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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 잭 푸닌

LNCK 2014. 8. 2. 11:01

※잭 푸닌 장로의 책 Living As Jesus Lived  총9장을 번역 중입니다.  영문 보기

이유는, 이 책의 9쳅터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4영리' 수준의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줄거리가 무엇인지, 뭐가 중요한 것인지.. 이해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편.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요14:10, 4:34, 17:4           출처, 영어 편역

 

Living As Jesus Lived by Zec Poonen

6장. Living In The Will Of God         

 

◑서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7

He who does the will of God will abide forever. 1Jn.2:17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3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7:21

 

 

 

하나님의 나라는 그 속성상 영원합니다.

 

그냥 교회 다닌다고, 세례 받았다고..가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고,

 

지금 지상에서 만나던 우리 가족, 친척, 지인들을

 

거기 천국에서 다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양심으로 자기 인간의 부족함을 절실히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자를 뜻합니다.

 

위 두 구절은,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언제나 심령이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순종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고, 자기 뜻대로 고집하여,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을, 절대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요5:19,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8:28,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8:42,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14: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아버지의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어떤 필요를 보셨을 때,

 

‘아 필요한 일이니까.. 지금 그 일을 해야지/도와야지’

 

그렇게 즉각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의논해 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 때, 행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도, 무려 4천년 동안이나 기다리셨습니다.

 

그 기간 내내 이 세상은, 구세주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보내실 때.. 그제야 비로소 오셨습니다. 요8:42↑

 

 

 

갈4:4참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일의, 적당한 때를 정해 두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전도서 3장에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고 잘 나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그 때를 아십니다.

 

‘재림’ 같은 때는, 아들도 모르시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아무리 지금 절실히 필요한 일이라도,

 

꼭 아버지께 ‘그 때’를 물어보십시오.

 

 

 

그 일은 옳아야 하고, 꼭 필요한 일이어야 하지만,

 

반드시 ‘때’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소견(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아, 이건 필요한 일이야, 내 생각에 번쩍 떠올랐거든’

 

그렇게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그 양심과 생각이 무지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떠오르신 생각이, 틀릴 가능성이 매우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어떤 일을 추진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따르셨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오랜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성경에도 능통하셨습니다.

 

벌써 12살 때부터, 예루살렘의 학자들과 토론하실 정도로, 그 지식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십대의 나이로, 성경 교사로 활동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실력이 너무 아깝게시리, 18년 동안이나, 평범한 목수로 지내면서

 

불학무식자도 할 수 있는, 책상이나 의자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30세 공생애 시작까지 기다리느라, 열불이 뻐쳤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주위에, 예수님의 설교를 듣지 못해서, 그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성급하게 공생애를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He who believes will not be in a hurry" 사28:16

 

 

 

▶그러다가 드디어 아버지의 때가 이르자,

 

순종하여 나가서 설교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요” 요2:4, 7:6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자기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알리실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막8:31참조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생애는, 그 언제나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때를

 

세심하게 분별하셔서, 거기에 철저히 따르고 순종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좋은 일’이라고,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필요’를 보시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으므로,

 

사람들의 필요를 보시면서도, 아시면서도.. 꾹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주변 인물들이 어떤 좋은 제안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솔깃해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어떤 곳에 예수님이 머무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으므로,

 

그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막1:35

 

 

 

인간적으로 보면, 그곳에 계속 머무실 이유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굉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사람이 생각하는 길과 다릅니다. 사55:8

 

 

 

▶이른 아침에, 예수님은 나가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시고, 그 음성을 귀담아 들으셨던 것입니다. 막1:35~39

 

예수님은, 베드로 같은 측근이나 친한 사람의 제안을 먼저 들으시기 전에요.

