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3

절망을 끝내고 소망을 노래하라

LNCK 2014. 8. 21. 11:26

◈절망을 끝내고 소망을 노래하라           벧전1:3-5                      2013/01/06설교녹취

 

 

※내용 요약

사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를 믿으며, 안심하고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진정 성령으로 거듭난 경우, 90%이상 이미 해결된 상태입니다.

 

축구나 야구로 비유하면, 승리가 이미 약속되어 있어서,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 비디오를 보는 심정으로, 평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을, 일상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의식주 문제에만 골몰합니다. 그 가운데서 늘 일희일비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비록 피부에 와 닿는 주제는 아니지만,

피부에 와 닿는 의/식/주/건강 문제로 일희일비 하지 말고,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 그것이 신자의 참된 소망이라고.. 아래 설교는 말씀합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사실은 그 얘기만 주로 합니다.

그게 복음인데요, 문제는 우리가 탁상공론 쯤으로 여기고, 관심 없어 합니다. 내 피부에 와 닿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신앙이 성숙한 신자일수록, 그 탁상공론 같은 복음을, 자기 현실로 살아냅니다!

 

 

◑세상 소망 .. 그건 신기루입니다.

 

▶자 우리가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가장 많이 관심을 갖는 것 중에 하나,

또 많이 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희망에 다 부풀죠.

희망을 꿈꾸죠.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2013년 연초 설교임

 

우리의 삶이 한계가 있고, 연약함이 있고, 의식주에 결핍이 있죠.

또 우리 삶을 살다보면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불완전한 우리의 삶 속에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 그것이 희망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하죠.

어떤 것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며 한 해/ 한 달/ 하루를 출발합니다.

 

   애기를 키우고 있는 엄마들은,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희망할 것이고

   또 미혼인 남녀들은 올 해는 꼭 만나야지, 하면서 결혼을 희망할 것이고

 

   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질병이 낫기를 희망할 것이고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그 직장을 다니면서 은퇴까지 해고당하지 않고

   무난하게 마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은퇴 이후에 계신 분들은, 이제 마지막 날까지 건강하게

   내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어떤 형태든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그 희망을 가져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희망은 현실을 살게 만드는 힘이죠.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이 모두 절망하고

그 절망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그 때

한 사람은 아침에 작업장에서 주운 유리 조각을 날카롭게 만들어서

그는 매일 아침 면도를 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때

그가 결국 살아남게 되는 그런 일화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정말 희망은 중요한 것이고, 희망은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인 것입니다.

희망, 소망을 갖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희망이, 좌절을 맛 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좌절을 통하여, 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뀝니다.

 

희망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절망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삶에 희망을 품지 않는, 무감각한 삶을 택하게 됩니다.

 

왜요?, 수많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기대를 저버리고, 기대에 수준을 낮추면서, 더 이상 희망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자포자기와 자괴감에 빠져서 ‘이제 나는 더 이상 희망하지 않겠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포기할 때, 희망을 내려놓았을 때,

우리의 삶은 초라해지고 움츠려들게 될 것입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1위를 늘 유지하고 있습니다.

연간 그 많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진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절망이 깊어지고, 기대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희망이라고 하는 것에, 절망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려고 애를 쓰지만

청년 실업률은 계속 치솟고 있습니다.

희망하는 곳에 절망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그런 현실이

오늘 실제 우리 삶 가운데서 체감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기복주의 신앙,

형통의 신앙, 예수를 믿으면 복 받을 것이라는 이 세속적인 가치의 성공.

 

그러나 우리의 현실로 들여다보면,

-기도를 하지만, 응답 되지 않는 기도가 여전히 남아 있고,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

 

-형통의 신앙. 긍정의 신앙을 아무리 가져 봐도,

그러나 우리 삶에 풀리지 않는 현실 속에 부딪칠 때, 절망은 오히려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이 일어났는데, 많은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요.

암 말기의 환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낫기도 하지만,

죽는 경우를 우리는 더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내 입술로는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의 반대편에 웅크리고 있는 절망이 덮칠 때

내 희망은 무색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우리는, 형통의 신앙만 붙잡고

예수를 믿으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하게 세상의 성공을 꿈꿀 때

우리는 그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절망의 밑바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했던 것이 무너질 때, 그것이 해답이 되지 않을 때,

여러분 이 인생에 주어지는 희망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리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우리의 해답을 정리하고 있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신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희망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편지한 진짜 소망

 

▶베드로는 지금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있는 거예요.

