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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LNCK 2015. 3. 11. 09:02

◈예배란 무엇인가             요12:1~8           13.03.10.설교스크랩

 

 

 

◑서론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교인이냐/ 아니냐를 사실 눈으로 가름하는 가장 척도는, 주일날 교회가서 예배드리느냐/ 아니냐? 그거죠.

 

예배도 종류가 많습니다. 주일예배,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구역예배, 가정예배, 예배 굉장히 많죠?

그래서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들은, 예배 무감각증에 걸려 버렸어요.

그래서 그냥 예배 메너리즘에 빠졌는데, 그냥 안 하기는, 또 찝찝하니까,

그냥 예배를 해치워 버리는, 냉동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의 에센스(본질) 14번째 주제는, <살아있는 예배, 진짜 예배란 무엇인가> 입니다.

 

예배란..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만나는 것입니다.

높으신 하나님과 낮은 인간이 만났는데, 원래 수준이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가 만날 때는,

높은 존재가 내려와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그래서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초대하시고, 예배의 문은 하나님이 여십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내 스스로 예배하고 싶어서 온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초대한 거예요.

거기에 반응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오셔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로, 먼저 이곳에 오셔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뛰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축복의 첩경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내 개인의 삶이 살아나고,

   내 가정이 회복되며, 민족의 운명이 트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민족을 사랑하시고, 자기를 예배하는 나라에게 부흥을 주십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제대로된 살아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참된 예배를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참된 예배자 true worshipper 입니다.

 

본문의 아름다운 이야기는베다니 마을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엿새 전에 일입니다.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만이 이 여인을, '베다니의 마리아'라고 정확하게 명시합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나올때 마다, 예수님에 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발 앞에 항상 마리아가 무릎 꿇고, 조용히 앉아 있다는 것에서,

우리가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도 너무 교만하고, 너무 시끄러워요.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우리가 주님을 대할 때, 예배하러 들어올때 보면, 너무나 오만하고요,

주님의 발밑이 아니라, 주님의 머리 꼭대기에 기어오르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는, 주님을 움직여서, 주님을 조정해서, 내 마음 대로 뭐 좀 해보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에 발 앞에 침묵하고 있기 보다는, 마치 빚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고, 쏘아 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서는 그런 무례함이 없어요.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앞이 자기 자리임을 알아서,

발 앞이라도 예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좋아서, 거기에 조용히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란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망치와 정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채석장에서

이미 잘라낸 치수에 딱 맞게 준비된 돌들을 가지고 와서, 조립해서 붙였기 때문입니다.

 

보배로우신 주님과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안됩니다.

영적으로 준비가 안되어 있으니까, 겸손이 없으니까 시끄러운 거예요.

예배 드릴때 인간이 시끄러운 소리를 그렇게 내면 안되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드리는 팀들한테, 그것을 굉장히 많이 주지 시킵니다.

FD, 또 성가대, 밴드팀, 자기 순서 아니라고, 그래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껌 씹으면서,

자기들끼리 스포츠 얘기하다가, 갑자기 '어 11시야, 시작해야 돼',

이러고 들어오는 예배팀들은, 하지 말아야죠.

 

옛날에 그렇게 예배하는 제사장들, 잘못된 불을 드렸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다 죽여 버렸죠.

요즘 은혜로 봐준다고 해서,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도, 너무나 질서가 없어요.

인간적인 소리를 너무 시끄럽게 내다가, 시간만 되면, 자기 순서되면 나가서 연주하고, 하면서

예배를 해치워버리는, 그런 인본주의적 예배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거예요.

예배는 그렇게 준비안된 채로 허겁지겁 들어가서, 해치워 버리듯이 하는 그런것 아닙니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예배시간에 일찍 오세요.

   그렇게 설교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서 들어오지 마시고,

   한 30분전쯤에 오셔서, 기도하시고, 준비하시고, 그러면 주차도 넉넉하고,

   기도하면서 준비된 예배를 그렇게 드리셔야 됩니다.

 

그리고 예배에 맞춰오면서, 너무 인간적인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허둥지둥, 그렇게 대충 해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는 것처럼, 진정한 예배자는 몰입하죠. 확 빠져드는 것입니다.

준비되어서 하는 거예요. 경건한 침묵이 있어야 되요. 겸손이 있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자입니다.

