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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

LNCK 2015. 5. 17. 08:50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              눅22:24~30, 1:16~17             2014.09.21.출처

 

 

 

 

◑권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 앞에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엄청난 대적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들은 밖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안에도 존재했습니다.

두 가지 내부의 적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돈에 대한 탐욕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 유다였습니다.

또 하나의 적은 서로 누가 높은지를 놓고 다투는 제자들의 야심이었습니다.

 

두 가지 내부의 적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내부의 적입니다.

 

갸롯 유다처럼 돈에 대한 탐욕으로 예수님의 적이 되고 있는 사람

또한 서로 누가 높은 사람인가를 놓고 자리다툼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주님의 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은 사람인가 다투는 것은

이 시점에서 처음 등장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초기 예수님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때부터

제자들 사이에서 이미 존재했던 고질적인 문제죠. 누가복음 9장에도 나타납니다.

서로 누가 높은 사람인가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가 되는 사람이,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예수님의 역설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죠.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의 마지막 1주일 즈음에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그런 중요한 이 시점에도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자리다툼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 대립, 갈등으로 삶의 모습은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이런 자리다툼이 있습니다.

어느 책에 보니 닭 10마리를, 동일한 닭장 안에 모아 놓고 먹이를 주면

불과 몇 분 안에 서로 눈치를 보면서 서열이 매겨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힘센 1위를 차지한 닭부터 10위를 차지한 닭으로

열 마리의 닭들이 서로 서열을 스스로 매겨서 평화를 유지하게 되는데

서열 1위인 닭이 2위인 닭을 괴롭혀도, 절대로 대들지 않는다고 그래요.

 

2위인 닭이 3위인 닭을 괴롭혀도 절대 대들지 않아요.

제일 불쌍한 건 10위죠. 서로 다른 환경에 있었던 닭들을 모아놓아도

서열 싸움으로 정돈을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서로 다른 환경의 열 명의 사람을 한 공간 안에 모아놓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서로에 대한 평가로, ‘나는 이 10명중에서 어느 정도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자리매김을 마음속/무의식적으로 하지 않을까요.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해지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해지려는

인간의 권세에 대한 연약함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닭은 서로에게 대들지 않지만, 사람은 대들어요. 그래서 자리다툼이 생기는 거죠.

 

모든 사람에게는 권세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이면에는 권력, 권세, 자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권세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1:16~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하는 구절 가운데

보좌들, 주관들, 권세들 다 비슷비슷한 권력에 관한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이는 만물만 창조하신 게 아니라

열 마리의 닭들이 서로 권세를 의식하며 질서를 이루듯이

만물을 움직이는 권세를 함께 창조하셨다는 거예요.

 

권세는 하나님의 창조 작품입니다. 만물이 유지되기 위해서!

질서 없이, 권세 없이는, 만물의 질서가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17절 마지막에 보면,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할 때

영어로 시스템, 조직, 체계에 대한 단어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만물을 움직이는 체계 속에는 권세가 있는 겁니다.

권세,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세상을 붕괴시키려는 거죠.

권세,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악한 것입니다.

악한 권위만큼이나 악한 것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창조된 권세가

인간이 하나님의 권세에 대적했을 때, 하나님을 배역하며 권세에 도전했을 때

타락한 영적 권세 가운데 속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6: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권세는 타락한 권세입니다.

악한 권세입니다.

 

골로새서 1장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물을 유지하기 위해 세우신 권세인데

그 권세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악한 권세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우는 권세로 타락했다는 거죠.

 

이 세상에 타락한 권세가, 세상에 밝게 드러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였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의 타락한 권세는 그 분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가 얼마나 악한지 보여주는 게 십자가입니다.

가장 의로우신 분을, 가장 악한 자들이, 불의한 자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

그것만큼 이 세상에 타락한 권세가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악한 권세가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이 세상의 타락한 권세를 심판하고 무력화하셨습니다.

 

그게 골로새서 2:15절에 나오죠. 같이 읽겠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 십자가의 사건은, 세상에 악한 권세를 무장해제시킨 사건이라는 거죠.

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권세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부활하심으로 증명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타락한 권세에 대한 유혹을 종종 받으셨죠. 인성을 가지셨으니까요.

