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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LNCK 2015. 11. 12. 10:36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20:14~16                      15.10.18.출처보기

 

※주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주님의 지시를 받고서

   오히려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런 용기와 담대함은, 주님과 독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리즈에서, 행18~20장의 바울의 행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앗소까지 일행과 합류, 밀레도로 가다

 

바울은, 일행과 떨어져서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혼자 걸어가면서

하나님과만 독대하는 자기격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했고,

자신을 영원히 살려주신 주님을 위해서, 자기 육체의 생명을 던지기로 결단했습니다.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본문은, 그 이후의 일을, 우리에게 밝혀 줍니다.

 

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마침내 걸어서 앗소에 도착한 바울은,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가서,

바울을 기다리던 일행과 앗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에게 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던 앗소는,

플라톤이 이상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곳이었습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부름을 받기 전, 주전 348~345년까지

직접 철학을 가르쳤던 앗소는, 바울 당시에도, 철학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앗소를 가면, 바닷물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바다 속이 그냥 들여다보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도시에 당도한 바울은, 아름다운 앗소를 관광하려거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자취를 둘러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앗소에서 밀레도로

바울은 일행과 만나자마자, 곧장 함께 배를 타고 남쪽에 있는 미둘레네로 갔습니다.

 

20: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미둘레네에서도 바울 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계속 남진해서 기오와 사모를 거쳐서,

앗소를 출발한지 나흘 만에 드로아에서 250여 킬로 떨어져있는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서두르는 바울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에베소를 그냥 지나치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밀레도는, 에베소 아래쪽 남쪽으로 45km 지점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에베소는 바울이 3년 동안 머물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도시였습니다.

3년 동안 그곳에 정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20:1절에서, 에베소를 떠났던 바울이, 본문의 시점에 이른 것은

대략 1년이 경과한 이후의 일로 추정됩니다.

    행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렇다면 1년여 동안이나 보지 못한 에베소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배를 타고 가면서, 3년동안 목회했던 정든 에베소가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쳐서, 밀레도로 직행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서라고 밝힙니다. :16

 

또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날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급히 서둘렀다고 본문이 증언합니다. :16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바울은 에베소를 그냥 지나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대민족의 3대명절인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 날로부터 7주가 지난 날입니다.

이처럼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해서 오순절이라고 불렸고,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난 날이라고 해서, 칠칠절이라고도 불렸고,

그때의 시기가 밀과 보리의 수확기와 겹쳐서, 추수감사절을 뜻하는 맥추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잠시 날짜를 계산해 보면,

6절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유월절 둘째 날부터 7일간의 무교절을 그곳에서 보낸 것입니다.

 

그 이후에 바울은, 드로아로 가기 위해서, 에게해를 건너는데, 5일을 소요했고,

드로아에서 7일동안 머물렀습니다.

 

또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가는데, 단 이틀만 소요되었다고 할지라도

15절의 증언처럼, 앗소에서부터 밀레도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나흘을 합치면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가는데, 6일이 걸린 셈입니다.

 

그 날짜를 다 합치면,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보낸 바울이, 빌립보를 출발해서 계속 남진하여

본문의 밀레도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총 날 수가, 25일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순절이 이르기까지 남아있는 날도 동일하게 25일이었습니다.

*유월절(무교절)에서 오순절까지는 50

 

그러나 지금 밀레도에 있는 바울이, 앞으로 가야할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지난 25일 동안 바울이 빌립보에서 밀레도까지 이른 거리보다, 두 배나 더 길었습니다.

 

만약 지중해에서, 자칫 풍랑이라도 만나서 배가 표류하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당도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유 있게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3년이나 목회했던 정든 에베소를 지척에 두고서도, 그냥 지나쳐서 밀레도로 직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서둘러 도착하려는 이유

 

이때 바울이 왜 굳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 했었는지

그 이유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1. 명절에 구제헌금 전달

유대민족 최대 명절인 오순절이 이르기전에,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각 지역교회에서 모아준 구제헌금을 전달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또 오순절이 되면, 지중해 세계에 흩어져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유대인들이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기에

그 시기는 바울에게 더 없이 좋은 복음전도의 기회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순절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오순절은,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모교회 교인들과 함께

성령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방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나눌 수 있는 최적기였습니다.

 

2. 주님이 명하신 환란의 길을 향하여 서두르고, 지체하지 않음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격리시켜 하나님과 독대했던 그 시간을 통해서

3차전도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자신의 3차전도여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임을 확인한 이상

바울은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신이 가야할 예루살렘을 향해서

지체 없이 계속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를 출발할 때, 본래 바울의 계획은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것이었지만,

성령님 안에서 예루살렘이 3차전도여행의 최종 목적지임을 확인한 바울은,

그 이후부터는, 수리아의 안디옥은, 다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결박과 환란을 당할런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가야할 예루살렘을 향해,

지체 없이 바울은 나아가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당장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서 신규사업에 투자하기 위해서

혹은 반등 직전의 부동산을 급히 매입하기 위해서

서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이, 단돈 1원이라도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위한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은, 결박과 환란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 위험한 길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체 없이 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주님께 자기 생명을 포함해서 자신의 전부를 드린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결단이었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바울에게 그런 결단과 실행의 삶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혼자 걸어가면서, 그 독대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적용: 독대와 자기 격리의 힘

 

바울은 자기 격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바울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1. 자기 격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견지한다는 교훈입니다.

