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을 누림 히11:8, 창12:1~3 14.06.06. 전국청년부흥대성회, 출처
◑1.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오래 전부터 갖고 계셨는데
그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나와 같이 일해줄 그 누군가가 어디에 있을까?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면,
어떤 그룹을 통해서 어떤 큰 단체나 모임을 통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사람,
그 한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은, 몽골에 있을 때, 제가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야하나 말아야하나를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 제게 말씀으로 분명히 알려주십시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 한 인물을 들어,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요나단이었는데,
이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오합지졸처럼 보이고
그들이 점점 병영을 이탈하고 사기가 침체되어있는 것을 보고
블레셋 군대를 향해서 혼자 돌진해 들어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때 그 옆의 무기 든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나와 같이 저 블레셋 군대에게 뛰어들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이길거야.”
영어성경을 보면 그때 Maybe라고 되어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라고 하는 생각만 가지고, 요나단이 적진으로 뛰어듭니다.
요나단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다니면서 “여러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 깨어서 일어나야합니다. 우리 같이 전쟁에 나갑시다, 우리 같이 싸워봅시다,
같이 기도합시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몸 하나를 적진에게 던져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하면,
적진에 하나님께서 지진을 주십니다.
큰 진동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블레셋 군대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그리고 블레셋 군대를 후퇴시키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군대가 움직입니다.
여러분, 군대가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한 사람이, 몸을 던지는 데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한 인물을 통해서 구원을 허락하신
수많은 이야기를 성경에 담아 두셨는데요...
▲성경의 구속사도, "한 사람을 통해"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그 일을 시작하실 때, 누구에게 주목하시냐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인물에게 주목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하면...
그를 떠나게 하십니다.
그 사람은 그 당시에, 세계 경제의 중심지라고 하는 메소포다미아 우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지금의 터키 남동부지역인 하란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한 번 더 부르십니다. 어디로 부르시냐하면,
가나안 땅으로 부르십니다.
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만나셨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시할 땅...
자 여러분, 자기 자신이 지시한 땅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합니다.
여러분은 ‘비전을 가져라’라고 하는데
비전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싶은 것을 그리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겁니다. 그래서 calling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처음부터 명백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하란, 다음에 가나안)
때로는, 부르셨지만, 그곳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떠나야하는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시고, 착착 단계를 밟아서 걸어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방법은 뭐냐면,
“아! 그래, 내가 의사가 되고싶어. 의사가 되려면 이러이러한 길을 가야 해.
그러면 내가 첫 단계로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성적을 만들어야 해.
그렇기 위해서는 내가 공부를 ,이런 계획을 가지고 하자.”
많은 경우, 어떤 계획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계획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응답하면서 살려고 한다면,
때로는 그 계획을 넘어서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해서 민감해야합니다.
▲제가 옛날에 한국에 있었을 때, <중국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중국 역사를 전공으로,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를 받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개입하셨습니다.
이슬람 역사를 공부하는 쪽으로 제 방향을 바꾸시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왜냐면, 전공을 바꿔서 유학을 간다면
어느 학교도 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 전공을 바꿔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한다면
그 공부가 너무 버겁고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일 준비가 안 된 사람으로서, 전공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제가 불편했습니다.
제가 불편해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히브리서 11:8 말씀인데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말씀이 제게 확 다가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믿음은, 다 아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구나.
다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구나.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확신할 때 반응하는 거구나.”
그리고 나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역사 과로 apply를 여러 곳에 했는데
하버드 대학교에서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왜 그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고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왜 그 공부를 해야 했는지 알게 된 것은
기도 가운데 결단하고 나서, 15년이 지난 뒤에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네시아로 부르셨을 때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 그 땅으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이슬람 역사를 공부하게 하신 거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몇 년 걸렸는지 아세요?
15년 걸렸습니다.
자, 이와 같이 때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반응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로 부르심을 받을 때도
실은 제가 왜 그 땅으로 가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한 4년 전쯤에 하나님께서 저를 불편하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그때 몽골국제대학교를 섬기면서
몽골이라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가 더 이상 여기서 할 일이 없다'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곳을 떠나야한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로, 학교가 저를 의지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고 이 곳에 왔는데
제가 떠나버리면, 이 사람들에게 제가 너무 미안해서 어떡합니까?
