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순례자의 영성

LNCK 2014. 12. 29. 16:08

 

순례자의 영성              11:8~10                   아래 설교 녹취, *믿음불패7 

                                                                      ‘순례자, 짐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행복하다

 

 

 

믿음은 동사 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고, 신념도 아니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통해서 계속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말씀에 따라 반응하고 행동하죠.

신자는,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떠나는 것이죠. 떠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인도가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왜 나를 인도 안 해주시느냐하는데, 떠남의 순종을 해야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는 순간부터,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때부터, 자기의 믿음의 나이가 카운트가 시작되죠.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정확히 찍혀있습니다.

124절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더라,

떠나는 순간부터 정확히, 믿음의 나이가 카운트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고 떠난 사람들을 순례자라고 그럽니다.

본문 히11:9절에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그랬습니다.

언제든지 펴고 접을 수 있는 임시 거처를 쳤다는 말입니다.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어디에든지 설치가 가능하고 옮길 수 있는.. 그래서 텐트를 칠때 중요한건 말뚝을 세게 박으면 안 돼요.

너무 세게 박으면 뺄 때 고생하잖아요.

 

하나님이 지시하시면 빨리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에를 보면 나중에 재력을 가지게 되죠.

아내를 빼앗길 뻔 하다가 살아나고, 재물도 얻고 부가 엄청납니다.

 

아브라함이 재산이 굉장히 늘어났음에도.. 장막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재산이 늘어나면, 집을 사고 정착하잖아요.

 

소유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정착을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소유가 많아도요.

 

왜냐면 그의 부르심의 목표가 정착이 아니고, 따로 있기 때문에

그가 목표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11:10)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이 아니란 거죠.

만약 눈에 보이는 땅이 목표였다면, 성을 사야 되는 거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례자였습니다.

9,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

아마 아브라함은 자녀들에게도 순례자의 모습을 가르쳤던 것 같아요.

 

우리는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정착하면 안 된다.’

아브라함은 아무도 불편한 장막을 치고 걷는 과정에서, 얼마나 불편 했겠어요.

 

그때에 아브라함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옮겨다녀야하는지, 정착하면 안 되는 것인지.. 가르쳐 줬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순례자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순례자입니다.

 

성경다음으로 많이 읽었다고 하는 책이 <천로역정>이죠.

이 책이 순례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기가 막히게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순례자들이죠. 그러므로 순례자의 영성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나선 사람들이죠. 순례자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1. 그래서 순례자의 영성의 첫 번째는, <떠남의 영성>입니다.

 

순례자와 노숙자는 모두 집을 떠난 사람들이지만 서로 달라요.

노숙자는 집을 떠나긴 했는데, 자세히 보면 지하철역에 다 모여 있어요.

목적지가 없는 것이죠. 목적지 없이 집을 떠난 사람은 방랑자가 됩니다.

 

방랑자는 누구입니까? 계속 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객사라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떠남이 목적이었죠.

그러나 우리는 무분별한 떠남이 목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하신 목적지가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라가 중요해요.

 

창세기 121절에 히브리서의 아브라함이 떠난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직장을 옮기라는 얘기인가, 아니면 신학교 가라는 소리인가

 

떠남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순례자의 영성입니다.

무조건 떠나면 안 돼요. 하나님의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2:1절에서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말은 지시할 때 가라이 말입니다.

 

지시하지 않으면 멈춰있어야 합니다. 지시하면 가야 되요.

하나님은 지시할거에요 언제든지, 있으라 하면 있고, 가라 하시면 가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삶이 떠남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항상 순종할 태도를 갖춘 삶, 그게 순례자입니다.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합니다.

포기할 준비를 하고, 언제든지 물러날 준비를 합니다.

언제든지 죽을 준비도 하는 거에요.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떠남의 영성>으로 가야하는 거죠.

 

 

여러분 순례자의 영성은 포기하는 삶입니다.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죠.

 

포기하는 것을 어려워하면, 순례의 길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순례자의 영성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순례자는 몸이 가벼워야합니다.

 

짐이 많으면 옮겨 다닐 수 없어요. 평소에 버리는 삶이 몸에 익어야합니다.

살다보면 짐이 많아지죠. 우리 아파트에 봐도, 쓰레기 통을 맨날 비우는 데도

나오는 거보면 대단한 거에요. 자꾸 쌓이는 거에요.

 

나도 모르게 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이죠.

자꾸 무엇인가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쌓아올리는 겁니다.

사람들은 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울타리를 칩니다.

도시는 떠나지 않고 모여드는 곳이죠. 안정을 추구하는 겁니다.

 

성경은 철저히 세속도시와 하나님의 도성을 비교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있는지 히브리서 11장을 보며 확인해야 합니다.

 

도시는 떠나지 않고 모여 들죠. 그리고 또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걸 위해 무언가 쌓아야 합니다.

 

인류 최초의 바벨탑, 하나님이 허무셨죠.

