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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만이 배신자인가?

LNCK 2014. 12. 29. 16:52

 

유다만이 배신자인가          눅22:1~6          14.09.14 설교 녹취

 

 

 

◑눅22:1절

 

"유월절이라고도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습니다." 눅22:1

 

▲눅22장은, 예수님의 인생의 목표와 비전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시간적 배경은 무교절과 유월절이 진행되어지는 일주일의 시간입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요셉의 후손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의 종살이를 마치는 그 정점에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애굽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마지막 신적인 심판의 재앙 사건이었습니다.

 

그 유월절 사건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고,

그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없는 집의 장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의 재앙이었죠.

 

유월절 내용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인인 것과

어린 양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우리가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영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저와 여러분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합리적인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움직이면.. 살아있다고 얘기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잠자고 있다. 즉 “죽어있다.”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떠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볼 것인지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유월절 어린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고백을 드릴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소유와 신용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1주일이, 무교절과 유월절에 일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하여 선포되어진 구원의 시작점의 상징인

유월절 피흘림에 대한 그 약속과 성취가,

 

이제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감을 통하여

그 몸이 유월절에 드려진 어린양의 찢겨짐과 피흘림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죽어야 한다...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이 "유월절"이라고 표현된 것은,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각자의 죄 때문에 죽어버려야 되는 상황을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신다...라는

죽음을 건너서는 생명의 축제를 선언해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에...

내가 마땅히 죽어야하는 냉엄하고 서늘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내 대신 죽음을 통하여 그것을 벗어날 수 있게 된

축제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20:18~19절에,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자기의 죽음과, 자기의 죽음 후에 일어날 부활의 사건에 대한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일생의 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의 비전과 목표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꿈꿨던 것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비전은 죽음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서 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열광과, 지지와, 추종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 끊임없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한 십자가! 그 하나만을 묵상하며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당시에

세례요한을 추종했던 사람은, 남자만 약 7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죽고 예수님의 시대가 열리면서

70만 명이, 예수님을 따르는 seed member(일종의 개척 멤버)가 되어준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모든 대 도시가 뒤집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집중하고 몰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70만명 플러스를, 세례요한이 예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유월절이라는 시간은

예루살렘의 성에 보통 100만 명이 몰려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3년의 시간 속에, 예수님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유월절을 지키러, 대거 모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광과 열의와 추종에 관심이 없었고

그분은 자기의 인생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고백하며 살아가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어린양이고,

자신의 인생의 비전은 죽음이었고,

자기 인생의 가치는, 십자가 희생을 통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정확한 인생관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거기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들어가시는..

그 자기 사명과 비전에 충성된 예수의 삶을 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기억해야 될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비전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핵심가치는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허락받은 내 인생의 이 아름다운 환경과 재능과 가능성을

무엇을 위해 쓰고 계십니까?

 

오늘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권위자요, 통치자요,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살리려는 그 한 가지 목적 때문에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하향적인 인생을 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만났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모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반대적인 삶을 삽니다.

   즉 자기가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잘 버는 쪽으로.. 방향과 목적을 정해서 달려갑니다.

   그렇게 달려가서,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 중에는 1%~5% 잘 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똑같습니다. 자기 인생은 허무하고, 메마르고, 공허하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은,

   그가 신자라 하더라도, 그가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최근 10년~20년을 되돌아 보면,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가?' 하고 씁쓰레 합니다. 

  

   그러나 바보같이 십자가의 길을 갔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지나간 10~20년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고, 후회가 없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 지상의 십자가 길에 대해, 감사와 감격이 충만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12:2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비유는, 생산성과 효율성의 개념이 아닙니다.

'거룩한 낭비'입니다.

예수님의 인생과 삶의 가치관이었던 것이죠.

 

한 알의 밀이 떨어져서 썩어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예요.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를 위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야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고 앞으로 낳을 너희들의 후손이

예수의 생명의 열매로 맺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 장면을 통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과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발견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살고자하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내가 살아서 자꾸 꿈틀거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내게 역사하지 못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이 자꾸 더 안 좋아지는 겁니다.

 

   내가 죽는다는 뜻은

   내 인생의 결정권과 내 인생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우리는 흙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무가치한 흙 속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가치는 어디서부터 부여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영이, 흙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인생은 가치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가치있게 살기를 원한다면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냐가 아니라,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었고, 재산도 없었고, 후원그룹도 없었고, 그를 위한 조직도 없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서 힘이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그 자체가 진리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그러한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만이,

자기 인생이, 유월절처럼 죽어가는 그런 답답한 환경일지라도, 그 끝은 생명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내 인생에 무엇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전이며 가치며 목표인지를

   깨닫는 사람이 가장 복된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마십시오.

