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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 주면 되돌려 받습니다 빌2:3 스크랩
◑내가 나눠주면, 뭐라도 되돌려 받습니다. 그저는 없습니다.
미국 남부의 한 지역에서는 매년 호박 우수 품종 경진 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대회에서는 매년 우승을 독차지하는 농부가 있었는데요, 그에게는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웃들에게 호박 종자를 아낌없이 나눠 준다는 것입니다.
농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이웃사람이 물었지요.
“당신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품질 개량을 한 결과로 상을 타는 것인데
왜 우리들에게 그 종자를 나눠 주시죠?
우리야 좋은 종자를 얻으니까 좋기는 하지만,
좋은 종자를 나눠줌으로 인해서 우리가 기른 호박이
당신 밭에서 난 호박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이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종자를 이웃에게 주는 것은 사실 내 자신을 돕는 것이랍니다.”
이 농부가 사는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으로 밭들이 서로 이웃하고 있었지요.
농부가 경진 대회에서 상을 받은 좋은 종자를 나눠 주면
이웃들은 호박의 품종을 개량할 수가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농부가 좋은 씨를 감추면, 벌들이 꽃가루를 옮길 때
이웃의 열등한 종자를, 자신의 밭에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웃들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협력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매년 호박 우수 품종 경진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지요.
우리는 주는 것에 상당히 인색합니다.
그러나 줌으로 인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나눠주는 삶을 살 때,
하나도, 그저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따뜻한 미소와 감사를, 우리에게 되돌려 주며,
또한 축복의 기도를,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 것은, 즉 나를 돕는 일인 것입니다.
내가 나눠주면, 뭐라도 되돌려 받습니다. 그저는 없습니다.
◑낄끼빠빠, 낄빠빠낄
혹시 ‘낄끼빠빠’란 말을 아십니까?
한 마디로 낄 때 낄 줄 알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 개입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투신할 줄 알고
빠질 곳에는 지혜를 발휘해서 미련 없이 빠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살다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괜히 이 곳 저 곳 다 기웃거립니다.
여기저기 다 들쑤시고 다닙니다. 아무 때나, 생각 없이 수시로 남의 대화에 끼어듭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가치를 실추시키기 십상입니다.
‘낄빠빠낄’ 하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가벼운 사람으로 인식되는 지름길입니다.
(낄 데 빠지고, 빠질 때 끼는 사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자주 고민하게 되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꼭 개입해야 될 사안인가? 내가 꼭 가야할 곳인가?
내가 가면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불편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잘 간수하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지켜나가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노력이
‘낄낄빠빠’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낄낄빠빠’의 명수셨습니다.
정말 개입해야 될 일에는 목숨까지 걸고 개입하셨습니다.
백성들 전체를 그릇된 신앙으로 이끌고 있던 당대 유다 지도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맞서셨습니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의 위선과 비리와 이중적 신앙에 맞서셨습니다.
그러나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할 때 어떠하셨습니까?
이제는 내가 빠질 순간이로구나, 직감하시고 몰래 빠져나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낄낄빠빠’의 전문가셨습니다.
헤롯 왕의 그릇된 결혼 앞에 목숨까지 걸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직언했습니다.
그 결과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낄 때는 목숨 걸고 낀 것입니다.
그러나 빠질 때 빠지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전성기 시절, 그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세례자 요한 당(黨)’이라고 칭할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큰 스승으로 받들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시자마자
스스로 자신을 ‘와르르’ 허물어트립니다.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반면에 베드로 사도는 ‘낄낄빠빠’에 조금 서툴렀습니다.
간혹 ‘낄빠빠낄’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자주 끼지 말아야 할 때 끼어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곤 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보십시오. 어련히 예수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어느새 다가와서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21:21
끼어든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1:22
이웃들의 결점을 바라보느라 너무 바쁜 우리들입니다.
형제들의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입니다.
결국 허탈함만 남는 형제들의 단점을 주제로 한 ‘뒷담화’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모든 것들 하나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너는 그저 나를 따라라.” 21:22
◑울타리를 허물지 말라
어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부모가 평생을 땀흘려 일구어 놓은 포도밭이었지요.
이 포도밭으로 인해 젊은이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가족이 먹고 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대상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려받은 포도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발전을 시킬 것을 다짐했지요.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포도밭,
이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포도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타리에는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울타리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뒤, 이 포도밭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점점 망가져갔습니다. 울타리를 베어버리자
사람과 짐승들이 마음대로 포도밭에 들어와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포도가 열리진 않지만
포도밭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도
포도나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위의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울타리보다는 포도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포도나무가 없다면 포도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울타리 없이는.. 포도밭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듦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도와준 가족, 친구,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고생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주셨으며,
선생님들은 정성껏 지도하여 훌륭한 인재로 길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인정과 우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었던지요?
그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고마운 분(울타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존재함, 그 자체로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하 녹음 안 함 ............................
◑이왕 가는 길, 편하고 가볍게!
높은 산을 오를 때 구시렁거리면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휘파람 불며 아름다운 자연을 찬양하며, 기쁘게 오를 때, 더 쉽게 오를 수 있는 법입니다.
이왕 사는 인생이라면, 좀 더 즐겁게 등산을 하는 것이, 지혜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길입니다.
지상에서의 생을 다 마쳐가는 노년기 때는, 대체로 남는 것이 아쉬움이요 안타까움입니다.
죄책감이요 허탈함입니다. 돌아보니 별로 이뤄낸 것도 없고, 사회에 기여한 바도 없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씁쓸해하고 힘들어합니다.
이들은 평생을 불평불만 속에 살다가, 얼굴 표정마저 굳어져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먹고사는 게 그리 힘들었던 것도 아닌데, 늘 부정적이고 피해의식과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족을 힘들게 했습니다.
결국 마지막 모습마저도 그렇게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은, 그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반대로 평생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늘 온화한 웃음을 짓다가,
그 얼굴 그대로 편안하게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먹고사는 게 너무도 힘들었지만,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고 활기차게 살았습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가족과 이웃을 격려하고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TV에 보니까, 하루 종일 재래시장 한쪽 바닥 좌판대에서, 채소를 파시는 할머니께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수고한 값으로 매일 저녁 자장면 한 그릇을 맛있게 드시고,
그 매일 자장면으로 저녁을 드시는 자신의 인생을, 너무 만족스러워 하셨습니다.
'자장면 한 그릇을 먹으면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인생!' 정말 복된 삶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마지막 돌아가시는 모습도 너무나 편안하고 고요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그 마지막 모습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그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어떻게 보면 정말 큰 짐이고 멍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무게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을 오를 때 구시렁거리면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휘파람 불며 아름다운 자연을 찬양하며, 기쁘게 오를 때, 더 쉽게 오를 수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매일을 주님과 동행하다가
우리 또한 마지막 순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 살은 사람이 잘 죽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
‘죽음을 어떻게 살까?(Dying Well)’
호스피스 전문가인 몬타나 대학의 아이라 바이옥(Ira Byock)교수가 펴낸 책 제목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과 지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잘 사는 것(경제적 부유의 의미가 아닙니다)은, 잘 죽기 위함 입니다.
잘 죽는 사람은, 잘 살았기 때문에 잘 죽습니다.
삶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입니다.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웰 빙(Well-Being 잘 삶)바람이 거세고 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죽음(Dying Well)을 이야기하지 않는 잘 삶(Well Being)은 허구입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 궁리만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 앞에 망연자실 한다면
그 삶은 결코 잘 산 삶(Well-Being)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과 마주하더라도
의연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삶(Well Dying)이 잘 삶(Well-Being)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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