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음 25 마10:22, 행6:10~15 14.12.26.가톨릭 묵상글 스크랩, 출처
※최근 시리아 지역에서 IS(이슬람 제국)에 의한, 무시무시한 핍박과 순교의 소식들이 들려와서 당혹케 됩니다.
그런 가운데 <스데반의 순교>를 주제로 한 묵상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10:22
◑참 신자는, 마귀가 알아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누구나 웃으면서, 기쁘게 그리고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기 원합니다.
가능하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원합니다.
과연 몇 %의 신자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을까요?
길거리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큰 소리로 외쳐대는 이들이
사람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사랑, 정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움을 느끼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자성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손쉽게 신앙생활을 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처럼 마냥 웃으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주위를 기울여 이웃의 아픔을 보고자 한다면,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 우리 앞에 주어집니다.
말 그대로 십자가를 껴안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움받음과 핍박 당함은, 신앙생활의 본질 중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4:12
내 삶으로 신앙을 증명할 수 없다면, 어쩌면 나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행7장에는 스테반의 순교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 한 말인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는
평상시 스테반이 보여준 삶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기도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역시 맞이하게 될 그 순간에, 그 확신에 찬 기도를 자연스럽게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심도 있게 뒤돌아 볼 필요가 있음을 꼭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스테반의 삶과 죽음은 어찌 그리도 예수님의 생애와 흡사한지 모릅니다.
전승에 따르면, 스테반은 현재 예루살렘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 있는 성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성문은 "스테반 성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스테반은 신성모독이란 죄명으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당합니다.
굵직굵직한 돌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죽어가던 스테반은, 십자가상 예수님과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무지막지한 적대자들은 무죄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도 모자라
극심한 고통 중에 신음 중이던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들고 있던 돌을 하나하나 던질 때 마다,
조금도 피하지 않고 맞으며 죽어가던 스테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행7:60
스테반이 고발당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적대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설교, 길고도 논리정연한 스테반의 설교는 사도행전 7장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행7:56
스테반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메시아 라는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죽음이나 권세, 적대자들의 횡포 앞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리고 당당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수도회 입회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좀 했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 순교자 시성식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집례로 여의도에서 개최되었고,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 인파 속에 저도 들어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웃기는데 그때 당시 여의도 시성식을 마치고
제가 살던 거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순교영성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기회만 닿으면 순교해야지 하면서
계속 어디 순교할 기회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순교할 기회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순교를 하려고 했지만, 시대가 저를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꼭 피를 흘려야만 순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지금 이 시대
하나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순교는,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가 아니라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백색순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정말 용서하기 힘든 그 인간, 정말 꼴보기 싫은 그 인간을
다시 한 번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다.’ 라고 외치며 최선을 다해서 사는 일입니다.
‘앞으로의 1년을 내 생애 가장 멋진 1년으로 장식하겠다.’고 다짐하며
불꽃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란 것, 멋진 TV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호화찬란하다거나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따분하고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엄청나게 구립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교영성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활짝 웃으면서,
기쁜 얼굴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교는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순교자는 자신의 순교를 통해,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화’되는 것이 순교입니다.
현대의 순교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오늘날 순교란 순간순간 죽고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죽은 사람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모욕을 줘도 침묵합니다. 멸시를 당해도 침묵합니다.
그저 하나님 자비와 은총만을 바랄 뿐입니다.
◑고통 없는 증거 없다
<연탄길 2>에 ‘청소부 선생님’이란 제목의 사연입니다.
한 학생이 교실에서 적지 않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과학실험실로 이동했다가 돌아왔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업 후 반 학생들을 남게 했습니다. 그리고 백지 한 장씩을 나눠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돈을 훔치는 일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한다면 더 부끄러운 일이고
평생 동안 자신을 부끄럽게 할지 모릅니다.
없어진 돈은 선생님이 대신 채워 놓을 테니, 여러분 중 혹시 돈을 훔친 사람이 있다면
이 종이에 ‘다시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적고 진실로 뉘우치기 바랍니다.
물론 이름은 적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참 후 나눠줬던 종이를 걷어 훑어보던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좀 더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은 슬퍼보였습니다. “오늘 청소당번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오늘부터 청소는 선생님 혼자 하겠습니다. 뉘우칠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은 나를 찾아오던지
내 책상위에 쪽지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그 날부터 먼지 뽀얀 교실을 혼자 청소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책상과 의자들을 힘겹게 나르는 선생님 모습을, 아이들은 교실 밖에서 안타깝게 바라봤습니다.
몇 명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도와주려 했지만, 선생님은 웃으며 아이들을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청소가 열흘이 넘게 계속된 어느 날, 선생님이 청소를 마치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복도에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까칠한 얼굴을 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 잘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를 선생님은 말없이 안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제 25일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기쁘고 행복한 날입니다.
