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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의 비유 2

LNCK 2015. 5. 3. 08:2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2             4:13-20              2012.3.25.출처보기

 

◑3. 가시떨기 밭 마음

 

밭에 뿌린 씨앗은 모두 동일합니다.

100배의 결실을 맺은 씨앗은 특별한 씨앗이 아니라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에 뿌려졌던 것과 같은 동일한 씨앗입니다.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제자들과 같이 좋은 결과를 내는 밭이 있는 반면에, 전혀 그렇지 못한 밭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이곳이나 저곳이나 동일하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밭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적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 마음 밭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보물은 우리 마음 밭에 있습니다.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 마음 밭을 아름답게 가꿀 때

바로 그곳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수피의 회교 신비주의자 바야지드의 기도문)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하느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네.

그러나 내가 중년에 이르러 내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었네.

주여 저에게 저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그러나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위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았네.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 나는 나의 우둔함을 눈치 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이렇게 되었네.

주여 저에게 내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거야.

 

세 번째 묵상할 마음의 밭은 가시떨기 밭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농부가 가시떨기가 있는 곳에 씨를 뿌리겠습니까? 아마도 가시떨기가 있었다면 다 갈아엎을 것입니다.

그러나 잡초는 원래 생명력이 강합니다. 뿌리가 살아 있다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잡초는 발육이 더 왕성해서, 알곡으로 가야할 양분을 다 빨아 먹습니다.

가시떨기는 또한 햇빛과 공간마저 막아, 알곡은 성장이 더디게 되고 결국은 쭉정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기타 욕심이라고 해석합니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여기에 일락, 곧 쾌락을 덧붙입니다. 8:14

 

우리 안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 에너지가 열매를 맺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염려나 물욕이나 욕심이나 쾌락으로 그 에너지가 새어나가고 맙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 일정량의 생명 에너지 탱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탱크가 줄줄 새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연결관이 박혀 있어

에너지를 뽑아가 정작 열매를 맺는 쪽으로 미약하게 흘러들어갑니다.

새는 곳을 막고 불필요한 관들을 잘라내어야, 생명에너지가 온전히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작을지라도 한 곳에 힘을 모으면, 거기서 폭발적인 힘이 나옵니다.

남극의 태양일지라도, 돋보기를 갖다 대면 불을 일으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생의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결국 열매 없는 인생으로 만듭니다.

생명에너지를 갈아먹는 유혹들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세상의 염려입니다.

데일 카네기라는 사람이 근심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근심, 곧 염려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세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50%

염려와 근심 때문에 생긴 신경장애나 정신장애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좀 먹는 것도 이 염려입니다. 현실은 전혀 비관적이지 않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스쳐갑니다.

그래서 우리 온 에너지가 다 빠져 버리고 말며

더 이상 기도할 의욕도 나지 않고, 믿음도 없어집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인데 나뉘다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염려는 생각과 마음이 나뉘고 분산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여러 염려들로 우리 마음이 분산되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먹을 것에 대한 염려, 일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으로 우리 생각은 흩어져 있습니다.

 

염려가 많은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4:6)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염려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6:27)

염려는 쓸데없습니다.

 

쓸데없는 이유는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음만 산란하여 제대로 된 조치나 계획을 취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염려는 습관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습관이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악한 것입니다.

 

몽테뉴는, “나의 생애는 실제 발생하지 않은 아주 처참한 액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라 말을 합니다. 염려는 무엇입니까?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미리부터 걱정하는 태도입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 현실은 잘 굴러가는데

우리는 이 염려라는 허상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중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주된 내용은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무기력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예컨대, 어떤 계약을 해야 하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럴 경우 우리는 오만 가지 생각을 다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저 사람이 내 약점을 알아봤다

내가 하는 일은 항상 그래등등 온갖 상상을 하고 의미 부여를 하다가 스스로 낙담하고 맙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정말 그 회사에 바쁜 일로 긴급소집이 있어 올 수 없었다고 하며, 오히려 사과까지 하였습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염려하고 있었던 시간 내내

우리는 마치 사망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염려할 시간에 대신 기도를 하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염려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사라집니다.

주님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 되시는데 너희 필요한 것들을 어찌 다 채워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신앙이 없으면서도 염려하지 않고 태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 되겠지!’ ‘궁하면 통한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하면서 이겨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 필요를 아시고 도와주시겠다는데

더욱 더 염려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염려를 없애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력이 생겨 위기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알곡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19:22)고 말씀합니다.

재리의 유혹이 영생의 열매를 맺을 기회를 앗아간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아버지' '사막의 성인'으로 불리우는 안토니오입니다.

안토니오는 251년 이집트 중부 코마나의 한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에 양친을 잃은 후 성인은 가족들을 돌보며 많은 재산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평범한 부자 청년이었던 안토니오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였습니다.

