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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자기부인

LNCK 2015. 3. 16. 07:45

◈십자가와 자기부인           8:34~38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의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8:34~36

 

 

◑서론

 

▲십자가는, 과거 역사 속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주님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매일 임재하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십자가 체험의 첫번째 단계는, 바로 옛사람이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힘으로써, 죄에서 해방되는 체험입니다.

우리를 해방시키는 십자가, 그것이 첫번째 십자가의 체험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롬6:2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

즉 '죄에서 해방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첫번째 체험한 사건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지난 시간에 살펴 보았고요,  ☞십자가와 자기 해방 

오늘 이 시간에는, 두 번째 십자가에서 체험해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십자가의 체험. 이것이 두번째 단계의 체험입니다.

 

첫번째 단계의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십자가의 체험에 이어

반드시 함께 이루어지는 체험이 두번째 단계, 자기 부인입니다.

 

이 두 단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 고백이 점점 더 바뀌게 됩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신앙 고백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앙 고백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신앙의 고백.

 

   둘째 신앙 고백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고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는 고백.

 

   셋째 단계의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를 지신 목적입니다.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죄인의 삶 속에 거하심으로써,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그리스도.. 이것이 십자가의 목표입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 신앙으로 살아갈 때, 계속해서 깊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두번째는, 나의 십자가 죽음이 반드시 따라와야 우리는 십자가를 진정 체험할 수 있는데

내 자아를 죽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의 체험을 해야합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의 능력과 은총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흘러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자아라는 무서운 존재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가 살아 있는 문제 

 

하덕규 씨가 만들어 불렀던 '가시나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그러나 실상은 이 가사를 더 정확하게 바꾼다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 것이 아니라, 온통 나뿐입니다.

내 속엔 온통 나 밖에 없어.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 대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외부에서만 온다면 어쩌면 쉬운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온통 죄로 물들어 있다는 것, 내 자아가 자기 사랑으로 온전히 물들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아픔이요 고민이요 문제인 것입니다.

 

이 물 속에 한 컵 속에 작은 물감을 떨어뜨리면 물 전체가 다 물드는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아 전체가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물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내 속엔 내가 전부라서. 내 속엔 나 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조금 개선하고 바꾸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네 자신을 잘 보살펴라, 네 자신을 확장시켜라,

그리스 철학에서는 네 자신을 알라, 자아에 대한 여러가지 처방이 나왔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아는 죽이는 길 밖에 없다.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길 밖에 없다.'

 

프랑스인이 되려면 프랑스인인 척 한다고 프랑스인이 됩니까? 프랑스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죽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자아가 살아있는 문제는, 영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예배, 봉사, 섬기는 일,

이 모든 일에 있어 심지어 영적인 훈련까지도, 우리 자아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무섭습니까.

 

때론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섬김 속에서도 우리의 자아가 살아 있는 것을, 아십니까?

 

열심히 섬기다가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시험에 드는 나, 자아가 살아있는 것이지요.

완전히 죽은 제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제물은 말이 없는데.

나의 자아가 살아있기에, 우리는 섬기면서도 자아가 살아있어요.

 

심지어는 영적 훈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있고 기도하고 여러 훈련을 받으면, 자아가 죽어야 하는데 때로는

영적 훈련조차, 오히려 자아를 더 강하게 만드는 때가 있어요.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 교만해져서 자아가 더 강해져요.

 

이것은 오늘 이 시대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라는 두 사람을, 빌립보 교회에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구하는데  빌2;21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의 모습에서조차, 자아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는 거죠.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구하는도다.'

 

   우리가 입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 깊은 동기에서는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어쩌면 예수님을 포장한 자기의 비즈니스가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의 사역 또한. 저부터, 목회자부터.

   어쩌면 겉으로는 설교하고 봉사하고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사역이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자신의 본질을 위한 사역으로 만들어버리는 모습.

영적인 사역을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예수님으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만큼 우리의 자아가 무섭습니다. 이 무서운 자아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죽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그 자아를 제거하는 수 밖에 없는 거죠.

 

C. S. 루이스가 쓴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사탄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책이죠.

 

스크루테이프라는 사탄이, 자기 조카인 웜 우드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코칭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편지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여기서 '원수'는 예수님이에요. 착각하시면 큰일납니다. (보통 원수는, 사탄이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환자'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거예요. 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착각할 때가 많아요.

