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에 매인 사신 엡6:20-24 15.03.15.스크랩, 출처
◑쇠사슬과 사신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6:20
▲에베소서 마지막 강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만물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위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요 기업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교회 위에는 놀라운 능력이 주어졌고
악한 자의 권세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죄인의 몸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영광은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저는 여기서 쇠사슬과 사신이라는 두 단어가
신앙인의 실존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6:20
그것은 이 세상이 아직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의 소유가 되어 있고 악의 소유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중립지대에서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마치 최전선에 떨어진 군사와 같습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고립되어 포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변절시키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쇠사슬에 묶여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사신입니다.
사신을 영어성경은 ambassador, 곧 대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프레스뷰온’은 황제의 특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대사이며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바울은 일개 잡범으로 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며, 바울 어깨에는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대사에게 필요한 것은 존엄함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 매이거나 두려움에 떠는 대사는 자기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왕과 총독 앞에서 바울은 얼마나 당당하였습니까?
쇠사슬에 매여 재판정에 끌려온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그래서 19절과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파르레시아’를 번역한 ‘담대하게’는 :20
왕이나 권력자나 어떤 위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기도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행4:29)
이 담대함은 우리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신에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기고와 우리
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에베소서에서 바울 외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이름이 두기고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동행했던 ‘아시아’인으로 나옵니다.
당시 아시아는 에베소를 지칭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아마 에베소서를 가지고 갔던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두기고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입니다. 참 대단한 칭찬입니다.
바울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미국 타임즈 창간자 헨리 루스의 부인 클레어 부츠 루스는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기억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컨대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로, 링컨은 ‘노예 해방의 기수’로,
마틴 루터 킹은 ‘흑인 인권 운동의 선구자’로 기억됩니다.
루스 부인의 이 글을 자기의 자서전에 인용하며, 가장 괴로워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미국을 건설하기 위해 모든 노력과 헌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에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성공적인 성과들은 묻힌 채
‘임기도중 사임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을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단 한 문장의 인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진실해’ ‘인색해’ ‘사랑이 많아’ ‘타고난 리더야’ ‘우유부단하다’
‘사기꾼이야’ 그런 인상 비평이 우리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됩니다.
두기고는 지금 바울로부터 ‘사랑을 받은 형제다, 신실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더 나가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서 편지를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사정을 알려주고,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22절입니다.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일종의 추천서입니다.
여러 모로 볼 때 두기고는 교회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 같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골4:7)고 소개합니다.
디도서에서는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딛3:2),
디모데후서에서는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딤후4:12)라 말씀합니다.
▲복음전도자는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냈다면, 바울은 지금 두기고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버금가는 인물로 추앙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당시에는 그는 소수자였습니다.
주류는 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기에, 가는 곳마다 사도권에 대한 의심을 샀습니다.
가는 곳마다 추천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말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3:1-2)
추천서가 필요 없고, 복음 선포의 결과물인 너희가 증명하지 않느냐는 바울의 말입니다.
▲특별히 그의 율법에 대한 투쟁은
유대인들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던 초대교회에 위험스러워보였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세력권에서 먼 이방인 공동체로 밀려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소외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방향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과 바울의 신학을 이어갔던 사람이 바로 이 두기고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바울 학파라 불리기도 합니다.
역사와 전통은 그것을 이어가는 세력에 의해서 보존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남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롬9:27)
그루터기에 의해서 역사는 이어져갑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남은 자들, 그루터기가 미래입니다. 지금은 소수에 불과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미래는 이들이 점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많은 세력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내가 옳은 자리에 있는가 입니다. 옳은 것이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두기고와 같은 사람에 의해서 바울의 복음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고
또 우리 손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변질될 때 루터를 통하여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루터가 두기고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두기고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은혜와 불멸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성경의 각양 축복의 말로 마무리됩니다.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먼저 평화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평화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인간들 간의 평화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공동체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죄 때문에 멀어졌고 담을 쌓았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무너지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사랑입니다. 사랑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카리스입니다.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어집니다. 우리 인생이 선물입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선물들이 많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평화 사랑 은혜가 있기를 서로에게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족에게 평화가 필요합니다.
남북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갈등이 너무 심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을 돌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사랑의 시스템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자와 약자를 배려해 주는 경제 시스템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부어졌으면 합니다.
은혜는 또한 우리로 겸손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겸손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들을 많이 사용하고 평화와 사랑와 은혜의 축복을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의 마무리 인상에서 제가 좀 더 주목하고자 하는 축복은
제일 마지막 단어인 ‘엔 아프싸르시아’입니다. ‘불멸성 안에서’란 뜻입니다.
한글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은 이 단어를 ‘변함없는’이라 번역하여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라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수식 하는 위치가 애매하여 어느 곳에든 붙일 수 있습니다.
‘불멸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찾아본 성경 중에 단 한 성경 예루살렘 바이블에서만 ‘in life imperishable’
곧 ‘불멸하는 삶에서’라 단독구로 번역합니다.
제가 주로 참조하고 있는 요아힘 그닐카의 에베소서 주석서에서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족처럼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에베소서 저자의 마음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는 이미 에베소서 2장 5, 6절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신앙인들을 땅 위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현재형이나 미래형이 아닌 단순과거형을 썼습니다.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요한복음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얻었다는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압도적인 생명이 이미 이 땅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지만 그런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보이는 세계에 매여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설명들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멸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에게서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원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불멸하는 교회의 영광이 현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광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미 이런 영광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쇠사슬은 그 어떤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가진 것이 든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라고 하는데, 진짜 그렇습니다.
부러운 마음이 들고 난 후에 절제하거나 기도한들, 그 유혹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부요한 사람은 유혹이 둥지를 틀 수 없습니다.
마음의 부요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악한 자의 그 어떤 공격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 그래서 불멸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자는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사람들은 허름한 밭을 샀다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즐겁습니다.
늘 싱글벙글합니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보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당당합니다.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거기서 감사와 기쁨과 찬양과 당당함과 존엄함과 사랑과 능력이 나옵니다.
하늘 영광이 우리 삶에 넘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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