대충 잘 맞춥니다. ‘혼의 능력’입니다.

 

일부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게 발달했는데, 그게 ‘예언/ 투시 은사’와 쉽게 결부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런 글이, 진정한 성령의 은사를 훼손할 위험도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여러 은사 집회가,

 

일부만 성령의 은사이고, 또 다른 일부는 ‘혼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구분하자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꼭 집회를 열지 않더라도, 자기 개인적으로

 

‘혼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감각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환상도 잘 보고 합니다만.. 그게 다 성령의 은사는 아닌 것입니다.

 

 

 

결국은 그 열매를 보고, 구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 추구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몸된 교회를 해치고, 은사자 자기 영광을 교묘하게 추구한다면,

 

그것은 ‘혼의 능력’이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면서도,

 

인원과 재정을 끌어 모으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혼의 능력’의) 은사자들은,

 

자기 스스로 ‘나는 너희들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고수로서, 스스로 인식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교만.. 이런 것은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 아닙니다. ‘혼의 능력’입니다.

 

 

 

▶실제로 ‘치유 은사’는 여러분 꼭 기독교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타종교에도 ‘치유 은사’가 있습니다. 방언도 있습니다.

 

 

 

타종교에서는 무엇으로 고칠까요? 성령의 능력은 아니잖아요.

 

그게 바로 ‘혼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런 ‘치유 은사자’들은, 곧잘 이렇게 말합니다. ‘나은 줄로 믿으세요!’

 

그게 ‘혼의 능력’을 동원하는 방식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으면.. 재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의 능력’으로, 스스로 ‘나은 줄 믿어서’ 고침 받은 것은,

 

반드시 며칠 안에 다시 재발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질병 중에 ‘정신적 원인’으로 인해,

 

실제로 몸이 아픈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병리적 원인이 아니라요.

 

 

 

그런 환자는, 정말 그 ‘정신적 원인’(미움, 우울, 상처)을 제거해 주면,

 

자기 육신의 질병도 귀신 같이 낫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환자가 나은 것은 확실한데,

 

그게 ‘혼의 능력(심리 치료)’으로 나은 것인지,

 

‘성령의 능력’으로 나은 것인지.. 정말 구분이 모호하게 됩니다.

 

 

 

다만 그 열매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기 왕국을 확장해 가는 은사자가 있다면,

 

(판단은 하나님만 하시겠지만) ‘혼의 능력’으로 하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로 치유되는 방식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먼저 ‘낫는다는 믿음’을 주십니다.

 

 

 

자기 소원으로 ‘낫는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고,

 

또는 심리적으로 억지로 ‘낫는다’는 믿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고전12:9

 

믿음은,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옵니다.

 

 

 

그렇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은.. 그 믿음대로 되겠지만,

 

자기가 자체 생산하는 믿음마인드 컨트롤로 만드는 ‘믿음’은

 

만약 무슨 결과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건 ‘혼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 이 아닙니다.

 

 

 

‘혼의 능력’의 최대 문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환자) 자기가 낫고 싶은 대로 행하고, (은사자) 자기가 고치고 싶은 대로 무조건 행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든 일(질병 포함)에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낫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성숙된 후에 낫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나아야 한다'는 인간의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기

 

 

 

▶예수님은 ‘혼의 능력’으로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면서, 언제나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종 홀로 광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6

 

 

 

십자가를 앞두신 공생애 마지막 때도,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으나

 

밤에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지내셨는데,

 

의심할 필요 없이, 거기서도 기도에 방해받지 않으시기 위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내 누구 집에서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해서, 기도하기가 좋으셨을 겁니다.

 

 

 

▶‘혼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일/사역만이, 영원토록 남기 때문입니다.

 

‘혼의 능력’으로 하는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모래성처럼 무너져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일하는 사람은

 

예레미야서에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17:8

 

 

 

반대로 자기 ‘혼의 능력’으로 행하는 사람은,

 

‘사막의 가시떨기나무’같다고 표현합니다. 17:6

 

거기는 땅도 나무도, 언제나 바짝 말라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그 ‘생명수의 강’에서 성령의 물을 길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불교의 수행, 요가의 극기 식의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뭇가지가 나무로부터 수액을 공급받지 않으면, 곧 말라버립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위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nothing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혼의 힘’으로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계속 공급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엡5:18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심령이 가난한 가운데서,

 

늘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사는 인간의 예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삶은, 오늘날 우리도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날마다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그건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적 신분으로 사셨다는 말이 되는데요, 그건 물론 아니고요.