 

사탄이 자기 조카에게 이렇게 코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보고, 그분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강하지 않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말로, 정말 강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절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

그러므로 내가 '환자'(그리스도인)들을 '원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떼어놓느냐 하는 것, 한가지 뿐이란다."

       

'환자'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강해질 때가 언제냐면,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때' 가장 강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원수'(예수님)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길 때,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절,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흔쾌히 내어놓는 무서운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떼어놓아야 한다.. 는 겁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여기엔 진리가 숨어 있어요. 사탄도 진리를 아는 거예요.

우리가 언제 가장 강해집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 된다는 거예요.

 

사탄도 아는 진리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는 강한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거죠.

 

 

◑이렇게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의 부패함과 사악함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런 고백을 하지요.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압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선하다고 생각했던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옷'과 같은 선함이라는 겁니다. 사64:6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망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우리가 죄를 범하고 실패하고 좌절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죠. '내가 이것밖에 안돼?'

 

   여러분 실망하지 마세요. 실망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절망해야 합니다.

   실망만 하는 사람은, 계속 실망만 하는 거예요. '내가 이것밖에 안돼?' 자존심이 살아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실상은 훨씬 심각한 거예요. 아직도 절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절망했던 로마서 7장의 고백,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온통 나 자신뿐이고 죄악뿐입니다.'

'모태로부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나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자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나에 대한 기대가 살아있고, 소망이 살아있고, 자존심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실망하죠.

그런데 이 힘으로 해보려고 할 때 또 실망합니다. 계속 실망하는 인생입니다.

 

'실망'이 아니라, '절망'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하게 해야 되는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이죠.

 

둘째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격적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이렇게 예수님이 요청↑하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제자들의 인격적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성령님께서 옛사람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어요. 성령님은 '위대한 장의사'라는 말이 있어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장의사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성령님이에요.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기에, 나의 동의와 순종 없이 억지로 우리를 끌고가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가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동의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동의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결단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고, 인격적인 참여를 하지 않으면.. 로마서 6장에서 머물게 됩니다.

로마서 8장으로 건너가지 못해요.

 

왜 롬7장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수없이 실패했던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사도 바울이 살았던 경험이 있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로마서 7장이 튀어나온 거예요. 거기에 머물러서는 8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죠. '나는 날마다 죽노라.'

   왜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을까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살아 있기에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순종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나에게 모든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순종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아침에는 십자가를 지고 시작하고

저녁에 돌아올 때는 어디다 십자가를 뒀는지 모르고.. 왜 그럴까요?

 

맥스 루케이도가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못 박혀 있는 십자가인데

왜 우리는 십자가를 어디다 두고 잊어버렸나. 예수님께는 있는데 우리 십자가에는 없는 게 무엇일까?'

 

그게 바로 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못이 있어요. 우리 십자가에는 못이 없어요.

대신에 우리의 십자가에는 바퀴가 달렸고, 목걸이가 달렸습니다.

 

못은 뭘까요? 순종입니다. 말씀의 못이요, 순종의 못입니다.

때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못이 우리에게 박힐 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다.

 

순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순종하라고 할 때, 그 순종의 못에 박힐 때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다고 할 때

그 순종의 못이 우리에게 박힐 때 고통스러운 겁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그 못이, 우리 나 자신의 십자가에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십자가는 달콤한 삶이 아닙니다. 아픈 삶입니다. 찔리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겁니다. 피하고 싶은 겁니다.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못 박힌 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당시에 사형제도 중에 이런 게 있었죠.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시체와 함께 묶어버리는 겁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거예요. 죽은 사람의 독기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계속 전달됨으로 서서히 죽이는 거예요.

   얼굴과 얼굴을 배와 배를 맞대고 묶어 죽이는 사형 방법이 있었어요.

 

   사도 바울은 그 모습을 연상시켜서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우리의 옛사람이 죽음에 넘기우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시체를 끌어안고 함께 장사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바로 이것에 우리가 성공한다면,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성공한다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일이 바로 로마서 8장의 고백이에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인 크라이스트의 삶을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

즉 <연합>이 일어납니다.

 

로마서 810~1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몸은 죄로 인해 죽으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기 영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그리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안에'라는 말이 8장에는 반복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 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육체대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어요.

