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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신비

LNCK 2015. 6. 12. 11:32

몸의 신비                    4:11-16                2014.01.26.설교스크랩, 출처

 

 

 

주일 아침 교회를 가야 할 시간에 어느 부부의 대화 내용입니다.

아내가 급한 마음으로 교회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옷을 입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걸 보고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교회 갈 준비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요?’

남편이 잔뜩 찌푸린 채 대답하기를 가고 싶지 않소.’

아내가 묻기를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렇소.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사람들이 너무 쌀쌀 맞고 사랑이 없는 것 같고

둘째는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셋째는 그냥 가기 싫소.’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하지만 꼭 가야 할 이유가 세가지 있어요.

성도들이 마음이 따뜻하고 둘째는 그래도 교회에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은 있어요.

셋째는 무엇보다 당신이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이기 때문이에요. 빨리 옷을 입으세요.’

 

제 얘기는 절대 아니구요. 때로는 교회 공동체에서

목사마저도 가고 싶지 않은 그런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게 교회 공동체는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교회는 ’ (공동체)

 

신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자동적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죠.

성경적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곳일까요?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공동체성이 있습니다.

교회 건강성이 많이 화두가 되고 있고

교회가 건강한가, 교회가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교회가 얼마나 크냐

이것보다 교회가 건강하냐 건강하지 않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슈가 되죠.

 

교회 건강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진단을 할 수 있지만

아주 핵심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

얼마나 확보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건강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기업체나 세상의 어떤 공공기관 같이 그런 조직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몸이라고 표현한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는 것이 교회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우린 교회를 다니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결국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 때문에

스스로 시험에 드는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몸이다라고 할 때, 우리 인체를 좀 이해할 필요가 있죠.

사실 사람의 인체라는 것은 신비로운 겁니다. 몸이 참 신비로워요.

인간의 몸은 수많은 신체 기관들이 오묘하게 서로 연결되어져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실낱 같은 아주 미세한 신경 세포 조직들이 거미줄처럼 온 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혈관들이 있는데 이 혈관들을 통해 혈액들이

지금도 온 몸에 곳곳에 쉬지 않고 돌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뼈들이 기가 막히게 서로 결합되어 있죠.

척추를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내장 기관들이 매달려 제각기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 오묘해요.

 

그래서 이 몸 전체를 우리가 이해할 때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유기적 결합이라는 겁니다. 유기적 결합이라는 개념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긴밀히 연결되어져서 상호 교류를 하면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밤에 잘 때, 좀 팔이 불편하다고 해서, 팔을 떼놓고 잘 수 없는 거죠.

불편해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행 가는데, 몸이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 간을 떼어놓고 간다는 건 불가능하죠.

그게 유기적 결합이라는 겁니다.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것!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할 때, 우리 관계를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기능을 하고 있어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이 교회는 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불가능합니다.

홀로 독립된 개체로 신앙생활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공동체 일원이 된 이후로는 나 홀로 떨어져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손가락에 난 상처가 고통을 준다고 해서, 손가락을 자르지 않잖아요?

꿰매어주고 낫도록 하죠. 어떤 것도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공동체는 배타성을 가지면 안 됩니다.

모두가 수용하는.. 관계의 단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는 노인을, 노인은 젊은이를,

특정한 부류만 모이는 교회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남녀의 차이, 이런 것도 다 없어요. 어떤 교회는 남녀 구별이 심한데,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인종도 마찬가지이고요.

여러 민족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 하모니를 잘 이루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탈북민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아주 귀중한 일입니다.

어떤 교회는 지방색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호남 사람들이 모이는, 경상도 사람들이 모이는, 정상적이지는 않아요.

모두가 다 어울리는. 배타성이 없어야 해요.

 

공동체 안에 용납과 인내가 필요한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다도 사실 위험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너무 다양하니까. 한 부류가 아니고

어떤 목적이 같아서 모이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곳이죠.

나와 다른 주체들과 몸의 일부로써 받아주는 거죠.

 

이지선 자매라고 이대 4학년 졸업반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승용차에 불이 나면서 온 몸이 반쯤 다 녹아버렸잖아요.

이지선 자매가 자기 얼굴이 다 녹고 몸이 녹아버렸을 때 거울을 볼 수가 없어요.

너무 두려우니까요.

 

나중엔 이제 녹은 얼굴의 피부 사이로 몸이 다 녹았는데

그 피부로 눈썹 같은 게 날 때, 그 일그러진 얼굴도 사랑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런 간증을 해요.

 

내 몸의 일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잘라버리지 않는 거죠.

잘라버리면 더 깊은 고통이 생길 수 있는 거죠.

 

교회를 우리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이 달라져요.

기분 나쁘다고 교회를 안 가는 건 몸을 거부하는 거죠.

