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사죄 눅19:1-10 15.08.16 출처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에 고백하는 대로
예수께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심판에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생명책이 있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한 책이 있어서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행위의 책에 따라,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 못으로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심판에 대한 경고에요.
◑그런데 최후의 심판에는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너무 늦다는 사실이에요. 권선징악의 효과가 있기에도 너무 늦습니다.
하나님이 일본을 심판하신다고 했을 때, 마지막에 가서야 심판을 하신다면
피해자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고, 죄인에겐 어떤 경고의 효과가 있겠다는 말입니까?
심판을 하실 것이라면 차라리 이 시대에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축구경기 중에 파울을 한 선수를 퇴장시키려면,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일 때에 해야지
경기가 끝난 다음에 퇴장을 시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최후의 심판이 어떤 유익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심판은 그것을 겪는 사람에겐, 아픔이 되고, 경고가 되고, 뭔가 바뀔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그리고 그 심판을 보는 사람에게는, 보상 내지는 정의구현의 효과가 있어야 되는데,
최후의 심판은, 문자 그대로 최후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도 없고, 변화할 기회도 없고,
깨달을 기회도 없다면, 최후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어떤 유익을 누릴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늦다는 것입니다.
▲3. 셋째는 최후의 심판이 하나님께 어떤 영광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려고 애를 써서 열심히 키웠지만
그 자식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보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와 같지 않습니까?
그건 부모에게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서 의인이 되게 하려고 애를 쓰셨지만
인간이 죄를 고백하여 지옥에 가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어떤 기쁨이 되겠습니까?
기독교는, 힘써 애써,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기 위하여 애를 썼지만
하나님의 그 마지막 질풍노도와 같은 분노 속에
사랑의 메시지는 흐지부지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줄 알았더니,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구나’
하고 모든 사람이 결론 내리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국내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습니다.
피해자가 많은 아픔을 겪은 후에, 자기에게 아픔을 주었던 가해자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자리에서 가해자는 뻔뻔하게 떳떳한 얼굴로 "내가 하나님께 회개했고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깐 기독교 신앙이 어떤 모순을 빚을 수 있는 가를 지적하는 영홥니다.
피해자의 입장은 황당한 것입니다.
본인은 가해자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고,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하여 애를 썼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가해자를 찾아간 것인데,
가해자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나는 이미 회개해서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을 한다면
정말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서하셨다는 말인가요?
피해자의 아픔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말인가요?
하나님과 죄인 간에는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가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피해자의 아픔을 건너뛰고 죄인을 용서하시는가요?
그것이 과연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인가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회개,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진정한 회개의 전형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에 회개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성립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1.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고민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회개할 때 내 죄로 말미암은 고통을 느껴봐야 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회개 한 게 아니에요.
자신의 죄가 큰 만큼 아픔을 겪어 봐야 됩니다.
"네 죄를 알렸다"라는 말이 헛튼 말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장면을 보려고 하는 그 모습에서
예수님은 삭개오가 갖고 있는 아픔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죄에 대한 고민을 피하려는 방도로서, 회개를 하려고 합니다.
회개를 해서 용서를 받으면, 아픔을 면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이기적인 방법입니다.
밀양에 나오는 그 죄인이 피해자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에 마음에 평강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겪는 번민과 고뇌에는,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죄를 알든 모르든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정말 악한 사람은, 번민도 없고 고민도 없습니다.
자기 죄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싸이코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전혀 고민하는 흔적이 없습니다.
영화 <대부> 3편을 보면 마이클 콜레오네가
대주교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하지 못하겠다고 할 자신이 없다고 주저하다가
겨우 말문이 열려서 자기가 양심을 어겼고
또 자기 동생을 죽였고, 많은 사람을 죽게 했고,
자기가 이러한 죄를 저질렀고, 마음속에 아픔이 있고,
번민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터트리지요.
그때 그 고해성사를 듣던 대주교가 섣불리 평강을 기원하지 않았어요.
그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됩니다.
"Your suffering is just" (당신의 고뇌는 정당하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죄인이 충분한 고민을 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섣불리 평강을 남발하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는 과정에, 자기의 죄로 말미암은 아픔을 느껴야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죄인의 집을 찾아가셨지만
처음부터 평강이나 구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 집을 찾아가셨지만 처음부터 구원을 말씀하지 않았어요.
삭개오가 일어나서 ‘주여 내가 내 재산에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한 후에야
예수님이 ‘구원이 오늘 이 집에 임하였도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다고 당장 구원을 받는게 아니에요.
목사가 성도를 찾아갔다고 당장 구원이 이루어지는게 아니에요.
성도가 목사와 같이 식사를 한다고 그게 구원이 되는게 아니에요.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도 기다리셨어요.
삭개오가 참으로 회개하는 것. 회개의 증거가 있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사죄라는 것은 그렇게 함부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두 번째로 삭개오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피해자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노력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뉘를 토색한 일이 있다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남을 토색해서 부자가 됐어요. 그게 삭개오의 죄에요.
