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zZKZGATq2DE
◈사랑하며 살기 P1 행10:38, 요7:38, 롬5:5 출처, 번역
Living as Jesus Lived by Zac Poonen 4장. Living In Love
※1970~80년대 부흥회는, 한국 교회의 주류 신학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래와 같은 기독교의 본질은 추구하지 않고, 대신에 '성공/출세' 이런 가치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개신교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한 분이 그런게 아니라, 중심을 받치고 있는 주류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방문 일정을 짠 것입니다.
'성공/출세'와 반대되는 가치이지요. 그 분도 훌륭하지만, 그냥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이신 것이지요.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래서 받치고 있는 주류가 훌륭했던 것이지요.
◑‘사랑’은 ‘의’와 함께 가야
하나님은 빛이시며 동시에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드러났는데,
그것은 바로 ‘빛’이시며, 동시에 ‘사랑’으로서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왕으로서의 휘황찬란한 영광보다, 더 존귀한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1:14
그런데 ‘빛’과 ‘사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빛’은 밝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와 같습니다.
참된 의는.. 사랑이 충만한 것이며,
참된 사랑은.. 의롭고 순결하며 빛처럼 투명한 것입니다.
둘은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혹자는 자신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
그 속에 사랑이 빠져 있으면,
그것은 성경적인 의가 아니라, 바리새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혹자는 자신이 모든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
그 속에 의가 빠져있으면,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사랑(집착)이거나,
혹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살면서,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의’가 바탕이 된 사랑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사랑이 빠진, 의와 거룩을 추구했고,
오늘날 우리는, 의가 빠진, 사랑(사실은 탐욕)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딱딱하고 메마른 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얻었던 것은, 뼈와 해골만 남은 ‘의’였습니다. 사실은 그게 ‘의’가 아니죠.
‘사랑’이란 살이 덮여야 온전하게 되는데,
살이 없고, 뼈와 해골만 남은 ‘의’는, 비틀린 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 그대로 사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지킨다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 형식적이었고요
예수님은 그보다 더 철저히 율법적으로도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도덕적 계명을 지키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뼈와 해골만 남은 바리새적 의를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뼈와 골격에, 살을 붙이셨습니다. 그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뼈와 골격을 무시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빛義이 사랑에 의해 감싸져’ 있었습니다. 사람의 뼈가 살에 감싸져 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진리義’를 가르치셨지만, ‘사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엡4:15
그런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은혜도 함께 있었습니다. 눅4:22, 36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눅4:22
성령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사랑은 자연스레 나오는 것입니다. 연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하시려고 노력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 속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대로 나타난 예수님의 삶도 보면,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냥 삶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사랑)을 행하시고.. 행10:38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홍수처럼 넘쳐흘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우리 속에서 넘쳐 흘러나오는 것,
즉 사랑은, 억지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몸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지요. 요7:38
사랑, 거룩, 겸손 같은 하나님이 성품은, 연기가 아니라,
샘물이 샘솟듯이 우리 속에서, 솟아 나와서
그게 우리 언어를 통해, 우리 행동을 통해 나타나 보여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거듭난 신자는, 그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게 되고,
그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베푸는 ‘대가를 바라는 사랑’과
크리스천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나를 ‘이기적’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내 중심의 진실함’을 더욱 구하여야 합니다. 시51:6
사랑을 베풀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또한 의로운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죄의 속박에서 그를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셨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무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경건하고, 배우고, 수준 높은 사람을 존경하기는 쉽지만, 사회의 저변층을 존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의 저변층, 무시 받는 죄인들까지도, 다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또 우리 중에 일부는, 자신이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해서, 그 목적으로,
자기 주변 신자들만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대접하면, 그 친절과 대접을 돌려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인(자기 주변 제자)뿐만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 처음만난 빈자들, 무시당하는 자들, 외모가 보기에 흉한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을.. 한 사람도 멸시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존중의 사랑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온 세상의 가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8:36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을 보시는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만나실 때, 일단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탄에 의해 미혹되고 묶인 것을 보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고치셨고,
그 속박에서 자유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이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죄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시기 위해서,
영원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기 원하셨고,
또한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르실 준비가 되어 있으셨기 때문에,
설교하실 때, 그 무엇보다, 죄에 대해서 강력히 설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강력하게 설교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청중과 똑같은 죄인이라서,
또한 설교자가, 타인의 죄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강력히 책망하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자신이 먼저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 안에서 진리(진실로 번역 가능)를 말하라’고 권면합니다. 엡4:15
우리는 자신이 먼저 죄를 이기고 성결한 삶을 살며,
또한 그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으로써,
우리 이웃과 청중의 죄에 대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아서요! 그게 진짜 사랑이니까요.
이웃의 진실을, 우리가 사랑의 온기로 말해 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남극과 북극에도 햇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열매가 자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빛’만 있지,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지, ‘물질’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람을, 그의 소유나 물질과 더불어 판단합니다.
즉 부자는.. 높이 평가하고, 빈자는.. 무시합니다.
죄가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든지, 이제 ‘돈이 사람보다 더 소중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은 그 물질을 버는데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물질보다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환히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세상에서 자기는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그 짓밟힌 사람들에게, 전혀 짓밟히지 않은 사람처럼, 친절한 말로,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에게, 전혀 패배하지 않은 사람처럼 격려의 말로,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타인이 보기에,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그들은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도 사랑하셨고,
구속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가능성을 내다보셨습니다.
