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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영성

LNCK 2014. 12. 24. 12:44


◈기다림의 영성            눅1:67~80        아래 설교 녹취, 정리            

 

 

 

◑대강절은 "기다리는" 절기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기다림의 마음은, 동물에게는 없는 감정입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감정이 '기다림'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유치원을 아쉽게 다니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가방을 사 오셨습니다.

그 가방이 너무 예뻐서, 그걸 메고 어서 속히 학교에 가고 싶어서
며칠 전부터 가방을 메고 왔다갔다하며.. 기다린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사춘기에 들어서는, '도대체 나랑 결혼할 여자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게 너무나 궁금했고, 그리고 빨리 결혼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자마자 빨리 결혼해야 하겠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 이런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떤 교인들을 만나게 하시고, 어떤 교회를 섬기게 하실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빨리 졸업을 하고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싶다... 그런 기대를 했었는데..


제가 어떻게 어떻게 흘러와서, 로드아일랜드에서, 이런 귀한 교회까지 오게 되었는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참 신비한 마음이 듭니다.

 

기다림의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또 그 기다림이 이루어질때, 감사의 마음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참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기다린다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못 해서.. 헤어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기다리지 못 하고 갈라서는 사람들도.. 안타깝게도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다리기 힘들다는 겁니다.


도저히 이 기다림의 시간을 내가 앞당길수만 있다면 앞당기고 싶지,

기다림이 오래 지체 되면.. 우리 속에서 불안한 마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 아내랑 목욕탕에 갔을때, 저는 먼저 나왔는데, 아내가 너무 늦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번에 갔을 때는, "우리가 몇 시에 만나자" 하고 약속을 했는데, 또 30분이 지나도 안나오는 거예요. 
   제가 기다리는데 화가 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남자분에게 물어보니
   "우리 아내도 똑같아요. 여자들은 목욕탕에 가면 다 늦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늦게 나올수가 있냐? 약속을 2시에 나오기로 했으면, 나와야 하는거 아니냐?" 했더니
   그 분이 제게 한 수 가르쳐 주시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실때, 남자는 흙으로 만들고,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들은 목욕탕에 들어가면, 흙이라, 오래 씻으면, 다 씻겨 없어질까봐 빨리 나오는거고
   여자들은 뼈니까, 더운 물에 푹 고면 그렇게 시원하니까, 못나오는 거니까, 참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했습니다.  
   어쨌거나 기다린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다릴수록, 성탄절에 은혜가 큽니다.

지금 2014년도 성탄절 시즌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고
우리는 교회 절기로 대강절로 지키는 데요..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겁니다.

           *기다릴 대, 강림할 강,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기간 이란 뜻이죠

 

이 기다림 속에서 "우리 주님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주님 저에게 오시옵소서.." 이렇게 기다리는 기간이, 대강절입니다.

 

이 기간 중에, 우리 기다림의 마음이 간절하면, 성탄절에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전혀 기대하는 마음도 없고 기다림이 없으면
성탄절이 또 흘러가게되는 그런 연중행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극대화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설명 / 득남 보다 더 큰 기쁨과 소원

 

당시에 사가랴라고 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엘리사벳이라고 하는데, 이 분들이 나이를 먹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나이를 하도 먹어서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이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뻤습니다. 젊을때는 그렇게 자녀를 달라고 해도 안 주셨는데
내가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주님이 자녀를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감사해서, 찬양을 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내용은 자기 아들(세례 요한)을 주심을 감사드리는 찬양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눅1: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그러니까 스가랴가 아들을 득남했는데...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 귀한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찬양하기보다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실 메시야를,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이니 감사합니다"

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극대된 신앙인은.. 주님(의 오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가랴는 득남의 기쁨으로 인한 찬양을 하다가,

찬양의 내용이 바뀌어,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며,
우리 아들이 주님오심을 예비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여러분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확실한 기도응답을 해주셨다면,

그래서 그 기도응답을 받게 되신다면,


주님 오심(초림, 재림)을 찬양하시고,

내가 주님으로 인해 구원받음을 찬양하시고 감사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가랴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었다.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메시야가 우리에게 오시는 기쁨을 상상해보고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감사가...
   자기가 원하는 기대를 하나님이 주실때 이렇게 기쁘겠구나!

   주님이 오시면 이렇게 기쁘겠구나! 하면서
   그 감정을 대비시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찬양이 나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기쁜 날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좋은 날, 기쁜 날, 복된 날, 정의로운 날"의 기다림을 가지게 되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분은

메시야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그 분이 오시는 날입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기다림이 있지만,

그 기다리는 것은, 가장 좋은 날을 기다리는 것이거든요.

'그날이 오면 좋겠다!' 해서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거든요.
근데 그 날이 어느날이냐? .. 바로 주님 오시는 날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기다리는 날이 무슨 날입니까?

   승진의 날, 결혼식, 집사는 날? .. 득남, 1억 만드는 날, 해외여행?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세속적 소원"을 갖고 있는, 육신에 속한 신자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바라고, 고대하는 날, 가장 행복한 날은

   바로 예수님의 초림/재림의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날이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까?)

   그리고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가랴는, 우연히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한 게 아니라,

평소에 자기 마음에 늘 소원으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입술로 표현된 것입니다. 소위 "자기 18번"이 나왔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예언대로 살았던 세례 요한

 

아버지의 찬양과 감사는 중요합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감사와 찬양 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일종의 "예언"이 되는 셈이지요!

