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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정해서 사는 사람 P1

LNCK 2015. 5. 12. 10:24

뜻을 정해서 사는 사람 P1          1:1~16                    출처보기

 

 

 

 

반갑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기 앞서, 과거에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제 생에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먼저 말씀 드리면서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인생의 방향도 내용도 알지 못한 채

아무도 살아보지 않는 자기 인생을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인생을 삽니다.

그럴 적에 교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생애를 좌우합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 은사이신 안병욱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홍군, 무슨 일인지 한 번 정했으면, 십 년을 정진하게. 그러면 반드시 전문성을 갖게 될 걸세.

이 나라는 신생 국가인데, 내 생각에 가장 부족한 것은 전문성이네.

전문성이 확보되면 쓸 만한 사람이 되네.

그리고 어디든지 자기 생의 소중한 역할을 감당할 걸세.’

 

안 선생님이 얼마 전에 소천하셨습니다. 92세의 나이로.

한국의 철학계에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신 어른이십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에게 주신 그 말씀은

제가 평생 일할 적에, 한 번 정하면 십 년 반드시 해봅니다.

 

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 일이 십 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평생의 귀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짓고 있는 강원도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에

<선교사 은퇴자 마을>에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거기에 예배당이 있는데, 아마 이 예배당 지어 놓으면

한국 건축사가 새롭게 써야될 만큼 중요한 건물로, 이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설계도가 왔을 때 불란서에서, 한국에서 누가 시공하겠다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삼성 같은 회사도 그렇고, 현대에서도, 아무데서도 공사하겠다는 곳이 없어서 참 난감했습니다.

 

건축이란 것은, 설계로는 가능하지만, 시공 불가능한 건물들이 더러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거 못 짓는가..’ 그랬는데, 그것을 한 분이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구조가, 독일의 세계적인 구조 회사 중 하나에서 설계를 해줬는데

우선 그 설계도를 읽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3D로 설계했는데, 제대로 읽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 분이 여기까지 와서,

그것도 용산에 백사십 몇 층인가 건물을 짓는다는 것의 구조 설계를 그 회사에서 했습니다.

그 분이 또 우리를 맡아서 설계해줬습니다.

 

나중에 얼마나 어려운 가는, 여러분이 직접 보셔야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할 테니

더 설명을 하기 어렵구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지금 훌륭하게 중요한, 건물 뼈대 작업을 끝내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초등학교 4학년 졸업생입니다. 그의 학력의 전부입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냐면 우리 비전대학을 나오신 분들은

가방끈이 짧다고 멸시 받는 일을 종종 당해서, 학력의 열등감에 평생 시달려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어깨를 펴주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전주 비전대학과 관련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한국에서 대학 진학률,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로 이미 평가를 하고 있는데

대학교에 부모들이 목숨을 걸고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고등학교 졸업해서 사람 대우 못 받는다, 그래서 부모들이 피눈물 흘리면서 그 일을 꼭 합니다.

 

학력 파괴에 대해서 많은 얘기해도, 정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자기 분야의 최고인 사람들, 학력 불문하고.

이런 사람을 찾아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학교가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분야의 큰 뜻을 이룬 사람들,

전문성을 이룬 사람들을 사랑해주고 존경해주고.. 이런 풍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일은 대학교 나왔냐, 박사 학위 받았냐?’ 그렇지 않고

그 분야의 마에스트로냐그러거든요.

그리고 또 ‘Ph.D가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짜 교수냐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유럽에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 사람이 참 뛰어나다 그러면

대학교를 바로 들어가서 석사 박사 없이 바로 교수하는 사람, 진짜 박사입니다.

 

그래서 학력을 뛰어넘는 풍토를 우리 학교에서 만들되

학력 불문하고 자기 전문성를 이룬 사람들을 우대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 학교가 해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 응원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전대학 학생들 중에도, 학력 상관없이 일정 뜻을 이룬 사람들 세워서

명예박사를 우리 학교에서 주는 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에 소원을 가져봅니다.

 

그런데 그 초등학교 4학년 나온 그 분이, 시공한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냐면

목사님 이 건물 보니까 너무 아름다워서 보석 같습니다.

보석 세공하는 마음으로 건물 짓겠습니다.’ 그래요.

 

지금 스트럭쳐를 아무도 못한다는 걸, 그 분이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최 사장님, 어떻게 이런 어려운 공사를 다 합니까?’

그러니까 그 분이 웃으면서 늘 자기에게 맡기는 것은, 어려워서 아무도 못하는 것만맡긴대요.

