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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믿음의 큰 사람

LNCK 2016. 1. 5. 11:10

◈작은 믿음의 큰 사람                3:7~13                      13.09.01.출처

                                                                                                      *원제목 : 그대의 빛난 이름처럼

    

도입 예화 / 작지만 큰 가치

 

지금 여러분은 두 개의 시계 사진을 보고 계십니다.

왼쪽 시계는 백범 김구 선생님의 시계이고, 오른쪽 시계는 윤봉길 의사의 시계입니다.

이 두 개의 시계에는 이런 일화가 얽혀 있습니다.

 

1932429일 아침, 당시 25세의 청년 윤봉길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김구 선생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한 시간 밖에 쓸데가 없으니까요.”

 

청년 윤봉길은 그 날 상해 홍구공원에서 있었던 일제의 일본천황 생일잔치를 겸한

일본의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수많은 일본인 장교에게 상해를 입혔습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대단한 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윤봉길 의사의 그 사건은 한국역사에 엄청난 의미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의 기록에 의하면

백범 선생은 청년 윤봉길의 제안을 받아들여 윤봉길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범 선생은 청년 윤봉길과 함께 차를 타고 홍구공원으로 가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후 일본 군인들에게 붙잡혔고,

일본으로 끌려가 그 해 12월에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해방 후에 백범 선생은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찾아가

윤봉길 의사의 어머니에게 맞바꾼 시계를 보여주면서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그 시계를 받지 않았고,

그것을 품에 안고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은

죽는 날까지 그 시계를 항상 곁에 두었다고 합니다.

 

백범 선생이 윤봉길 의사에게 주었던 2원짜리 시계는

지금 우리나라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었고,

윤봉길 의사가 백범 선생에게 주었던 6원짜리 시계는

등록문화재 제441호로 지정되어 백범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당시 6원짜리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쯤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계에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도

그렇게 귀중한 가치를 가지는 것도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빌라델비아 도시 소개 1)

 

 

본론/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이 신앙생활하는 데에 그 여건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지진이 많아 불안에 떨어야 했고,

신앙적으로는 우상숭배가 성행해서 믿음을 갖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많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작은 능력이란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우리는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디오니소스와 황제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재정도 넉넉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이름 있고 출세한 사람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세상에 자랑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개 교회 가운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장 늦게 세워졌습니다.

교회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야 저 교회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감탄사가 나올만한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비록 작은 교회였고, 능력이나 가진 것도 없는 교회였지만,

사탄의 회당이라고 불리는 세력들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서는 그 사탄의 회당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회당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회유해서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었고,

그렇게 해도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에는 위협과 핍박을 해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상황은 좋아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칼루스 2세가 형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처럼, 1)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핍박이 가해질수록 그들은 더욱 믿음을 붙잡고

믿음 안에 살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더 많은 능력을 달라고 떼쓰지 않고

지금 자신들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능력을 가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에서도 많은 능력을 가져야만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과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재능도 많고 능력도 많은 일꾼들이 많이 있으면, 교회가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권력도 가지고 있고, 재산도 많은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이 있으면

사회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해서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을 잡아주면

교회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우는 것은

오랫동안 신앙생활했다는 신앙의 경륜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는 것처럼,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그 교회를 오랫동안 섬겼다고 하는 교회의 중심축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분쟁에 휘말리게 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능력이 많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적 지식도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힘이 있고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 분쟁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게 주신 작은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을 지키며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지 말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회적으로 출세하십시오.

높은 자리에 올라가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그 어떤 자리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말씀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칭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많이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을 바꾸어야 하고, 말씀이 내 인격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바꾸지 않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바꾸려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을 말씀이라는 잣대로 자꾸만 재단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자기 의에 빠져서 바리새인처럼 되고 맙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숫자가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물결이 흘러야 합니다.

 

모임 중에도 말씀이 흘러야 하고, 교제하고 섬기는 일에도 말씀이 넘쳐흘러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에만 말씀을 듣고 말씀을 생각하고는,

교회의 다른 영역에서는 말씀과 아무 상관없이 사역한다면 그것은 교회일 수 없습니다.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하십니다.

 

말씀이 살아 역사하고, 말씀이 흘러넘치는 삶에는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말씀은 모든 면에서 주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자칫하면 주님의 이름을 배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입술로 주님을 배반합니다. 입술로 주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나는 예수 모른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3:8-10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그 입으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로 주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는 입술에는 늘 찬송이 흘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축복하고 은혜를 나누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게 정직한 입술입니다.