 

 

 

예수님이 날마다, 새벽에, 저녁에 기도하신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자기 ‘혼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혼의 능력’으로 해도, 뭐가 조금 되는 것 같으니까요.

 

아니 ‘혼의 능력’으로, 아주 많이 끌어모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요15:5절의 nothing이요, 렘17:6절의 마른 나뭇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혼의 능력’을 결코 무시하면 안 됩니다.

 

어떤 분야마다, 재능을 타고 나서, 특별히 유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의 능력'으로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의 능력’으로 잘 되는 것은.. (안 되면 차라리 빨리 중단할 터인데)

 

그건 아주 마귀의 미혹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파멸입니다!

 

 

 

▶저 푸닌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관광을 다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경치 좋은 곳’, ‘호텔’을 눈여겨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실 장소를, 눈여겨보시며 다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유혹이 없으셨을까요? 히4:15

 

예수님도 얼마든지 ‘혼의 능력’으로 행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유혹을 이기고, 또는 ‘혼의 능력’으로 행하는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만 공급받아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던지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셨습니다. 히5:7  "loud crying and tears"

 

그래서 예수님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고,

 

‘혼의 능력’으로 자행자지 하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히4:15, 5:7~9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자기의 ‘혼의 능력’을 믿고 활동하다가는,

 

자행자지하고, 유혹에 넘어지고, 죄를 짓게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말씀 묵상과 기도 생활에 게을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필히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행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사역이 잘 되든지, 못 되든지 불문하고요!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사역을 마치고도, 저녁에 기도하는 습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날 사역의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게 되며,

 

또 다음날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 사역의 영광을 자기에게 돌려버리면,

 

‘하나님의 능력’의 공급이 중단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계속적으로 ‘혼의 능력’으로 행한다면,

 

그는 아직 완전히 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아/육신/혼의 능력이 깨어지지 않아서, 자기 혼의 힘으로 자꾸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주님은, 계속 그를 넘어지게 하고, 깨어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무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만 간절히 의지할 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그를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내가 약할 그 때, 강하다’는 역설적 고백이 나오게 하십니다. 고후12;10

 

 

 

아브라함은 자기 ‘혼의 능력’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혼의 능력’의 열매를, 절대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심판 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혼의 능력’으로 행한 모든 사역, 모든 열매..

 

그것이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하나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풀, 나무, 짚’으로 지은 것으로, 불타서 재만 남을 것들입니다.

 

 

 

이삭 한 명이, 천 명의 이스마엘보다 낫습니다.

 

1그램의 순금이, 1킬로그램의 나무보다 낫습니다. 심판 날에!

 

 

 

큰 외적 업적을 이루면 좋지만, 그게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작은 일이

 

심판 날에는

 

‘혼의 능력, 자기 능력’으로 행한 크고 웅장한 일보다..

 

결국은 보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은 타서 없어지고 재만 남겠지요!

 

 

 

▶심판 날에,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의 세마포 흰 옷을 입을 사람이 있고,

 

반대로 더러운 누더기를 입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혼의 능력, 자기 능력’으로 행한 사람은,

 

크든지/작든지.. 그의 모든 행함은

 

더러운 누더기가 됩니다. 사64:6

 

 

 

당신은, 혼인잔치에 입을 세마포 웨딩가운이 준비되셨습니까?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결혼식장에 더러운 누더기라..

 

그런 사람은 결혼식장(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기 전부터, 자신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3:17

 

 

 

이 말은, 예수님은 공생애 이전부터, 지난 30년간을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히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물론 하나님은, 방탕한 죄인도 불러서, 그를 변화시켜서 쓰시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아서, 놀라운 성령의 사역으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구해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사역 시기 (공생애) 이전부터, 즉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써,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위 히1:9절, 마3:17절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마치는 말.

 

 

 

우리 각자는, 타고난 자기 재능이나 은사가 있습니다.

