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까봐 무서운 마음이 당연한가?_- YouTube
◈죽을까봐 무서운 마음이 당연한가? 히2:11~18 14.05.19 출처
마귀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이용해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삼아 평생을 끌고 가는데,
왜 거기에 노예노릇을 하십니까?
▲죽을까봐 무서운 마음이 당연한가요?
육체가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에요,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보편적이라고 해서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죽는 게 얼마나 무섭습니까?
죽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보편적인 거죠.
죄도 마찬가지에요, 보편적이지요, 그러나 마땅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본래 에덴동산에서의 상태를 보면, 육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슈가 되질 않았어요.
그러면 언제부터 그랬느냐?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고 그러셨잖아요? 정녕 죽으리라.
근데 따먹었는데도 육체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참 생명이 죽는다는 뜻이었어요.
▲참 생명이 뭡니까?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말과 생각과 행동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이 하나님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
살아야 될 이유가 하나님인 상태, 이게 참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죽는다고 하는 것은, 육체가 죽는 것을 말한 게 아니었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말하기를
‘네 육체가 살아있으면 산 거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기는커녕
오히려 너도 하나님처럼 돼가지고 살 수 있다’
그러니까 햄릿의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에 나오는
To be 와 Not to be 라는 것이, 원래 에덴동산에서는
육체가 사느냐/ 죽느냐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근데 타락하고 나서, 사람들이 육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살아있으면, 산 것으로 여겼던 거니까요.
육체가 살아있어도, ‘생명/영혼’은 죽은 거였거든요. (일반적인 사람의 상태가 그렇다는 뜻)
죽음 안에서 육체가 살아있는 것이었는데,
육체만 살아있으면 산 것이라고 하는 마귀의 말에 속아가지고
그만 육체가 죽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히2:14b절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게 그렇다는 거예요.
죽음을 무서워하면서 평생 거기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를, 놓아주려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평생 매여 종노릇 한다’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는 순간이 오거나 죽음이 확실시될 때 무서워하지만
우리는 보통 때 죽음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기억도 하지 않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이 세상일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잖아요?
죽음에 매이기는 뭘 매여요? 아닌 것 같잖아요?
근데 성경말씀이 맞습니다.
죽음 앞에서만, 죽기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고 죽음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에 매여 있어서, 죽음이 무섭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지요?
여러분이 직장에서 말하고 행동하시는 것,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그것들이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런데도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바로 고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신다 이겁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전혀 행동과 말과 생각의 패턴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혹시 우리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있을까요? 있어요.
신앙인인데도 아직도 육체가 죽는 것을 무서워하면서, 그 마음 때문에,
평상시 죽음과 관계도 없어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도
죽음에 매여 말하고 행동하는 게 가장 잘 나타나는 데가 있습니다. 어디인지 아시겠어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 맡긴다’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또,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다’라는 말도 많이 해요,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가져온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신앙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속아서 육체의 죽음을 무서워 벌벌 떨면서 사는 상태를 잘 보여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라는 말을 할 때 조심해야 돼요.
맡긴다는 거는 보통 뭘 맡긴다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다, 하나님 앞으로 가져온다, 다 삶의 짐이나 문제들,
해결해야 될 과제, 난관이나 어려움, 이런 것들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기도 열심히 해서 잘 맡기고, 하나님께 잘 내려놓고,
그리고 주저 없이 하나님 앞으로 잘 가지고나오면 신앙이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큰 오해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문제를 맡기려 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 관심’ 과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이 서로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맡기고/ 내려놓고/ 가져오고 하는 이 모든 경우에
우리 마음이 실려 있고 쏠려있는 곳은 ‘문제’나 ‘과제’에요.
근데 맡긴다, 내려놓는다, 가져온다고 할 때의 목적어를 잘 보세요.
그러면 우리 마음과 관심이 향하는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은, 맡긴다, 뭘 맡겨요? 내려놓는다, 뭘 내려놔요?
‘문제’를 내려놓고 문제를 맡겨요.
그러니까 우리 관심이 문제고, 관심이 과제고, 관심이 짐입니다,
혹은 꿈이라도 좋고, 비전도 좋고. 그것도 다 문제이지요.