하나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학교가 너를 의지하지 못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떠나려고 보니까, 저는 이미 몽골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관계'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한 예로 제가 몽골에 있었을 때, 대통령도 알았습니다. 장관들도 알았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어떻게 풀어가면 될지 감이 생겼습니다.
더 많은 관계가 생겼기 때문에, 앞으로 여기서 더 많은 사역이 기다리고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나라'고 하십니다.
제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제가 어디로 가야합니까?”
갈 곳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떠나라고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갈 곳을 정해놓고, 어디로 가야겠구나 생각한 다음에
그 다음에 떠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서를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제가 몽골국제대학교 측에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6개월 뒤에 떠날 겁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 묻고 기다렸습니다.
한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땅을 보여주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온 가족이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이런 것 같아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
여러분, 부르심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르심의 목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입니다.
제가 몇 차례 떠나보고, 그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때, 몇 번째 떠남인가 봤더니
제가 아내와 결혼해서, 이사한 것만 10번째였습니다.
나라를 여러 번 바꿨습니다.
계속해서 떠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떠나는 삶은 불편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여러분, 자기가 익숙한 나라를 떠나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여러 가지 면에서, 외국인에 대해서 문호가 열려있다고 하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가면, 많은 불이익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몽골도 그렇고, 인도네시아도 그렇고,
차사고가 나면 무조건 외국인이 뒤집어쓰게 됩니다.
또 늘 비자문제로 부대껴야 됩니다.
이곳(한국)에 강연하러 올 때도, 진행팀이 걱정할까봐 말을 안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비자 때문에 못 올수도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들어가려고 할 때도 문제가 있었어요.
저희 기관이, 인니 공무원들이 요구하는 웃돈을 주지 말고 버텨보자라고 했기 때문에
뭔가 수속을 하는 것마다 복잡하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면,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엔 친척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친척을 떠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아세요?
친척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자기를 돌봐줄 가장 가까운 안전장치입니다.
씨족, 부족이 자기를 둘러싸주고 있으니까 다른 집단이 나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이 나를 공격하면, 내 씨족들이 보복을 해주거든요.
내 친족들이 같이 보복을 해줍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경찰력이 없었을 때는
씨족들이 친족들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지지기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친족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저희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몽골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아내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때 둘째아이가 생후 6개월이었는데
몽골이라고 하는 나라에 들어가려면, 아이들의 안전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의료 쪽에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의료 환경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몽골 전체에 인큐베이터가 2개 있는데,
하나는 고장나서 못쓰고, 또 하나는 작동법을 아는 사람이 러시아로 갔대요.
어차피 못쓰게 됐대요.
수술을 받고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맹장수술 같은 간단한 수술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엄마로서 마음에 짐이 됐습니다.
하루는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 너 미국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니? 한국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니?
몽골에 있다고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란다. 내가 너와 함께하는가가 중요하단다.”
아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떠난다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불안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나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너 아비 집을 떠나라.”
아버지 집을 떠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아세요?
그 당시의 유산은 다 부동산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유산을 물려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오는 유산, 경제적 유익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면 왜 아브라함을 그렇게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을까요?
여러분, 고향을 떠나서 가는 것이 여러분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이 익숙한 곳, 여러분이 계획하고 있는 것, 여러분의 안전지대,
거기에서부터 떠나면 광야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광야는 어떤 곳이냐면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입니다.
히브리어에 광야(미드바르)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라는 단어의 어근이 같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자,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떠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따라서 떠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풍요를 따라, 편안한 것을 좇아 떠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을 따라왔던 롯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가나안 땅에서 갈라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셨을 때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지역에 비하면 물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물을 가지고 다툼이 많이 벌어집니다.
더군다나 가나안땅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사갈 때...
어느 땅이 물이 좋은 땅인가? 어느 땅이 땅값이 오를 가능성이 많을까?
어느 땅에 가면 편리할까? 오늘 동네로 갈 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정서상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요? 비슷한 부류보다, 괜찮은 부류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어울리다보면
더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 환경보다는, 더 좋은 환경으로 가야한다는 믿음이 확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전 환경보다 훨씬 좋지 않은
가나안이라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때 롯이 같이 따라왔는데
결국 가축에서 먹일 물 문제로 인해(창13:10), 아브라함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야기합니다.
“자, 우리 갈라서자.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내가 오른쪽,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내가 왼쪽을 택할게.”
