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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모음 10

LNCK 2014. 10. 5. 18:53

묵상글 모음 10                                                               모두 가톨릭글에서 스크랩

 

 

 

 

1. 이웃을 신앙적 눈으로 바라보기          마25:40~46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어보지만, 악습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는 알콜 중독자들, 마약환자들, 노숙자들, 정신 질환자들,

이 세상 어딜 가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몇몇 출소자들...

오늘도 한 아이는 제게 "차라리 소년원에서 그냥 있을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너무나도 엄청난 벽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형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큰 숙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새천년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이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0

 

이웃을 바라봄에 있어 가장 필요한 노력이 영적인 눈으로

,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 이기적인 욕망이 배제된 영혼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육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지니고 다가갑니다.

 

"저 사람, 비록 지금은 주어진 상황이 몹시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원인이 있었을거야.

저 사람 역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나와 똑 같은 인간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아무리 한심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긷든 하나님의 손길, 창조 때의 그 고귀한 품성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2. '아버지'를 신앙적 눈으로 바라보기

 

다음 글은 신달자 시인의 글입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3. 선택의 순간

 

언젠가 어느 신부님이 미사 중에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답니다.

천사와 악마 중 누가 힘이 더 셀까요??” 신자들의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천사의 편을 들면 천사의 힘이 세고,

악마의 편을 들면 악마가 셉니다.”

사람의 선택에 따라, 내 주변에서 역사하는 천사와 악마의 영향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수호천사가 우리를 보호하고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우리가 수호천사의 말을 잘 따를 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천사의 소리보다

악마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곤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서도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제 소명을 결정해야 할 때였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저는 어떤 선택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선택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기도한 후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때 저는 다음 말씀을 만났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지금 나에게 좁은 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길이 제 길임을 믿고 있습니다.

선택하기 어려운 순간에 말씀의 도움을 청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믿고 따라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내가 누굴 지키는 자입니까?

 

저의 직책은 수도회 원장입니다.

다른 수도회에서는 원장이라고 하지만, 저희는 수호자라고 합니다.

 

과거부터 기독교의 전통은, 왕이나 교회의 수장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사명을 부여했었습니다.

아주 명예로운 직임이지요.

 

그런데 수호자하면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잘못 생각하면,

내가 뭐 집 지키는 개라도 되는가라는 거부감이 들곤 합니다.

 

지키는 것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양떼를 지키는 것,

재산을 지키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예의를 지키는 것,

중립을 지키는 것,

법을 지키는 것 등 수두룩합니다.

그렇다면 수호자란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요?

 

수호자로서 제가 가끔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주 신경 쓰지 않으면, 저의 신경이 형제들을 보호하는 데서 떠나

법을 지키는 쪽으로 쏠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기로 약속했는데 왜 안 지키지?,

저것은 저렇게 하는 것인데 왜 그대로 하지 않지?’ 하며,

, 약속, 합의가 준수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율법주의자가 하던 짓이지요.

 

사람이 빠지고 법만 남는 것,

물에 빠진 소는 놔두고,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수호자로서 제 임무는

수도회 법 자체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수호하는 것임을 다시 상기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형제들을 수호한다고 하다 보면

이번에는 또 다른 악마적인 생각이 듭니다.

바로 가인이 내 뱉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고 가인이 대답하지요.

 

저도 내가 뭐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다 성숙한 사람들인데 지나치게 보호하려 들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래서 저의 호의가 거부당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나도 힘든데 남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 가인과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다 큰 사람들인데 하며 관심을 끄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제가 가인처럼 아우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잘못 되어 죽어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런 책임감에서 비롯된 양심의 가책이 저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수호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장의 그 가정의 수호자이고,

선교회 회장은, 그 선교회의 수호자입니다.

 

그런데

나의 보호가 집착이지 않고

나의 보호가 책임과 의무이지 않고

나의 보호가 사랑이 되어야지만, 참된 수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착도 나를 자유롭지 않게 하고

의무도 나를 자유롭지 않게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수호천사의 역할을 하게 할 것입니다.

 

역시, 늘 결론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 타령을 하였습니다.

 

 

◑5. 길 잃은 강아지

 

얼마 전 산책하다가 데려온 길 잃은 강아지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큰딸을 위로해 주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예측하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으며

오직 당신이 필요합니다하는 표정으로 옆에 있어주기 때문일까요?

 

그냥 서로의 존재감으로 행복해하는 강아지와 딸의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딸아이의 지친 맘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지만

나의 염려와 바람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돌보지 않은 어린아이가, 딸에 대한 염려와 바람을 만드나 봅니다.

 

오래전 방송되었던 연속극 주인공 몽실이가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주변의 여건 때문에 나는 될 수 있으면 참아내고

웬만하면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나를 초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내 안의 해결되지 않았던 바람이 어린이로 비춰졌습니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겠지만, 예수님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노력중입니다.