 

▲요12:1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난지 얼마 안됐어요.

 

죽은 동생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는 체험했어요. 감격에 가슴이 벅차있는 거예요.

기적을 귀로 들은 사람과,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기적을 체험한 그들이, 기적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 앞에 놓고,

예수님께 그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 예수님께 그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배는 은혜를 받으러 온다고 하지만,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만,

실은 이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그 은혜를 보답해 드리는 것입니다. 반응하는 거죠.

 

한국교회에서는 예배 본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것 잘못 된 말이예요.

그건 마치 영화구경 하듯이, 우리 예배자들은 수동적인 제3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것이고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거예요. 체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거룩에 일부분이 되는 거예요. 불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 커서, 거기에 대해서, 나의 가진 모든 것을, 터뜨리면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장로를, 집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가난하고, 겸손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예배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먼저 예배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자가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목마른 심령이 있다면, 장소는 상관이 없어요.

 

아브라함은 어느 곳에서든지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어요.

바로 전날까지 이방신들이, 춤을 추던 이방신전이 있던 곳에서, 아브라함이 예배를 드렸어요.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과 사귀는 거거든요. 데이트 하는 거예요. 장소와 상관이 없어요.

시간이 상관이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항상 만나듯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차 안에서든지, 걸을 때던지, 산책 하던지, 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상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사귀는 사람이

바로 이 자리에서도, 파워풀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이 예배는, 성경에 나오는, 이 파워풀한 예배는,

베다니 마을에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너무나 평범하고, 가난한 집에서 일어났어요.

 

성경에서 나오는 엄청난 예배는, 전부 거의다, 성전에서 드려진 예배가 별로 없었어요.

뜻밖에 장소에서 터진 거예요.

 

예배하는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교도 좋고, 카페도 좋습니다.

어제까지 이곳은, 교총선생님들이 세미나도 보시고, 결혼식 예식 드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간에, 목마른 심령가진, 저와 여러분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곳이 거룩한 땅이 되는 거예요.

 

모세가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을때,

목동생활하면서, 불타는 떨기나무는,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불은 달랐어요. 꺼지지 않는 불이었어요.

지극히 평범한 현장이, 하나님의 불이 임하니까, 지극히 엄청난 현장으로 바뀌는 거예요.

 

예배란 그런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인데, 늘 듣는 성가 같은데, 늘 듣는 설교 같은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탁 기름 붙는 거예요.

그 순간에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능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임재거든요. 장소가 상관이 없어요.

 

제가, 월남전 때 포로가 되었던 한 미군장교의 수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특별히 감동적인 장면이, 포로수용소에서 예배드리던 장면입니다.

 

포로수용소는 육체적인 고문도 있고, 음식도 쥐꼬리만큼 주고,

그러니까 말할 수 없이 힘든데, 그래도 그들을 살렸던 것이 예배랍니다.

 

이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가? 설교자가 없고, 성경책이 없으니까,

성경책이 딱 한권 있는데, 다 낡아빠진 그 영어성경책을 월맹군 장교가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면 굉장히 많이 얻어맞고,

대표가 가서 월맹군 장교 앞에서, 그 성경을 한 시간씩 베껴 쓸 수 있었어요.

 

근데 베껴 쓰는 것도, 월맹군 장교가 눈앞에다가 담배를 뻑뻑피면서,

막 꼬집으면서, 방해하는 도중에 필사적으로 베껴야 되요.

 

그리고 베껴 쓴것을, 이제 감방으로 가져오면, 하루 안에 돌려줘야 되기 때문에,

감방에 한 두장 베껴 써 오면, 동료들이 쫙 돌려 가지고 외우는 거예요.

김상사 너는 요한복음 11~5절까지 외워, 외워가지고 잊어버리면 절대 안돼.

진짜 말씀이 성육신 되는 거죠.

 

네가 이것을 한자라도 잊어버리면, 우리는 말씀이 텅 비는 거야.

그렇게 매주일 필사적으로 외운 것입니다, 군인들이 전부 다.

그렇게 해가지고 요한복음을 통째로 외우고, 성경을 암송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또 큰 소리로 찬양하면, 혼나니까, '지금부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찬양합니다.' 그러면,

입모양으로 찬양하는 겁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 막 찬양하면서 다 우는 거예요.