치열한 경쟁 쟁취 힘의 과시 무엇인가를 쌓을수록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이기만하고 흩어지지 않으면, 의도적으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을 유목민으로 부르셨는데, 끊임없이 이동을 했어요.

그런데 자꾸 모이면 흩어버리셨어요.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모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흩어지게 하시죠.

야곱도 세겜 성에 정착하려하다 험한 꼴을 보고, 벧엘 광야로 올라갑니다.

 

성이 주는 문명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려줍니다.

도시의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우리 영혼을 흔들어놓는, 우리는 도시 안에 살지만

광야의 영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 경쟁하는 문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믿음의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광야에서의 영성이 없어 졌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세속 문화에 빨려들어 갑니다.

우리의 허영과 교만 세상의 유혹을 이겨낸다는 것은 우리 힘으론 불가능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세속사회에 충분히 적응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한국교회 위기론을 이야기할 때 세속화

여기에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강력한 세속화의 힘 앞에 서있습니다.

 

이 특새를 통하여 특별히 참여한 우리에게

이 싸움에서 이기는, 그런 전과를 세웠으면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순례자의 영성은, 언제나 포기할 수 있게 훈련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포기할 수 있는 준비,

삶속에서 정기적으로 무겁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포기에서 중요한건 자기부인입니다.

붙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 훈련입니다.

 

여러분 집도 그렇잖아요. 버릴 거 버리지 않고, 계속 갖고 있으면 창고가 됩니다.

주어지는 힘도, 일정하게 내려놓는 훈련을, 계속해야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순종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냐 하면

아브라함의 순종은 한마디로 포기하는 삶이였어요.

 

믿음은 순종이고 순종은 복이에요. 그는 자신의 안정된 삶을 포기했습니다.

장막을 치는 삶은 기득권을 만들지 않겠다는 몸부림 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는 사건은, 완벽한 포기의 절정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포기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아들을 바칠 수 있었습니까,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죠.

수없이 포기를 훈련한 사람만이

100세에 나온 독자 이삭까지 바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는 경지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권리를 포기해왔던, 안주하고 싶다는 몸부림을 포기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철저히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하시면, 언제나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사람이, 순례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이 매혹적인 세속도시 안에서 군침을 흘리지 않고, 영원한 목적을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순례의 길을 걷는 가운데, 내가 가진 것을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목마다, 내가 떨구고 가면, 내 뒤에 오는 순례자들이 또 이용하고

   내가 내려놓고, 그 길목마다 우리가 포기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이 바로 포기의 영성인 것입니다.

 

 

2. 순례자의 영성은 <단순한 삶>입니다.

 

순례자는 단순한 영성을 소유해야 되요.

그래서 영이 맑은 사람들의 특징은, 단순한 삶을 삽니다.

 

언제든 순종하려고하면 단순한 삶을 살아야 되요. 삶이 복잡하면 순종이 어려워요.

자신의 복잡한 수없는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뿐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이 너무 복잡해서 순종하려해도, 준비만 몇 년 걸릴 정도로,

여러분, 영성에서 단순함은 중요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이정표가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길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 단순한 삶은, 절제력 훈련을 통해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걸 절제하며 사십시다.

 

물론 완벽하게 수도사처럼 살 순 없어요. 그러나 훈련은 계속해야합니다.

절제력이 훈련 안 되면,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강력한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면, 믿음의 삶은 실종됩니다.

 

세상은 좀 더 가지라고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요즘 사람들이 걸린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좀 더 병이건 신종 바이러스입니다. “조금만 더!”

 

오늘날 새로운 종교가 소비교’, 끊임없이 구매하라는 거에요.

더 가져야 행복할거라고 요구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소비 중독에 빠져있는데,

이 삶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칭찬을 더 기대하기 때문에

더욱더 소비중독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 순례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어요.

단순한 삶, 자꾸 복잡해지는 삶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려하면,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잡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성을 쌓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순례자의 여정은 쉽지가 않습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익숙해지면, 순례의 삶은 즐거워 질 수 있습니다.

 

순례의 길이 힘든 것은, 쓸데없는 욕심 때문이죠.

자동차도, 짐을 가득 싣고 가면, 속도가 나지 않잖아요. 화물차는 특히 그렇습니다.

 

순례의 삶은 때로는 불편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약간의 불편함을 감소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겨야합니다. 여행이 왜 즐거운가 하면 집을 떠나면 불편하잖아요.

그때 그 불편함이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여행하다 보면, 밥한 끼 먹는 게 만만치 않아요. 얼마나 힘들어요.

둘러보다 다리도 아프고, 그러다 만난 식당에서 색다른 맛을 보면, 그제야 신이 나죠.

 

잠자리는 불편하지만, 여행의 피로를 씻게 하고,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의 교제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순례자는, 모든 세상의 길이, 집이 되고, 모든 것이 쉼터가 되고, 즐거운 것이 됩니다.