-처음에는 마귀를 통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네가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권세를 주리라. 예수님은 그 권세의 탐욕을 물리치셨어요.

 

-사람들을 통해서 왔죠.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여드렸지만

예수님은, 자신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자신들을 다스려달라고 유혹하는

백성들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의지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사람들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권세자들로부터 나온 질문은 네가 누구이기에 이런 권세를 행하느냐?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세상의 권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원칙, 원리를

복음서 전체에서 강조하셨어요.

 

1.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임을 강조하셨죠.

나는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없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세상의 권세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세에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권세의 청지기로 자신을 말씀하셨어요. 권위의 청지기!

 

진정한 리더십은, 권위의 청지기, 권세의 청지기라 생각합니다.

어떤 위치든 자리든지 간에 그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나의 권위, 나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자리에 있든지, 우리는 권위의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의 청지기, 물질의 청지기, 몸의 청지기, 마찬가지로 권위의 청지기!

이것이 나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권세라는 것.

그 청지기 의식이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의 그 권세는, 결코 자신에게로 영광이 돌려지지 않도록 하셨다는 거예요.

영광을 받아 마땅한 그 분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행함으로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고

온전히 권세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그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3. 예수님은 그 권세를 통해, 섬기는데 권세를 사용하셨다는 거예요.

세상에 권세 있는 자는 많으나, 영향력 있는 자가 적은 것은

그 권세를 가지고 섬기는 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돈으로 사람들을 움직인 것도 아니요, 무력으로 움직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셨을 뿐이고, 그리고 그 권세를 통해 섬기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큰 자셨어요. 큰 분이기 때문에 섬기셨습니다.

 

여러분 작은 사람은 못 섬깁니다. 작은 사람은 언제나 질투하고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고, 다른 사람들을 질시하고

다른 사람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작은 자에요.

 

그러나 큰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섬김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세상의 권세 앞에 타협하지 않고, 세상의 권세에 악함을 도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타락한 권위자들도 섬기셨어요.

   그들의 타락한 권세 앞에 무릎 꿇지 않음으로, 그들의 타락한 권세 앞에 거절하심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신 겁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모든 권세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있었다는 겁니다.

이 고백은 너무나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권세들과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쭉 읽어보면 세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 세상의 권세자들은 직함과 타이틀이 중요합니다. 자기 이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가, 타이틀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어요.

 

때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해서 랍비라고 불렀죠. 선생이라 불렀는데,

예수님은 선생으로 오신 게 아니죠. 그러나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어요.

 

목회자들도, 제가 전도사 때 전도사로 있다가 목사로 안수 받은 후에

전도사라 그러면 기분 나쁘더라고요.

내가 목사 안수 받은지 6년이 넘었는데 자꾸 전도사라 부르실까?’

 

여러분이 장로 안수를 받았는데, 자꾸 집사라고 부르면..

그런 교회 안에서도 직분에 대한 예민함. 타이틀.

우리 한국 사회에 정말 영적으로 보면 벗겨져야 될 문화가, 이 타이틀 문화가 아닌가 합니다.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타이틀을 부르는 게 더 익숙해요.

 

그런 면에선 우리는 이름만 부르는 걸 기이하다고 그러고 상스럽게 여기는데..

그것은 우리의 문화죠. 참 벗기 힘든 문화입니다.

 

영어권 문화에서는 이름을 부르잖아요. 어떤 직책이든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직책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게 참 선진적인 거 같아요.

 

예수님은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고 타월을 가지고 섬기셨어요.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서 타월을 가지고 오셨어요.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세족식을 하는데 중요한 행사 때 이 세족식을 하죠.

저희들은 행사로 하는 그 세족식을, 예수님은 세족식이 아니라 삶이셨어요.

 

예수님은 그때만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장차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될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해야 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시려고, 행하신 일이 아니라는 거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한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새삼스러운 유별난 행동이 아니라, 몸에 밴 삶의 스타일이었다는 거죠.

예수님은 타이틀이 아니라, 타월을 가지고 섬기신 분입니다.

