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은사 고전12:4-11 출처보기
※본문에 대한 여러 다양한 해석을 참고해 보려고 합니다.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4절부터 많은 종류의 은사가 등장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러 종류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헛 듣는 것입니다.
'나는 그 중에 어떤 은사를 받으려고 기도할까?'
이렇게 들으면 그것은 결론적으로 오늘 설교를 잘못 들은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은사를 열거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지가 뭐냐 하면,
이것이 다 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은사 저런 은사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은 성령님의 역사이다..
여기에 더욱 큰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사에 들어가기 앞서서, 큰 전제 하나를 깔고 들어갑니다.
은사에는 크게 두 영역이 있습니다. 누구나 모두 받는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란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말 그대로 ‘선물’ 또는 ‘그저 받은 것’,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받을 조건이나 근거가 없다는 얘기
우리는 은사라는 것을 잘못 쓰고 있습니다. ‘저 분 카리스마 있어’ 이런 것으로 은사라고 이해하는데,
이건 잘못된 사용법이고,
원래 은사(카리스마)가 갖는 용어의 뜻은, '인간에게 근거나 동기나 조건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은사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는데,
1) 누구나 받는 영역이 있습니다. 뭘까요?
구원입니다. 구원은 큰 의미에서 은사입니다.
왜 은사입니까? 그저 받은 것이니까. 선물이니까요.
내 의지나 근거나 동기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니까,
구원도 큰 의미에서 은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면,
진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은사로(선물로) 거저 주시지요. 공기, 물, 햇빛 등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준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짜 철저하게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선물은,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모두 주십니다.
2) 그런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문제는,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줄 수 있습니다.
본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가,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봅니다. 계속 살펴봅시다.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나 같고’가 3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위치가 모두 등장하지요. 성령, 주, 하나님.
즉, 은사는 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홀로 역사도 아니고, 성자 예수님의 홀로 역사도 아니고, 성부 아버지 홀로 역사도 아닙니다.
은사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과 성부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이 함께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습니까?
이 창조의 세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창조한 세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은사도 삼위 하나님이 함께 주시는 역사인데,
▶여기에서 일정한 패턴이 하나 있지요. ‘여러가지나 같고’
이 말은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가 하면,
‘성령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야기 합니다’.
통일성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통일됩니다.
어떤 은사든지 삼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다양성은, 은사는 성경에 나타난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고전12장에 열거된 은사와는 또 다른 형태의 은사가, 롬12장에 쭉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이, 은사 항목의 구체적인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은사는 하나님 만큼이나 넓습니다. 하나님 만큼이나 다양합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것은, 저도 지금 은사에 대해 설명하지만,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이것을 한쪽에 원리화 시키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실수가 벌어집니다
로마서에는 여러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는데,
본문 고전12장보다 조금 더 내면적인 은사를 로마서에서 소개합니다.
돕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봉사하는 은사, 전부 은사 영역에서 소개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열거된 은사는 보편적이고 외부적으로 두드러진 은사의 항목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매우 중요하니까 마크(밑줄)를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교회 성도들에게 각각 다양한 형태로에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 교회 은사를 받은 분들의 왜곡된 행태 중 하나가 은사를
첫째, 계급화 시키거나.
둘째, 자기를 치부하는데 은사를 사용하다가 하나님이 그 은사를 걷어가 버리지요.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주신 분 마음대로 제대로 활용이 안 되고, 사용이 안 되면,
하나님이 걷어 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당 쓸라고 빗자루를 주었는데, 안 쓸고, 그걸로 칼 싸움 하면서 장난치면
빼앗아 갑니다. 간단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라고 은사를 주었는데,
그걸 가지고 자기가 재고 다니고, 밥 벌이하고 다니고, 계급화 시키고, 교만을 떨면
하나님은 그 은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걷어 가십니다.
이것은 물질의 은사도 그렇고, 다른 은사도 똑같습니다.
어떤 은사든지 이 원리는 똑같고,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우리는 이 은사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몇가지 실례를 말씀드리고. 내용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집안에 1000명이 앉아 있어요. 근데 불이 나가서 깜깜해요.
그럼 1000명이 편안한 시야로 성경책을 일고 예배를 들이려면,
이 1000명이 앉은 공간에 전등을 몇 개 켜면 될까요? 1000개?
한사람 앞에 하나씩 다 켜야 될까요?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10명에 한 개 정도 키면 되겠지요?