그래서 잠을 안 자고, 자기는 구조적으로 어떤 것이 안 되는 것인가를 모른답니다.

어떻게 되느냐만 고민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철골 구조물에 있어서 어려움에 부딪히면,

꼭 이 분 찾으라 그런답니다.

 

그 밑에는 박사도 석사도 있고 그런데, 본인은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언젠가 이런 분들이 꼭 우대 받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염원을 가져봅니다.

 

제가 대학교 졸업할 적에 안병욱 선생님의 말씀대로

지금까지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10년을 해보니까 전문성이 생기구요

또 그 후에 10년을 하니까, 일이 되지고요

거기서 또 10년을 하니까,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됩디다.

그래서 30년의 세월이, 한 분야의 일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가져봅니다.

 

안병욱 선생님의 말 한 마디가, 제 생의 중요한 삶의 지표가 된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뜻이 세워지면 반드시 길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초등학교 4학년 학력이 전부인 최 사장이, 뜻을 세워서 계속 씨름하니까

안 되는 구조가, 구조가 되어져서, 구조학 박사들이 그 구조를 연구하고 있어요.

얼마나 재밌습니까.

박사들은 연구만 하고, 이 사람은 만들고..

 

뜻이 섰다는 것은, 그처럼 우리 인생에 가장 강력한 자원입니다.

내가 뜻이 바로 섰다는 것.

 

그러면 일반적으로 뜻이 세워지는데 있어서, 사람마다 다섯 단계를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1)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내 뜻을 주장하는 것이 호외감정’,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

 

제가 어렸을 적에 우리 아이 데리고, 그 때는 서울에서 창경원이라는 곳에 가서 그 벚꽃놀이 할 때입니다.

벚꽃이 많이 피었고 거기에 또 동물원까지 있었습니다.

내 아이가 거기를 가자고 막 졸랐습니다.

갔더니 줄이 얼마나 긴 지 두 시간을 뙤약볕에 서서, 이제는 한 십여 분만 기다리면 되는데

이미 가자고 그러는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소용없습니다. 기분 나쁘다는 거예요.

 

어렸을 적에 우리가 결정하는 그 가장 큰 동기는 내게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

어렸을 때입니다.

 

2) 아이가 자랍니다. 사춘기가 되면 친구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때는 그룹입니다.

내가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느냐, 그것은 그 아이의 사고 패턴을 바꿉니다.

 

내 편은 좋고 남의 편은 나쁘고. 우리 학교는 좋고 남의 학교는 나쁘고.

우리 가정은 좋고 남의 가정은 나쁘고. 그래서 내가 어느 편에 속했는가..

 

언제 글을 보니까, 손영호 목사님 이 분을 광신도라고 쓴 글이 있더라고요.

또 안OO 의사, O 선생을 조폭이라고 쓴 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니 이해가 되는 것이

어느 편인가,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손영호 목사님처럼 사는 것은 광신이죠.

 

자기 아들 죽었는데, 아들 죽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광신입니다.

일본 편에 섰다면 윤OO 의사, OO 의사, O 선생은, 조폭이죠.

어느 편에 섰는가..

 

3) 거기서 좀 더 자랍니다. 자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익인가 손해인가.

20대가 되면. 이익인가 손해인가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고, 또 일을 결정하는 동인이 됩니다.

 

아무리 기분 나빠도, 이익이 되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내 편이라도 배반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이것이 강력한 자기 뜻을 정하는데 기초가 됩니다.

 

4) 네 번째입니다. 선인가 악인가.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이것은 역사의 빛을 남긴 사람들의 대부분 사고입니다.

 

선인가 악인가.

선이면..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을 묵묵히 합니다.

악이면.. 어떤 이익을 준다 할지라도 No.

많은 사람들은 이 네 가지 패턴에서 사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서 판단하고 뜻을 정해서 삽니까.

 

5)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겐 한 단계 더 높은 사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가..입니다.

 

선이면 되는데, 아닙니다. 사람의 선은 의지마저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 선 의지의 결정 철학을 맑시즘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철학입니까.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평등하게 산다. 이것보다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유토피아적인 철학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맑시즘이 이 땅에서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정의감이 러시아에서는 천 오백만을 죽었습니다.

이것은 일, 이차 대전 때 죽은 전사자를 합친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때, 2천만 명이 죽었다고 자서전에 썼습니다.

그런데 인구를 살펴보면,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그 다음에 6천만 명이 빠집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6천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아니 전쟁이 났으면 서로 총이나 쏘고 죽어야죠.

정의라는 이름으로 항변 한 번 못하고, 인민재판에 의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이보다 더 잔혹한 전쟁은 세상에 없습니다.