분리가 불가능한데 내가 분리를 하고자 하는 생각.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그 사람을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어요. 사실은.

 

교회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골라서 모인 곳이 아니죠.

더불어 지내는 법을 배우면서 성장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얘기할 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때는

누군가 공동체에서 아픔을 겪을 때, 내가 그 아픔이 느껴지면 몸 안에 있는 겁니다.

 

손가락을 찌르면 아프잖아요. 손가락만 아픈 게 아니라 몸이 아픈 거죠.

그 전체가. 공동체 안에서 이걸 느낄 수 있느냐.

누군가 아프면 그 아픔이 나에게도 오는가. 몸 안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근데 지금 이런 것들이 우리 예배 속에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랑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방에 있는데 누군가 환자가 생겼다.. 모두가 함께 느끼죠.

관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돕고..

 

그런데 이게 그 사람은 상관없어!’ 이럴 수 없는 거잖아요.

몸 안에서 느끼는 건데요.

 

부족한 성도들이 눈에 띌 때는 그를 내치라는 게 아니고

그를 섬기는 가운데 그도 자라게 하고

그 섬김을 통해서 나 자신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그 몸 안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이

치유를 받는 놀라운 신비의 경험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겁니다.

 

몸이 아프지만, 저도 몸에 뭐가 났어요, 그런데 몸이 건강하면 그냥 낫는 거죠.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밥을 먹고 잘 돌보면 낫는 거죠.

자연스럽게 치유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생명에, 뚜렷한 특징이 뭐냐면 생명은 힘을 갖고 있어요.

 

교회는 바울을 생명체로 본 겁니다. 엄청난 힘이 있는데 무슨 힘이냐면

성장의 힘이 있는 겁니다. 어떤 생명체든지 자라는 기쁨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얼마나 작습니까. 요만하게 태어나는데 그게 그냥 자라고

말을 하고 뛰어다니고, 머리가 막 비상해지고.. 신비로운 겁니다.

이 조그만 씨앗을 하나 심었는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이게 생명의 파워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생명체로 본 겁니다. 죽은 무기체 덩어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앞의 컵은 무기체입니다. 성장이 없어요. 시간이 지나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그렇지 않아요. 끊임없이 자라나면서 새로운 역사가 생기죠.

바울이 교회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은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은, 사람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이 우리에게 심어지고 그 생명이 자라나는데

그 자라나는 생명체들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모여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커져갈 때

그것을 교회가 성장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체는 영적으로 자라가게 되는 거죠. 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장을 성경에서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온전함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인간이 온전하다는 뜻을 쓸 수가 없어요.

영어로 표현하자면 Mature라는 성숙이라고 표현하면 이해하기 좋아요.

 

성숙해진다는 건 뭘까요? 이 성숙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겁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이런 표현을 쓰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한다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삶의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 이게 성숙입니다.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라나게 된다는 겁니다.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계속 어린 아이로 남아있는 거죠.

만약 나이 70에 그리스도를 믿어도 영적으로는 갓난아이입니다.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막 태어난 그리스도인이기에 영적으로는 아이잖아요.

 

그는 자기중심적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할 능력이 없어요.

강도 높은 이야기를 하면 못 알아듣는 거예요.

 

결국은 세상의 다른 것에 영향을 많이 받기에 요동치게 됩니다. 쉽게 유혹을 받는 거죠.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외부적 환경에 늘 제한을 받고 늘 끌려다니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기에, 영적으로 늘 힘든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자라나게 된다는 거죠.

스스로 전에는 말씀을 듣기만 했지만, 말씀을 섭취하기도 하고

섭취하는 양들이 많아지고, 굉장히 딱딱한 아주 말씀들을 먹기 시작하는,

말씀의 세계가 들어가는 거죠.

 

기도도 전에는 걸음마에요. 그 기도의 세계 속에 걸음마 단계가 아니고

더 깊은 영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성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진리에 분별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겁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도 본받으라.’

영적 수준이 일정하게 오른 겁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자라나는 은혜를 겪게 되고, 그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장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1. 첫째는 교육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11절 보면 여러 가지 직임이 나옵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나옵니다.

 

여기 언급한 직분들의 공통점은 다 말씀 사역입니다.

실제적으로 남아 있는 사역은 목사와 교사인데요.

 

목사의 주된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죠. 교회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전할 때 회심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또 그 회심이 된 성도를 말씀으로 양육할 때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말씀 사역입니다.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가 중요한데, 숙명적입니다.

말씀의 이 통로의 역할을 목사가 하고 있기에

그 말씀의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잘 주어질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 직임자/목사의 역할을 12절에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첫째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는 것.

이것이 훈련의 포커스입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하고, 그 성숙한 성도가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겁니다.