 

끝나고 나면, 이제 성만찬을 하는데, 빵과 포도주가 없잖아요.

그 쥐꼬리만큼 배급되는, 그 마른빵이랑 멀건 스프를

십분의 일씩 전부다 세이브 해가지고, 성만찬을 위해서 모으는 거죠.

 

'이것이 주님의 살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입니다.'

그들이 미국의 화려했던 교회당에서 예배드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령의 강렬한 임재가,

그 포로수용소 예배 가운데 있었고, 그 예배가 그들을, 죽음 같은 고통에서 살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어떤 환경도, 내가 예배드리지 못할만큼, 힘든 환경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몸이 아프고, 바쁘고, 인생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예배가 필요해요. 그래야지 여러분이 삽니다.

 

깨어진 부부관계도, 살아있는 예배를 통해서 살아날 것이고,

깨어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예배를 통해서 살아날 것이고,

지금 쪼들리고 있는, 여러분의 재정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회복하길 원하시는 겁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공간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이 예배에 임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자죠.

 

 

◑2. 예배에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예배의 엔진은 말씀이예요. 교회가 교회인 것은 거기에 말씀이 있기 때문이예요.

말씀이 끊어지면, 그 교회, 교회 아닙니다.

아무리 건물이 좋고, 조직이 있어도,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거예요.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가 외형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 차는 차가 아닙니다.

말씀이 떨어지면, 그 교회는 죽은 거예요.

 

살아있는 교회 한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서, 사람들을 바꿔 놓습니다.

이 설교 말씀은, 하늘의 메시지가, 땅에 언어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한테나, 아무 때나 말씀 주는거 아니예요. 말씀의 기근이 오면, 말씀이 딱 끊어져요.

그러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께 말씀을 주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상황속에, 하나님이 넣어주고 싶어하는, 어떤 하늘의 메시지가 있다는거에요.

이것을 붙잡을 때, 이 말씀이 나를 살리고, 나를 치유하고, 내게 비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여기 영과 진리에서, 이 <영>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영이예요. 소문자 spirit 거든요.

이 말은 무슨 말이야면요, 하나님의 영은 문제가 없어요. 항상 우리의 영혼이 더러운 게 문제예요.

더럽혀진 우리의 영혼을, 여기서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의 더러운 영을 깨워서, 성령의 감동을 줘서,

하나님께 반응하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이렇게 파격적인 헌신을 할 수 있느냐?

마리아는 항상 말씀을 듣는데, 집중하는 여인이었거든요.

 

마리아는 항상 복음서에 나올 때 마다, 예수님의 말씀에 몰입하고 있었어요.

너무 정신없이 몰입하고 있자, 언니가 뛰어왔어요.

'너는 왜 부엌일 안 돕고, 말씀만 듣고 있니?' 그러니깐 마리아가 일을 안한게 아니고,

마리아도 일을 하다가 말씀이 좋으니까, 너무 몰입 되어버린 거예요.

 

여러분 설교를 듣는 사람은 많은데, 몰입하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벙쩌가지고, 그냥 완전 도취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때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오직 구속한 주님만 쫙 들어오는 그 몰입,

 

몰입을 하니까, 마리아는 설교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거예요.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를 듣습니다마는, 메시지의 핵심을 깨닫는 사람은 적어요.

 

십자가 복음의 진술을, 예수님의 설교에서 끄집어낸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12제자들도 제대로 그때까지, 예수님의 그 수많은 설교 중에서,

십자가 복음의 그 진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 여자만 깨달았어요.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본문 요12:7절을 보시면,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무슨 말이예요? 유대에서는요, 고귀한 분이 돌아가시면, 장례 치를 때값비싼 향유를 준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여자가 하필이면, 많은 헌신중에서, 이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이 여자가 예수님의 다가온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 죽음의 의미가 얼마나 귀한것인지를 이 여인은 깨닫고 있었던 거예요.

 

이 여인은 그냥 말씀을, 듣고 멍하니, '좋은 설교네..'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메시지 속에서, 삶속에서, 십자가 사랑을 붙잡은 거예요. 복음의 본질을 잡은 거예요.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을, 우리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죄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복음의 진수는, 듣기에는 간단히 보이지만, 이게 간단한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lip service아니거든요.