믿음의 순례자들로, 조금의 아쉬움을 받아들이고, 불편함을 감소하고,

모든 것을 다 채우려 하지 말고, 부족한 것에 대해 자족의 원리를 꺠우치는 것이..

바로 순례자의 삶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삶을 익히는 거예요.

바울이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던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하는 것이

순례자의 영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려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공급을 경험하는,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화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평안이고 안식이고 자유함 입니다.

 

이 평안과 안식과 자유는, 우리의 어떤 세속적인 노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얽어매는 것으로부터 풀려난 삶이 될 때, 찾아오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순례자는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포기의 영성을 가지고 말씀으로 흘러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반응할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란(갈대아 우르와 가나안 사이의 중간 기착지)에서 떠나지 않고

텐트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살았다면, 팔레스타인의 한 노인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반응하고, 끝없는 포기를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계속 옮겨갔을 때

온 세상에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름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순례자는 목적지를 바라봅니다.

 

여러분, 순례자는 노숙자와 다르다고했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11:10절에 이는 그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분명한 목적지를 보았습니다.

 

순례자는 목적지를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믿음으로 보게 하신 최종 목적지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 목적지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만든 세속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순례자는 한시도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적지를 놓치면 안되요.

살아갈수록 목적지가 선명하게 보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시력이고, 특별새벽기도를 통해 명확하게 보아야할 목표입니다.

지금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계속 보고 있는데

아 그렇구나.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으로 데려다 주고자 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겠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을 듣게될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다면 삶은 방황입니다. 목적지 없이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영구히 살 자들이 아닙니다.

 

경유해야할 곳을 목적지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잠시 지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소유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누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거든, 줘버리세요.

이번 연말에, 여러분이 움켜진 것들을 풀어놓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연말에 할 일은,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는 거에요.

그래도 내년 1월부터 또다시 쌓을 거에요. 모을 거에요.

그러니까 12월에 해야할 것은, 움켜진 것들은 빨리 풀어놓으세요. 아끼지 마세요.

 

저는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삶의 배경과

우리가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갭이 정말 많아요.

 

어떻게 우리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본질은 같은 거에요.

 

우리가 요즘 장막을 야외에 치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소유,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있어요.

 

좀 헐렁하게 사세요.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또 쌓이고, 그 쌓인 게 내 발목을 잡아요.

저도 20년 동안 사역하다 보니까, 발목을 잡는 게 많더라고요.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바람을 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자신의 짐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은,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세상이 단연코 목적지가 아닙니다.

LA에서 자동차로 그랜드 캐니언을 가려고 하면

반드시 네바다 주에 있는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해야합니다.

 

도박으로 유명한 도시죠. 그곳의 밤은 너무도 화려하고 휘황찬란합니다.

온 세상의 유명한 조형물은 다 갖다놓고, 쇼도 많아요.

그러나 그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죠. 잘못하면 낭패를 보고, 거지가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정작 그랜드캐니언의 장관을 보지 못하고, 홈리스가 될 수 있어요.

순례자가 종종 탕자가 되는 이유는, 목적지를 놓쳤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수없이 탕자가 되어, 길을 잃고 살고 있습니다.

순례의 길을 떠났는데, 목적지를 잃어서, 탕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세상에서 유랑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우리는 반복적으로 목적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고두고 말씀하시고,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한 곳만 바라보았어요.

 

예외가 없어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한곳만 바라보았어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성, 그분이 계획하시고 만드신 곳! 11:10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확실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최종적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곳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지, 세속도시는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는 순례의 길을 끝마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곳이고, 곧 아버지의 집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세상에 돌아다니는 동안에, 정작 그가 찾았던 것은 없었습니다.

여러분 순례의 길을 정확히 이해하고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연말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욕심으로 내가 움켜지고 혈안이 되어있는 것들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 붙잡을 수 있길 바랍니다.

순례자의 길을 걷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검색기를 통과해야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검색기 불편한 것은, 삑삑거리게 되어 있어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삶을 걸어가는데, 나를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것을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는 연말 되시기 바라고, 특새가 되길 바랍니다.

 

순례자의 길은 즐겁다

 

저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례의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뭔가 집착하고 쌓아 올리려 하고, 움켜쥐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내려놓으십시오.

 

괜히 쓸데없는 것으로 혈압 올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믿음의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왜 순례의 길에 장막만 필요할까요?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를 보내실 때도 마찬가지에요.

갖지 말라는 이유가 뭘까요? 주머니를 채우지 말라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는가에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불러내셨다면,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에요.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모리아에서 아들을 바치라고 했던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삭이 아니요,

오히려 더 놀라운 것을 예비하시고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순례자가 순례의 길에서 경험하는 축복은, 순례의 길에 동반자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최고의 동반자는 누구일까요? 바로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께서 순례의 길에 친구가 되어 주셔서

영원한 목적지까지 가이드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순례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인도에 늘 민감해야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심에 끊임없이, 두려움 없이, 믿음의 발길을 뚜벅뚜벅 내 딛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언제나 순종의 삶에 가벼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