오늘 26일은 예수님을 따르던 첫 순교자 스테반 성인의 순교축일입니다.
이렇게 가톨릭 교회는, 가장 기쁜 날에 연이어,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로, 전례를 지킵니다.
‘왜 기뻐해야 할 성탄절 후 첫 날부터, 한 순교자의 죽음을 묵상해야 하는가요?’
하나님께는 기쁨과 슬픔, 탄생과 죽음, 자비와 정의, 빛과 어둠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있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죽음은 기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콘(성화)을 그리는 분들은, 아기 예수님을 죽은 사람을 쌓는 수의로 싸여있게 그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선택한 몰약, 추운 겨울 말구유에 누워있는 모습은, 생명보다는 죽음을 더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태어남만이 아닌, 죽음과 연결 짓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테반의 죽음도,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활선상에서 보아야합니다.
정작 우리가 슬퍼해야 할 대상은 순교한 스테반이 아니라, 그를 돌로 때린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셔야 했고
스테반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순교 없는 증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굳게 믿는 이유는, 그분이 나에게 해 주신 희생 때문입니다.
그 눈에 보이는 희생이 없다면, 말로만 사랑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증거는,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선생님이 혼자서 교실을 청소하는 희생이 없었다면
아이가 선생님의 사랑을 저렇게 가슴깊이 느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후손들
2011년 9월 가톨릭 신문에 실린 ‘현대의 순교 이야기’는
바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혹독한 순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7천만 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65%에 해당하는 4,550만 명이 20세기에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20세기의 가톨릭 순교자들>의 저자 로버트 로열은 그런 면에서
20세기는 그리스도교 순교 역사 안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고,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안토니오 소치 역시, 저서 <새 순교자>를 통해
“20세기는 그리스도교 순교사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 이른바 이 같은 ‘새 순교자’들이 대거 나타나게 된 것은
두 차례 걸친 세계대전, 그리고 공산주의, 나치즘, 독재정치, 다양한 배경의 내전 발생 등이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복합적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더욱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 발표된 ‘도움이 필요한 구호’ 이탈리아 지부 보고에 따르면
2002년의 경우,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1000명 가까운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살해됐다고 합니다.
특히 콜롬비아에서는 2002년 한 해에만 127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였습니다.
특히 중동과 아시아에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가톨릭(또는 기독교)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살인, 강간, 방화 등의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순교가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성령의 역할이 강력해 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약해졌기 때문일까요?
스테반의 경우를 보면, 성령님의 역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순교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테반을 순교하게 한 장본인은, 그에게 돌을 던진 유다인들이지만, 넓게 보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는 스테반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시어, 유대인들이 그에게 반박할 수 없도록 하여 화가 나게 만드셨고
또 그들의 분노가 들끓는 가운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까지 보여주시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의 운명은, 다름 아닌 순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셨고, 성령님을 받은 사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순교자의 길은, 성령님을 받은 모든 이들이 가야하는 길입니다.
어떤 이들은, 순교가 무가치한 낭비, 소모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순교는 진리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의미 없는 희생일까요?
순교를 함으로써 그 가해자들의 잘못이 드러나고, 반면에 순교자가 지닌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벨이 죽음으로써, 가인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순교 없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그 가치는, 참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라틴어의 ‘순교’, 'martyrium'은 희랍어의 ‘증언, 증거’란 말의 ‘martyrion’에서 온 것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도 순교만이 증거의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것 때문에 이렇게 잡혀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신 분도 성령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6:13).
진정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요일 5:6).
성령님께서는 우리 목숨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시는 분인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죽음으로, 혹은 순교로 향하지 않는 이는, 아직 성령을 통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치열한 진리와 거짓, 성령과 세상의 싸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투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테반에게 돌을 던졌던 이들도, 사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테반에게 돌을 던짐으로써, 성령의 원수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두드러지게 세상과 맞서 순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 속해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겨야하는 그리스도와 스테반의 후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칭기즈 칸은 아무리 싸워도 지치지 않는 용맹한 자기 부하 예순베이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순베이는 아무리 싸워도 지칠 줄 모른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 같은 줄 안다. 자기만큼 못하면 화를 낸다.
그런 사람은 지휘관이 될 수 없다. 군대를 통솔하려면 병사들과 똑같이 갈증을 느끼며 피곤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주님, 우리를 이해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으로 미래를 본 사람은 준비한다 (0) | 2014.12.29 |
---|---|
신자 안의 맘모니즘 (0) | 2014.12.29 |
최고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처럼 (0) | 2014.12.27 |
미국을 위한 메시지 P2 / Carter Conlon (0) | 2014.12.26 |
묵상글 모음 24 (0) | 2014.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