그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치를 것이냐? 이게 결정하는 거죠.

 

근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이 만큼 사랑한다.' 그러시고,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목숨 보다 더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이해할 때, 우리는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주제를 알잖아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생명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이 폭력과 이 음란과 분노와 우울증과 거짓이 가득 차서,

9시 뉴스에 보고 있는, 그 세상에 그런 모든 쓰레기 같은 요소들이 다 우리에게서 흘러 나온건데,

이 몹쓸 세상을 위해서, 이 몹쓸 인간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걸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어요. 우리에게는 다 꿈이 있어요.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우리 자식을 잘 키워서, 출세를 시키고,

다 그런 꿈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유일한 꿈은 십자가 였습니다.

 

우리는 다 살려고 세상에 태어났는데, 예수님만 죽으려고 세상에 태어나셨어요.

33년 예수님의 인생은, 다 십자가에 그림자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그 십자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믿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 그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그냥 들은게 아니라, 몰입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 복음의 진수를 깨달은 거예요.

나를 향한 예수님의 그 엄청난 사랑을 깨닫고, 부서질때, 참된 예배자의 헌신이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이걸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의무감으로 교회 일 부탁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집사님 일찍 나와서 주차봉사 해 주세요.

이것을 십자가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시키기엔 너무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서 이 복음을 깨달아야 해요. 나를 향한 사랑을 깨달아야 돼요.

그래야 예배, 정말 중요한 요소인 제물을 드릴 수 있어요.

 

 

◑3. 예배는 역동성, 파격이 있어야 되요.

 

마리아는 자존심을 깨고, 그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그 당시 사회에서 남자들로 가득찬 방에 들어왔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한근이나 되는 아주 이 값비싼 나드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이 정도되는 나드향유면요, 적어도 삼백 데나리온, 우리 돈으로 3000만원이상 시가입니다.

굉장히 이 비싸죠? 그 당시 1년 노동자 연봉입니다.

그 정도 향수라면 샤넬 No.5 원액을 이 만큼 갖고 와서, 한 순간에 깬거예요.

 

근데 마리아가 결코 부자가 아니거든요. 아마 이 정도 향수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에 가지고 있는 은행계좌를 다 비웠을 것입니다. 전 재산을 다 턴 파격적인 헌신을 한거죠.

 

이 본문을 보니까, 이 향유가 마리아가 찔끔 찔금 낸게 아니라,

터져서 완전히 온 집안에 냄새가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예수님에 머리에서부터 향유가 부어 내려져왔다고 그랬어요.

 

저희 교회가 이번에 임직자들 MT 갔을때, 한 공동체팀에서 연극을 했는데,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했거든요.

 

근데 그 연극에 출연하신마리아역을 맡은 집사님이 향유를 깰 때

자기 이마에다 되고 땅 깨더라구요. 그런데 이게 성경적인 거예요.

서서 자기 이마에서 깼으니까, 예수님 머리에서부터 이렇게 쫙 흘러내렸죠.

그래서 발까지 흘러내린 것을 마리아가 닦은 것입니다. 정말 요즘 스텐다드로도 파격적인 행동이죠.

 

예배는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지만, 이렇게 파격적으로 터뜨리는 거예요. 역동적으로 드리는 거죠.

이것은 판에 잘 짜여진, 그 당시 율법이 말하던 잘 드리는 예배 교과서가 아니였어요.

 

그런데 교과서 데로 하면 재미없잖아요. 예배에는 질서가 있지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나만이 알 수 있는 최고의 파격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터뜨리는 거거든요. 표현하는 거거든요. 펄펄 뛰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역동적인 분이세요. 오순절 다락방에서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성령의 바람이 급하고 강한 불처럼 바람처럼 막 왔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님도 역동적이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막 거니셨다고, 왔다갔다 하면서,

막 아담을 기다리셨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러, 물위에서 배에서 이쪽까지 오는걸 기다리지 못하고, 물위를 막 뛰어 가셨어요.

 

역동적인 하나님. 하나님은 그렇게 파격적으로 우리를 사랑할 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왕자가, 왕궁에 격식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파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까 제가, 예배드릴 때는 인간의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지,

하나님께 반응하는 소리를 내지 말라 그런건 아니예요.