 

그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들을 향하여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한 마디로 그 시대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난의 연속 속에 살았어요.

 

그들의 삶에 치고 들어오는 이 압박감. 시련. 삶의 박탈감.

때로는 생존의 위기마저 버텨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 있는 그들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편지를 받고 있는 대상자들을 향하여

본문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에요.

 

사실 사도 베드로가 희망을 이야기해도,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는 이 고난들이 속 시원히 해결될 것 같지 않는,

희망보다 현실의 절망이 짓누르고 있는 그 현실의 무게, 그런 악조건 속에서

과연 성경적인 희망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고로, 둘 다 성경적은 아닙니다. 

 

-첫째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현재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아요.

언젠가는 좋지 않은 것으로 내 인생이 결론 날 것 같은 두려움.

그런 예견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부정적인 결론을 맺고 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긍정적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사람들도 있어요.

항상 미래에 대해서 기대감이 넘쳐흐르는 낙관적인,

언제나 대답을 들어보면 잘 될 것이다..

 

이런 긍정적 태도는, 부정적 태도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늘 흥분되어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조증’ 이라고 말합니다.

 

※조증 : 기분이 대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지는 게 주요한 특징이고

또한 대체로 이러한 기분이 지속된다. 대개 행복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심지어는 악재나 불행이 연속으로 잇달아 일어난다고 해도 웃으면서 지나갑니다.

조증과 그 반대인 우울증이 두 개가 겹쳐 나타나는 것이 조울증 입니다.

 

이것은 우울증과는 반대지만 이것 역시 병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너무 차서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을 왜곡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흔한 증상이 과대망상증입니다.

여러분 이런 형태의 사람들이, 만약에 예상치 않은 실패를 실제로 경험했을 때

떨어지는 낙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희망을 말합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희망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는 절망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은 어떤 것인가요?

세상에서 말하는 희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요?

 

로마서 15:13절에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랬어요.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인데, 뭘 소망한다는 것인가요. 하나님에게 소망이 있는가요?

여기에 소망은 하나님 당신 스스로의 소망이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에 대한 소망.

 

하나님 자신에 대한 소망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편에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에게만 소망이 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소망을 말하면서 소망이라는 단어 앞에 한 수식을 붙이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산 소망’

여러분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이 희망과 구별시켜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살아있는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산 소망’이라는 말은 쇠하지 않는,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시들지 않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방해를 받지 않는 소망!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지나면서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낙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엄밀히 말하면 소망이 아니에요.

산 소망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죽은 소망입니다.

 

이미 그 안에 희망이 없는,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사탕발림 같은 위안을 줄 뿐

진정한 소망이 그 안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산 소망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일시적으로 마음에 위안만 줄 뿐, 결국에는 절망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사실 속이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서

마음에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것은, 사실은 안에는 깊이 곪아서 암 말기인데

그냥 사는 날 동안에 평안이 살려고 위로를 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무엇이든 다 이룰 것 같았지만, 내가 바라던 것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산 소망은,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로는 ‘좋은 세상이 올 거야’

어떤 정치적 공약과 같은 그런 막연한 공헌 약속이 아니라

 

지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이 판국에

입에 발린 말로 가볍게 위로나 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몽둥이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가벼운 위로나 희망은 사람들은 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소망은 현실적 상황에서, 어떤 잘 될 것같은 조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사라고 하는 것은 그냥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같잖아요.

좋은 일이 있다가 안 좋은 일이 있다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웃다 울다 하는 것입니다.

 

사업하시는 분은 경기가 좋다가 안 좋다가. 그런데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파도처럼 들락, 날락. 늘 좋은 것도 없고 늘 안 좋은 것도 없어요.

환경은 변화무쌍한 거예요.

 

▶지금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소망의 근거는 오늘 현재 어떤 상황이나, 주어진 삶의 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벧전1:3절을 보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 하리이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렇게 소망이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안에 두고 있는 거예요.

 

확실한 것은 소망은 인간의 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그 말은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아니면 현재 닥쳐진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결론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

 

다른 어떤 세상의 물질적/현세적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가져야 할 가장 확실한 근거는

본문 3절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니이다.’ 벧전1:3

 

이것이 베드로가 지금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십자가가 부활의 복음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승리케 하실

모든 메시지가 그 안에 농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고 죽게 하실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셔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이끄신, 그 일을 이루신 내용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소망 living hope이 이 복음 안에 다 담겨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십자가가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이루신 그것을 붙잡기만 한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꾸 엉뚱한 곳을 바라보니까,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망할 수밖에 없어요.