 

 

 

예수님은 인간적 이성,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유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기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3:5~6

 

 

 

사50:4,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습)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 예언이 예수님께 그대로 응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토의를 길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뭘 할 건지, 뭘 결정할 건지.. 기도로, 하나님과 상의해서 결정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들과 회의가 필요하지만, 사람들과 회의만 하느라 시간을 길게 소진하지 말고,

 

차라리 함께 사람들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이렇게 매사에 묻는 기도습관이 형성된 사람이, 성숙한 지도자요, 성숙한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식사의 즐거움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 식사보다 더 중요하셨습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래서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양식/식사가, 성경에 2가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뜻) 마4:4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요4:34

 

 

 

오늘날 여러분의 주된 양식과 많이 다르지요?

 

불고기, 쓰시, 스테이크, 샤브샤브..

 

 

 

▶예수님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실 때도 보십시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적어도 세 번 올라가셨고,

 

그렇다면 적어도 세 번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때만, 환전상을 내 쫓으시고, 성전을 깨끗게 하셨을까요?

 

매 번 그러실 수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은,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혼적인 크리스천은, 시도 때도 없이, 정의로운 일은 무조건 다 좋다면서,

 

행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인도를 받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자기에게 감동을 주실 때만, 그 일을 행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에는 해야 될 ‘필요’들이 수두룩하게 늘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자들을 조직해서, 많은 예산을 모아서,

 

거창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자기 생각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들을, 죄다 모조리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라고 판단되는 그 일에만.. 순종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많이 다르지요?

 

 

 

▶예수님은 12살 되던 때 ‘내가 아버지의 일 my Father's business 가운데 있어야 되는 줄, 모르셨습니까?’

 

라고 육신의 부모에게 말했습니다. 눅2:49

 

 

 

우리 성경에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이라고 의역했는데,

 

원문에는 ‘아버지의 일, 사역’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사역’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러시다가 공생애 막바지에,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선교한답시고, 온 세상을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신다고, 책을 여러 권 저술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권도요!

 

예수님은, 세상에 해야 할 사역들이 늘려 있는데,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숫자가 적다고, 인위적으로 숫자를 늘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요17:4

 

참으로 오늘날 우리가, 깊이 곱씹어 봐야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종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주인이 명하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전4:2

 

 

 

주님은, 일생을 아버지의 뜻을 듣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확실히 듣고, 그 일을 이루는데 진력할 때

 

거기에는 지침 exhaustion 이나, 분주함 busyness 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개인적인 이익, 유익, 흥미.. 이런 것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처럼 혼적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흥미, 유익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보다 기도생활에, 자기 삶의 최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기도하시기 위해서, 빠져나와 종종 한적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눅5:16

 

 

 

한 번은,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뽑으시는 일 때문에,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신자들은, 매사에 그렇게 기도에 헌신하는 것을

 

시간낭비로 여깁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이 불안할 때만, 기도에 헌신합니다.

 

 

 

   그런 육적인 신자(우리 대부분)는,

 

   기도가 자기 삶에, 절대적 필요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사에,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잘 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까지도,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분주하지 않고, 늘 차분합니다.

 

 

 

▶마르다는, 사역에 너무 분주했습니다. 이것이 혼적인 soulish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마르다가 무슨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분주했기 때문에, 책망 받은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서, 

우리는 영적인 신자와, 혼적인 신자의 대비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재미있는 것은, 마르다가 오히려 마리아를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적인 열심인 신자들이, 오늘날에도, 영적인 신자들을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혼적인 신자들의 특징은.. 항상 바쁘고 분주합니다. 스스로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히4:10

 

그들의 목적과 동기는, 선하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변치 못하고, 스스로 행하는 모든 봉사와 수고는,

그저 '더러운 누더기'(사64:6)와 같습니다. 신부로 예비된 자가 입는 세마포 흰옷이 아닙니다.