 

목사의 말씀의 사역을 통해서 하는 것이고

그래서 온전해진 그리스도인이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함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합니다.

 

중요한 원리는, 교회의 일은 목사나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고

오히려 성도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사역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12

 

목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고 봉사를 하도록 코칭을 하고

실제적으로 사역은 성도들이 합니다.

 

우리는 간혹 오해를 하고 교회 일은, 목사가 하고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벌어서 헌금하고.. 이렇게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역의 주체는 성도들입니다.

 

목사님 우리는 이제 세상으로 갑니다. 열심히 교회 일을 하세요!’ 이게 아니라는 거죠.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무장되어 일꾼으로 세워져 가도록.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수동적 입장에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 안에 적극적으로 장을 펴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봉사는 교회를 내가 돕는다는 개념이 아니고, 각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가게 하는 겁니다.

목회는 성도들의 잠재력을 계발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계발하고,

그 분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목사님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모든 걸 다 해요?

그것은 성도가 해야 될 일을 가로채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봉사 일을 하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은, 훈련 사역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귀찮은 일들이 생길 수 있어요.

어떤 분들은 목사님 간섭하지 마세요. 편하게 교회 다니게 하지, 뭐 이렇게 피곤하게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본성이란, 우리가 편하게 내 방식대로 살고 싶은데 익숙해져 있어요.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내 방식대로 죄성에 이끌려가는 내 삶의 스타일을 고치려는 훈련이 필요해요.

 

존 칼빈도 굉장히 강조했어요. 저도 훈련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려면 여러 가지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어떤 분은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뭐 이리 복잡합니까. 군대입니까. 학교입니까?’ 이런 분들이 계세요.

그러나 이런 훈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를 겪을 수가 없어요.

 

어떤 분들은 주일 예배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훈련 프로그램이 다양하죠. 필수 양육 코스니 많대요. 무슨 폭발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아요.

 

이런 것들을 다 이수를, 어떤 분들은 돈 내고 등록해가면서 하는 게 못마땅할 수도 있지만

이런 과정이 없으면 우리가 성도로서 세워져 가기가 어렵죠.

 

하나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까지 시행 착오를 거쳐야 하고

우리가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서 마땅한 훈련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게 성도들 편에서 좀 더 어려운 훈련들을 시켜달라고, 요구해야 되는 게 오히려 맞아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복음의 씨앗이 심겨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야 합니다.

 

군대의 훈련과 다르잖아요.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마땅한 훈련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자라나게 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몫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세워져 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자라나고 봉사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모든 성도들은 영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생명체의 특징입니다. 안 자라면 생명체가 아닙니다.

 

생명체는 성장합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셨고

말씀의 수단을 통하여 온전케 하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고

그런 일들이 성숙한 성도들이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로 중요한 것은, 성장은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성장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관계적입니다. 16절 말씀이 굉장히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부음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중요한 것은 몸 안에 있을 때 함께 자란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자랄 수가 없어요.

성도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란다는 겁니다.

혼자 있으면 내가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신앙생활이 가장 좋은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를 못해요.

 

그러나 관계 안에서, 몸이 자라면 아이들이 자라잖아요.

몸만 자라는 게 아니라 몸에 속해 있는 모든 내장도 자라잖아요.

몸 안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자란다는 겁니다.

공동체 안에 속해있을 때 자연스럽게 신앙이 성장해간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통해 자라왔던 과정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해 있을 때, 서로가 연결되고 결합되어서,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라납니다.

 

단순히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다는 말은 그런 게 아닙니다.

무기체는 이런 마이크죠. 떼버려도 되요. 떼고 다른 거 붙여도 되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붙어 있는 거죠.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는, 그런 게 아니라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고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교회 몸 안에 있을 때,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과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매주 저는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10년 믿은 분들은 가지고 있는 어떤 선물(신앙 자원)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께 나눠줄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거죠.

 

어떤 사람은 투병하면서 고통 속에서 믿음으로 이겨 온 어떤 간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럼 또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분이 그에게 진정으로 격려하고 힘을 줄 수가 있어요.

그런 걸 통해서 신앙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는 거죠.

 

오늘 우리가 누구든지 이 부분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요.

 

성숙한 그리스도인도,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영적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게 아니에요. 상호 유기적입니다.

 

우리 자매들이 나이가 되어 결혼을 하잖아요.

결혼을 했을 때는 뭐 애가 애를 낳아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정신없죠.

그런데도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 힘을 쓰죠.

일찍 일어나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애가 힘들면 그것을 막 그냥 애를 쓰죠.

 

아기를 안고 얼마나 팔뚝도 굵어지고 그러죠. 먹을 것도 가리지 않게 되고 막 그러잖아요.