 

예배는 그렇다고해서, 죽은 무덤같이 정적 속에 드리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터뜨리는 파격적인 외침은 있어야죠.

 

펄펄 뛰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면서, 찬양하면서,

저는 이런 좀 펄펄 뛰는 청년 찬양예배가, 우리 교회에도 만들었으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게 살아 있는 예배죠.

 

마리아는 지금, 큐시트에 없는 걸 한 거예요. 그냥 옥합을 그냥 드리려고 왔다가, 그냥 깨뜨려버린 거예요.

그 순간에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그냥 드린 거예요.

 

왜냐하면, 이 마음을 주체할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내게 주신 그 십자가 사랑이, 너무 커가지고, 마리아는 큐시트에 없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파격적인 드림을 다 버버린거죠.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 지금 하는게 아니죠.

완전히 예수님한테 흠뻑 가버린 사람이 하는 거죠. 몰입하는 거예요.

 

   마리아는 향유만 부은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했습니다.

   여인에 있어서 이 머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대한민국 여성들이 이 미장원에 가서 머리에 부릿지하고, 드라이하고, 린스하고, 샴푸하고, 파마하고,

   무스하면서 드리는 돈은 우리나라 1년 국방 예산이죠. 엄청나게 정성을 쏟는,

   여인의 자랑이요, 그 영광 같은 그 머리를...

 

 

◑4.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닦는 걸레로 쓰면서, 자기 1, 가난한 그녀의 모든 전 재산을 털어넣은 향유를

남들은 요만큼씩 쓰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서부터 확 부어버리는,

그 파격, 그 충격, 정말 무리 한거죠. 오버 한거죠.

 

이 엄청난 예배는 무슨 뜻입니까? 마리아는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있었어요.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베스트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어요.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엿세후에 이 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온 인류를 살릴것이라는

그것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베스트를 드리면서, I love you this much하는,

하나님께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허겁지겁 팍 터뜨리면서,

 

'주님 저 가진 거 얼마 안되지만, 나를 위한 당신의 사랑에 나도 이렇게 화답합니다.

나도 이렇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읽으시고, 감동 받으신 거예요.

열두제자가 아닌, 어떻게 이 마리아에게 이런 믿음의 고백이 나왔겠습니까?

 

열두제자는 그토록 공들인 열두제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가 오른편, 왼편에 앉아서 한자리 할것인가를 다투고 있는데,

이 여인이 자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알고 있는 거예요.

그 십자가 사랑에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고, 반응하고 있는 거예요.

 

외롭고 힘드셨던 예수님이, 눈이 번쩍 뜨이셨어요. 감동하셨어요.

예배는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거예요.

 

보통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써,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배는, 그냥 우리가 와서 은혜 받는 자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중요한 후반전이 빠졌어요. 예배에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은, 받은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그게 드림입니다. 제물을 영어로 오퍼링(Offering)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헌금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드린다는 뜻이죠. 예배는 드림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이죠.

드릴때 아무거나 드리는거 아니예요. 우리가 드린다고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거 아닙니다.

쓰다남은 물건이나, 재능이나, 시간으로 대충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를

지금 이 순간 가장 기쁜 마음으로, 계산기 두드리지 않고, 파격적으로 깼버린 거죠.

 

이 재물은 물질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재능, 시간, 마음의 자세, 다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드리는 예배는, 보배로우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섬기기 위해, 여러분은 각자 다른 부서에서, 섬기셨어요.

 

저를 감동시키는 예배자들이 우리 교회에 많습니다. 제가 아침 7시 조금 넘어서, 들어오는데

저보다 일찍와서 주차장에서 담배꽁초 줍고 계시는 우리 주차위원들,

그 분들은 우리가 월급 주는 분들 아닙니다.

 

육십이 넘으신 사장님들이, 세상에서 열심히 존경받는 분들인데, 영하 15도때도 담배꽁초 줍고 계십니다.

그 분들의 예배는 그때부터 시작 된거예요. 누가 시키지 않았어요. 옥합을 깨는 거죠.

 

그냥 주차봉사만 기계적으로 해도 되는데, 이거 다 담배꽁초 줍고, 쓰레기 줍고,

여러분 그런 주차위원들한테 여러분이 차를 주차하면서, 불평불만 대들지 마세요.