그랬더니 롯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물이 많고 풍요로워서 여호와의 물댄 동산 같았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롯이 “아! 여기가 좋겠다.”하고 들어갑니다.
여러분, 풍요를 따라 들어가는 삶이, 갖게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보다는
주변 사라들의 변화를 받고 영향받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풍요를 따라 살아가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아세요?
숭실대학교에 보면 한 25%가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채풀을 하면, 아무리 찬양인도를 해도, 아무도 따라하지 않는다고 해요.
적어도 소수의 크리스천 만이라도 입을 열어 찬양을 하면
예배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텐데요... 이런 말들을 예배 인도하는 분들이 합니다.
그 청년들이 왜 입을 다물고 있을까요?
입을 여는 것보다,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자기 신상에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편안함과 풍요와 물질적인 성취를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신앙적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양보하면서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그곳의 문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딸들을 그 동네 난봉꾼들과 사귀게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불행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 민족은 하나님의 민족과 대적을 이루는 가문을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너희는 여기를 떠나라!”
그런데 롯의 아내는, 그래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아, 우리집 주변에 이마트도 있고, 신세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쇼핑몰, 커피샵,
애들 학교 학원까지 너무 가까운데 여길 두고 어떻게 떠나.”
그러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아브라함이 간 길은 좀 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나안 땅을 가게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첫 번째 만난 것이 있습니다.
기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가서 가장 먼저 맞부닥뜨린 것은, 바로 기근이었습니다.
저희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약속의 땅에 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순간들을 대면해야합니다.
그러나 환경은 어려울지라도
그 속에 소중한 보물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누림>인데요...
◑2. 하나님을 누림
▲ ‘너희가 인도네시아로 가야한다’는 부르심을 확인한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해보자라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아내가 넷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나이가 있고 아내가 늦둥이 셋째를 가졌는데
하나님이 또 아이 한 명을 더 허락하셨어요.
이제 인도네시아로 가려면, 우리 전 가족이 보다 날렵하게 인도네시아로 움직여야하는데
아이가 딱 생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냐하면
다리에, 모래주머니 4개를 달고 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일해 보려고 하는 그 순간에
아내가 하혈이 시작됐어요. 노산이다 보니까.
그래서 침대에 뉘여 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키고, 거기서 안정을 취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저희가 미국에서 1년 안식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으면, 나머지 세 아이는 누가 돌봐야할까요?
그때부터 저는 전업주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만 했습니다.
아이들을 돌봐야했기 때문에, 제가 그 전에 6개월 정도 집회 약속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안식년이니까, 좀 더 자유롭게 집회에 응할 수 있겠다해서
이런 저런 약속을 잡았었는데, 그분들에게 전화해서 다 양해를 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못갑니다. 다 취소시켰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6개월 그랬습니다.
제가 그렇게 전업주부로 있다 보니까, 주부습진이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무장갑을 껴야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아내가 장봐오라고 하면, 아무거나 막 담았는데, 이제는 눈여겨봅니다.
식초를 고를 때도, 어떤 식초를 골라야하는지 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인도네시아에서
여러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이 모여서 하는 중요한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저도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가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인도네시아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좋은 네트워킹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포기해야했습니다.
그것을 포기한 날, 제 마음이 좀 심란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과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제가 환경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운전하며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얘, 너 장 봐오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니?”
그 당시 저는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트렁크 문을 열고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얘들아, 아빠 장 봐온 것 좀 날라라.”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아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이 엄마아빠를 도와가면서 자라날 수 있도록,
배워갈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또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시는 겁니다.
“너 제초제 사왔을 때 어땠니?”
저희 집에 잔디가 많이 자라는데
잔디 뿐 아니라 잡초도 많이 자라기 때문에, 구청에서 경고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없이 제초제를 사와서 뿌리고 있는데,
저희 집 셋째가 다가와서 “아빠 저 이거 갖고 놀고 싶어요.”하는 겁니다.
제가 허락했을까요?
“아빠 혼자 물총싸움 하고 있잖아요.”하는 아이를 할 수 없이 집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얘, 너 집안에 들어가 있어라. 첫째야! 빨리 와서 동생 좀 챙겨라.”
그리곤 혼자 일했습니다. 왜 그렇죠?