 

625(한국전쟁) 때 우리는 3백만 명이 살상 당했습니다.

심지어 캄보디아라는 나라는 전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선 의지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선합니다.

그러나 선한 의지가 어떨 때는 잔인해져서, 그 사람들은 회개도 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 물러난 다음에, 공산주의 수괴가 처단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자세히 살펴보세요. 카다피도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고,

또 여러 독재 국가의 수괴들이 무너질 때 비참하게 되는데

그냥 소련에서도 그처럼 악랄했던 공산주의 수괴들이 다 죽었는데

지금 그 사람들 평가도 그대로입니다 거의. 중국도 마찬가지고.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가 갖는 특징입니다.

그 기초가 정의라는 것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이 옳을 수도 있다는 평가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리사욕 안 채웠다.. 그런데 사리사욕 안 채웠나요.

 

저는 북한에도 육십여 번 다녀온 사람이구요. 중국은 지금까지 한 삼백여 번 다녀온 사람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제가 일하고 있습니다.

 

공산국가에 복음 전하는 곳에 돌아다녀보는데

세상에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도, 불평등한 사람이 있고, 슈퍼파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 어떤 독재자보다 더 처절한 독재 행위를 행하더라구요.

그래서 참 사람에게 선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선하신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이 다섯 가지 원리,

1) 호애감정

2) 내 편인가 남의 편인가.

3) 이익인가 손해인가.

4) 선인가 악인가.. 여기까지가 일반 사람들의 사고라면

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이 정말 아름다운 삶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라는 거예요.

내가 나를 가장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를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편에 있는가를 늘 보도록 해야 합니다.

 

유명한 얘기 중 하나, 아브라함 링컨, 남북 전쟁 때입니다.

숫자도 적고, 물자도 더 궁핍한 남군의 리 장군이라는 명장이

번번이 북군을 괴롭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러자 북군의 교회 지도자들은 아브라함 링컨에게 찾아와서

대통령 각하, 하나님께서 북군을 도우시도록, 위해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때 남의 말 잘 듣기로 유명한 링컨이, 이번 만큼은 얼굴이 확 변하면서

목사님들,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내 편 되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것은 명언입니다.

 

그래서 참 특별히 통일 국가를 지향하는 우리가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면, 거의 햇수로 칠 년, 세계 역사상 내전 중 가장 잔인한 내전을

미국 남북 전쟁이라고 합니다. 가장 많이 죽었거든요.

 

그런데 전쟁이 다음에 보니까,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남북이 다시 융합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열망했던 아브라함 링컨의 사고가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내가, 하나님 편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그냥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계속 펼쳐져 나가는가를 배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그 전란은 자기 눈 앞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이 그처럼 정성스럽게 설계하고 준비해서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그처럼 정성을 다해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이 곳에 두고 내 귀를 이 곳에 항상 기울이겠다.

그리고 멀리서 너희 자녀들이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내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고, 다시 이 곳으로 너희 자녀들 돌아오겠다.’

이렇게 많은 축복을 약속한 성전이 자기 눈앞에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 절망을 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위험한 일을 당해보고 특별히 전쟁 같이 도무지 논리도 없고 윤리도 없는 살벌한 그 시절에는

사람의 모습이 다 다릅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625를 맞이했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지 우리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난 가셨고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 모시고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다른 어린 동생들과 함께

마침 아버지가 동네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어느 폐가 토굴에 숨겨놓고 거기서 살아야 하는데

배고픔, 추위, 게다가 날마다 누가 인민재판에 죽었다는 소식,

우리를 숨겨준 사람들도, 우리 때문에 화를 입을까봐 전전긍긍하던 것, 다 당해봤습니다.

 

나중에 거기를 탈출할 적에,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곳을 지나서 피난을 숨어 나왔습니다.

지금도 제가 제일 기분 나쁠 때 꾸는 꿈이 625때 꿈이에요.

전쟁은요,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럴 듯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살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는 곳이 전쟁의 인간 군상입니다.

 

그 때 자기 눈앞에 자기가 그렇게 존경했던 믿음의 선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전쟁으로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볼 때,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저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사실이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도 개 돼지처럼 포로로 끌려갑니다. 포로는 마차에 태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줄로 묶어서 개 끌고 가듯 끌려가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막을 지나갈 적에 내리쬐는 햇빛은, 보통 섭씨 45도 정도로 뜨겁습니다.

거기를 끌려가지고 바빌로니아로 먼 길을 걸어갈 적에

성전이 무너졌다 하는 소식도,

또 자기 믿음의 선조들이 무너진 모습들도, 자신에게 직접적 고통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자신이 개 돼지처럼 끌려가는 그 고통, 내가 당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듭니다.