누구는 성골이고, 누구는 진골이라서, 누구는 예배시간에 늦게 와서, 주차하면서 불평하고,

누구는 아침 7시에 와서, 오후 4시까지 있으면서, 담배꽁초 주우면서 섬깁니까?

주님의 십자가 은혜는 똑같이 받아놓고, 어떻게 반응하는건 그렇게 다를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성가대를 섬기는 분들도 마찬가지고, 저는 설교로 예배를 섬기죠.

저는 이 설교에서 옥합을 터뜨리는 설교를 해야됩니다.

 

교회가 좀 컸다고 해서, 설교를 오래했다고 해서, 그냥 대충대충 해치워버리는 것은,

나를 향한 십자가 사랑을 모독하는것입니다

 

성가대 연습도 마찬가지죠. 제가 항상 성가대에 요구하는 것은 영으로 찬양하길 바란다는 것이죠.

기업체 인터뷰 시간도 안 늦으면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대충 연습하고,

기도하지 않는 마음으로 대충 부르는 찬양은, 옥합을 깨는게 아니죠. 그건 주님을 모독하는 거죠.

우리 성가대 중에는 그런분 한 분도 없을 거예요. 안내팀도 마찬가지고,

 

우리 주일학교 예배가 얼마나 뜨거운지 몰라요. 예배전부터 와서 기도하는 부모님, 선생님들이 있거든요.

준비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에게 누가 강요했습니까? 아니예요. 그 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거예요.

그 십자가 사랑이 너무 좋아가지고, 어떻게하면 더 할까 싶어서,

그렇게 자기에 옥합을 깨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행위를 보기전에, 여러분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교회에게 헌금하기전에, 교회에서 봉사하기전에,

여러분 그 순간에 이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되요.

 

그런데 많은 경우 그렇치 않거든요. 여러분은 똑똑하기 때문에 적당히만해도,

남들이 열심히 하는것 정도 할 수 있거든요. 근데 그건 진짜 예배가 아니죠.

 

진짜 예배는 받은것 만큼 반응하는 거예요. 예배는 거룩한 낭비예요.

엄청나게 파격적으로 하는거에요. 계산기 두드리는게 아닙니다.

 

뭐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가 있는가? 여러분 마리아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 할수가 있죠.

그렇지만 그것만 보지말고, 주님에 사랑을 생각하십시요. 하나님은 정말 오버해서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천사 몇 명만 보내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허리가 휘었어요. 무리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한테 좀 무리 못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한테 좀 오버해서 사랑을 표현 못해요?

 

우리는 조금만 헌신하고, 무리해 놓으면, 피곤하다, 지쳤다, 나도 할만큼 했다,

그런 짜증나는 예배를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감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받은 사랑만큼 터뜨리는 거예요.

 

저는 매주 설교가 옥합을 깨뜨리는, 이 여인에 심정으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매주 헌금이, 봉사활동이.. 옥합을 깨는 그런것이기를 바랍니다.

 

옥합을 깨서 그 비싼 향유를 주님한테 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최고라는 것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에 합당한 칭찬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걸 행동으로 선포하는 거예요.

 

하나님 당신이 주신 은혜가 최고입니다. 그게 찬양이예요. 찬양은 하나님을 칭찬해 드리리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최고다. 더 이상 그럴수가 없다..'

 

진짜 찬양은 노래 잘 하는게 아니고, 이 드림이 진실할 때 오는 거예요.

액기스를 뽑아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에, 내가 가진 최고를 가지고 화답할 때,

불꽃이 튀는 거죠.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배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자 그런데, 이 예배를 방해하는 예배 킬러가 있어요.

 

요12:4~5 제자중 하나로써,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 하니

 

이 유다가 실은 어떤 사람이였는지를 보여주죠.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괘를 맡, 거기 있는 것을 훔쳐감이니라.”

 

자 보세요. 유다의 주장이 표면적으로는 아주 그럴싸 합니다.

삼백 데나리온, 삼천만원이나 되는 향수를 꼭 지금 깨뜨릴 필요가 있냐?

