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사람은, 구제하는 사람 마6:1~2, 6:21~24 출처
Shane Willard
※출처의 영어강의를 대강 번역해서 의미만 전달했습니다.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듣는 내용인데, 앞으로 이런 관점으로 계속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위 1절에서 ‘의를 행한다’고 했고,
2절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이어지는데 ‘구제할 때에’ 라고 했습니다.
문맥을 가만히 읽어보면, 3초 만에
“의를 행하는 것 = 구제하는 것”이란 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또는 ‘의’의 개념에는
‘구제’의 의미가, 거기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구제하지 않는’ 사람은,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다시 말해서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바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그 삶에 증거가 ‘구제’로 나타납니다.
보통 일반적/헬라적 개념의 ‘의’는, 올바름 right, 정의 justice 이런 개념이지만
히브리 개념의 ‘의’에는,
거기에 구제, 관대함 generosity, alms 이 강하게 들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 개념의 의로운 사람은 = 구제하는 사람이고,
불의한 사람은 = 자기밖에 모르는 탐욕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래에서 몇 구절을 더 살피겠지만,
성경에서 나타난 ‘의’를 헬라개념의 ‘정의’로 생각하기 보다는
히브리 개념의 ‘구제, 자비를 베풂’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이, 이라크, 터키 등 중동지방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빈자들이, 길가에서 구절하는 컵을 들고 이렇게 말한다고 하죠.
‘체다카(의), 체다카, 체다카’
'당신의 의를 제게 보여주세요'.. 그런 뜻이죠.
그들의 문화 속에 ‘의=구제’라는 개념이,
오늘까지도 남아서 계속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의”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이고
“관대함”은 히브리어로 “체다크”인데,
히브리 단어가 비슷하지요?
즉 히브리 개념의 ‘의’란 ‘관대함’이란 뜻입니다.
righteousness가 바로 generosity 란 뜻이지요.
*설교자 Shane Willard의 주장인데,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라서
이런 개념을 갖고서, 차츰 더 연구를 해 봐야 되겠습니다. 히브리 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로운 사람이 탐욕스러운 것은, 절대 말이 안 되는 셈이죠.
우리 개념에는, 구제를 거의 안 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히브리 개념 또는 신약성경적 개념으로
구제를 안 하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not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난해구절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전후 문맥에 이렇게 나옵니다.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인 22~23절은
‘물질에 관한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22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 KJV
‘눈이 밝다 eyes full of light’ 라는 표현은, 히브리 관용어인데,
예수님 당시에 ‘관대한 사람, 구제를 잘 하는 사람’에 대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탐욕스런 사람은 ‘악한 눈’ 또는 ‘어두운 눈’이라고 불렀답니다.
히브리 관용어로 그렇다는 뜻이죠.
아마 빈자를 쳐다보지 않았거나, 못 본체 하고 지나갔으니
‘악한 눈’ 또는 ‘어두운 눈’이 되는 셈이지요.
그러니 22~23절은, 눈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요,
빛과 어두움에 관한 말씀도 아니요, ‘구제’에 관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22절의 ‘눈이 성한(밝은) 사람’은, 구제를 잘 하는 사람이요,
23절의 ‘눈이 어두운 사람’은, 구제를 거의 안 하는 사람입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자기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잘 눈에 띄는 사람이요,
눈이 어두운 사람은.. 그 탐욕이 자기 눈을 막아서, 눈이 어두워져서,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못 보는 거죠.
23b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이 말씀의 뜻은, ‘빛이 어둡다’고 했는데,
‘구제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다른 탐욕의 목적, 나쁜 동기로 한다면..’ 이런 뜻입니다.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구제를 차라리 안 하는 것보다, 더 큰 어두움이라는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고, 도리어 징계를 받았던 것과 같죠.
그래서 마6:1절은, 구제를 하되, 선한 동기로 하라고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구제)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의와 구제가 같이 가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시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위 구절에서, 의인은..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righteous person은 generous합니다.
시112: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위 구절에서도 의로운 사람은, 관대하고 구제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래 구절도 <구제>에 관한 구절일 수 있습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제까지 히브리 개념의 ‘의’에는,
(보통 일반적인 개념의 ‘의’는 올바름 right, 정의 justice 이런 개념이지만)
거기에 구제, 관대함 generosity, alms 이 강하게 들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히브리 개념의 ‘의’로, 마5:6절을 해석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늘 구제하려고 애쓰는 자입니다.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가난해지지 않고, 오히려 잘 산다는 것이죠.
앞서 살펴본 시37:25절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고요.
시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보통 ‘헬라 개념의 의’를 갖고 있습니다. 올바름, 정의.. 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성경적 개념의 의’는, 구제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히브리 문화에 아주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구제를 전혀 하지 않고도,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겠지만,
정말 의로운 사람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삶의 증거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의로운 사람입니까?
▲그런데 마25장에도,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을 뜬금없이 "의인"이라고 칭합니다.
거기 무슨 신실하게 믿었다는 말도 없는데.. "의인"이라니 당혹스런 때가 있었습니다.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그런데 위 설명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그들은 "의인"이 맞습니다.
※빈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강추-
성경은 빈자의 구제에 대해서 3백번 이상 강조해서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