그럼 전등을 100개쯤 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듯이 은사는, 누구나 다 필요없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몇 사람 개인에게, 대표로 각각 은사를 맡기는 것입니다.
너 이것을 맡아서 여러 사람을 좀 유익케 하라.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은사를 주시지요.
마찬가지로 50명이 여행을 가는데 회계가 있는데, 50명 모두 회계여야 합니까?
그건 아니지요. 회계는 많아야 약 두사람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 48명은 편안하게 돈 출납 걱정없이, 수영도 하고, 등산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돈 주머니를 맡은 사람은, 예산 초과하거나, 돈을 잃어버릴까봐 제대로 놀 수가 없지요.
그러니 뭐하러 자꾸 달라고 해요? 은사를 가지면 고달파요. 굉장히 고달픕니다.
실제 은사를 가졌다가 너무 힘들어서 이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정말 고달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맡긴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될 책임 또한 있지요. 이제부터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2: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여기서 ‘지혜의 말씀’이라니까, '성경 말씀'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에는 ‘로고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라면 전부 성경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을 조금 더욱 바르게 번역하자면, ‘지혜의 말’, 그 뜻입니다.
즉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의적절한) 연설, 담화, 전달력, 이런 뜻입니다.
혹시 이런 것 경험해보셨지요? 어떤 분이 청중을 향해서 내용을 전달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청중도 모르겠거니와 자기도 모르겠고, 뺑뺑 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 같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은 아주 3D(입체적으로)로 이야기 합니다. 스토리가 막 살아나는 경우가 있지요.
이렇게 다릅니다. 그것은 은사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내용을 선포하거나 전달할 때, 갖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 능력을 은사로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완전히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햇갈리고, 듣는 청중은 더욱 햇갈리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말한 것 같은데, 나중에 일어나서 나갈 때 보면, 머릿속에 별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8b
여기서 ‘지식의 말씀’이라는 것은, '지식적인 말'로 유익을 끼치는 은사를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누구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는가 하면, 학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서 보통 책을 약 20권 정도 참고를 하는 것 같아요.
좋은 강해자 목사님들 쓴 책도 참고를 하고, 신학 대학교 교수들이 쓴 책도 참고하고,
또 저명한 신학자들이 쓴 책도 참고를 합니다.
저는 고린도전서를 씨즐턴 이라는 신학자의 책을 많이 참고합니다.
그런 분들이 평생에 걸쳐 흘린 땀의 결실로 일군 학문적 세계를 참고해서 읽다 보면
신음을 토할 것 같은 대목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학자는 정말 학자구나!'
어떻게 깊은 그 시대 배경으로 들어가서, 속살을 파고 들어가서
어떻게 그 시대적 상황을 들추어 내어서, 이를 하나의 커다란 3D(입체) 모양으로 구현해 내고 살려 내는가.
아주 놀라운 논리력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지식의 말씀'은, 지식으로 공동체를 돕는 은사를 뜻합니다.
저는 그래서 어떨때는 설교를 위해서 책을 참고하다가,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닌데,
그 저자에게 감사의 메일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당신 책을 통해서 온 교회 성도들이 많은 유익을 얻었다. 고맙다.’
그러면 기겁을 하고 답장이 옵니다. ‘무슨 그런 메일을 다 보내냐고’ 답장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삼일 교회는 사실 사람을 키워야 되는데요.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좋고, 목회자가 되는 것도 좋은데,
사실 많은 좋은 신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좋은 연구 결과물 하나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삼일 교회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 신학교 지망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가운데 좋은 신학자들이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로이드 존스 같은 분들, 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금의 입 크리소스톰, 또한 스펄전 같은 설교자들,
또 좋은 신학자들, 또 한국 신학교가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인 같은 인물들,
이런 분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서 배출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첫째는 ‘믿음의 은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믿음이 은사입니까? 여기에 은사라고 되어 있네요.
그럼 여기서 믿음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그 믿음'일까요?
분명 그 믿음은 아니에요. 그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이런 뜻입니다. 열광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자비를 격려하는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롤 모델이 있지요.
우리 지난 한주간 동안 디도서를 공부했습니다.
디도서에 중심 인물이 디도 아닙니까. 그레데섬, 어떤 섬이에요?
시장성의 논리가 강하고, 포학하고, 성격이 급하고, 용광로처럼 들끓는 섬의 특징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섬에 누구를 보냅니까? 디도를 보냅니다.