그 수모 속에서 끌려가는 기나긴 포로 행렬,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이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건히 붙잡고 삽니다.

그가 도착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환대해서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그런 놀라운 신분을 부여합니다.

 

아마 여러 나라를 정복한 정복자로서, 그 민족의 쓸만한 젊은이들을 키워서

식민통치의 한 수단으로 담겠다는 그런 생각을, 과거의 정복자들은 반드시 했었습니다.

 

사실은 우리나라만 해도 우리 어렸을 적에 매일 보는 신문 3,

그러니까 두 장짜리 신문에 1면은 정치고 2면은 경제고 3면은 사회고 4면은 체육, 문화 기타였습니다.

우리 어렸을 적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문 3면에 꼭 사회면 한 쪽에 보면

겨울에 얼어 죽은 사람이 몇 사람, 춘궁기가 되면 굶어죽은 사람이 몇 사람

계속 기사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 가난을 벗어난 지 삼십 년도 채 안 됩니다. 참 기적 같은 일이에요.

어떻게 우리가 이런 축복을 누리는지 설명이 안 됩니다.

이제는 배고파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건 참 대단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미국만 해도 60~70년 전에는 배고픈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가 미국 동부, 스모키 마운틴 근처에, 듀크 대학이라는 좋은 대학이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일 년을 산 경험이 있습니다.

 

거기 블루릿지 파크웨이라는 아름다운 도로가 있는데

대공황 때 사람에게 일거리가 없으니까, 산꼭대기에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길을 뚫었습니다.

일 시키기 위해서. 직업을 주려고.

 

그런데 거기를 운전해서 가다가,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이상한 곳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산골짜기 깊은 곳에 찾아가서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마을 사람이 저를 경원시하는 것 같아요, 저희 가족을.

 

그래서 거기에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얘기해보니까

우리 마을에는 동양인이 처음 들어온다고 그래요.

 

아니 1983년도에 갔으니까, 그 마을은 그 시절에 동양 사람을 처음 봐요.

그래서 거기에서 식사를 대접받으면서 625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곳에서 왔는가 얘기했더니

자기들도 50년 전에는 배고파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대요.

 

여러분 <세종실록>에도, 세종대왕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잘못이라고 제사를 지내더라고요.

그때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일 년에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을 다녀보면,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그 때는 세 끼 밥 먹는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그런 어려울 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지명을 받아서,

왕의 식탁에서 풍성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고 명예였습니다.

 

아니 자기는 실망밖에 안했습니다. 조국에 실망했고, 선대에게 실망했고

고통 받을 적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울부짖는 장벽을 넘어서 왔더니

원수의 나라의 황제는, 자신을 그처럼 잘 대접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안 계신다고 생각하기 쉬울 텐데

다니엘은 그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서 있습니다.

 

그가 바른 신앙을 갖고 서 있었는가/ 서지 않았는가를 평가하는 시금석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게 뭔고 하니 왕의 식사 대접이 나오는데

그 식사에는 먼저 제사에 드리는 음식이 나온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시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섬기는 배화교입니다. 拜火敎

이 사람들은 사흘에 한 번씩 태양에게 당신 덕분에 우리가 삽니다라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린 다음에는 그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이 사람들이 그 제사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기 신을 경배하는 예식을 가졌습니다.

 

청년 다니엘은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인가, 태양신을 믿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 태양신에게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전을 받습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위협을 받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유태인들은 지금도 피를 먹지 말라, 피는 생명이니,

성경에 계속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양이나 소를 잡을 적에 머리 때리면 쉽게 죽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 있는 그 양과 염소의 심장에 구멍을 뚫어서, 그 피를 모두 뽑아냅니다.

 

그러니 만약에 다니엘이 그냥 도살해서 가져온 그 고기는, 피가 얽혀있는 고기입니다.

지금도 뉴욕의 롱 아일랜드 지역에 살고 있는 정통 유태인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소의 심장에서 피를 모두 뽑아낸 고기를 먹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지금도 그래요. 값도 몇 배 이상 비쌉니다.

그런데도 꼭 그렇게 먹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 예배가, 바른 예배가 되어야겠다는 결심.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라.

그 말씀 따라 살겠다고 결심한 결심.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취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 그 음식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에도 순종하겠다..

이것이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의 진정한 삶의 표지입니다.

이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가서 예배는 잘 드리는데, 삶의 순종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다니지 않고 말씀만 순종하면 돼!’ 이런 사람들도 안 됩니다.