바라봐야 할 곳을 봐야 하는데, 바라보지 않아야 될 곳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망하니까.. 절망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런 엉뚱한 세상 소망을 자꾸 조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점쟁이가 그렇게 잘 합니다. 그래야 복채가 많이 나오고, 점집 영업이 잘 되거든요.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세상에 있는 어떠한 조건과 환경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 안에

우리의 승리의 모든 조건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여겨 보십시오.

   문제 될 게 정말 있겠습니까? 죽었는데요!

 

   함께 죽을 뿐만 아니라,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된 가운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위력을 붙잡아야 하는데

특별히 연초에 한 해 동안 우리가 달려가는데 다사다난 할 것이에요.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변화무쌍한 환경에 쫓아다니면서

허겁지겁 절망과 희망을 오고갈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그 복음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으면 흔들 자가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9회말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현실은 1-10으로 지고 있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했고, 그 승리는 종말에 확연히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의 복음이, 그 산 소망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죠. 비현실적인 얘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의 성숙으로 극복해 나가야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구원의 길로 완성하실 그 메시지의 엑기스가 어디에 있느냐.

십자가와 부활에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내 삶을 올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복음을 내가 붙들면, 두려움이 없어요. 평안이 와요.

살고 죽는 문제도 그냥 넘어서요.

고난이 올수록, 오히려 더 미래의 소망이 선명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비행기가 고도를 막 높이면 밑에서는 비가오고 야단법석이 나는데도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고도가 낮으면, 비행기가 먹구름만 통과하려고 해도 굉장히 기체가 흔들리죠.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도 맞을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고도만 높이면 아무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바울의 삶을 보면 그렇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

그에게 몰아닥친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영적 고도를 높인 거예요.

 

본문의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이 정말 척박하고 어렵고 힘들고 시련과 환란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주눅 들지 않고 환난 속에서 감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에 현실 속에 부딪치면서 울고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고도를 높였던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영적 고도를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 소망이 분명하면, 찬송하는 삶을 삽니다.

 

▶베드로는 지금 현실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고 어렵지만

본문 벧전1:3절을 보면 찬송으로 먼저 시작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랬어요.

 

여러분 힘든 사람들 곁에서 노래 부르고 있으면, 그냥 감정 상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당신은 뭐가 좋아서 노래를 부르느냐..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가 찬송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소망의 하나님. 모든 것에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지금 베드로가 형식적으로 이 말을 덧붙여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편지의 핵심적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편지의 시작이 찬송이에요. 얼마나 멋진 출발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오늘 2013년 한 해를 출발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제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모든 주권이 그분에게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승리를 주실 그분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 분의 역사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답답한 현실을 보는 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면

찬송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죠.

죽음은 절망의 아주 중요한 상징적인 사건이잖아요.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의 영광으로 절망을 완전히 걷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 십자가만큼 가장 처절한 절망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을 넘어 가장 위대한 부활이라고 하는 ‘소망’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에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찬송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을 내가 볼 줄 아는 영적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눈이 안 열리면, ‘현실’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답이 안 나와요.

 

여러분 현실을 아무리 들여다보면, 답이 안 나와요.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 일생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삶을

아무리 눈 닦고 바라봐도, 현실에 붙들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들이 바라봤던 것은 미래였어요.

믿음의 눈을 열어서 다가올 미래를, 더 확실하게 바라보게 될 때

그들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어요.

 

▶에베소서 1장을 보면 바울 역시 베드로와 공통점이 있는데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러면서 왜 찬송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1장 3절에서 에베소서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엡1: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앞부분의 중요한 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 마음의 눈이 밝혀져서 너희를 향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너희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현실을 좇았던 사람이 아니고

소망을 따라갔던 사람이에요. 왜요, 그것이 그들의 눈에 보였기 때문에요!

 

 

◑내가 받을 기업에 대한 소망

 

▶여러분 기독교는 장차 다가올 소망에 초점을 둡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꿈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안 하세요.