▲근데 예를 들어, 돈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려고 하면,
하나님이 느끼시는 문제는, 내가 느끼는 돈을 문제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처하고 있는 경제문제가 아니라,
‘돈 문제에 빠져있는 내 마음’을 문제시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관심의 우선적인 초점은, 언제나 제 1순위가 우리 마음이에요.
지금 마음이 어디에 가있느냐 이겁니다.
하나님께 와있어야 될 마음이, 문제에 가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문제시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빨리 깨닫고 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러 나왔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 문제를 내려놓는다/만다, 생각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문제를 내려놓으려고 하지 말고,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맡긴다, 내려놓는다, 가져온다는 게,
모두 다 문제에 대한, 나의 주체적인 행동을 말하는 거잖아요. 자아가 살아있는 겁니다.
근데 문제를 지금 들고 있는 상태였다면, 앞으로 내밀어서 맡기려고도 말고,
그걸 아래로 내려놓으려고도 말고, 그걸 가져가려고도 말고,
그냥 내가 죽어버리는 겁니다.
문제를 붙잡고 있는 내 마음이 죽는 거예요.
그 문제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문제시하시는 건, 바로 내 마음이 그 문제에 빠져있다는 것이지,
하나님께 내가 당면한 여러 가지 이 세상살이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는 문제가 언제나 그거에요.
내 마음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근데 이게 잘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을 앞에 두고 무서워하는 그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게 (나의 죽음이) 잘 안 되는 것일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유가 뭐예요?
상실감 때문에 그래요, 상실감.
요새 뉴스에 이건O 씨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건강이 아주 안 좋으신가봅니다.
회복이 되고 있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회복이 늦어지는 게 위독한 것 아니냐, 이렇게도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픈 것이 낫건 안 낫건, 이병철 씨도 돌아가셨고, 정주영 씨도 돌아가셨고
저희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저희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저도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건O 씨가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바라지만
회복되어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예요.
삼O이라는 기업이 이제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기업이에요, 전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육체가 죽으면, 삼O의 상당 부분이 그냥 없어지고 마는 거예요.
다 없어집니다, 아내도 자식도 다 없어지는 거예요.
이처럼 죽음이 두려운 핵심적인 이유가 ‘상실’입니다.
모든 소유, 모든 관계, 모든 신분, 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은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들이거든요.
근데 육체가 죽어버리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남는 게 없다는 것은, 내가 소실/상실 돼버리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나를 어디서 찾고 있었나 하면, 아내가 있으므로 남편이라는 나를 갖고 있었고,
자식이 있으므로 아빠라는 나를 갖고 있었고, 회사가 있으므로 사장이라는 나를 갖고 있었는데,
나의 내용이 그렇게 채워졌었는데,
전부 육체가 있으므로 맺어지는 관계로부터 나의 내용이 채워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육체가 없으면 나의 내용이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없어져버리는 겁니다.
내 육체가 없으면 나는 남편도 아니고, 육체가 없으면 자녀도 아니고, 사장도 아니잖아요.
내 육체가 없는데, 내가 무슨 장관이라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다~
그래서 무서운 거거든요.
▲내가 지금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와서 맡기려고 하고 내려놓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문제를 자꾸 맡기려고도 내려놓으려고도 하지 말고, 그 문제에 대해서 네가 죽어버려라’
여러분, 그 차이를 아시지요?
맡기려 하거나 내려놓으려 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주체로 살아있으면서
그 문제를 handle 하는 겁니다, 그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서’ 하나님께 맡기든지 하나님 앞에 내려놓든지 처리하려고 하는 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네가 그 문제를 handling 하는 주체로 살아있지 말고,
단순히 내가 내 힘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 맡기려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네가 죽어버리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님인 나한테 와야 되는데,
아직도 문제에 빠져있구나, 이걸 문제 삼으신다는 거예요.
▲내 마음을 온전히 못 드리는 거예요.
이것과 육체가 죽음으로서 모든 게 다 상실되니까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은 거라는 얘깁니다.