   무작정 남들 보기에 번듯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위해 사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들의 자녀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지며

   세상의 영향력있는 리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면, 우리는 나의 만족을 위해 살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 끝은 갈등과 상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렇게 되어지면, 내 인생에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나게 되어지고

설사 그 자리가 죽음을 향해 가는 자리일지라도

그 끝의 열매는 생명과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을 인지했지만,

그러나 그 유월절 어린양이 되기 위하여

죽음의 가치보다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주어질 것을 꿈꾸면서 행하셨습니다.

 

   오늘 창립 11주년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의 태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11년을 지내왔기 때문에, 우리의 경력과 전통이 쌓여서

   교회가 이제 안정되고, 앞으로 무엇인가 될 것이라는...

   우리가 갖고있는 환경과,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비전과, 나라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더 갈망하며 더 엎드리며

   그것이 우리 개인과 가정과 미래 속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7:13~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의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하향적인" 인생입니다.

거칠고 좁고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

죄인과 창녀와 세리들을 만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줬던 것이죠.

 

진짜 실력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기 안에 뭔가 진짜가 있는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내 안에 진짜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실력있는 사람들과 손잡고, 그 사람들의 name value를 통해

자기가 더 업그레이드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실체는...

하나님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이 가르쳐주신 모든 가르침대로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뒤바꾸는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갖고 있는 소유와 실력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니까 안되는거예요.

 

   주님이 가르쳐주신 모든 그 실력과 가르침과 그 가치가

   우리 인생의 연약함들을 덮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나의 부끄럽고 연약하고 미숙한 부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덮여져서

   내가 그것을 따라 살려는, 애쓰는 순종이 있었을 때 세상은 감동하는 것입니다.

 

 

◑눅22:2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눅22:1절이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에 대한 부분을 얘기한다면

2절은 그런 메시야를 바라보는, 세상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역사관은 딱 2개의 라인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과,

자기가 왕인 것을 주장하며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역사관.

이 두 개의 '도전과 응전'으로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재밌는 사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하나님 없이도 우리가 살 수 있다 라는, 자기 힘을 과시하는

종교·정치·권력의 당시 시대적인 상징의 도시)이라는 그 도시로 들어가셔서 죽으신 거예요.

 

가장 힘이 센 도시에서,

가장 연약하게 죽어버림을 통해서...

자기를 죽인 세상의 가장 강력한 리더들을

부활한 다음에 영적으로 승리함을 통하여

세상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이시려는 거예요.

 

누가 진짜 왕이냐라는 거죠.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의 최고 리더들이었습니다.

4절에 보여지는 성전의 경비대장들은, 권력의 상징이었죠.

 

예루살렘의 종교와 권력을 대표하는 두 그룹이

예수님의 입성을 맞이하면서 갖고 있었던 심적 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를 조용히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이 죽음을 향한 모함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이냐 하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끊임없이 내 자신이 왕인 것처럼,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높아진 마음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자기 아들의 생명의 가치만큼 우리를 소중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내 인생의 디자인보다

내 인생을 더 멋지게, 세상속에서 살아가게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영적인 컨설팅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그것은 종교적인 어떤 희열이나 어떤 열광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지극히 인격적인 인생에 대한 멘토링을

"성령의 인도하심" 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저는 그것을 "영적인 컨설팅"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 진정으로 경건한 남자와 여자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godliness라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을 닮길 원하는 사람, 그러한 마음을 가진 신경의 사람들에게는,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이 우주를 통치하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리더십을 그 사람을 통하여 펼치기 원하십니다.

 

진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어떤 포지션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에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년을 다 채우고 끝내던, 어떻게 끝내던, 끝납니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그 위치에서 떠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드러나죠.

   그 위치가 바뀌어도 끊임없이 그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위치가 바뀌면 갑자기 전화가 끊어지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핸드폰이 잠자기 시작하죠.

 

   그게 세상입니다.

   그게 허영입니다.

   그게 오만입니다.

   그게 자기에 대한 속임입니다.

 

주님께서 본문 2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길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들입니다.

 

세상에 힘을 갖고 있으나, 그러나 그 힘의 본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제도적으로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백성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들.

그들은 왜 백성들을 두려워 합니까?