 

   그 이후로 그는 아라비아 3년동안 광야에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는 체험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나 육체로는,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처럼 친밀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영으로는, 훨씬 더 깊이 있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던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 단지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뿐만 아니라

죄인 안에 거하시는 연합의 삶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신 거예요.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자기 해방을 이루신 거예요.

그런즉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자기 부인입니다. 해방/죽음 이후에, 나오는 자기 부인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닌데 살아 있어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의 삶을 체험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

이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 이것을 가르칩니까?

   세상의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자기 자신과의 연합을 말하는 지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임하셔서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이 예수 안에 거하시는 인격적 연합, 하나됨.

   그것을 약속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려면, 자기를 부인할 수 밖에 없어요.

 

수백만 권이 팔린 로버트 머머라는 분이 쓴 <내 마음 그리스도 인의 집>이라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그 책이 고전이 된 것은 그 분이 어느 교회에서 한 설교인데,

그것이 너무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치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내 마음은 집과 같은데 예수님이 내 마음을 찾아와, 내 집에 예수님이 함께 영접했어요.

사시도록 한 거예요. 방을 한 칸 내드린 겁니다. 부엌도 같이 쓰고, TV도 같이 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집 안에 거하시다가, 갑자기 안방의 비밀 벽장을 여시려고 하는 순간,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거기는 안 됩니다. 프라이버시도 있어야죠. 그러시면 저랑 같이 못 삽니다.'

거기에는 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내 집에 초청해서 같이 살지만, 레지던트지 프레지던트가 아니라는 겁니다.

함께 살긴 살아요, 그런데 주인은 아닌 거죠. 같이 살지만, 집문서는 안 드리죠.  

내 마음의 그리스도의 집에 과연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손님입니까.

 

이 한 가지 포인트.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인격적으로 내어드렸느냐.

아니면 필요할 때마다 부르는 손님인가요?

 

'예수님이 저랑 같이 살지만, 방 안에 가만히 계시고, 수시로 밖으로 나오시지는 마세요.

제가 원치 않을 땐, 그냥 방에 계세요.

내가 놀러갈 때는, 그냥 집 좀 지켜주세요. 교회 갈 때만 동행해주세요.'

 

그런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아침마다 예수님께 '제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사를 갈까요 말까요? 이 옷 어떻습니까? 예수님.'

이렇게 모든 삶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는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나를 구세주로 영접했어요.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로마서 5장, 6장을 체험한 거예요.

 

   그런데 8장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즉 내 안의 주님으로 거하시도록 내어드리기 위해서는, 나를 부인하는 수 밖에 없죠.

   나의 모든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골로새서 127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십니다.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언젠가 나타나는 비밀인데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감춰왔던 비밀은, 바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너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역사 속에 오셨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셨다는 거예요.

단지 감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거예요.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게 내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비밀이 되기를 바랍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그 믿음의 삶을,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많이 맺는다.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붙어있는 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 자존심 세우고 싶죠.

떨어지는 순간 죽음입니다. 가지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유일한 자존심은 나는 붙어있을 거야라는 자존심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는 아무것도 예수님 없이 붙어있을 때 그게 최고의 능력이요, 우리 인생의 비밀인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체험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영광스러운 고백을 합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랬듯이

지금도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그랬듯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는 것,

 

내게 사는 게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 고백을 담대하게 할 자신이 없어요. '가끔'은 그렇겠죠.

그러나 '항상'은 아직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몸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인생을

함께 결단하며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글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만일 24시간 동안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단 한 가지만 빼고, 당신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당신의 건강, 상황, 스케줄, 문제..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고, 단 한 가지만 바뀐다.

예수님이 하루동안, 그 분의 마음으로, 당신의 마음속에서 주장하여, 당신의 삶을 사시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하루 휴가를 떠나고, 예수님의 마음을 전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 분의 우선순위와 열정이 당신의 결정을 좌우하게 된다.

그 분의 사랑이 당신의 행동을 지시한다.

그러면 당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될까?'

 

그런데 이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 체험되어야 합니다.

 

▲또 존 스토트 목사님의 글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글이 있습니다.

'만일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셰익스피어처럼 희곡을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그 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기쁜 소식은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가질 수 없지만

예수님의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거룩함의 길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비밀이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몸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모방이 아니라 재생산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인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할 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설교의 주제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십자가의 체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언젠가 한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경험하는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역사하셔서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사는 인생을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빌립보서 1,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만든 내 안에 사는 이 오직 그리스도라. 이 찬양을 우리가 부르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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