이제 그것을 회개하는데, 그냥 과거일은 과거일로 덮어버리죠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만일 누구를 떼어버린 일이 있다면, 사배나 갚아주겠습니다.
피해자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는 사람에게 짓는 죄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를 한다면
사람이 입은 피해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는 따라 주어야 되요.
따라주어야 됩니다.
몇 년 전에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과거에 누구의 돈을 훔친 것을 회개하면서
그런데 자기가 훔쳤던 대상은 벌써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후손에게 찾아가서 훔친 돈을 돌려주었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게 진짜 회개입니다.
‘그냥 하나님께 내가 아무개의 돈을 훔친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나를 정결케 합니다.’
그러나 그걸 돌려주려는 노력이 없이 회개한다는 것은 얌체에요. 그게 무슨 회개입니까?
그 죄의 혜택은 여전히 누리면서 죄만 사함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건 주님도 진정한 회개라고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전에 한국의 김득구 선수가 라이트 웨이트 챔피언쉽 경기에서
만시니 선수의 펀치를 맞고 쓰러져서 결국 사망했지요.
만시니 선수가 김득구 선수를 죽이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복싱 자체가 위험한 것이고, 위험을 감수하고 시합을 하는 것이고,
일방적인 경기도 아니었어요.
만시니 선수가 김득구 선수를 일방적으로 때린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김득구 선수의 사망은 레이 만시니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는 복싱을 떠났고,
신앙에 귀의하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일평생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옛날에 고우영 화백이 그린 최배달에 대한 만화가 있었습니다.
최배달은 극진 가라데를 창시한 제일교포 무술인에요.
이것이 실제상황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배달은 황소와 싸워서 황소의 뿔을 부러트린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가 전국의 무술인을 찾아다니면서 대결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런데 그 만화를 보면 어떤 무술인과 대결을 벌이다가
그 무술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무술인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겁니다.
그런데 최배달씨가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갑니다.
머슴으로 들어가서 막일을 해주면서 사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 가족들이 돌을 던지고 쫓아내려고 하지만
묵묵히 참고 밭도 갈아주고 막일을 해주는데
결국은 그 가족이 최배달씨를 용서하고, 이제는 가시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실화였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린이를 위한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참 회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그런 면이 있었어요.
그는 사람을 괴롭혀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요즘에 고속도로 가다보면 ‘떼인 빚 갚아드림, 떼인 빚 찾아드립니다’
컬렉션 에이전시와 비슷한 직업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다가 로마 정부에 일부를 바치고 일부를 착복하는, 그게 세리에요.
그래서 그 당시 세리를 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가 회개하는데 내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만일 사배를 갚겠나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정성을 다해서 갚겠다는 말입니다.
그제야 예수님이 구원을 선포하셨어요.
개신교는 이러한 회개의 모습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진정한 회개는 심판을 앞당기는 면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지금 회개하면 나중에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지금 회개하는 것이 나중에 받을 심판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심판을 면하는 것입니다.
모든 회개에는 작은 심판의 면모가 있습니다.
나중에 받을 큰 심판대신에 지금 작은 심판을 겪음으로써
이후에 최후의 심판을 면하는 것입니다.
이자가 불어나기 전에 빨리 빚을 갚는 것이 나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누가 너를 송사하여 끌고 갈 때에 도중에
그와 사화하라고 말씀하셨지요. 빨리 지금 사화하는 것이 낫지
그렇지 않으면 저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넘겨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빨리 그것을 갚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기다리면 점점 더 죄 값이 불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에 빨리 회개하면 나중에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으로 인간의 사법제도에는 마지막 심판을 덜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도둑이 잡혀서 죗값을 치르면, 나중에 마지막 심판 때 심판을 받지 않지만
도둑이 체포를 피해서 도망가면 나중에 심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사법제도. 인간은 소위 역사를 바로잡는다.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은
이후의 받을 심판을 앞당긴다는 면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우리끼리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중에 그것을 해결하셔야 되는데
그때가 되면 더 아프고, 더 힘들고, 더 괴롭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위험이 됩니다.
여러분 독일은 과거 전쟁 중에 유태인들에게 지은 죄 많은 죄를
여러 번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죄했지요. 금전적인 보상도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반 나치주의를 천명했습니다.
만일 지금 누가 독일에서 나치주의를 찬양하면 법에 걸리고, 처벌을 받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전쟁 중에 지은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나아요. 먼저 맞으면 많이 안 맞습니다.
나중까지 기다리면 더 많이 맞을 수밖에 없어요.
회개한다는 말은 나중에 큰 심판 대신
지금 작은 심판을 감수하겠다는 말이에요.
지금 작은 심판을 감수하면 나중에 큰 심판을 면합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진리에요.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작은 괴로움을 감수하면 나중에 평강과 생명을 얻습니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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