디도는,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이 디도는 분쟁과 격려의 자리에 보낼 수 있는 동역자였습니다.
디도가 가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지요.
여기서 '믿음의 은사'라는 것은 ‘내가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통해서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들고, 격려케 하는 인물을 말합니다. (그레데 사람들을 믿어주었다는 뜻인듯)
그런 인물이 사실 많지 않지요. 그런데 그것도 성경에서는 은사로 인정합니다.
근데 교회 안에는 전부 뭐가 되려고 해요? 전부 바울, 모세 되려고 하는데,
바나바 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격려가 있고, 회복이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울의 회심을 의심했을 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말하기를 ‘아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사람이라는 것은 단편의 그림을 가지고 평가할 수 없잖느냐.
진짜 회심했다면 이처럼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래서 사도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서
당시 사울을 천거한 인물이 바로 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 격려자. 우리는 전부 머리가 되자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영적인 잘못된 경쟁이 벌어지지요.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다 사도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역할이 다르지만 가치는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9b
'병고치는 은사'라는 표현이 복수(실제로는 은사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복수로 썻을까요? 복수로 쓴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만큼, 병고치는 은사와 역사를 다양하게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병고친지도 몰랐는데, 병이 낫는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런 경험을 조금 했습니다. 지속적이 아니고 몇 번 있었습니다.
저는 병고치는 은사가 없습니다. 잘못 알고 찾아오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심방가면 (환우가) 일찍 돌아가셔요. 심방 다녀오면 이튿날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오곤 해요.
한번은 철야를 인도하고 끝났는데, 땡큐 카드 몇장 들어오고 선물이 하나 들어왔어요.
‘목사님, 철야에 환자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제 병이 나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거기 있었는지도 몰랐고, 무슨 병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이 하셨고 자기 믿음으로 나았겠지요.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하셨어요. 그런 경우들 가끔씩 있습니다.
제가 사할린에서도 그런 경험을 한번 했습니다. 새벽에 지쳐가지고 설교하는데,
설교 듣다가 7년 불치병한 젊은 형제가, 자기 병 때문에 자살하려다가 몇 번 바다에 뛰어 들었던 형제입니다.
그 형제가 병이 나았습니다. 저는 그런 사연있는 형제가 앉아 있는지도 몰랐지요.
무얼 말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로 설명을 합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한가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성령운동이 오순절 계통을 통해 처음 들어오다가
이것이 한국 교회 안에서 조금 과도한 분위기와 잘못된 열기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개혁주의 입장의 교회들이 겁을 먹었습니다.
우리도 성령론을 강조하면 짝난다.
아예 교회안에서 은사, 성령에 대해서 거론조차 안 해온,
또는 못하게 하는 분위기로 일색해 왔습니다. 굉장히 손실을 본 것입니다.
분명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칠 수 있고,
성령의 역사로 병을 고칠 수 있고, 그 은사가 나타난다고 설명 했습니다.
그렇다면 있는 것입니다. 우기가 거기에 대해서
너무 의심스러운 눈초리만으로 보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굉장히 가난한 태도입니다.
거기에 겁 먹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하고,
성경에서 말하고자,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는, 적극적으로 말하고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여기에 여러 가지 은사가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 한가지만 빼겠습니다.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는 오늘 한국 교회에 너무 많은 논란이 되는 주제이기 때문에
방언에 관한 부분은 고린도전서14장과 연결시켜서 해석해야 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이 방언에 관한 내용은 다음 주 수요일에 깊이 다루고,
오늘은 방언 주제를 생략하고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이 말은, 성령의 힘을 통해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열매들을 얘기합니다.
그 증거로 복음을 위한 실효성이 있는가(복음 전파에 도움되는가?)가, 그 은사를 분별하는 기초입니다.
단순한 능력은, 사탄의 유혹에 놀아나는 행태일 수가 거의 다 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로서의 '능력 행함'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 능력을 나타내는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실효성을 위해서,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을 가지고, 시몬 마술사는 능력이 있었지요.
근데 결국은 귀신의 장난이였습니다. 어둠 권세 잡은 자들의 장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둠 영계에 빠진 사람에게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령의 능력을 말하는데,
그 성령의 능력이, 복음의 실효성을 위해서 나타나는 능력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 다양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고, 또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따지는 은사를 가진 사람도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짜증 나지요.