 

메시야 탄생 예언의 마지막 주자가 세례요한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아버지 사가랴가 태어날때부터 그렇게 축복을 했습니다.
'주님 오심을 예비하라고, 기다리라'고...  눅1:76

 

그래서 이 사가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그 후에 세례요한이 어떻게 성장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상상해보세요. 세례요한의 가문은 참 좋은 가문입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굉장한 존경과 넉넉한 살림살이를 갖고있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이다 보니까 아주 볼썽사나운 일들도 많이 봤을 겁니다.
깊이 종교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지 않은 모습도 많이 봤을겁니다.

그랬기 때문일까요? 그는,  빈 들로 들어간거예요. 빈들로 들어가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를 두르고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왜요? 아버지 사가랴가,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예언이, 기도가 "씨"가 된 셈입니다.

 

눅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이 사가랴의 예언은, 말3:1절을 인용한 것인데,

 

말3:1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눅1:78 "이로써 돋는 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를 인용했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세례요한)'에 관한 것인데,

사가랴가 그 구절을 인용해서 예언하는 바람에,  

세례요한이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게 된 것이지요. 전체적으론 성령의 섭리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비록 생전에는 고생 직싸게 하며 살았지만

   천국에서는, 아마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큰 상과 기업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 아버지 덕이라면, 덕입니다!

 

   우리도 자녀를 위한 축복기도가 중요합니다.

   아버지/부모님 기도대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적용 / 사가랴처럼, 세례요한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됩시다!

 

만약에 주님께서 종으로서, 마굿간에 오시지 않고, 왕으로 오셨다...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여기있는 사람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삶의 경험을 해보시면, 왕이 되었거나 오너가 되면.. 기다릴 줄 모릅니다.
잘못되면 여차없이 잘라버리고, 잘못되면 징계를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들과 오너들은 "기다리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종은 "기다릴" 줄 압니다.


세례요한은 그 "기다림"의 길을 미리 걸어가기 위해서
빈들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이 기다리는다는 것, 여러분은 잘 기다리십니까?

여러분의 남편에게 아내에게 교인들끼리 잘 기다려주십니까?
그런 마음이 크신 분은 섬김이 있는 분이고, 예수님을 닮으신 분들입니다.

종은, 상전을 공격할수 없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분노가 많고, 타인을 정죄하는 마음이 크고, 혼내고 싶고 그런 마음이 큽니까?


 

그 사람은 종의 모습이 아닌 왕의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그 사람은 기다림이 없습니다. 시간 개념이 칼 같은 분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생활까지도, 내 열심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왕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 오시는 날이 나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처럼 빈 들에 있는 분,
종의 모습을 가지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분들은
주님 앞에서 기다림의 영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른사람들을 용서할 일이 생겨도,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하여도,
그리고 내 자신에게 화가 나도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다림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누가 왕 같은 사람이고, 누가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그럴까요?

 

종의 마음을 가지면 우리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종의 마음을 가지면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왕의 마음을 가지면 나 조차도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그 인생 자체가 기다리는 인생이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을때 그는 기꺼이 자기 자리를 내어놓고
나는 그분의 신들메를 맬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면서 우리 주님을 높이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눅3:2절,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어디로 임하셨다구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많은, 그 넓은 세상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임한 것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임한 것도 아니고,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셨다...

 

안나스와 가야바, 그들이 누구냐하면 대제사장들입니다.
그 대제사장을 한 번이라도 보고싶어서, 성전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로 갔느냐 하면,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오셨다는 겁니다.

종의 모습으로 있는 자에게 주님이 오십니다.

왜요? 그분이 주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기다리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이 오셔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오셨을 때, 그 베들레헴에서 주님을 경배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기다리는 사람만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또한 세례요한의 영성,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것입니다.

 

...........................

중략된 예화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교회오는 중고등부 아이들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혼내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야! 너 왜 나한테 인사안해?" 하고 혼을 내면 아이들이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도록 혼을 내고,
또 청년들에게도 "야? 너 왜 인사 똑바로 못해?" 이렇게 혼을 내시고,
"인사를 왜 이렇게 대충해?" 이러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 장로님은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자기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저도 어느날 그 분께 걸렸습니다. 저도 끌려갔습니다.

전도사 시절이었는데 그 분이 서계신 곳에 햇빛이 비춰서 그 분의 얼굴을 못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부들부들 떨면서 "전도사님! 지하로 내려오세요!"

그렇게 끌려가서 혼났습니다. 어떻게 전도사님이 그렇게 인사성이 없으시냐고...
"너무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주부터 장로님처럼 생기신 분만 보이면 숨기 시작했는데
또 혼날까봐 그분이 보이시면 얼른 숨었습니다.

 

그렇게 숨었는데 거기서 같이 숨어있는 성도를 발견했습니다. 그 분도 나도 혼날까봐 숨어있던 겁니다.
그 장로님이 오시면 교회가 그렇게 홍해가 갈라지듯이 성도님들이 피해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장로님이 계셨는데요.
그 분은 초증학생이나 중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인사를 잘 하세요.
정말 겸손하게 "이렇게 주님이 부르실때 순종하고 오셔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손잡고 인사해주시고,
그렇게 젊은 아이들에게도 잘해주셨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그 장로님이 오면 저 멀리서도 "장로님!" 부르면서 달려와 인사하고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