이거는 낭비다. 이거를 가지고, 가난한자들에게 구제헌금으로 쓰면 좋지 않겠느냐 하는

듣기에는 굉장히 그럴듯한 발상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진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람이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나중에 요한은 알게 되죠. 실은 회계를 맡고 있다가,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격으로

살금살금 자기가 훔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구린 부분이 있으면요, 역으로 그 부분에서 자기가 구리니까

그것을 오히려 역으로 남을 공격하는데 씁니다.

 

자 여러분 저는 그래서요, 하나님의 일을 할때, 우리가 비판받는건 당연해요.

그런데 비판받는 것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 보다, '저는 누가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악플 이런거 옛날부터 읽어본적이 없습니다. 몇 개 읽다가 말았어요.

왜냐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여러분 무게를 두지 마십시요. 신경을 쓰지 마십시요.

 

우리 교회 리더쉽 철칙 알죠. 뭐든지 저는 얘기하면 꼭 그 사람을 책임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도 구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집사님은 평소에 개인적으로 얼마나 구제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집사님에 구제헌금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삶으로 하지 않으려면 말하지 말라는 거죠.

 

왜냐하면 말에 우리는 위선이 있어요. 가식이 있어요.

그럴듯한 말로 유다가 가난한자들 돕자고 그랬지만, 실은 그게 아니였던 거예요.

진정한 이웃사랑의 힘은 그런게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8절 가난한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무슨 말이예요? 가난한사람은 항상 너희 옆에 있으니까, 가난한사람은 항상 도와야 된다.

지금도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가난한 집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실 분입니다.

가룟유다가 아닌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죽었어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그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가난한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에게 다 쏟아부으면서, 예배하는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거예요.

 

가난한자들을 사랑해야 되지만, 그것은 사역이예요. 사역과 예배는 달라요.

그것을 구태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경쟁시킬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저 어떤분들은 그런 얘기합니다. 예배드릴때 그렇게 잘 드릴 예산이 있으면,

그 돈을 가지고, 가난한자들을 돕자...

 

예배드릴때 헌금할 돈을 가지고, 가난한자 도울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외국으로 휴가갈 돈 줄여서, 제주도로 가시고, 그 돈으로 가난한자를 도울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 쇼핑할 돈을 좀 줄여서, 가난한자를 도울 생각을 하셔야지,

왜 하필이면 헌금할 돈을 가지고, 경쟁을 시킵니까.

 

인간은 악해요. 어떻게 우리가 인간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고 난 뒤에야

우리는 그 힘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가난한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건 순서가 거꾸로 됐다는 거죠.

예수님을 진실로 예배하는 자만이, 가난한 형제를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정성을 드려 예배할 때, 이것을 가룟유다가 그럴듯한 명분을 들어 공격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다른 제자들까지 가세해서, 유다의 편을 들어서,

마리아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예배는 영적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영적전쟁에서, 이 사탄은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인싸이더들, 교회 안에 있는, 유다와 제자들을 순간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중에도요, 잘못하면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참된 예배자로 공격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 공격하는 논리는 항상 그럴듯해요.

아 예배시간에 가서 우리 가난한 사람을 돕는 봉사활동 해야지,

그 헌금있으면, 구제헌금 해야지, 그럴듯한 논리가 있는데,

실제로 자기 삶에 있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은,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아요.

 

예배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거는, 경쟁 하는게 아니예요.

그리고 살아있는 예배는, 항상 그럴듯한 논리로, 사탄이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준비하고, 예배를 들어와야 됩니다.

 

여러분 중보기도팀이, 기도로 준비하지 않는 예배는 ,반드시 사고 생깁니다.

예배 도중에, 휴대폰 울리는게 그게 항상 사고인줄 아세요? 결정적인 순간에 타이밍을 끊어요.

 

참 이거 사고 아니예요. 멀쩡하던 사람이 설교시간만 되면 주무시다가, 끝나면 딱 눈 뜨는게 그게 사고까요?

아니예요. 그 뭔가 있는 거예요.

예배에 나의 온 몸을 드리는, 준비가 없으면요, 우리 중보기도팀이 준비하지 않으면,

영적전쟁으로 우리가 망가져요.

살아있는 예배가 얼마나 파워풀한지를 알기 때문에, 예배 킬러가 있는 거예요.

 

이 살아 있는 예배는요, 거짓된 영성을 드러나게 만들어요.

가룟유다가 멀쩡하다 갑자기 자기에 거짓된 영성을 드러내고 말았잖아요.