돈 문제 때문에는 아직 내 육체가 죽지 않았지만
결국 육체가 있으니까 돈 문제가 문제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 마음이 돈 문제에 대해 죽는다는
이것이 육체가 죽을 때와 똑같은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 하나님께 마음이 드려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무섭게 느껴지는 상태는,
살면서 아직 한 번도 내 마음을 뺏어간 문제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어버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일상적으로 늘 내 마음을 잡아끄는 이 세상의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그냥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고, 내가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왜 자꾸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그러느냐 이겁니다.
내 마음이 죽어버려서 하나님께로 가야 돼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그래서 십자가가 주어졌다는 얘기에요.
죽음의 무서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해내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해가지고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죽어버리는데,
죽는데 맡기고 내려놓고 가져가는 게 뭡니까?
죽으면 끝나는 거죠, 죽으면 끝나버리는 거예요.
죽어서 마음이 그냥 하나님께로 가버리는 겁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근데 여기서 또 마귀가 장난질을 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못 죽습니까?
내가 그렇게 팍 죽어버리면 문제는 문제대로 고스란히 그 상태로 남는 거예요.
문제가 있는 상태로, 돈 문제가 남고 건강 문제, 자식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다 남아요.
하나도 handle 할 사람이 없이 버려진 것 아니겠어요?
근데 내가 그걸 다루거나 관여하지 않으면 꼭 망할 것 같잖아요, 일이 잘 안 될 것 같잖아요.
요게 마귀의 속임수라는 겁니다, 두 번째 속임수.
그래서 죽음에 매여서 살게 만드는 거예요.
죽음이 무서운 게 상실할까봐 두려워하잖아요.
내가 마음이 죽어버리면,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는데
내 마음이 이 상황에 대해서 죽어버리면 이걸 누가 개선시킬 것입니까?
이대로 놔뒀다가는 망할 것 아니겠느냐.. 라는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요게 마귀의 짓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이 세상에는 피조물이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도 피조물이 아닌 게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그분이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시잖아요,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맡기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려 하지 마세요.
이미 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겁니다, 내 모든 문제들은.
나만 죽으면 되는 거예요.
▲이미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아버지로서 창조주로서 당신이 갖고 계신 계획과 뜻이 임하고 있는데,
그걸 내가 붙들고 있으면서 내가 가로막고 있는 것뿐입니다.
어디다 맡긴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난 문제인데,
공중에 나는 새에게도, 들에 핀 백합화에게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이 세상 안에서
내게 나타난 문제를 어디로 가서 맡기고, 어디에 내려놓고 어디로 갖고 가겠다는 얘깁니까?
이미 하나님의 손길은 다 와있는 건데,
내가 그 문제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지고 걱정하고 오두방정을 떨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선하신 의지가 막혀있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내게 주어진 문제는, 다 하나님 뜻 안으로 들어가게 돼있는 겁니다.
▲요걸 마귀가 막아버리는 거예요.
‘네가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고 계속 관여하지 않으면,
아니 열심히 관여해도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제대로 될까 말까 한 판인데,
네가 그러고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음이 그렇게 죽어버리고 나면
네 상황들은 곤두박질칠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할래?’ 이게 마귀가 붙잡아 매는 거거든요.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게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문제에 대해 죽어야 돼요. 그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도 죽어야 해요.
언제부터 그 문제를 우리가 붙잡았는지 아십니까? 아담 타락 이후부터에요.
이 세상의 문제는, 우리가 마음으로 붙잡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 마음으로 붙잡아야 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 한 분 붙잡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나가는 과정 중에서
이 몸으로 해야 될 일이 있으면 하면 되는 거예요.
▲자식을 기를 때도,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내 사업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 자체가 타락이고,
그걸 내려놓겠다, 맡기겠다는 것도 주제 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 사업에 대해서 내가 죽어버리면 되요,
그러면 사업은 하나님과 맞닿게 돼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임해서 갈 거예요.
근데 사업이 망했다면, 그 사업은 계속하면 안 되는 거니까.. 망하는 거지요.
망하는 게 좋으니까 망하는 겁니다, 잘되면 하나님 뜻이니까 잘될 것이고.
