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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새 식구들

LNCK 2015. 10. 8. 20:39

예수님의 새 식구들              12:46-50                   12.05.13.출처

 

 

 

 

지난 주간에 저는 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정성스럽게 모아주신 송아지 50마리를

하노이 시 인근의 농촌마을에 전달해주고 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2006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7년 동안 12번에 걸쳐서

베트남 농촌에 송아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계산해 보니, 3년이 되면 한 마리씩 상환하는 것을 다시 환수를 해서

투자한 것까지 합해서 우리 교회가 7년 동안 485마리의 송아지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약 14만불, 17천만원정도가 됩니다.

 

지금처럼 매해 50마리씩 지원을 하고,

또 그동안 지원했던 것을 3년마다 상환해서 다시 지원하면

앞으로 3년 후인 2015년에는, 우리 교회가 지원한 송아지가 1000마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후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2018년쯤에는

아마도 1500마리에서 2000마리에 육박하는 송아지를 지원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송아지가 한 마리 들어가면 가난한 농촌의 농가의 생활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됩니다.

 

저는 <암소은행 사업>이 대단한 의미가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는 베트남에 큰 빚을 진 나라입니다.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또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많이 살상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우리나라 군인들이 가지 않았던 남쪽의 사이공

지금의 호치민 시나 하노이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지식인들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군인들이 싸웠던 중부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우리나라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면 치를 떤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베트남 국민들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지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베트남의 가난한 농촌,

특히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이나 아버지를 잃은 전쟁고아

또는 전쟁 중에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된 상이군인들을

도와주고 희망을 준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를 돌보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너희들이 잔치를 할 때, 가난한 사람, 나그네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잔치는 가까운 친지들이 모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거워하는 것이 진정한 잔치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송아지를 전달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베트남은 아직도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입니다.

목사나 교회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 송아지를 가지고 갔을 때는, 교회가 준다는 말도,

제가 목사라는 말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이 송아지는 갈릴리교회 교인들이 헌금한 돈으로 산 송아지이며

저는 갈릴리교회 목사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할 때는 가난한 사람과 같이 해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잔치를 할 때마다 조금씩 정성을 모아서 송아지를 전달하게 되었다고

제가 10~15분 동안 설교를 합니다.

 

저는 그 말을 할 때에 송아지만이 아니라

복음의 씨가 이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힐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 복음의 씨앗이 베트남 땅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을 확신하며

이 일을 위해서 저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송아지 전달식에도 예전처럼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공회당에 모여서

애국가도 부르고 베트남 국가도 부르고 대단한 의식을 치렀습니다.

 

마을의 온 지도자들이 나와 전달식을 하고 나면, 성대한 잔치를 베푸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정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점심시간에 마을의 주석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딸만 둘이 있는데, 시집을 가서 하노이에 살고 있는데

아내가 딸집에 가서 외손녀를 보느라, 혼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을에 200여 가구가 있는데

자기처럼 아내는 아이들 집에서 손주들을 보고 있고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집이 35가구라는 것입니다. 소위 ‘1인 가구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저는, 베트남도 만만치 않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혼자 사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진짜 식구는 일 년에 몇 번밖에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동네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밥도 해주고, 병이 나면 병원도 데려다 주고

동네 사람들이 진짜 자기 식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베트남 사회도 우리나라와 같이

급격한 가정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가정은 무엇이며, 식구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정부 통계청에서

우리나라 가족제도에 대한 충격적인 통계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대가족제도 하에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고모들 우리 형제들 그리고 사촌들까지

20여명이 함께 살았습니다.

 

식사 때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함께 모이면

30~40명이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전형적인 대가족제도에서 저는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 산업화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대가족제도는 해체되고

소위 핵가족제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핵가족제도는 부부와 자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형태입니다.

 

당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것이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4인 가족 위주의 핵가족제도가 70년대 우리나라에 정착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이와 같은 핵가족제도가 2010년까지 진행되어 오다가,

2010년부터 바뀌게 되었습니다.

-2010년 전까지는 4인 가족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에 아이가 하나인 3인 가족,

-그리고 부부가 사는 2인 가족,

-그리고 드물게는 혼자 사는 1인 단독가구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에 이르러서 이런 가족구성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가족 구성이 2인 가족이 되었고

-그 다음이 혼자 사는 1인 가구,

-그리고 네 사람이 사는 4인 가구

-그리고 세 사람이 사는 3인 가구가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과 2년 후인 2012년에는 이 가족제도가 다시 바뀌게 되는데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가구가 되었고

-2인 가구가 2,

-3인 가구가 3,

-4사람이 함께 사는 4인 가구가 4위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인 가구와 2인 가구의 합계가

3인 가구, 4인 가구의 수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인 가구와 2인 가구가 과반수가 넘어선 것입니다.

이제는 혼자나 둘이 사는 집이

세 식구, 네 식구가 사는 집보다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고령화, 이혼, 미혼가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2012년에 혼자 사는 가구가 25.3%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4가구 중 한 가구가 혼자 사는 가구라는 것입니다.

 

통계청의 예측에 의하면 앞으로 10여년 후인 2035년에는

혼자 사는 가구 수가 34.3%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10여 년 후에는 혼자 사는 가구가 세 가구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 가구의 20%가 미혼 여성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부부가 같이 살고, 자녀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같이 사는 가구가 금년에 66.6%

그러니까 세 가구 중에 두 가구가 부부가 같이 살고

한 가구는 부부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남편이 혼자 사는 가구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10여 년 후인 2035년에는 53.7%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부부도 같이 살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가족제도에서 부부와 자녀들이 사는 핵가족으로 발전했습니다.