그런데 이면에 여러분들이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따져질 때 일은 정확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것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필요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예화는, 동영상에서 직접 들으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당신 내년 이맘때에 좋은 사람 만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고,
설교 말씀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는 조금 혼란스러워요.
저마다 은사가 있고, 능력이 나타나는데, 사람들이 헷갈려 있습니다.
저 사람이 능력이 분명히 있는데 저것이 정말 귀신으로부터,
어둠 권세 잡은 자로부터 오는 능력인지, 성령으로부터 오는 참된 능력인지,
이것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두가지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하나님 말씀에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입니다.
저 사람 능력이 성경에서 지지하는 태도인가.
2)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게 매일 밀착되어 있는 삶이 있는가.
이 두 가지가 검증된 사람 가운데, 영들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동영상에도 보면 방언들 많이 뜹니다. 여러 가지 방언이 있지요.
다른 나라 방언도 있습니다. 갑자기 영어가 튀어 나온다든가,
또 어느 러시아 선교사님은, 러시아에 간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갑자기 러시아 사람들 한 복판에서 메시지를 전해야 될 그런 긴급한 순간이 왔는데,
자기도 모르게, 러시아 말 배운 적도 없는데, 러시아 말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 다른 나라 언어의 방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모든 방언의 은사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문제.
가끔 가다가 미련한 짓을 하는 사람, 기도 인도하면서
자기가 막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 있지요? 그건 아닙니다.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 방언이 진짜냐 가짜냐 떠나서, 그 사람에게 주시는 방언 은사 원래 목적이 아닙니다.
방언은 철저히 개인적인 용도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해서, 신비한 언어를 주실 때가 있지요.
또 조금 더 나누어서 설명하자면, 혀 끝에 언어가 있어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모르는 방언이 또 있습니다.
이런 이해하는 방언이 하나 있고,
그러나 공통점은
이것이 유익이 되려면, 중간에 반드시 통역자를 세워야 합니다.
다음 수요일에, 방언은 자세히 따로 떼서, 살필 것입니다.
◑12: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여러분, 위 구절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지금부터 제가 양쪽을 얘기 할 테니, 위 구절이 어느 쪽이 좀 더 강하게 지지하는지를
여러분이 한번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 보십시오.
12:1-11절까지 살펴 본 바대로는;
1) 여러분, 이런 이런 이런 능력과 은사가 있으니까,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사모하십시오. 골라잡으십시오.
2) 이런 이런 이런 다양한 은사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은 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맞을까요?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후자이지요. 2)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끝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C.S.루이스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업실이다.’
그 '작업실'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왜냐하면, 미술관이다, 박물관이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업실이다. 작업실이라는 것은
어떤 작품에 목표를 가지고. 계속 지금 진행중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를 빚어가고 계세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표현하지요.
토기장이가 자기 집에 그릇을 만드는데, 그 주인의 뜻대로 만들 권리가 없겠느냐.
어떤 사람은 정식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사발로, 어떤 사람은 밥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가마솥으로, 그 모든 권한은 누구에게 일차적인 주권이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
그래서 오늘 11절에서 이렇게 끝이 나지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 말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맡은 자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계급이 될수 있어요 없어요?
'맡았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서, 이타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데 유익을 위해서
이 은사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고전12:30-31“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놀랍게도 지금까지 병 고치는 것도 대단하고, 통역하는 것도 대단한데,
더 큰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더 큰 은사가 있대요.
그것을 사모하랍니다.
그러면 더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장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러면 12장이 끝나면 뭐가 나옵니까?
13장이 나옵니다. 그럼 13장 전체 주제는 무엇을 얘기 합니까? 사랑.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더 큰 은사는 무엇을 말합니까? 사랑.
이것은 누구나 사모해야 될, 구해야 될 은사로서 좋은 길 보이겠다고 말합니다.
믿습니까? 방언 은사나, 신유 은사나, 통역하는 은사나,
이런 것들도 은사지만,
그것은 누구나 필요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은사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모해야 할 은사.
내가 너에게 좋은 길을 보이리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은사를 말합니다.
그분이 선물이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12:31절 그렇게 끝이 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는 예수님에게로부터 나오는, 성령님에게로부터 나오는 지엽적인 은사도 우리에게는 필요는 하겠으나
그것보다 공기와 같이 절대적이고 누구나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 교회가 은사라는 주제 앞에 맞딱뜨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나머지 지역적인 여러 가지 은사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로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는 큰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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