이 두 개는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바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바르게 예배해야 합니다.

이 두 겹의 축복의 통로를 놓치면 안 됩니다.

 

청년 다니엘은, 이 두 가지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로 작정합니다.

문제는, 뜻만 정하면 안 됩니다.

 

제가 가장 한국 교회의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뜻을 세울 때는 세웁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 하나님 뜻 깨달았다 그러고, 그 다음 행보는 없습니다.

주일날 좋은 말씀 들었으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착각합니다.

 

심지어는 좋은 생각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회개도 않습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성경 말씀은 머리로 생각만 하는 것이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내 삶의 행보에 걸음걸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 소년 다니엘은 자기가 뜻이 정해지니까 즉시 말합니다.

나는 이 음식을 먹지 못하겠습니다. 내게 채소만 따로 주시옵소서.’ 즉시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면, 즉시 순종하지 않으면 영원히 안 됩니다.

깨달았을 적에 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삶의 뒤안길을 보면서 그때 순종했으면 얼마나 성취 됐을텐데,

시작을 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내게 그런 게 몇 가지 있어요.

그런데 시작했기 때문에 엄청난 열매를 맺은 것도 있습니다. 시작했기에.

시작은 즉시 하셔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할 적에 즉시 합니다.

 

 

뜻을 정해서, 순종하는 사람의 자세

 

그 순종 중에 가장 감동적인 순종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서 바치라고 요구했을 때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가라 모레에 가라 글피에 가라시간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만약 죽인다면, 일각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러니까 말 안했으니까 나중에 차차 하겠다고, 아마 그렇게 생각도 할 법한데

모든 방해를 다 뿌리치죠.

 

가령 마음의 생각들,

하나님께서 이 아들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발의 모래처럼 채워준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내 아들 죽이라고 했겠느냐,

만물의 영장인 사람보고 족제비도 지 새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데, 자식 죽이란 말인가?’

뭐 이런 많은 변명을 할 수 있는데, 모든 변명을 다 뿌리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하나님, 나는 순종하죠, 그런데 당신이 내게 준 저 여자가..’ 언제부터 그 말 했어요?

창조 때부터 그랬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자기는 하고 싶은데 의논을 했더니, ‘나 죽이고 데려가

그래서 아들을 붙잡아서 못 가게 하면,

나야 순종하죠, 그런데 저 당신이 준 저 여자 때문에 순종 못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뿌리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장작을 빠개고 있는 아브라함을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펄젼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했더라고요.

노족장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나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애비 마음보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브라함은 자기를 압니다.

지금 순종하지 않으면 지금 머뭇거리면 영원히 순종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순종의 준비를 하고

모리야 산장으로 아들을 데려갑니다. 순종은 즉시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이 펼쳐질 때 겸손하게 펼쳐져야 합니다.

환관장이 다른 식사를 요구하는 다니엘에게 말합니다.

, 만약 내 말대로 내가 너에게 채식만 주면

네 동무들은 기름기가 좔좔 흘러서 건강한 모습을 볼 때 너만 초췌해지면

왕이 왜 저 아이는 초췌해지느냐, 그 때 왕은 나까지 처단할 것이다.

그러면서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때 다니엘이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고,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교만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플리즈, 청하노니, 플리즈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갖는 오만방자, 이것을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태도가 나빠서.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태도도 올발라야 하지만

사실까지 같이 올발라야 합니다. 둘은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졌기에 자신 있게 겸손해도 됩니다. 자신을 가지고 겸손하세요.

그처럼 우쭐대는 것은 사실은 열등감이지요.

청하오니”, 겸손하게 그 일을 실행하는 다니엘을 봅니다. 1;12

 

세 번째로 지혜롭게 자기 의사를 개진합니다.

어떤 지혜를 펴는고 하니, 비교하도록 합니다. 환관장님, 열흘만 시간을 줘봅시다.

그래서 열흘동안 음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먹었으면,

먹고 나서 그 다음 내 동무들과 얼굴이 초췌해져서 비교가 되면

그 다음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비교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런 비교가 내 삶 속에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 계신 것과 하나님 계시지 않은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도록, 공간을 내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역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교하도록 합니다. 열흘 동안 하나님께 시간을 드립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나를 향해서 축복해주시옵소서. 역사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지혜롭게 하나님 계신 것과, 계시지 않는 것의 차이를, 비교하도록 개진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뜻을 순종할 적에 깨달았으면

즉시고 그것이 펼쳐질 때는

그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어서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지혜롭게 개진하는 것.

이 세 가지! 뜻을 정해서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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