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이사야: 하나님의 비전(25) - YouTube
◈이사야: 하나님의 비전 25 사44:1-8 15.11.01 출처보기
◑예정과 자유
▲이사야 40장 이후 끝장까지는, 이스라엘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생활을 하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멸망하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린 것 같으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민족과 국가의 멸망이 그저 적치적 민족적 문제를 넘어
자기네가 믿던 하나님의 존재, 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었던 약속, 신앙과 결부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포로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사,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재앙과 또는 심판과 절망들이 끝이 아니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오늘 44장에서 말씀하신 바와같이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
이런 표현들은 조금 후에 더깊이 찾아보겠지만
이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 야곱이라는 개인의 이름을 통하여 이미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자기 설명,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들이 가지는 이미 이루어졌던 역사 속에서의 약속들을 상기 시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운명을 쥐고 계신 분,
시간을 장악하고 계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에게 붙인 설명이기도 합니다.
'나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시작이시고 그리고 결과이십니다.
어느 것에서도 하나님이 시작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써 돌이킬 수 없듯이,
결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타협되거나 포기되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예정>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작정> 이라고도 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조주로써 존재하는 만물이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와, 존재의 가치와, 존재의 결국, 의미, 완성을 그가 쥐고 계시죠.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성경이 말하고 싶은 내용보다
우리의 질문은 좀 더 부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걸 쥐고 계시다면,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혹은 인류역사에 일어나는 비극들, 절망들, 반발들,
또 후회들은 뭐냐?’ 이 질문이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되어있죠.
‘하나님이 계시다면, 차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믿기 전에야 많은 실수가 있다 치더라도,
‘예수 믿은 이후에 간절히 드린 기도와 소원은 다 왜 응답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들이 이 예정으로 설명되는 성경의 주장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기이한 약속은, 이 예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거부할 자유를 주신답니다.
‘언제나 예정을 설명하려면, 인간의 자유는 한계와 선택의 폭이 어디까지일까?’
하는 문제가 되죠.
‘최종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냐? 인간의 책임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그 뜻(예정)을 이루기 위하여 그래서 우리가 예상하는 힘,
즉 폭력과 강제력으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데,
즉,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실 것이냐? 사랑으로 이루신답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방법, 사랑이라는 방식,
사랑이라는 수준, 그것으로만 이 당신의 작정을 기어코 이루시겠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겠답니다.
▲여기에서 자유를 준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가지는 독특한 지위가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대등한 예우를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그 대등한 예우를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요구했음으로 당연히 선택권(자유)을 줍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반발과 무지와 배신이 빚어내는 선택권의 부작용들이
하나님의 실패할 수 없는 작정과 충돌을 빚을 때,
그것을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극복하실 것인가요?
하는 문제가 당연히 제시되죠.
왜냐하면 우리 현실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이런 기도를 하곤 합니다.
'하나님,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요? 나한테 자유를 주지 말고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시라고 그랬잖아요!
왜 나보고 선택하라고 그래서 선택을 했더니, 그 다음엔 잘못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 기도는 우리가 수없이 해왔던 기도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이 기도는 당연히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실까?' 이것이 우리가 풀어야할 ,
그리고 기독교신앙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핵심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우리는 야곱을 찾아가 봅시다.
창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새로운 이름을 얻는 장면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거듭나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 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약탈자' 라는 뜻이죠.
야곱이 약탈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굳이 약탈자라고 의역해서 이해하는 것은
우리말에도 분명하듯, ‘발목을 잡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손목을 잡는 것하고 의미가 다릅니다.
손목은 연애할 때 잡는 거고,, 발목은 해칠 때 잡는 겁니다.
그는 평생을 약탈자로 삽니다.
자기의 선택을 자기가 정한 가치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가?’로
열심히 살아온 전형적인 인간상입니다.
그는 장자권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도 빼앗고
그리고 피난 가서는 외삼촌 집에서도 거부가 됩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터에 섰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이게 뭔가, 인생이 뭔가?'
인문학이 밝히는 것처럼,
인류역사와 또한 각 개인의 인생속에서 최종적으로 받는 질문은 이겁니다.
"이게 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나는 뭔가?'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을 묻게 됩니다!