위험한 일이니까요.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얘, 너희 집에 강도가 들어왔으면 넌 어린 아이들 깨워서
‘얘들아, 아빠가 위급한 상황이니까 아빠를 도와라.’라고 하겠니?”
제가 고개를 떨궜습니다. “아니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가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에서 교육사역을 하고 대학사역을 하는 것이
너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겠니?”
“아니오,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예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맞아. 그것은 너의 일이 아니야. 나의 일이야.”
여러분,
하나님이 “그건 내 일이야.” 라고 말씀해주실 때
그 어깨에 있는 짐이 다 녹아내렸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제가 거의 6개월 동안 백수생활을 했는데,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하나님께서 손해보고 계시는 거예요.
제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말씀을 전하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것 같은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냥 너가 거기 잠잠히 있는 게 보기 좋다.”
여러분, 이렇게 큰 모임에서 말씀을 전할 때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아무리 해도 표시도 나지 않는 그 일 가운데 파묻혀 있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목하고 계십니다.
의미 없는 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 가운데 빠져서 헉헉거리고 있는 그때도
하나님은 “그래, 잘 하고 있어. 그래, 조금만 더 버텨줄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요? 이렇게 힘든 이유가 뭔가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어요.
“너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려고 그래, 사랑을.”
“하나님! 사랑이 뭔데요?”
그때 저에게 들려오는 첫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한 구절.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제가 사역을 위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뭔가 일을 하려면, 끝없이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연습을 하나님이 미리 시키신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저는 그 후 인도네시아에 들어와서 언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언어를 배우는데...
저는 제가 박사과정을 졸업했을 때
“와! 이제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시험은 없어!”라고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또 저는 매일 쪽지시험을 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대학교의 어학과정에 들어가서 1년간을 보내면서
매일 아침 시험공부를 준비해서 차를 타야했고
왠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몇 번째 언어를 배우는가 세어봤더니 10번째 언어였어요.
‘언어만 배우다 끝나는구나.’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대해서도 적응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예민해져 있었고, 게다가 저는 굉장히 위험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수술의 결과가 안좋아서 2달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막 굴리신다고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세심하게 돌보시지 않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예배가운데 있었는데 ‘주 품에 날 안으소서’라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 가운데 제가 넋두리로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저 좀 안아주시면 안되겠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 정말 날개를 펴신 듯,
내가 날개치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이,
그분이 아무도 모르게 제 뒤에서 저를 안아주시는 것 같이 느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안겼을 때, 주님은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 같았어요.
“얘, 지금 네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 가운데 한동안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것 같고,
네가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허비하고
그렇게 네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만족할 수 있겠니?”
제가 그때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분께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렇게 저는, 혼자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지낼 때
'하나님을 누림으로써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 아브라함이 떠날 때 하나님이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이 뭐냐면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
그래서 모든 열방이 너를 통하여 복을 얻게 하겠다.”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떠나고자 결단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로 인하여서 열방이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 땅에 갔을 때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당대에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눈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너의 자손이 뭇 별과 같이 많게 하겠고,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겠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25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봤는데 딱 하나 주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 약속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네가 밟는 땅마다 다 너에게 주겠다고 하셨는데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장례할 묘가 없어서 헷족속에게 돈을 주고 땅을 사야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제가, 여러 번의 이 떠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받은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건 뭐냐면 어떤 풍요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주셨어요.
그런데 풍요는 아니예요.
아브라함이 받은 진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얻은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누림'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하나님을 누리고 보니까
다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몽골생활, 누군가 물어봤습니다. 힘들지 않냐고.
그리고 몽골의 그 추운 영하40도가 넘는 곳에서 있다가,
1년 내내 영상 30도가 넘는 그러한 인도네시아로 가서 또 힘들지 않냐고 물어봅니다.
물론, 힘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누리면...
그 말씀, 그분의 안으심, 그분의 섬세한 인도하심에 중독됩니다.
그것에 중독되고 나면 다른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첫 번째 가치인가? 라고 하는 것인데,
한번은, 제가 아들과의 사이에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저에게 뭔가 부탁할 일이 있어도 저에게 직접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서 “엄마, 아빠한테 저 이거 좋아한다고 얘기 좀 해주세요.”
“얘, 너가 직접 아빠한테 얘기하면 아빠가 잘 들어주실 거야. 좋아하실 거야.”
“엄마가 얘기하세요.”