 

그런데 찬송하는 입술로 형제를 저주하고, 형제에 대해서 험담하고,

형제를 정죄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가짐으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직접 모독하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또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주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삶으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삶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다워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들로 유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자다운 모습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이나 죄와 타협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유혹했을 것입니다.

우리 고을은 포도가 주산물이고, 포도농사를 잘 지어야 우리가 풍족하게 살 수 있어.

포도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 신을 섬겨야 해!

예수를 믿는다 하더라도 디오니소스를 함께 섬겨도 되잖아!’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렇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하려면 믿음 갖고만 되는 게 아니야.

직장에서 줄도 잘 서야 하고, 때로는 윗사람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적당하게 아부도 할 줄 알아야 해.

윗사람이 시키면 그게 신앙의 양심에 거치적거린다 하더라도

때론 눈 감고 따를 줄 알아야 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수없이 많이 그런 유혹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때론 그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고, 때론 그렇게 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신앙의 길과 전혀 다른 세상의 길을 따라 행동합니다.

그리고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자기 스스로 합리화해버립니다.

 

여러분, 출세가 우리의 비신앙을 합리화해주지 못합니다.

현실이 우리의 불의와 죄악을 정당화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손해를 보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려 할 때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무리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해야 합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며 삶으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앞으로 시험이나 시련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선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려 할 때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험을 겪어야 하고, 시련을 감내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시험이나 유혹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며 살려 할수록 더욱 큰 시험과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어떤 환난이나 힘든 일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또 어떤 시험과 유혹이 온다 하더라도, 곤고한 일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의 길을 따라 간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언제나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로 하여금 시험의 다리를 건너게 하시고, 유혹의 강을 건너게 해 주십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보다 내게 주신 것이 작은 것이고, 적은 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도 약하고, 물질도 넉넉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들 앞에 내 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작은 것 하나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조차도 남들처럼 강한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능력을 나타내는 믿음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작은 믿음과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에 이끌려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구석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멋진 이름을 가진 자답게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를 닮는 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인이라는 멋진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볼 때 우리의 생각이나 삶 속에 신앙인다운 모습이 안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신앙답게 살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신앙인이란 신앙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신앙의 방법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신앙의 가치로 판단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인이라는 멋진 이름을 주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은 작은 자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나 은사나 모든 면에서 작은 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능력이 작다고 신앙인답게 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붙잡고 말씀을 따라 산다면, 우리도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준 멋진 이름처럼 살았다고 말입니다.

 

.........................

 

 

1) 중략된 부분

빌라델비아라는 도시는 주전 2세기에 버가모의 국왕인 아탈루스 2(Attalus II)

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립한 도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탈루스에게는 유메네스(Eumenes)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형은 성경에 나오는 에서와 같이 사냥과 싸움을 좋아했고,

동생은 학자들과 토론을 하거나 도서관에 틀여박혀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첫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아무래도 내성적이고 학문을 좋아한 동생은

나라를 이끌어가기에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이 된 형은 한 동안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전투적인 그의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에게 나라 안의 일을 맡기고

주변 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하고 돌아온 형의 마음엔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성적인 동생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동생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잘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나라 안에는 동생을 충동질하여 형을 배신하고 나라를 찬탈하도록 유혹하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이 있었지만, 동생은 끝까지 형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형을 대신해서 나라를 잘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형 유메네스가 헬라에서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동생인 아탈루스가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죽었다던 형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형이 돌아오자 동생 아탈루스는 기꺼이 왕위를 형에게 돌려줍니다.

 

그 때 로마정부에서는 아탈루스에게 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굳게 지키라고 권했지만,

그는 그런 제안을 거부하고 미련 없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형 유메네스는 그런 동생이 고마웠고, 그는 죽을 때에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동생인 아탈루스에게 물려줍니다.

 

왕이 된 아탈루스는 한 도시를 세우고 사랑하는 형에게 바틴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형제의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필라델피아라고 지었습니다.

그 도시가 바로 오늘 성경에 그 이름이 언급된 빌라델비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세운 아탈루스 2세에게

그의 형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필라델푸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빌라델비아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는 지역입니다.

첫 번째 특징은 그 지역에 지진이 많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에는 큰 지진들이 자주 일어나서 지진이 가득한 도시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 사람들은 늘 지진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포도 농사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수확한 포도를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어서 수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빌라델비아 지역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술의 신으로 알려진

디오니소스를 섬기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빌라델비아는 알렉세히르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역인데,

지금도 그 지역 주변에는 수십 km에 이르는 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빌라델비아는 포도를 많이 재배하면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신을 섬길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 어느 곳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황제숭배가 성행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개 교회 중에서 2장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와

3장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 이 두 교회만이 책망 없이 칭찬만 받는 교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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