 

내 꿈과 내 계획은 종종 깨어지고 망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사건, 표현할 수 없는 고통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약속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그 현실에 둘러쌓을 수 없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 현실에 초점을 맞지 않고 소망에 초점을 맞추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이 산 소망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기업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1: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소망은 상속(기업)으로 완성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장래에 받을 상속이 얼마나 큰가..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 주어지는 어떤 것도 있지만, 미래에 주어질 그 완전한 상속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상속은 세상적인 것과 철저히 구별 되는데

 

-첫 번째 특징이 뭐예요. ‘썩지 않는다’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다가올 그 마지막 날에 주어질 상속,

하늘의 기업은 썩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썩습니다. 안 썩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다 금방. 잠시 좋다가 떠나갑니다.

그러니까 썩는 것에 소망을 둔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더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1:4

여러분 우리가 소유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더럽게 만들 때가 많아요.

 

집착 할수록 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아요.

돈을 많이 만지면 손이 더러워진다고 그러잖아요.

세상의 것을 소유할수록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의 유업은, 우리를 더욱 더 우리의 눈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아 보이는데, 갈수록 빛이 바래지는 것이 세상의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지만, 나중에 보면 다 쇠해버리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권력과/ 인기와/ 부가 다 그런 것입니다.

대단한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쇠하고 만다는 거예요.

여러분 세월이 흘러도 쇠하지 않아야 진짜잖아요.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 1:23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여러분 모든 육체는 풀과 같아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여러분 이것이 베드로의 아주 바른 시각입니다.

진짜 소망을 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길을 가다가 5달러 지폐를 길에서 주웠어요.

너무 신이 나서 그 뒤에 부터는 계속 또 떨어졌나, 하고

그 후 계속 땅만 쳐다보고 다녔다는 거예요.

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있나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 결과 오랜 세월이 지나서 결산을 딱 해보니까

단추만 5만 여개, 172개의 핀, 동전 수 십 개를 주웠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인색한 성질. ‘왜 없는거야’ 하면서 성질이 더러워 진 것이죠.

 

여러분,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이죠.

찬란한 햇빛. 친구들의 웃는 얼굴. 그리고 봄철의 꽃들을 보지 못했어요.

왜요? 눈이 땅만 바라본 거예요.

 

여러분 내가 귀중하다고 여기고, 땅의 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 때문에

얼마나 진짜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내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소망에서 자기 눈을 뗀다면

그 순간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냉엄한 현실밖에 없습니다.

 

 

◑영생을 생각하는 사람이, 현실을 진지하게 삽니다.

 

▶C. S. 루이스가 그런 지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세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다.

 

현세에서 진짜 진지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내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이다.. 는 말이죠.

 

내세에서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고, 내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는 현실의 삶을 더욱 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쓸데없는 것에 내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불필요한 것에 쇠하고 망하고 썩고 말 것에 대해서 투자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왜, 내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결론을 가지고 현실을 사는 거예요.

 

현실에 버려야 할 것과, 포기할 것과, 내가 몰두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아들이, 아버지 금고 털이를 하지 않는 거예요.

왜 아버지 금고 털이를 해요? 상속자인데.

 

여러분 신자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왜요, 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확실한 것이 아니에요.

변화무쌍한 현실이, 어떻게 확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가올 미래. 영생의 삶.

그 미래란, 십자가 부활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의해서,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 길게 봐야 합니다.

 

여러분 새해에 우리는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의 상황에 대해서 막연히 소망하고 살 것이냐..

그러면서 또 절망하고 희망하고 절망하고 희망하고

오가면서 시달리는 인생을 살 것이냐..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면, 절망 할 것을 소망하지 않고

소망해야 할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절망할 것들에 대해서는 빨리 포기하고

진짜 소망해야 하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포기할 것을 빨리 포기하셔야 되요.

여러분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적당하게 기대하세요.

 

여러분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할 소망이 딱 하나에요.

<소망의 하나님>이세요.

 

소망의 하나님은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확정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결단코 절망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의 눈과 귀를 복음에서 떼면 안 되는 거예요.

금년 한 해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실에 일어난 상황에 따라

너무 쉽게 결론을 내지 않아야 되요.

 

▶세상의 사람들을 보세요. 너무 멀리 보지 못하잖아요. 결론이 너무 성급해요.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 합니다.

오늘 실패 했으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쉽게 끝이라고..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끝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에요.