안토니오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많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참회와 청빈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한적한 동굴과 사막에서 수도의 생활을 하였고 안토니오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안토니오의 수도와 청빈 생활을 본받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집트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참 많을 때는 사막의 수도사만 근 2만 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재산을 버리고 사람이 없는 사막으로 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 있으면 물질과 여러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습니다.

의지할 것 없고 방해하는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데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시대에서 이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생활이란 것이 있고 또 우리가 먹여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생활에서 영적인 성숙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부단히 물질로부터 자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 307-9절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문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7-9)

 

아굴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는 물질의 위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려움을 잘 압니다.

물질이 많으면 교만해져 신앙을 버릴 수도 있음 또한 잘 압니다.

 

주님은 물질을 주인이라 하여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혹이 강하고 맘몬의 지배력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물질이 하나님의 발 앞에 무릎 꿇도록 해야 합니다.

부요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물질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물질이 유혹이 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귀중한 도구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욕심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갖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적당한 욕심은 우리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도 이상의 욕심을 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할 때, 다른 부수적인 것으로 우리 에너지를 분산시킵니다.

문제는 욕심이 교묘히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어 우리를 유혹한다는 점입니다.

 

욕심은 목회자들을 자주 넘어지게 만듭니다. 선교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많은 성도수를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 건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큰 교회를 지어 자랑하거나 소유하려는 우리 욕심이 더 클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명예욕 또한 목회자들을 영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사단은 광야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과시욕과

세상 만국의 권세를 주겠다는 권력욕으로 예수님을 유혹하였습니다.

더 인정받고 더 큰 힘을 갖고자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끊임없이 물리쳐야 될 것들입니다.

 

주님은 대신 죄인들과 가난한 자를 섬기는 길과, 십자가에서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섬김과 십자가를 통해서 신앙인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욕심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는 다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져 가는지를 보십시오.

또 내가 맺은 열매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평화와 오래참음과 자비와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이르는 성령의 열매인지,

아니면 과시와 허영과 허세와 권려과 분열의 열매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욕심을 하나님을 향한 욕심으로 바꾸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하나님은 우리가 더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에 욕심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갈 때

욕심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넷째는 세상의 즐거움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많으면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식이나 스포츠나 성적 탐닉 등이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목회자가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면 기도를 게을리 하고 목회도 게을러집니다.

 

물론 자기 본 일 외에 다른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을 것입니다.

적당한 놀이와 즐거움은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분전환이 되고 생의 창조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볼링의 원조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볼링의 원조는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옛날 중세 수도사들에게는 나무 막대를 세워놓고 공을 굴려서 넘어뜨리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놀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나무 막대를 사탄으로 생각하고

사탄을 쓰러뜨리는 놀이를 즐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대중화 시킨 것이 루터입니다. 당시 루터는 다이아몬드 형태로 핀을 세우고

공을 굴려 넘어뜨리는 놀이를 개발하였습니다.

쉬고 놀고 즐기면서 우리는 새 힘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나 ‘-홀릭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곳에 빠지면 위험합니다.

사업가가 사업 외에 도박에 빠지면 그 회사는 곧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이 인터넷이나 게임에 빠지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즐거움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목회가, 학자는 연구하는 것이, 사업가는 사업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될 때

거기서 열매가 나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이 즐거움이 된 분이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에 빠질까봐 주님은 종말을 통해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고

그 때 깨어서 주님의 일에 충성되었던 사람에게는 칭찬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악한 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4:48-51)

지금은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다가도 깰 때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잡초는 그냥 놔두어도 잘 자랍니다.

우리 마음 밭에도 이런 잡초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의 쓴 뿌리들이 틈만 나면 솟아오르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떠내려가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와 부지런한 순종은 강력한 제초제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행함으로 우리 마음 밭을 부지런히 일굴 때

가시떨기라는 잡초는 자랄 수 없을 것이며

거기에는 3060100배의 놀라운 결실이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4. 좋은 땅의 축복

 

농사와 관련된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농(下農)은 잡초를 가꾸고(作草), 중농(中農)은 나락을 가꾸고(作穀), 상농(上農)은 땅을 가꾼다(作土)”

농사의 하수는 피와 같은 잡초를 뽑는 데 힘을 쓰고,

중농과 같은 평범한 농사꾼은 좋은 결실을 얻으려고 나락만 가지고 씨름하며,

진짜 잘하는 농사꾼은 땅을 좋게 만드는 데 전력한다는 뜻입니다.

 

잡초를 뽑는 것도 중요하고, 나락에 신경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땅의 질이 좋고 영양분이 있어야 작물의 수확이 좋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농사꾼은 부지런히 땅을 갈고 고르고

또 그 위에 영양분을 주는 객토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농사꾼입니까? 잘못된 것만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은 버리고 잘된 것만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까?

