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음 24 요1:14 [출처] 2011년 12월 25일
◑낮아지고 같아지는 것
오늘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1:14).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닮는다. 성격이나 취미나 생각이나 행동은 물론 말투·걸음걸이·얼굴 모습까지도.
청소년들은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닮고 싶어서 연예인들처럼 꾸미고 다닌다.
연인들이나 신혼부부는 커플링을 한다. 좋아하고 사랑하면 같아진다.
내가 학생시절에 지독한 류머티즘에 걸려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할 때
어머니께서는 밤잠을 안 주무시며 기도하셨다.
사랑하는 자식이 아프면 어머니도 같이 아프고, 자식이 잠을 못 자면 어머니도 같이 잠을 잘 수 없었나 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와 같아지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능한 인간이 되셨다.
그래서 인간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추위와 더위를 느끼고, 질병에 걸리고
인간처럼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되셨다.
사랑은 상대를 자신과 같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상대와 같아지게 하는 것이다.
눈높이 수학, 눈높이 교육이 인기다. 하나님이 인간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다.
우리도 사랑하고 싶다. 사랑하고픈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자신의 수준과 위치와 주장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로 내려감으로써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와, 인간과 같아지신 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다.
성탄은 사랑의 신비다. 자신의 위치를 깎아내려 낮아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눈높이를 맞춘 사랑의 신비가 바로 성탄의 신비인 것이다.
◑아기 예수와 우리 집 아기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하셨는데, 여러분이 축하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탄생하셨는데, 제가 축하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보통 아기가 탄생하면, 아기의 부모나 조부모가 축하받습니다.
옆집에 얘기가 태어났는데, 내가 축하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니 우리가 오늘 예수님 탄생으로 서로를 축하하는 것은
우리가 작은 예수(우리 아기)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이제 옆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오늘 “작은 예수 엄마 축하합니다. 작은 예수 아버지 축하합니다!”하고
다시 한 번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니 기쁘십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니 기분이 좋으십니까?
작은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것 좋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다시 한 번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엄마가 되라고 하면 되시겠습니까?
혹시 예수의 엄마가 되는 것은 좋은데
지금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되신 것을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지금의 이 아들과 딸을 또 낳게 된다면
지금의 이 아들과 딸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의 이 아들과 딸이 아닌, 다른 아들과 딸을 원하십니까?
저는 이번 성탄을 앞두고 한 10여일 심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저의 형제(신학생)들을 포기해버릴까 하는 유혹이 너무 심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형제들이 잘못하는 것이 그리 많이 눈에 띠고
형제들의 잘못이 너무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형제들, 수도자이니 착할 것 같지요?
전혀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지 않고
저의 기대만큼 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하고 똑같습니다.
저의 형제들 수도자이고 어른들이니, 말썽 일으키지 않을 것 같지요?
Trouble Maker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저의 형제들이 전에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이때 그런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니 성탄을 앞두고 이런 것은, 요즘 저의 형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저의 문제이고, 지금 생각하면, 마귀의 장난이고 유혹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의 형제들은, 욕심만큼은 아니어도 괜찮은 형제들이지요.
예수님만큼 Nice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형제들이지요.
아니 예수님도 인간 마리아의 눈으로 보면 Trouble Maker였습니다.
어머니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자식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묵상을 하니, 이번 성탄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하여
이 착하지 않은 형제들,
이 Trouble Maker들을 문제꺼리로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깊이 다시 고민하게 하신 것이고,
마침내 마리아처럼, 이 형제들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상호간에 한 가족임을 서로서로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서로 간에 거리낌 없이 드러낼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적 몸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Mothering, 어머니 됨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이면서
또한 어머니가 되어야 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에게,
“레오 형제, 그대의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를 드리며 평화를 빕니다.
나의 아들, 내가 그대에게 어머니와도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자식이 나왔어. 너 같은 자식은 싫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모 되기 싫어 결혼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애는 안 낳으려고 합니다.
Career Woman이 되는데 걸리적거린다고 자식이 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다시 똑 같은 자식을 낳아야 한다면 낳겠습니까?
형제들은 어떠시겠습니까?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형제를 나의 아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이렇게 어머니 됨을 묵상하다보니
나는 과연 어머니답고 어머니다웠는지 또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식의 모든 문제는 부모 책임이지요.