 

문제는, 회심한 신자도, 마르다와 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에 게을리 할 때 그렇게 됩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노략물이 아까워서 남긴 것은,

 

인간적 생각으로는.. 좋은 판단이었지만, 괜히 다 진멸하면 경제적 논리로 보면 아깝지요.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삼상15:22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변하지 못해서, 그 음성을 듣지 못해서,

몰라서..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듣는 시간' 즉 말씀 묵상과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를 보십시오. 그들은 봉사를 많이 해서, 교회에서 신실한 신자라고 칭송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르다'들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봉사를 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먼저 '듣는' 일인데, 말입니다.

 

 

▶행3장 성문 미문 앞에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고쳤는데,

 

그는 아마 예수님 당시에도, 거기에 앉아서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를, 그 당시에 고쳐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좋은 일을 다 행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때 그를 고친 것이 ‘퍼펙트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때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행4:4

 

 

 

▶그래서 하나님의 뜻만 분별하고 행하신 예수님께는 ‘완전한 안식’이 있으셨습니다.

 

하루 24시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데, 모라자서 쩔쩔 매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기 일’이라서 바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케줄에, 누가 예고도 없이 비집고 들어왔을 때, 혈루병 여인처럼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관대하실 정도로, 너그러우셨습니다.

 

시간에 쫓긴다며, 귀찮다며, 성질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만 행하기에는, 하루 주어진 24시간이, 쫓기지 않고 늘 여유로워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영어로 한 번 다시 읽어보세요.

Jesus' life was a life of perfect rest. He had enough time in 24 hours every day to do all His Father's will.

But if He had decided to do what appeared good to Him,

then 24 hours a day would not have been enough and he would have ended up in unrest on most days.

 

Jesus could rejoice in every interruption that came to Him,

because He accepted the fact that a sovereign Father in Heaven was planning His daily schedule.

And so He was never annoyed with interruptions.

 

The life of Jesus will bring our inner beings into perfect rest too.

This does not mean that we will do nothing, but that we will do only what is in the Father's plan for our lives.

Then we shall be more eager to finish the Father's will than our own pre-determined programme.

 

 

▶오늘날 사람들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바쁘다. 시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혼적인 크리스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들은, 마르다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에 좋아보이는 일은, 죄다 분별없이 행하기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고, 그래서 신경이 예민하고, 정신적 안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탈진하든지, 신경질적이 되든지, 육체적으로 지쳐서 나가떨어지는데..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결과’일까요?

 

 

 

마11:29절에도, 자기 십자가 멍에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안식을 주신다고 했지, 탈진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목자이고, 우리는 시23편에 나오듯이, 풀밭의 양입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지, 스스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은, 신자가, 자기를 비우지 못하고, 자신만만해서

 

늘 목자의 인도를 듣지 아니하고, 자기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 삶이 지치고,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인도를 받으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 쉬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혼적인 신자의 특징은, 자기 혼의 능력이 강하고, 자기 혼의 능력을 늘 의지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인도를 간절히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신자일수록, 자기 혼의 능력을 버리고,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인도를 늘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늘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천사들이 그렇게 완전하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사람과 달리,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순종합니다.

 

일례로,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했던 말을 보십시오.

 

눅1:19,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100% 순종하는 이유는, 그들이 늘 하나님의 존전 presence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늘 하나님의 존전 앞에 계셨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100%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원한다면, 

주님의 존전 앞에, 늘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혼적인 신자는, 나름 지치도록 봉사하고,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에게 응합니다. ‘밤새 수고하였느나, 잡은 것이 없도다’ 눅5:5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뜻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살면,

 

그물에 풍성하게 잡을 것입니다. 요21:1~6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다 뽑힐 것입니다. 마5:13

이 말씀에서 유의해 볼 것은,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냐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그 나무를 심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것은, 그게 뭐든지 다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획/시작하신 일'을 세밀히 분변해서, 그 일에 자신을 투신해야 합니다.

그 일은,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7

 

위 말씀은, 반대의 경우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행하는 사람은 멸망하리라' (perish, 영원히 거하리라의 반대)

 

이 글을 다 읽으셨으면, 이제 다음 질문을 던져 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고, 또한 일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