 

씨앗은 자체 생명력이 있습니다. 좋은 환경만 제공되면 어떤 곳에서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좋은 땅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뿌렸지만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에서는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었고

오직 옥토와 같은 좋은 땅에서만 30, 60, 100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수는 적었을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이룬 30, 60, 100배의 결실로 말미암아,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밭에서 잃었던 손해를 너끈히 보상하고도 남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처럼 네 종류로 나누고 있지만 원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모두가 길가나 바위처럼 단단했는데 점점 옥토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원래 옥토였는데 완악해지고 단단해져서 길가나 바위처럼 변해버린 것입니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타락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주와 인간을 만드실 때는 흠이 없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두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밭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졌다고

자주 말하였습니다. 이를 전적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적타락이라는 말은, 단지 구원과 관련되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전적타락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전적타락이라는 것을 인간성에도 적용하여, 인간 마음의 본질적인 악함이나

무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를 적용한다면 옳지 않습니다.

이런 경향은 어린 아기를 바라보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이 죄인이고

악하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성마저도 형편없이 망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망가질 작품이라면

그것은 원래부터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타락은 작은 흠에 불과합니다. 인간 생명 자체는 에덴동산에서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워낙 아름답게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맹자의 성선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원래 인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0:14-15)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곧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어떤 씨앗이 뿌려져도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을 잃어버리고 단단하고 완악해져서

길가나 바윗덩어리처럼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1. 무엇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단순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웃고 떠들며 그 순간을 즐깁니다.

자신이 가난하거나 자신이 위기에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화를 내거나 엉엉 소리 내어 웁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떻고 자신의 체면이 어떻고 하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울다가고 금방 까르르 웃기도합니다.

서로 싸우다가도 금세 함께 어울려 놉니다.

 

어른들은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현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합니다.

자기 체면이나 위치 때문에 마음껏 울거나 웃지도 못합니다.

자기에게 잘못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은 평생 원수가 됩니다.

소위 뒤끝작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다가 결국 어떻게든 복수합니다.

 

편견이란 것도 어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이래’ ‘저것은 이래라고 규정하면

도무지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상황이나 현실이 바뀌어도 수용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가 힘이 듭니다.

자기 생각이 강해서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낙원을 썼던 밀턴은 노년에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눈이 멀고 난 후 밀턴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를 절망케 한 것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소경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생각이었다.”

 

인간의 생각이란 것이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 내 처지에 대한 비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인터넷에서도 떠돌고 있는 작자 미상의 신과의 인터뷰라는 글이 있습니다.

신과 인터뷰하는 가상의 글인데 란 사람이 신에게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떤 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어린 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이어서 가 또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드는 것임을...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도 용서해야만 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또 있나요?” 하고

가 묻자 하나님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늘 기억하거라. 내가 항상 이곳에 있음을. 언제나, 모든 방법으로.”

 

2.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솔직함은 실은

그 배경에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보호자입니다.

어린아이는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부모가 왜 어린아이들에게 매여 있습니까?

아이들이 자기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도움 없이는 그들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갑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채우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될 때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옥토 밭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층들의 위협이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은 철부지 같았지만, 주님은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옥토 밭과 같은 결실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그분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서예에서는 최고의 경지는 교(), 즉 아름다움이 아니라 졸()이라고 합니다.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봉은사 현판에

판전(板殿) 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매우 어수룩한 필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글씨를 최고의 경지로 칩니다. 서예에서 최고의 경지를

환동(還童)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좋은 땅에 대해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8:15)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밭을 가는 수고라 할 것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황무지도 옥토로 만듭니다.

 

돌멩이 투성이인 밭을 부지런히 갈고 물을 주다 보면

어느새 옥토가 되어 있는 것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고향에 가면 광활면, 만경면이란 곳이 있습니다.

조정래 씨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땅이 얼마나 너른지 지평선이 보일 정도이고, 광할이라 만경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입니다.

 

원래 이곳은 바다였습니다. 일제시대 간척을 했습니다.

처음 간척된 땅은 소금기 때문에 농사를 할 수 없습니다.

간척지의 염분을 제거하는 데 평균 1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물을 대고 빼면서 소금기를 빼고 객토를 한 끝에 이곳은 비옥한 땅이 되었습니다.

가을 추수철에 벼가 무르익어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장관입니다. 인내로 옥토를 만들었습니다.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은 미생물과 지렁이의 수고에 감사해야 합니다.

미생물과 지렁이가 수 억 년 동안 지상의 땅을 일구었습니다.

 

그 결과 전지구상에 평균 1m 두께의 토양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결과 이 대지 위에 식물이 자라고 동물과 인간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내의 수고가 만들어놓은 결실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원래 좋은 땅입니다. 더러 완악해지고 더러 힘들게 살다보니

어느새 다져지고 단단해져버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 영을 주셔서 우리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 우리 마음을 맡겨 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옥토로 바꾸어 주시고

그래서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 인생을 만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인내로 모두 풍성한 인생의 복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