아이가 대체 왜 그럴까 봤더니
아이가 아빠한테 거절당할까봐 뭔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아빠를 불편해하는 이유가 뭘까?'
그 부분을 생각하다가 중국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중국에 가 있는 동안에
제가 어느 선교사님과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가정에 상처받은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셨는데 저는 그것이 제 큰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아이를 호되게 야단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밖에 나가서 현관 밖에서 반성하고 있으라고 시켰는데
아이가 그것에 대해 굉장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았어요.
저는 아이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습니다.
엉엉 우는 아이를 들여보내서 달래고 재웠는데 그때 아이에게는
뭔가 엄마아빠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놓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도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와 같이 팔베개를 하면서 잠들고 다음날 같이 일어났을 때
제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동현아, 너 아빠한테 속상한 것 많지?” 그랬더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런데 동현아, 너 아빠한테 이러한 일로 혼났던 것도 기억하니?”
그랬더니 어떻게 그날을 잊겠냐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럼 동현아, 왜 혼났는지도 기억하니?”
“몰라요.”
아이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은 빨리 지워버립니다.
“동현아, 그때 너가 이런 잘못을 해서 아빠가 어쩔 수없이 혼낸 거였어.
그런데 아빠가 너를 혼내는 방식에 잘못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빠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아빠도 잘못했다고 그러시더라.
동현이 너가 너무 힘들었다고. 아빠가 네 마음을 몰라줬어.
너무 미안하다, 아빠 용서해줄 수 있니?”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고개를 한 번 끄덕 합니다.
“야! 이동현, 진짜야? 아빠 용서하는 거 맞아?”
“아빠, 나 그거 잊어버리려고 하고 있거든요? 자꾸 기억나게 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알았어, 알았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났습니다.
제가 집에 일찍 와서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학교를 다녀와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기방에 들어가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빠방 문을 빼꼼히 열더니 저에게 와서 제가 뭐 하나 관찰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책상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제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계속 그러고 있길래 제가 궁금해졌습니다.
‘어? 이 녀석 왜 안하던 짓 하지? 얘 왜이래?’
작업하다 말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야, 이동현, 너 아빠한테 뭐 부탁하고 싶은 거 있어?”
그랬더니 아이가 정색을 하면서 저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빠, 나 아빠한테 뭐 부탁하려고 이러는 거 아닌데?
그냥 아빠가 기억나서... 아빠가 보고싶고 생각나서 온건데...”
아빠가 그리웠다는 거예요. 제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 아들을 끌어안고 침대에 가서 막 뒹굴었습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생겨서 힘들었어요.
그때 예배시간이었는데 예배자리로 나오면서
마음에 눌린 것 때문에 하나님께 푸념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바로바로 안 도와주세요? 언제까지 힘들게 하실 건가요?
저는 이 일에 부담이 참 많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문득, 제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아빠, 나 부탁하려고 이러는 거 아닌데...”
그때, 제가 그냥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바닥에 누워서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아빠, 저 지금 뭐 부탁하려는 게 아니구요,
아빠를 그냥 보고싶어요. 아빠를 누리고 싶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진짜 문제는
일이 풀리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때 하나님께 그렇게 고백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아들을 안고 기뻐하면서 막 데굴데굴 구른 것 같이
그분이 저를 그렇게 찾아오시는 것을 느꼈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십니까?
혹시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선물? 그것 때문인가요?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그 선물 든 손인가요? 그분의 얼굴인가요?
여러분의 관심이 그분의 얼굴을 향할 때 여러분이 그분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요와 성공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그분을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얻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그 약속하신 복 자체였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안전지대 Comfort Zone을 떠나서 그분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그러려면 좀 불편해져야합니다.
여러분의 목표가 편안한 삶이 되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안전을 지향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저의 아이들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저의 아이들이 더 행복해 질 줄 알았어요.
왜냐면 몽골이라는 험한 환경에 갔다가
더 좋은 환경으로 갔으니까 아이들이 더 많이 행복해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좋아하는 시간은 한 3개월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저의 큰아이가 와서 저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아빠, 저 지금 너무 불행해요!”
“그래? 뭐 때문에 불행하니?”
“우리반에 아이폰을 가진 아이가 나타났어요.”