나의 자식은 나의 유전자를 받아 태어났고,
나의 자식은 나의 교육을 받아 자랐고,
나의 성격, 나의 식성, 나의 모습을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죄는 다 나의 죄이고
자식의 허물이나 약함도 다 나의 탓입니다.
자식이 잘못 되었을 때 부모가 괴로운 것은
그것이 자식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그리 되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죄인이고 허물 많고 약한 것 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부모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셔서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부모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이 때를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이 모습을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이 성격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과 약함은 다 하나님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왜 그 모양이냐고 꾸짖기만 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계시면서 나처럼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인간성, 즉 인간의 죄와 허물과 약함을 밑에서 짊어지시고
하늘로 오르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이 성탄 저를 반성합니다.
형제들의 부족을 탓 하기 앞서
“나는 정말 제대로 살았나?”
내가 잘 살았다면,
내가 정말 성 프란치스코와 같이 어머니다웠다면
형제들이 더 행복했을 텐데!
“나는 정말 내려갔는가?”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제들 밑으로 내려갔다면
형제들은 더 신적인 고귀함을 지닐 텐데!
◑하나님의 사랑고백, 아기 예수님.
오늘 성탄 축하 중, 저희 노총각 형이 남긴 길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네, 축복받는 성탄 되고 항상 건강 조심하고.
올해도 나는 외로운 크리스마스가 되겠지만, 예수님도 외롭게 오셔서 다행이야 ㅋ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 너를 생각하며 기도할게^^”
이맘 때가 되면 이성 친구가 없는 청년들은, 함께 성탄 캐럴을 들으며 걷는 짝들을 보며 더욱 외로움에 빠집니다.
그런데 저희 형의 말처럼, 예수님은 짝이 없는 싱글들에게도 위로를 주시는 군요.
아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가난하게,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외롭게,
소외된 이들의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소외되게 태어나시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아픔을 보듬어 주시기 위해서.. 가장 아픈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런 예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즐거운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시죠? 물론 모두 행복하실 것입니다.
분위기가 그래서 만이 아니라,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을 보면 왠지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랑고백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으로 오고가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첫 사랑고백을 진지하게 받아 본 사람이라면
그 행복감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두 남, 여가 서로 좋아는 하고 있지만, 눈치만 보고 있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이 속 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서 나는 떠나네!” 라는 유행가도 있지만
아무튼 무엇이나 어정쩡한 것이 가장 힘듭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사랑한다는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 때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합니다.
오늘 구유를 보면서도 사실은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뭐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보다 소중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 죄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랑고백’인 것입니다.
사랑고백은 큰 모험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그 사랑에 응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상대는 그 사랑고백에, 자신도 사랑한다고 응답할 수 있고, 응답을 회피할 수도 있고
자신은 미안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하는데, 대답을 회피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올 때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매우 오래 갈 수 있고
나중에는 두려움이 앞서, 다시는 사랑고백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받는 사람 또한 긍정, 무응답, 혹은 부정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긍정으로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이루 바랄 것이 없겠지만
무응답이나 부정으로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사랑이고 지옥은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사랑과 비슷하게, 먼저 인간에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처음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고백을 한 번 거절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다 포기하고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두 번째 사랑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또 그분의 생애와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보고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고백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커다란 숙제를 떠안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인지/ 무관심 할 것인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 중의,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고백에 대해서 응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연인간의 사랑이 이루어져 행복하기 위해서는, 짝사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인간들의 사랑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이젠 다른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삼각관계가 되었다면, 누군가는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자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고백에 응답한 당신의 연인들에게도
결코 삼각관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34:14)
질투의 화신이 하나님입니다. 질투는 우리나라 칠거지악 중의 하나였지만
자신이 온전히 준 사랑에 대해 자신도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의 예를 들어보면 아기 예수님은 겨울의 혹독함과 밤의 고요함과
마구간의 가난함과 딱딱한 여물통에 놓이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과 반대되는
도시의 현란함과 무절제와 집착과 이기주의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베들레헴 마구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도시 아니면 시골 마구간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연인 간에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사랑해!”라는 말 대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무엇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사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씀으로
자주 응답 드리는 것이, 오늘 아기예수님께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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