내가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끝입니까? 아니죠. 그것은 내 생각이죠.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하고 또 너무 쉽게 절망해요. 신자들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좋은 일이 있으면 할렐루야! 감사헌금 내고 나왔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서 그의 얼굴을 보면, 지옥에서 출장 나온 얼굴을 하고.

다 죽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의 결론은,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끝이 아니고 과정이잖아요. 통과 의례잖아요.

지나쳐야할 길목이에요. 그 길의 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에요.

 

멀리 봐야 되요. 여러분, 고수는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이에요.

바둑의 9단은 50수를 내다본다고 해요. 하수는 두 세 수도 보기 힘들어요. 50수는 봐야죠.

 

여러분 오늘 5절에 보면 베드로는

우리에게 고수의 자리로 인도하는 거예요. 벧전1:5절 보세요.

‘너희는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 보니까 너희는 말세에. 이게 뭐예요?

모든 것을 완성할 마지막 순간을 보는 거예요. 이게 50수에요.

 

여러분. 너희는 말세에. 지금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당장 일어난, 실패와 성공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당장 내 삶에 힘든 것을, 말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말세에’ 이 말은 뭐예요.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실 날.

모든 것은 거기가 결론이에요.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실 날.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베드로는 멀리 보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복음은/예수님은 멀리 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곱이던, 이삭이던, 모세던, 다윗이던, 요셉이던, 사무엘, 뭐 누구든지

그들은 인간 개인의 승리 이야기가 아니에요.

 

누가 나와서 성공했다고 요셉을 뭐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모든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하나님의 이야기에요.

 

그 사람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에요.

요셉이, 요셉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여러분 내 인생을 내 손에만 맡겨져 있다면, 그것처럼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성공의 자리에 있어도, 내가 세상에 어떤 것을 가지고 있던지

무슨 위치에 있던지, 내 삶이 나에게만 맡겨져 있다면, 그것은 불안한 인생이에요.

 

우리의 인생의 결론은 우리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소망의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 분의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사를 보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신앙의 진위를 잘 알 수가 없는데

1세기를 보면 환난과 핍박이 몰아치고, 기독교인들을 짓밟고 짓밟아도

들풀처럼 잡초처럼 다시 일어나는, 죽이려고 짓밟고 순교를 당해도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잡초처럼 일어나는, 막을 자가 없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난 것입니까.

 

현실에서 보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을 것 같은데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내는 모습들 속에

그들 안에 있는 소망의 하나님,

 

그것은 십자가 부활의 복음 위에, 그들이 붙잡혀있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그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에 결론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탄식과 절망이 많은 세대입니다.

목회를 제가 하면서 보니까, 성도들 가정에 별 일이 다 일어나요.

 

어떤 때에는 기도를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아요. 너무 안타까워요.

여러분 세상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이, 절망한 사람만이 정답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 절망의 끝에서, 소망을 노래하게 돼요.

 

여러분 절망할 것에 충분히 절망하고 나면, 그때 복음이 성공하게 보여지고

처음에는 내쳤던 영원의 세계가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영원이니/ 영생이니/ 구원이니.. 이런 게 잘 안 다가와요.

오늘 현실에 내 배부름과 만족의 은혜에 눈을 다 집중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내가 현실에 완전히 절망하고 나면, 밑바닥을 치고 나면

그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구원의 손길을 붙잡으면서

십자가 부활을 통한 그 복음 안에 들어가면서,

 

영생의 삶이 보이면서

이 땅의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확 와 닿으면서

그 구원을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이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완성을 붙잡고 있는 삶을 살고 있으면

우리의 삶의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

더 믿음 속에서 강력한 힘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젊은이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절망하려고 하면

'확실하게 절망해라. 거기에 소망이 없다. 소망은 하나님에게 있다.'

한 번 절망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것을 빨리 깨달아야 됩니다.

 

막판에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고 무언가 희망이 있는 것처럼

날마다 바라보다가 절망을 마지막 날에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에요.

빨리 절망하고 희망의 하나님을 붙잡을 때

이 세상의 환경과 상관없이 요동치 않고 믿음의 삶을

꿋꿋하게 견고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진짜 소망을 붙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마음을 잠시 그냥 흥분하게 하는..

그러나 그 끝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약속된

이 마지막 궁극적 승리의 보증을 믿음으로 붙잡고

소망의 하나님 위에 내 삶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믿고 흔들림 없이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