방법도 결과도 어떤 다른 모든 가치를 떠나 '나는 뭔가?'이죠.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결국 이 마지막 질문의 자리에 섭니다!
인문학 전체를 통하여 인류역사를 성찰하면,
가장 중요한 텍스트를 구축하려고 애썼던 인류의 노력은
결국은 텍스트까지 못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시간은, 모두 정황을 만들어냅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정황이라는 것이 생기죠! 정황은, 컨텍스트 입니다.
그 정황에 무엇을 담아야 되는가?에서
역사는 모든 실험, 모든 기회, 모든 경험을 가집니다.
화도 내어보고, 타협도 해보고, 무슨 원칙도 세우고, 도덕도 만들고, 양심도 제시했으나
결국은 그것으로는 텍스트가 되지 못하는 걸 발견합니다!
정당한 본문이 없으면, 우리는 만족을 할 수가 없는데,
그 만족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하면,
우리는, 즉 인류는 같이 살 능력이 없더라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렇죠?
국가나 사회의 필요성은, 법을 제정하여 간신히 버티는 정도입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죠. 사람이 무서운 것은
모두가 다 정당한 정체성을 상실한 탓입니다!
‘왜 나 같지 않은가?’ 라고 물으시면 상대방도 똑같은 질문을 퍼부을 것입니다!
'왜 나 같지 않은가?‘
전쟁이 역사에 제일 많이 드러나는 이유는
서로 다 ‘나 같으라’는 싸움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위하여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방법 밖에 공존의 다른 방법이 없다는 확인입니다.
그러니 인문학이 발견한 텍스트, 본문은 '공포' 였습니다.
'공포란 인간에게는 정체성이 없다' 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은 뭔지 모르겠다, 역사를 살펴봐도, 철학과 문학을 동원해서도
인간은 거대한 갈망은 있지만, 그게 무슨 갈망인지,
어떻게 채울 수 있는 갈망인지, 갈망의 실체가 뭔지.. 모르겠다! 이었습니다!'
성경이 그 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입니다!
인간은 뭐냐? 하나님이 만들은 창조물입니다!
너무 쉬운 답으로 휙 가버린 것 같죠. 거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정체성이 성립될 근거를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사야 44장에서 보는 '하나님의 작정' 이라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그 의지를 선언하는 것보다 더 크게,
그리함으로써 드러내는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관한 보이는 설명, 보이는 설득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의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가
드러나는 것이 예정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며 무엇을 만들려고 하시는가' 가
우리에게 허락한 자유 속에
'하나님이 우리의 선택과 당신의 신실함을 섞어 씨름하여 만드는 속에서 확인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게 야곱의 자리죠!
하나님이 최후의 순간에, 야곱이 자신의 정체성에 방황과, 당황과, 그 공황에 빠졌을 때,
찾아와 마지막까지 덮어 누르지 않고 씨름하십니다!!
씨름하십니다!
야곱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돌연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우리는 거기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고 '나는 가겠다' 라고 얘기합니다.
골반을 쳤는데, 사람이 서있는 육체의 가장 중요한 근간입니다.
거기는 다리도 붙어있고 상체도 얹혀 있습니다.
거기서 야곱이 돌아서는데, 그것은 쉬운 말로 ‘회개’라고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쯤을
그 공포를 통하여 희미하게 느끼고 근거가 되어,
‘하나님을 붙잡아야 겠다’는 반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반전은 공포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의 각성도 아니고, 그것은 창조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일어납니다.
'하여튼 못 가십니다. 축복하기 전에는 못가십니다!'
'네 이름이 뭔데?'
'약탈자 입니다!'
'그러니 네 이름으로 탈취해 가져라!'
'안됩니다! 내가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붙잡아 승리하게 되는 자!’
씨름은 떨쳐내는 싸움이기도 하고, 붙들고 늘어지는 싸움이기도 하게 된 것입니다!
지지 않으려고 밀던 싸움이, 붙들고 늘어진 싸움으로 변화되는 그 신비와 그 기적은
우리는 모릅니다.
왜요?
십자가의 반전도 동일하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준 세월들, 기회들, 선택이라는 지위가
결국 우리를 설득과 납득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만은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공부를 하듯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각각의 경우에, 각각의 독특한 자기 확인과 자기 고백이 있습니다!