근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마음은 원래 지어지기를,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히 기쁘고 만족하도록 지어진 거예요.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도 않고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게 죄입니다.
더러움이고 채워지지도 않아요.
그러므로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세요.
육체가 살아있고/죽었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느냐 세상 안에 있느냐를 결정짓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육체가 살아있어도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더 보탤 것도 없고,
육체가 죽어도 내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잃을 것도 없어요.
왜? 마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로 살아있어서 무엇을 내 마음의 기쁨을 위해서 더 보탤 겁니까?
영이신 하나님으로 마음이 만족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러면 육체가 죽었어요,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품고 있는데, 내가 잃어버릴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육체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원래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왜 살아 있느냐? (이제까지 죽는 게 좋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통로의 역할을 위해서 살아있는 겁니다.
결혼을 해도 그 상대 때문에 기쁜 게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기쁜 마음이 저 여자와 결혼하라는 뜻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 안에서 기뻐하면서 그 여자를 만나고 관계하는 것이지,
그 여자 때문에 기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여자 때문에 기쁘게 되면.. 여기서부터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3년 안에 이혼하는 겁니다, 아니면 체면 때문에 죽지 못해 살든지.
왜 여자 때문에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하고, 남자 때문에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가정이 생겼어야 백년해로가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 마음을 뺏어갈 때,
자꾸 그 문제를 껴안고 맡기네, 내려놓네, 갖고 가네,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문제가 나를 덮어씌우고 있으면 그 상태대로 마음이 죽어버립니다,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근데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십자가밖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이 죄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당신에게 마음을 두게 하셔서 십자가로 끌고 가신 거예요.
십자가로 끌고 가면 우리 마음이 붙잡고 있는 모든, 맡기려 하고 있고, 내려놓으려 하고 있고,
가져가려 하고 있는 그러한 주체가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문제는 십자가를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손 안으로 들어가는 거고,
십자가를 기점으로 내 마음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거고.
문제도 하나님의 뜻 안으로, 내 마음도 하나님 품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품안으로 들어간 마음에 기쁨과 화평과 평강과 행복이 주어지면,
이제 이 세상에서는 이 육체가 살아도 얻을 게 없고, 죽어도 잃을 것이 없는 상태일 때,
이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도 나타나고… 얼마나 행복하고 좋냐 이겁니다.
▲마귀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이용해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삼아 평생을 끌고 가는데,
왜 거기에 노예노릇을 합니까?
이 세상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를 붙잡고 거기에서 이걸 맡기네, 마네..
마귀는 ‘하나님! 내 문제를 맡아주세요~ 맡아주세요,
내 문제를 마음에서 내려놓게 해주세요, 내려놓게 해주세요!’
40일 금식기도 하는 것 되게 좋아합니다.
어쨌든 40일 동안 그걸 안 내려놓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거기에 매여 있는 겁니다.
왜 맡기려고 철야기도를 합니까?
그러지 말고, ‘하나님, 이 문제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이 문제에 대해 죽어버리게 해주세요!’
그러면 그 자리가 내가 죽어버리고 문제는 덩그러니 남지 않겠어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손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손이.
어디로 가 맡기고, 어디로 가서 내려놓고, 어디로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 내놓겠다는 겁니까?
이미 다 와있는데, 내 마음만 그 문제에 대해서 죽으면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서 나도 행복하고,
내게 주어진 문제도 하나님 손에 이끌려서 자기의 갈 길을 가게 될 텐데…
난센스에요.
왜 난센스가 나타납니까?
죽을까봐 두려워서, 죽을까봐 두려운 마음의 핵심이 뭡니까?
상실의 두려움.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죽으면 큰일 나고 곤두박질칠까봐,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게 바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두려움과 똑같은 두려움이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두려움이고,
이 두려움을 이용해서 마귀가 우리를 종노릇 시키고 있다는 얘깁니다.
십자가로, 주님께서 그 해방을 위해서 오셨는데,
십자가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너무나 보편적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워하는 마음은 절대로 마땅하고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죽음의 그늘을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하늘의 빛 아래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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