물질은, 예수님께, 어떤 대단한 가치가 없었습니다.
물질은, 타인을 돕는데 사용되어질 때만, 예수님은 그걸 가치 있게 보셨습니다.
상상이지만, 한 아이가 예수님의 목공소에 놀러 와서
비싼 어떤 물건을 깨어버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전혀 야단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질의 가치보다, 그 아이의 가치가 상상할 수 없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지, 물질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그저 사람을 도울 때만, 그 가치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물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사람들을 무시해 버립니다.
물질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심지어 형제끼리도 서로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긍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만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골1:9
사랑이란.. 사람을 보되,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이 노래 부르며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습3:17
예수님도 그러하셨고, 그래서 우리도 성령이 충만해지면,
사람을 바라볼 때, 그 누구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 누구라도, 사람을 바라보는 기본적 시각이 사랑입니다.
비판적이거나, 의심하는 눈초리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 긍휼의 마음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즐겁게 듣더라’ 고 했습니다. 막12:37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향기’를
듣고, 느끼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진 신자는, 그 성령의 속성이 자기 속에서
생수의 강처럼 밖으로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말, 긍휼의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5:5
▶병자들을 보실 때, 예수님은 특별히 ‘긍휼’로 대하셨습니다. *compassion, 동정
가난한 자, 굶주린 자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고,
‘목자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볼 때도, 긍휼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언제나 동일시하는 사랑이요, 긍휼이었습니다.
가련한 사람들을 볼 적에, 예수님도 똑같은 가련함을 느끼시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누구를 도와줄 때는
우리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병자가 병자의 아픔을 알아주잖아요.
예수님은, 꼭 말을 해야, 그를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을 찾아가서 도와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가련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크게 상심하셨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전혀 긍휼을 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혹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막3:5
◑사랑은.. 인내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죽는’ 방식으로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거칠게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또는 그들의 교만과 비난의 말에 대해서,
한 번도 화를 내시거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잘 섬기지 못 하는 제자들에게도,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도자로서, 그런 분노를 잘 내지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겠다는 큰 기대 자체가 아예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게 아니라, 섬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매일 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귀찮게 하거나, 훼방하는 것에 대해
전혀 평정심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느리다고, 사람들은 분통터져 하는데,
예수님이, 느린 사람들을 보셨을 때, 안달하셨을까요?
머리가 빨리 안 도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완전하신 사람이신 예수님은, 불완전한 사람들의 부족함을 너무도 기꺼이 다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완전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재빨리
똑같이 불완전한 사람들의 약점을 그렇게도 잘 찾아내는지요,
그들의 연약한 점을 참아주지 못하고, 쉽게 분통을 터트리는지요!
사랑하면.. 인내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씨에 나타난 사랑
예수님은, 그 누구도 과소평가하는 말을 하시거나,
상처 주는 농담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사소한 말이라도, 상처가 될 만한 말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어에 세심하셨지요.
제자들이 예수님 몰래 자기들끼리 담화하는 것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뻔히 잘못하는 것을 보시면서도,
3년 동안이나 인내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진실을 말씀하되, 사랑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은 누구를 말씀하는지 몰라서,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신할 자를 지목하시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그만 알도록, 그렇게 사랑으로 대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혀를, 오직 사람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데만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혀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선한 도구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피곤한 사람을, 말로써 격려하셨습니다. 사50:4
그러나 거만한 자들에게는, 그 혀는 오히려 그들의 교만을 자르는 ‘검’이었습니다. 사49:2
▶예수님이 로마인 백부장이나,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칭찬하셨을 때,
그 이방인들은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을까요.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는, 옥합을 드림으로써 예수님께 큰 칭찬을 들었습니다. 막14:6
비록 죄인이었지만, 자기의 사랑으로 인해, 칭찬을 들었습니다. 눅7:47 ↙
그가 손가락질 받는 여인이었지만, 그의 사랑함이 많은 장점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눅7: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주위의 사람들을 늘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의 격려를, 결코 쉽게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가 실패할 것을 내다보셨지만, 예수님은 그를 실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짧은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베드로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위에 실패한 형제 자매를 보더라도
격려와 사랑의 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요!
사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피곤한 자를
말씀으로 늘 도와주셨습니다.
그렇게 된 비결은,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사50:4b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습)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면’,
그날 우연히 만나게 되는,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을, 말씀으로 격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셨지만,
그렇다고 바리새인들처럼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즐거움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히1:9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에도, 즐거움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다락방 강화(전날 밤 설교)’때도,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예수님의 말씨에는, 이렇게 사랑과 즐거움이 넘치셨습니다.
세상은 피곤하고, 사람들도 힘겨워 했고,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길을 가시는 중에, 박해와 곤고 속에 늘 사셨지만,
그러나 기쁨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코미디언처럼 늘 웃기셨다는 게 아니라,
삶의 환경은, 지치고 피곤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엄숙하고, 근엄하게 평정을 유지하신 게 아니라,
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사랑 때문에.. 늘 그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꺼트리지 않으셨습니다. 마12:20.
아무리 연약한 사람과 죄인에게서도, 그들의 장점을 찾으셨으며,
그들이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자리를 슬슬 피하는 게 아니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을 이해하셨고, 친절하셨고, 젠틀하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만한 자들과,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고 숨기던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피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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