돌보는 가운데 부모의 마음도 알게 되고, 깨닫는 것도 많고 점점 성장을 하는 거죠.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서로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적용

 

우리 교회 안에도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 장애인을 비장애인들이 섬기면서 배우는 게 엄청나게 커요.

아주 주옥 같은 삶 속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섬기면서 얻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잖아요.

 

장애인은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에게 받는 혜택이 있고

서로 교류를 하면서 연결되어져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 갑니다.

이런 것을 느끼려면 소그룹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로 치면 사랑방. 여기서 어떻게 합니까.

내가 지금은 누군가 내가 힘들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고, 그런 마음이 있지만

아무도 그렇지 않아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느낄 수 있는 건 소그룹이에요.

우리 곁에 사랑방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야 그리스도의 생명의 힘이 무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몰라요. 내가 죽는지 사는지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누가 소리 지르면서 눕지는 않잖아요.

여기서는 주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는 예배라 볼 수 있고

수평적으로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건 소그룹입니다.

 

사랑방 안에 들어가셔야 교회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숫자가 좀 적으면

오히려 그것이 주일 날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성가대만 해도 이 정도 규모면, 그리스도의 몸을 느끼기에 많습니다.

그렇기에 소그룹이 안에 또 있어서 그 안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모든 것을 서로가 통할 수 있는 관계면 좋겠죠.

 

우리는 아무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 관계에서 우리가 성장하게 되고 그 공동체 안에 놀라운 비밀들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공동체를 기피합니다. 공동체의 힘을 잘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이 지금 얘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교회를 정확히 이해하면

이것을 느낄 수 있는 게 소그룹입니다.

 

사랑방에 들어가면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어마어마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랑방 안에서 흘러넘칩니다. 작은 공동체가 아니면 우리가 소속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소속감이 없으면 안정감이 없어요. 연결된 느낌이 없기에 언제든지 분리가 가능한 구조에요.

주일날 한번 예배를 드리고 어떤 다른 것에 연결되지 않으면

잠재적으로 늘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소속감이 없기에 부담도 없고, 언제든 그럴 수 있는.

멤버십에 대한 진정한 공동체 의식이 들어오기가 힘듭니다.

부담 없이 다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에 위기가 오면

공동체가 나에게 큰 도움을 줄 수도 없고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없습니다.

 

신체 모든 기관들이 몸인데, 이게 하나하나 떨어지면 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 경험은 소그룹을 통해서입니다.

한 사람으로는 우리가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오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인간관계의 신뢰가 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아는 사람끼리도 신뢰가 약해졌어요. 가족 관계마저도 신뢰가 약해졌고

또 심지어는 형제들끼리도 신뢰가 많이 깨어져서

갈등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고, 도시의 삶 속에서는 굉장히 삭막하죠.

 

이런데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이 소외 의식입니다.

큰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소외된 느낌을 받습니다.

 

인터넷 문화나 이런 것들하고 핸드폰을 통해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만, 사실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화기 없으면 답답해서라도 쫓아가서 만나고 그랬잖아요.

얼굴과 얼굴을 만나고 살가운 터치가 일어나야 하는데

이제는 기계 앞에서 모든 걸 하고 교감을 나누는 인간관계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도시의 아파트 문화나 층간 소음 문제로도 신경전을 벌이는

이런 공동체 없는 환경 속에서 모두가 소외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도 빈부 격차에 의한 소외감이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대로 격리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우울증과 자살률이 계속 늘어납니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리적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극단적 개인주의를 느낍니다 우리가. 여기서는 공동체 의식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아이디어는 공동체에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퍼펙트한 환경은 공동체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의 관계가 공동체의 시초에요.

그런데 죄를 통해서 이 공동체가 깨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깨어졌잖아요. 이것 자체가 재앙이에요.

 

깨어진 관계의 불행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두 가지입니다.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에요. 더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살아 있으면, 가정은 개별적인 가정이 어려움을 갖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면 그 안에 소속되어져 있는 과정이라면

그 위기를 맞고 있는 어려운 관계 문제가 있어도, 이 가정은 언젠가 회복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그리스도 몸의 파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모이고 있는 이 모임은, 그냥 모임이 아닙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몸은 이 안에서 성령이 움직이시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생명의 공동체이기에 실제적인 통치가 일어납니다.

 

그 안에는 신비한 묘약들이 역학적으로 관계를 이루는데

연약함과 문제투성이 사람들이 그 안에서 치유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론 처음부터는 아닙니다.

우리가 죄성을 갖고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에 위험한 출발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서 서로가 노력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점점 몸이 성장함으로 인하여

그 안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건강한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래서 어떤 관계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합니다. 공동체 사상.

바울의 신학 속에 이 공동체 사상이 굉장히 중심에 있는 것이고

신앙생활에서 이 부분을 우리가 놓쳐버리면 교회를 놓치는 겁니다.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