 

즉 불신자나 자연인도, 자기 재능이나 은사가 있습니다. '혼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자기의 타고난 은사가.. 성령의 은사와 혼합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는”

 

자기 타고난 은사로, 즉 ‘혼의 능력’으로 막 사역을 행하는데,

 

그게 좀 열매가 나타날 때는

 

자기 스스로 자기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성령의 능력이 자기에게 늘 붙어 다닌다고, 머물러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자기는 남다른 사람으로 인식되면서, 자기 우상화에 빠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그날 그날 공급 받으셨습니다. 늘 머물러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혼적 능력’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신자는, 쉽게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혼적 능력’으로, 사역을 추진해 나갑니다.

 

 

 

이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를 깨뜨리십니다.

 

이때 마귀가 역사하면.. 그가 하는 사역이, 일시적으로 더 잘 되게 합니다.

 

 

 

전자는.. 작게 깨어지고, 빨리 돌이키게 되지만,

 

후자는.. 크게 깨어지고, 쉽게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 타격이 너무 큽니다.

 

 

 

다른 분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교회 성장 분야는 웅변술, 리더십의 은사, 회중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능력 등이

 

성령의 은사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대중이 많이 따른다고, 다 성령의 사람은 아닙니다.

 

과거에 부흥사 중에 일부는, 이렇게 혼적 능력이 탁월해서, 스스로 속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의 능력’으로 교회가 크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으신 것은, 결국에는 뽑힐 것입니다.

 

 

 

특별히 ‘치유 사역’에 있어서,

 

‘혼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가장 많이 혼동됩니다.

 

 

 

모든 치유사역자를 다 ‘혼의 능력’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심한 분별이, 성도 개인이나, 사역자 자신에게.. 절대 필요합니다.

 

아니면, 지금 혹시 잘 되고 있어도, 그건 짚/나무/풀로 짓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육체로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분별이 더욱 힘듭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기 혼의 능력’도 대단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으로 혼동해서

 

스스로 속는 일을, 대단히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는’ 일이요, 그 최후 결과는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자기 분야에 있어서, 대단한 능력자라 하더라도..

 

당신 스스로 그렇게 믿으면.. 큰일납니다.

 

 

 

이건 마귀의 미혹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한 거지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대단한 능력은, 주로 더 비천한 인간에게 부어집니다.

 

 

 

‘나는 너네들과 달라! 나는 특별히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야’하는 순간,

 

마귀의 놀음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특별히 기름부음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특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기름부음’이 특별한 것이지요.

 

 

 

자기를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특별하게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로부터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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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의 은사’에 관하여                   펀글, 편집, 강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은사라는 말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입니다.

 

오늘날도 기적적인 치유가 믿음 안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치유 모임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노라고 간증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과도하게 강조할 때, 우리는 다음 사항을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 병고침이 마치 우리의 믿음 여부,

 

혹은 믿음의 강도에 달려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자칭 신유 은사자들은, 병고침이라는 결과가

 

환자 자신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얼마나 능력 있는 사역자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는 듯이 가르칩니다.

 

 

 

성도가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약 5:14),

 

-그가 병에서 회복될 것인지,

-그 병을 가지고 살아가며 연단을 받을 것인지(고후 12:8-9),

 

-아니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거하는 복을 누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주장하는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분명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나아가 그런 자신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병자의 믿음이 약하거나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요)

 

 

 

또한 기적치유 사건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적은 빈도로 일어납니다.

 

간증자들의 간증이 거짓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하면서도

 

의학적으로 조사하면,

 

간증자의 간증처럼, 기적적 치유의 결과는 대단히 희박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그 현장에서는 나은 것처럼 기분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치료이었습니다.)

 

 

 

추측이지만,

 

신유집회에서 신유기도로 말기암에서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간증한 사람들 10명을,

 

2~3년 후에 실제로 탐문 조사해 보면, 10명 중 9명은 아마 사망했을 것입니다.

 

(자기 믿음으로 낫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런데 불신자라도 기적으로 낫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유 은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너무 오용/남용되기 쉽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은사집회가,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기독교를 미신적인 종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원에 관한 종교입니다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서도 하나님 나라의 지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더욱더 온전히 그것을 누리게 됩니다.

 

 

 

특히 살아있는 동안의 우리의 삶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영원에 합당한 존재로 우리를 빚어 만듦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소중한 기회입니다.

 

 

 

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라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환자의 주된 관심은, 질병의 증상이나 그에 따른 즉각적인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금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를 되찾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질병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그의 온전함’에 더욱 관심가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