앞으로 2035년이 되면 그런 생각들이 다 없어지고

부부가 아니라 혼자 사는 가구 수가, 과반수가 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통계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떻게 급격하게 변화되고

전통적인 가정이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이 뿌리째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사는 것을 가정으로 생각했지만

앞으로 변화된 사회에는 반 이상이 부부가 같이 살지 않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정윤리와 가정생활을 주장하고 강조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며, 듣는 이들에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볼 때

부모가 혼자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자식들을 나무라지만

우리 현실을 생각해볼 때, 부모 자식이 한 집에서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또한 부부가 같이 사는 일도 어려운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10여년 후에는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 가정이, 반 수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고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면 양로원에 가든지 요양원으로 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가는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만 가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면 불효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식이 많이 바뀌어, 가장 합리적이며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자식들이 불편하게 모시는 것보다 거기서 편안하게 사시게 하는 것이

불효라고 할 수 없는 세상이 왔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앞으로 편리한 시설의 요양원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남편과 아내가 똑같이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원에 가게 되면 좋은데

한 사람만 건강이 나빠지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면, 부득이하게 별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옛날에 부부는 죽을 때까지 같이 살고 죽어야 헤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살아있으면서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요즘 누가 병원에 입원하면 식구들이 간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효심이 지극한 자식이라도 직장을 그만 두고 부모님을 간병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부부라 할지라도 나이가 들면 간병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간병인을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죽을 때 식구들의 품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지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간병인의 품에서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종종 나는 어느 조선족 간병인의 품에서 죽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고 거스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변화의 흐름입니다.

 

지금도 많은 어른들의 경우, 병이 나서 병원에 가면

자식들이 간병하지 않는 것을 섭섭해 합니다.

 

그러나 병이 났을 때 자식들의 간병을 받는 사람은

어찌 생각해보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식이 일도 하지 않고, 간병을 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견디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나날이 죽어 가는데 자식들은 오지 않고 식구들도 없이

낯선 간병인의 손에서 마지막 인생을 맞이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저도 제가 살아온 인생이 만만하지 않은데

제가 마지막 인생을 마칠 때 나와 같이 살아왔던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제가 누군지 모르는 낯선 간병인의 손에서 시중을 받으며 죽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난 58일이 어버이날이었는데 여러분의 자식들이 찾아왔습니까?

가슴에 꽃을 달아주었습니까? 이제는 그것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전화나 받으면 다행이고, 인터넷으로 꽃다발을 받았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불평하고 불만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변화된 세상에서 가정이 무엇이며, 식구가 부부가 무엇이며

효도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옛날과 같은 윤리를 자녀들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 아내에게 강요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나 있는 가족에 대한 생각,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설명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음으로 가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고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에게 4명의 남동생과 누이동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3절에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부모형제와 가족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뜻밖에도

혈연인 자신의 형제들에 대해서 냉정한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심지어 어머니에게까지도 말입니다.

 

세상의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가족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동양의 효를 강조하는 목사님들은

성경의 이 대목은 아마도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대로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족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들도 생각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저는 제 마지막을 지켜보게 될 간병인이 저의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가족입니까?

나의 아픔을 같이 하고 나의 마지막 죽음을 같이 하는 그 사람이 가족이 아닙니까?

 

멀리 떨어져있어 일 년에 한번 볼까말까 한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혈연으로 맺어진 전통적 가족의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의 개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여기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새로운 식구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나와 함께 인생을 사는 사람이 가족이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개념의 가족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을 가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지금 나와 함께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생각이 같고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이 내 가족인 것입니다.

그들과 가족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나를 낳은 부모라도, 같이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의 관계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가족입니다.

결국 가족은 지금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같은 생각 같은 목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모가 누구이며 형제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도 바울은 부모가 누구이며 형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아내나 자식은 없겠지만

부모나 형제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편지를 남겼지만,

자신이 스스로 부모나 형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육신의 부모가 누구이며

육신의 형제가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바울에게 믿음의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의 육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사도 바울의 믿음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아 육신의 아들은 없었지만

딤전1장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을 보아

사도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도 바울에게 디모데와 디도라는

두 명의 믿음의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혈연관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어머니와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개념이 더 특별합니다. 혈연에서 맺어진 가족뿐만이 아니라

그 집안의 종들, 그 집안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

그들과 함께 먹고 같이 사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우리의 가족이 아니라

토요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이, 우리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우리 교회에 찾아와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이

우리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가족의 개념입니다.

 

옛날에 이런 저런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에게 연연하고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식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새로운 식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새로운 식구로 삼아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나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믿음의 식구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이고 자식입니다.

혈연을 넘어서 믿음으로 맺어진 나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

시대의 진정한 우리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1인 가구나 2인 가구가 늘어나고 사회의 가족제도가 완전히 해체되고 새롭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살면 어떻고, 여럿이 살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낡은 세상적 기준입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매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서로 의지하고 돕고 살아가는

믿음의 가족이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의 가족, 누가 너의 가족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2, 3, 4인 가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귀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정말 가족이 누구인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가족을 사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식구들로 받아들여

여러분의 인생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이 넘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