 

그 순간에는 그렇게 섬기셨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또 다른 섬김의 모습이 있었을 거예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말씀하신 것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날 때부터 줄곧 어떠한 상황에서도

때로는 타월을 두르시고 섬기는 자로 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타이틀인지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때로는 타월을 들고, 다른 어떤 모습으로 섬기는 자로 서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2. 예수님은 파워 Power를 행사하지 아니하시고 패션 Passion,

고통과 시련을 당하시는 분으로 계셨죠.

 

25절의 말씀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의 왕들은 백성을 다스리며 권세 부리는 자들은 자칭 백성들의 은인이라고 한다.

 

2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다.

 

세상에 권세자들이 고난을 자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고난을 자청하더라도 정치적 목적 없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고난 받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파워가 아닌 패션으로. 고난으로 그들을 섬기셨다는 거예요.

 

3. 세상의 권세자들은 25절에 흥미로운 말씀이 나오죠.

그들은 스스로 은인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죠. 프톨레미 왕조 시대에

자기를 은인이라고 불러주기를 좋아했던 왕이 있었어요.

 

그때로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과 왕들은

백성들이 자신을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하고,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왜 그런 일이 생길까요? 그 왕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어요.

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그런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나눠주는 작은 것을 가지고,

우리가 왕 때문에 살아갑니다. 왕이 우리의 은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자신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한반도에도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었죠. 계속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는 곳이 있죠.

자신을 스스로 은인으로 만드는 거죠. 미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거예요.

 

마땅히 사랑과 돌봄으로 통치자가 백성들을 섬기는 게 당연한 것인데

지극히 당연한 섬김을, 자기가 은혜를 줬다고 바꾸는 거예요.

 

통치자의 당연한 사랑과 섬김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은인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던 통치자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통치를 미화시키고, 우상화하고, 절대화하고 했던 것이죠.

 

압제당하는 사람들이 압제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을 갖고

은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칭 은인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수많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다 그를 은인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나는 구원 받았다. 예수님의 섬김으로 나는 회복을 얻었다.’

자칭 은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은인으로 기억하게 되는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셨습니다.

 

내가 주변 사람들 이렇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떠난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나는 그 분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게 되는 게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요, 진정한 지도자요, 진정한 권세의 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26절에서 이런 교훈을 주십니다.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다이건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9장에도 동일한 맥락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종종 자신을 낮추는 상징으로 어린 아이를 내세우셨죠.

어린 아이들을 보면 철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궁금했어요. 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어린 아이의 모든 면을 다 배울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죠.

성숙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게 아니죠.

 

그럼 어떤 면에서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막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 자녀들을 볼 때는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어린 아이일수록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이것은 권세에 있어서, 어린 아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로

자기를 위해서 휘두르거나, 다른 사람을 압제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 권세를 악한 목적으로 부리지 못한다는 거죠. 권력을 사용하는데 낯설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서열을 매겨서 자신의 신분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아주 조그만 어린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은근히 서로 서열을 매기고, 다른 아이들을 평가하고 따돌리고 그러죠.

 

그런데 유치원 이하의 아이들을 보면, 피부색이 다르거나

혹은 경제적인 상황이 다르거나, 어떤 상황에 관계없이 차별이 없습니다.

편견이 없습니다. 권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력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아이들이 그 권세에 깨어나게 됩니다.

누가 반장인가에 예민하게 되어 있어요. 권세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가 있어요.

 

여기서는 그 이전 단계의 어린아이를 뜻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권세를 자기를 위하여 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러한 어린 아이의 단계.

 

성인이 되어서도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저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권세가 주어지든지.

섬기는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위치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권세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온전히 섬기는 자로만 권세를 사용한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는 거죠.

 

 

하늘 나라 권세를 연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29, 30절에서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세상의 권세에 대해 무지한 자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권위를 행사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누가복음 222930.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우리 모두를 보좌에 앉혀주시는 때가 온다는 거예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연습해야 될 게 있습니다.

통치자로서, 권세자로서의 연습이에요.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겨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맡겨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연습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군림하는 권세가 아니라 섬기는 권세,

그 권세를 우리가 연습해갈 때

언젠가 우리에게 권위가 주어질 때 올바로 합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악한 권세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그 권세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장성한 어른이 될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권위자로,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되는 그 분이 섬기는 자로 되셨기에

우리 모두는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섬기는 자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타자 J.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