 

자기가 그 권력의 핵심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왜요? 그 자리가 자기를 증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직책으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직책을 함께 섬기고 있는 팔로워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은 그 사람의 인격과 태도 때문에, 그 사람과 손잡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의 중심 속에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존경했을 때만

우리 인생의 참된 구원이 허락되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의 명예와 존경도 허락된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의 심경은 어떻게 되어져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는 예수의 참된 사랑 앞에

우리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그 목적과 비전을 잃어버린 자들이 있다면

지금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오늘 하루하루 내 인생의 모든 환경을 결정하며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대하여 묻지 않고 결정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향하여 주시고자 하는 복된 디자인에 대하여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다시 따르는 일들이, 다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눅22:3~6

 

3. 사탄이 그 열둘 중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4.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5. 그들은 기뻐하면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6. 유다도 이에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여기 가룟 유다가 등장하죠.

유다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팔려 넘어가게 되지만

오늘 저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유다에게 그런 마음을 심기우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 동기는 바로 이렇습니다.

유다의 마음 속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민족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는 민족주의자였죠.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는, 그 일을 위해서는 사람과, 돈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지지를 받자

예수님을, 자기민족을 정치적인 해방을 이루어 주는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게 되었습니.

 

그러나 더 중요한 결정적인 요인은,

유다는 메시야인 예수님을 옆에 두고 함께 살았지만

그러나 그 마음속에

자기의 논리와, 자기의 전략과,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계획이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식인 메시야의 희생양의 죽음의 방식 보다는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방식대로 주님을 조정하려고 했던

그러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제일 가까이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멀리 모시고 있었던 것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기득권과,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죠.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우리에게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얘기하셨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유다처럼,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라는 자기의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안정감이란 사실입니다.

 

또한, 내 인생의 결핍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 뜻 안으로 들어와서 내 요청을 해결하길 원하는

자기 우상주의가 바로 우리 인생의 유다처럼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두 가지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현상"(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시대죠.

소유와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지배하고 소유하기 때문에

나의 것에 대한 태그를 달 수 있는... 내가 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세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좇는 세대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갖고있는 능력과 영광과 그 권세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생활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의 미래의 가능성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이성적인 사회의 네트워킹의 실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이루고자 하는 그 비전의 무한 레일 위를 달리게 될 때

마찰력은 줄어들고 작은 힘으로 멀리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모멘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죠.

 

그 레일 위에 올라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엔진과 아무리 좋은 타이어를 가지고 있어도

오프로드(울툴불퉁한 길)로 들어가게 되어 그 수명이 급격히 닳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출애굽할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렇게 얘기하시죠.

   ‘내가 독수리가 새끼를 등에 업고 날아오름처럼 이라고 얘기했어요.

 

   다 자라지 않은 독수리가, 성체가 되지 않은 독수리가 날개짓을 오래하면

   아마 근육이 파열되어서 그 평생의 건강을 잃어버렸을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에 업혀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을 향한...

힘을 갖고 있고, 자기의 소유를 갖고 있고, 자기의 권력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보았을 때

 

예수님마저도 자기가 소유한 그 범위 안에 들어오기를 거부했던 자기중심적인 인생과,

자기가 왕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떠나있는 그런 심경에

우리의 태도가 있다면

오늘 우리는 그 마음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배터리를 갖고 있는... 충전이 되지 않으면 끝이 나버리는

제한적인 가능성과 에너지와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께 플러그인 된다는 거예요.

 

가룟유다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이 권력자들의 한계는

자기 힘으로 얻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꾸로 얘기하시죠.

"마음이 가난해져야지 천국을 받을 수 있어."라고...

 

왜냐면 우리의 힘으로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도 내가 예수를 믿는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도 현실 속에 살 때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의 유혹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리차드 포스터의 "돈과 성과 권력(Money, Sex, Power)"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유다처럼 마음속의 예수를 버리게 되는 동기는

돈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시작한다."

 

탐욕은 자기가 왕이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죠.

 

사울도 블레셋의 전쟁 속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

어떤 것도 취하지 말고 다 멸절시키라고 얘기하셨는데 어떻게 합니까?

 

눈으로 보기 좋은 말과 소와 황금, 보석들을 다 챙겨오다가 걸렸더니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제사에 쓰려고, 하나님께 드리려고... 그것이 탐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의 욕구를 채움, 그게 탐욕입니다.

 

첫 번째, 돈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하면

조종하는 힘을 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힘을 주죠.

 

두 번째, ()에 대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 대신, 내 마음속의 결핍을 채우는 쾌락을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권력은 무엇입니까?

원래는 내가 하나님의 권위(Authority)안에서 살아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디자인해서 이끌어주시는데,

 

자기가 힘을 취하기 시작하면 내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기가 꽤 능력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첫 번째, 돈을 보게 되면,

돈은 사실 선하거나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은 인격이 있고 영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받게 되면 힘을 얻게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맘모니즘이라고 부르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돈을 가지면

내 인생에 대한 안정감이 생기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내가 그 돈을 유용하고 씀을 통해서

내 인생에 모든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확장하고 조절할 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장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거예요.