 

일주일 뒤에 성만찬 할때도 가룟유다는 드러났어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진짜 십자가 복음이 나오면요, 그리고 진짜 십자가 복음에 제대로, 반응하는 예배자가 있을때,

가룟유다들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영성이 드러나는 거죠.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안에 있는, 거짓된 영성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가룟유다가 쫏겨 나가기 바랍니다. 가식적인 예배가 사라지기 바랍니다.

 

참된 예배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이 축복이 있습니다.

근데 마리아가 이 모든 비판을 당하면서도, 침묵하고 있었어요.

 

여러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때, 항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하지 않아요. 공격이 들어와요.

그렇지만 여러분 인간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전쟁은 하는게 아닙니다.

 

같이 소리 높여서 맞서 싸우지 말고, 침묵과 예배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냥 계속 전진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세요. 예수님이 마리아를 변호하시고, 높여 주십니다.

 

7절에서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감싸주시면서, 가만 두라’ Leave her alone.

그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 제자들을 야단치십니다.

 

마가복음 146절에서 좀 더 자세한 설명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영어로 보니까, She has done a beautiful thing to me. 그녀가 내게 너무나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합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주님이신데, 주님이 이 예배자의 행동이 너무나 내게 아름답다 하시면 끝난거죠.

여러분 마리아를 보호하시고, 높여주시는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의 예배위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게 기름부우심이예요. 예배 가운데 이게 꼭 필요하거든요.

 

예배는 내가 드려서 끝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심으로써 완성되는 거예요.

참된 예배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인정해주시고, 선포해 주시는 말씀은 바로 성령의 응답이예요.

 

나를 향한 하나님에 사랑에 나도 최고로 화답했을때,

하나님이 그게 너무 기쁘셔서, 불과 바람과 능력으로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그게 예배에, 은혜의 완성이예요.

오늘 그런 성령님에 인정하심이, 기름부우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 내가 너의 예배를 받겠다. 너의 예배를 받겠다. 내가 기분이 너무 좋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서 하나 더 나가셔서, 그 누구도 듣지 못했던 엄청난 칭찬을 마리아에게 주십니다.

 

막14: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와 예수님이 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런 칭찬을 한 인간은 이 여자 하나뿐입니다.

베드로, 바울 아니예요. 다윗도 이런 칭찬을 들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행하신 그 수많은 기적중에, 그 수많은 설교 중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이야기도 셋트로 가져가서 말하라고 한 것은 이 스토리밖에 없습니다.

이 여자는 전무후무한 칭찬을 들은 거죠.

 

예수님이 이 사건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요?

왜냐하면 이 여자의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이라 했죠?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내가 너를 이 만큼 사랑한다면서, 자신에 베스트인 아들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놓으면서,

다가오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복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저도 주님을 그 만큼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정신없이 계산기 두드리지 않고, 완전히 몰입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팡 쏟아내는게 바로 예배예요.

 

이것이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고, 최고의 사랑에, 최고의 헌신으로 화답하는

이 손뼉이 터질때, 감동이 터지는 거예요. 거기에 부흥이 임하는 거예요. 능력이 임하는 거예요.

변화가 임하는 거예요. 축복이 임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반응이거든요. 하나님에 베스트에 나에 가장 즐겁게, 가장 열정적으로 계산기 두드리지 않고,

몰입하면서 쏟아낼 때, 이런 예배를 드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게 아니라, 인생이 변합니다.

 

여러분은 예배서 은혜 받았다하면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는걸로 생각하죠.

'아 오늘 예배 좋았어' 그게 아니예요. 인생이 바꿔요.

 

그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전까지 모세는 허리 휘여진 80대 노인에 불과 했는데,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지팡이 하나 쥐고 가서, 이집트를 덜덜떨게 하며,

2백만 민족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가 됐어요.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고 나면 여러분이 바뀔거예요. 여러분의 자녀가 바뀔거예요.

이 민족의 운명이 바뀔거예요. 통일이 올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민족을 통해서 열방으로 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체험한 사람은, '야 예배 좋았지'가 아니라,

'나 이렇게 못살겠어, 나 이제 하나님의 쓰임을 받겠어' 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런 예배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주 예수를 높여드리는,

그런 예배자, 다 되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우리,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정하려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립니다.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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