내용은 같은데, 경험은 각자 다 다릅니다.
가장 많이 일어나는 신자들의 실수는
내가 구원받은, 내가 변화된 그 컨텍스트에 데려가면
다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줄 알아서,
‘무슨 기도원에 가서 시냇가에 있는 몇번째 바위에 앉아서 밤을 새면 구원을 받는다, 성령을 받는다’
라는 그런 간증이 생겨난 것입니다.
모두가 다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가 같은데로 오죠.
같은 주인 동일한 인격, 그 정체성을 아는데 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데 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격적으로
아니 가장 확실하게 이 하나님의 <작정>과, 우리에게 준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증거고 완성입니다!!
◑빌립보서 2장으로 가시죠.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작정과 자유, 두 가지가 다 나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에게 준 자유가 여기서 동시에 결합을 하는데,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지고 지고 지고 지고 지고 지는 길을 갑니다!
우리의 무지, 외면, 거부, 배신, 누명, 죽음을 감수하십니다!
왜 감수하시죠?
우리 삶 속에 따라 들어와서, 그의 일(작정)을 이루기 위하여 따라 들어오사,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그 일을 당합니다.
멀리 계셨으면 거부고 배신이고 다 없는 거죠! 거기까지 따라 들어오십니다!
그의 작정 그의 일하심은 (아까 얘기했죠?)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하시는 겁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 동안 뭘하죠?
우리에게 준 선택권을 자유를 마음껏 구사합니다. 뭘로 구사했죠?
하나님이 감수하신 모든 것, 즉 무지, 기만, 배신, 왜곡, 푸념.. 뭐든지 했죠!
그 모든 것이 어디로 가나요?
우리가 한 것이, 결국 십자가를 만들었다는 사실로 갑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한 모든 것의 궁극적 결과물입니다! 죽음이죠!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아서,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내내 우리가 반복한 것, 우리 인생에서 늘 선택권의 직멱면을 때마다 하는 것,
‘이것이 가장 나은 방법일까? 난 이게 좋아!,,' 라는 모든 것이
결국은 사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헛된 것이었다! 비겁한 것이었다!
우리의 선택권은 이것 밖에 없었다..입니다.
왜요? 우리는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의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 자유로 나를 선택해라!‘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선택의 선택 조항에 하나님이 없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죠!
‘죄의 종’이라는 하는 표현이 그래서 나옵니다.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종’이 됩니다. 기꺼이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위가 열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보시면, 기꺼이 종이 됩니다.
뭐라고 상대에게 얘기하죠? '제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성경이 하는 이런 표현들이 가지는 이 가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혼자 살아보라고, 하고 싶은 것 다해보라고!
그래서 그게 무엇을 만드는가를 보라고.. 자유를 주시고,
고통스럽게 다 감수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것,
심지어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을 감수해주시는 것으로
비로소 우리는 깨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만 영광이 있습니다! 여기에만 명예가 있습니다!
'나, 내가 소원했던 것 다 버리고, 내가 망하는 길로 가는 한이 있어도
난 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선택하겠습니다!'
이렇게 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가지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전지전능하시다, 못하실 일이 없다, 내 기도 꼭 들어 주신다’
그런데 내가 왜 불편한가요?
하나님이 내게 바라는 것은 그런 보이는 외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나 자신, 나의 정체성입니다!
'그걸 원하는 자다!' 하는 게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의 성품! 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이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인데..
우리는 '밤낮 돈 떨어졌습니다. 냉장고에 고기 가득 채워 주십시옵소서,
냄비에다 넣어 끓여주시옵소서..'
왜 더 나아가는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의 전 인생에 걸쳐 우리가 밤낮 원망하는 것들이 내가 선택한 것이고,
그것이 낳은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걸 반복적으로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 항복하지 않죠!
강요할 마음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준 기회가 뭘 만들고 있는지를 기억하여
이 승리!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현실, 정황이 어떤 것일지라도,
정체성에서 이기는 자가 된다면, 위대할 수 있다는 것, 감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이 가로막을 수 없는 자랑이 되고 감격이 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온겆 도전과 시험과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거룩함과 위대함과 명예와 자랑과 실력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웃을 수 있죠. 용서할 수 있죠. 감사할 수 있죠. 이 인생 놓지지 않는 우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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