 

나는 내 영혼이 만나는 최초의 인간입니다.

내가 나를 받아들였기에 내 딸을, 있는 그대로 위로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6. 어떤 작가가 우리의 마음을 "은"에 비유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갓 태어난 아이는 순수한 은의 모습이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라면서, 이 순수한 은에 다른 성분들이 첨가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순수한 은은 독성이 전혀 없는 깨끗함 그 자체이지만,

이 은은 아주 적은 양의 다른 것만 첨가해도 맹독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은으로 만든 제품들을 보면 그냥 공기 중에 가만히만 놔두었는데도

새까맣게 변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 역시 이렇다는 것이지요.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은의 성질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깨끗하고 순수했지만,

다른 것들이 첨가되면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대신 독성을 간직하면서 점점 검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그리고 처음 태어났을 때의 깨끗함과 순수함을 다시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불가능할까요?

다시 처음 태어났을 때의 깨끗함과 순수함으로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냐고요?

 

저는 은으로 된 성찬용 성작, 즉 큰 은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멋진 성작이지요.

그런데 본당 사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성작을 사용할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잘 싸서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지요.

언젠가 이 성작을 사용할 기회가 있어서 꺼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은색의 깨끗함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게 색깔이 변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새까맣게 변했다고 성작을 버렸을까요? 아니지요.

성작을 비롯한 제구 등을 닦는 약을 이용해서 닦으니

다시 처음의 깨끗한 은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깨끗함과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셨지요.

미사 때의 깊은 성찰을 통해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깨끗하고

순수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깨끗함과 순수함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스스로도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악마 같은 사람, 천사 같은 사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리도 자주 불평불만을 털어놓게 될까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렇습니다. 남을 너무 의식하다보니 그렇습니다.

남보다 못한 내 모습이 불만족스럽고, 기대보다 못한 현실이 괴롭다보니

불평불만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이 내부를 향해 방향을 바꿔, 스스로를 개선시키는 에너지로 승화되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불평불만은 밖으로 튀어나와 세상과 남을 향합니다.

내 삶에 대한 불만족이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상대나 세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미성숙한 자기방어수단이 불평불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평불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적당한 불평불만은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이

수돗물처럼 콸콸쏟아져 나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분들과 함께 있으면 에너지 소모가 상당합니다.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불평불만에 아무런 응대 없이 가만히 있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본의 아니게 위로 차 함께 불평불만에 동조합니다. 덩달아 불평꾼으로 변해갑니다.

 

반면에 만났다하면 기쁨을 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기쁨의 도구는 바로 칭찬이며 격려입니다.

활짝 핀 미소입니다. 균형 잡힌 유머감각입니다.

 

요즘 웃음치료가 유행입니다. 자꾸만 웃음을 잃어가는 이 시대, 참으로 바람직한 시도입니다.

웃음을 준다는 것은 건강을 준다는 것입니다.

웃게 한다는 것은 생명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미소를 짓게 한다는 것은 구원을 주는 것입니다.

 

이웃들의 얼굴에 미소를 감돌게 하는 사람들,

이웃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

이웃들의 등을 기분 좋게 두드려주는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이 시대 천사들입니다.

 

발길 닿는 그 어디든 하나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

그 사람 생각만 해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런 이웃관계를 조성하는 사람,

맑고, 풍요롭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사람,

그들은 어쩌면 이 시대 천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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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회심한 이의 눈물

 

3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오랜 세월 가정과 겉돌며 사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해지신 후 본당 교우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고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성당에 가다 쓰러지신 적도 있었지만 교리공부를 마치셨고,

세례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긴장하셨다. “정말 죄가 다 없어지니?”

하고 내게 물어보시던 모습, 간간이 눈물이 어리시던 모습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친정어머니와 우리 동기들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던 친정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 애썼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큰딸이 성당에 다니는 것도 못마땅한데 아버지까지 예비자 교리를 받으시자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하셨다.

어머니는 성당에서 교우들이 찾아오면 빗자루를 들고 뛰쳐나오시기도 하고,

방문한 구역장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계속해서 성당에 나가자고 말씀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생을 걱정하시다가 집안에서 넘어지셨는데,

그 순간 이러다 내가 죽으면 큰딸의 상심이 크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시고는

예비자 교리를 받겠다고 하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주변의 인정을 받던 보살이셨던 어머니는

마침내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셨다.

 

세례를 받으신 후 신부님의 세족례를 받으며 얼마나 많이 우셨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 아버지가 깨끗해지는 꿈을 꾸셨는데

너무나 생생하다고 하셨다. 매일 미사참례하러 갈 때마다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평화로운 어머니의 모습이 내겐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