 

은행에 저축하는게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기의 허락되지 않는 범위를 벗어나서

투기하거나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내 인생의 미래를 보장할 것처럼

집 사고 땅 사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월급을 받아서 아이들을 위해 또 미래에 쓸 것을 위해 저축하는 것,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더 힘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돈이 주인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하나님이 내게 채우시고,

하나님이 내게 이끄신다는 그 믿음을 갖는 것, 그것이 청지기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것은 하나님이 기본으로 공급하시니까

너의 인생에 공급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는 얘기라고 제가 설명드렸었습니다.

그게 청지기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정으로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서 쓰고 또 가정의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고,

또 거기에 더하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헌금하고 나누고 기부하는 것...

그렇게 하나님이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예수님의 기준은

사람을 살리는데 위대한 목적을 두고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많은 돈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시험이 올 것입니다.

 

두번째 성()...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인데 세상은 그것을 음욕으로 변질시켰죠.

 

음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정상적인 인격과 가정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신뢰와 사랑과 존경 속에서 나누는 그러한 부부의 관계를 벗어나는 모든 환경을

바로 음욕이라고 얘기합니다.

 

먼저, 눈의 음욕이 있습니다.

요즘 대중문화들, 걸그룹들...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적인 음욕을 품게 하여

그들에게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

그래서 자녀들에게 텔레비전을 함부로 보여주시면 안됩니다.

 

왜냐면 그 음욕은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가치와 관계성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나중에는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자기의 마음에 필요한

혹은 자기의 육체에 필요한 관계를 사게 만들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음욕입니다, 음욕...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그것이 외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이나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죠.

외설이 예술입니까? 예술이 아니죠.

그것은 사람의 가치를 저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 모든 것을 표현하고 산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절제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에 대한 것은

바울이나 예수님도 결혼이라는 그런 계약된 관계안에서 주고받아야 할 것이며,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의 순결과 거룩을 지키도록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세번째, 권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력과 하나님의 권위(Authority)는, 사람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과 권위는 지배하고 조종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쓰죠.

사람들을 남용, 학대 합니다.

내 마음에 필요하면 사람들을 고용했다가 필요없으면 그냥 자르는거죠.

 

그게 세상의 권력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은 자기도취주의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세상의 권력에서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돈과 사람들의 이목을 확보해야 자신이 힘이 생기기 때문에

작은 것을 투자해서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의 열매는 권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간성을 따지지 않고 그의 기능성만 보고 고용하는 것이

세상의 구조인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위구조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권위 구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구조 안에서 그 리더 마저도 하나님의 권위구조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내가 겪고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 위의 그 권위를 행사하는 상사에게 하나님의 선한 권위를 행사하도록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리더들을 의탁하는 그 마음을 갖는 것이 건강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존중감과 그들의 명성을 지켜주고,

그들에게 솔직과 진실함으로 대화함을 통하여

무엇이 진실인지 그들의 마음을 밝힐 수 있는 대화를 해야되며,

 

결국 그런 관계를 통하여 세상의 리더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권력 구조 안에서의 관계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줄을 서죠.

 

그러나 우리는 모든 리더들과 함께 솔직함과 진실함을 통하여 신뢰를 쌓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건강한 기준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유다가 갖고 있었던 유혹이었고,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들이 받고있는 유혹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가정과 순 cell group 안에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한 사회와 삶의 형식과 방법과 내용이 뭔지를

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을 내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피할 길도 열어주셔야 하고, 도움도 허락하셔야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로 넘겨지는 이 순간

유다의 마음속을 헤집고 다녔던 이 세 가지의 유혹도

지금 우리에게 직면해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 속에서

이 세 가지 유혹 가운데 날마다 승리하는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

특별히 여러분들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의 비전으로 돌아가게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 돈과 성과 권력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세워 주셔서

   하나님의 순결한 세대로, 영향력있는 리더로 살아가게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가정과 내 개인과 특별히 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비전으로 돌아각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내 마음속에 늘 유혹받고 있는,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늘 유혹받고 있는 돈과 성()과 이 권력에 대한 구조 속에

   하나님이 내 마음과 생각을 열어주셔서

 

   오늘 주님의 뜻과 계획과 기준으로 돌아가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귀한 인생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각 가정마다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여주시고,

   순마다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여주시고,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과 지혜와 권능과 영광과 권위를 통하여

   가정과 세상에서 승리하는 인생으로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를 위하여 자기 인생의 비전을 죽음으로 선택하셨으며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며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인생을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로 돌아가게하여 주시옵소서.

   가정마다 말씀읽고 기도하는 일들이 시작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