 

바울은, 이미 투옥과 태형과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당한다고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을 단 한 번이라도 당해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일인지, 자신의 온 몸으로 체험한 학습효과 때문입니다.

체험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때로는 공포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바울이 가려고 하는 길은, 결박과 환란이 도사린 길입니다.

바울이 또다시 투옥당하고 테러를 당해야 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미 유경험자인 바울로서는, 어떤 수를 쓰든,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길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참된 용기요, 자기 격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만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용기의 원천이 인간 자신이면,

그것은 도리어 자신을 무너뜨리는 만용과 허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용기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꺾어지지 않는 참된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

어느 쪽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좇아 살기보다는,

불의와 더 자주 손을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매사에 참을 추구해야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왜 습관적으로 거짓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두려움과 욕심 때문입니다. 정의와 참을 추구했을 때 당할지도 모르는 불이익,

불편, 소외에 대한 두려움과 불의

그리고, 거짓과 벗함으로써 더 많은 편함이나 유익을 누리려는 욕심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두려움과 욕심은,

인간의 만용과 허세로는 절대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로만 가능하고,

그 용기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서만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자신을 격리해서, 하나님과 독대한다는 것은

이미 영으로 자기 안에 임해 계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자신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죽음을 깨트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이미 내 안에 임해 계심을 매일 재확인하고 살아간다면,

그 하나님을 힘입어 제압하지 못할 두려움과 욕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용기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2.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결과적으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지중해 세계를 누비고 다녔고,

마침내 결박과 환란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거쳐서

제국의 심장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복음의 증인,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 생애에 걸쳐 전도를 통해, 그가 얻은 그리스도인의 수를 다 합쳐도,

서울에 있는 중형교회 한 곳의 교인 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전도한 사람들의 머리 수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그로 인해서 로마 제국의 역사가 새로워졌고,

유럽 대륙의 역사가 새로워졌고, 세계사의 물줄기가 새로워졌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 개인의 역량에 따른 그의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서,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렸을 때

그 바울을, 당신의 도구 삼으신 주님에 의해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바울과는 전혀 대조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 동안에, 단 한 번도 팔레스타인을 벗어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셔서, 그 안에서 사역하시다가

그 안에서 고난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을 떠나보신 적이 없는 그 예수님에 의해

인류 역사가 새로워졌고, 이 세상이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포함해서, 당신의 전부를 성부 하나님께 드렸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친히 섭리하신 결과였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

그런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육체의 호흡이 멎을 때까지 단 한 곳에서만 줄곧 살아도,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포함해서,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에 의해, 결과적으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격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만, 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전부 드리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로 자기 자신을 성화시키는 것임을

바르게 터득하기 때문입니다.

 

3.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격리를 통해, 환란과 결박이 도사린 예루살렘 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바르게 분별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에베소를 지나쳐 밀레도로 직행했습니다.

 

우리말 지체하다는 헬라어는 크로노트리베오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와 문지르다, 비비다는 의미의 '트리보'가 합쳐진 말로서

문자적 의미는 시간을 무의미한 것들과 비벼서 흩날려버린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욕망과 비비느라 무의미하게 흩날려버리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시간을, 태만과 비비느라 흩날려버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시간을, 괘락과 비벼, 무의미하게 흩날려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단 한 번도 어디에서도

자신의 시간을 무의미한 것과 비벼서, 흩날려버린 것이 없었습니다.

새신자반에서 배운 것처럼, 바울은, 주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서

자신의 시간을 영원으로 엑사고라조 즉, 건져 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는 동일하게 24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24시간을, 무의미한 것과 비벼서, 겉날려버리는 사람이있는 반면에

동일한 24시간을 주님 안에서 영원으로 건져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과, 백년을 살아도, 물거품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바울처럼, 참수형을 당해 죽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살아남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의 여부에 의해서 판가름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자기 시간을 드리는 것이요,

그것은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하나님의 영원과 접속시키는 길임을 바르게 알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든 요즘은, 손안에 온 세계가 들어있습니다.

손안에 들어있는 작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손안에 들어있는 스마트폰 안에, 온 세계의 뉴스와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손안의 스마트폰이, 아무리 첨단의 IT기기라 할지라도

전원을 켜지 않거나,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으면

손안에 들어있는 스마트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임해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격리해서, 기도를 통해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려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이미 임해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접속하기 위한 영적 전원을 켜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접속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영적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내 속에 이미 임해 계시는 그 분을 인식하고,

나를 품고 계시는 그 분을 매일 느끼면서, 그 분의 것들로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 종이 한 장은 쉽게 찢어지지만 종이에 풀을 발라 바위에 붙이면,

바위의 강함은 종이는 찢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해, 나를 격리시키는 것은

종이처럼 연약한 나의 존재를, 바위 같은 하나님께 접붙이는

자기 연합임을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님의 품성으로 채움 받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정의와 참을 좇으려는 나의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두려움과 욕심을 제압하는 용기를 지니게 해 주시고,

나의 생명인 소중한 시간을 무의미한 것과 비비느라 겉날려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매 순간을 영원으로 건져올리게 해 주시고,

결과적으로 나의 삶이, 이 시대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로 쓰임받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