자기는 구형 핸드폰도 없는데 아이폰을 가진 아이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너무 불행하더래요.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K-pop 스타 얘기가 나왔는데,
자기는 K-pop이 뭐냐고 그것부터 질문했다가
아이들에게 가정환경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고,
그런 식으로 성장하면 앞으로 사는 게 힘들어질 것 같다고 조언을 받았대요.
그러니까 집에 와서
“아빠, 나 불행해. 나는 아무래도 잘못 키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가 불평거리가 더 많아지더라구요.
‘아, 환경이 우리를 감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제가 아이들을 모아서 한번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얘들아, 아빠가 너희에게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어. 그게 뭔지 맞춰볼래?”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어... 글쎄요? 예수님 잘 믿는거요?”
“응, 그것도 좋은 일이야. 하지만 아빠는 좀 더 구체적인 답을 원해.”
“어... 엄마아빠 말 잘 듣는거요?”
“응, 그것도 좋은 일이야. 그치만 조금 더 구체적인 거.”
“음... 그러면 공부 잘하는거요?”
“만약 그게 아빠의 첫 번째 목표라면 아빤 많이 불행한 사람인 것 같은데(크크), 다른 거.”
“그럼 뭔데요?”
“얘들아, 잘 들어봐. 아빠가 진짜 원하는 건...
너희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때로는 너희 앞에 있는 좁은 길(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
그 좁은 길도 택할 줄 알고,
너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양보할 줄도 알고,
너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아빠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여러분, 제가 제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면, 이건 제 진심이겠죠?
우리 부모님 세대는 우리를 키울 때..
‘내가 모든 걱정을 도맡고, 모든 짐을 대신 져 줄테니까 너희만큼은 좀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면서 여러분을 키우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아버지 세대는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의 세대는 잿더미 속에 경제적인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세대는 다른 도전에 직면에 있습니다.
풍요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세대를 살게 됩니다.
여러분이 희생을 감당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서는
앞으로의 삶 가운데서 무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저 세상적인 성공을 하는 것이 목표라면
여러분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 머물러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목표인 채로 남아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표가 바뀌어져야합니다. 아브라함이 떠난 것 같이,
여러분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
그분을 누리는 삶,
그분이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기도
그 옛날 아브라함을 찾으셨던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도
나와 같이 이 삶을 살아갈 아브라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그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가운데 누군가를 찾고 계실 겁니다.
제가 책에서 수많은 하나님과 함께했던 간증들을 나누었는데,
그것은 몽골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도 동일한 기쁨과 특권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떠나야합니다.
그 떠남은 단순이 물리적으로 사는 환경을 바꾸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것만이 나의 목표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것만 있으면 내가 편안해질 것 같아.’라고 생각했던 어떤 것들,
‘나는 이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라고 생각했던 그 영역들,
그 영역들에서부터 나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얘야, 나를 신뢰하면서... 그 믿음의 영역 가운데...
내가 너에게 준 그 믿음을 사용해서 걸어 나오지 않겠니?”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제 아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렇게 고백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빠, 이 순간 만큼은요, 제가 뭘 얻으려는 것이 아니구요.
아빠에게 잘 보여서 뭘 얻어내려고, 아빠 선물 때문에,
아빠에게 뭐 부탁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구요.
그냥 내 마음 가운데 아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고백해요. 아빠를 느끼고 싶어요.
내가 아빠로 인한 빈 공간이 있어요. 그 곳에 와주세요.
실은 저 많이 버거워요. 목표를 따라서 나를 채찍질 하면서 막 달려갔어요.
그런데 여전히 피곤하고 정말 다람쥐 쳇바퀴도는 삶 같아요.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고도 했고,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공허함이 있어요.
주님, 저에게 저를 아브라함이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이 시대에 찾고 있는 아브라함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면 제가 일어서겠어요.
그리고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만 만족하길 원해요.
주님, 주님과 함께라면 어려운 길도 이겨 나갈게요.
고생스러운 좁은 길이지만 기꺼이 갈게요.
내가 많은 사람들이 먹어치울 분량을 먹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먹이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주님, 나를 바꿔주세요.
나의 목표가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
오천 명 분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오천 명 분을 나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주님, 내 삶의 목표가 편안함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불편한 가운데에서라도 주님을 누리는 삶이 되게 해주세요.
내 삶의 그 무엇, 거기에 내가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주님을 찾는, 이 땅에서 주님을 찾는
그 발걸음의 끝을 보는 것이 되게 해주세요.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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