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4 오래 참음 갈5장22~23, 히10:38-39 11.09.18 출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성령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사랑, 정의, 평화, 거룩 등 여러 가지로 규정을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을 상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가장 중요한 성품 중 하나가 바로 이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바로 오래 참음의 역사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불과 한 장에 걸쳐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요약하고 있지만
그 창조가 실제화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아래 단락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들어주십시오.)
과학자들은 우주 역사를 140억 년으로 추정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이 실현되기까지 140억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수억 년 이라는 시간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시간입니다.
우리는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은데 수십억 년, 수백억 년을 참고 인내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주가 탄생한지 한참 후인 46억 년 전쯤에 지구라는 행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뜨거운 지구가 식고 생물이 살기까지는 또 수십 억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36억 년쯤에 세포와 같은 형태가 만들어졌고, 5억 년 전쯤에 생명체다운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생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쯤에 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어떤 학자가 지구 생명체의 역사를 1년으로 계산하면
인류는 12월 31일 밤 11시 45분, 그러니까 1년을 꽉 채우기 15분 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인류는 창조 역사의 막내둥이이고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전 지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짧게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실제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저는 마치 이 과정이 한 생명이 태어나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아이를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보호합니다.
그 기간이 차면 아이를 출산하고 1-2년의 절대적인 양육기를 거칩니다.
말이나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똥오줌을 다 받아줍니다.
아기는 누워만 있다가, 어느 날 기게 되고, 별안간 걷기 시작하고, 대소변을 가리더니,
더듬더듬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몸이 자라고, 언어나 사고 능력도 급격히 자라서
이제는 대화도 가능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새 우리의 친구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부모와 싸우기까지 합니다.
완전한 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필요한 것이 부모의 인내입니다. 부모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물질이나 사랑이나 모든 것을 쏟아야 하고, 자기 성질이나 생각을 죽이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런 오래 참음의 결과 자녀들이 이제는 우리 분신처럼 또는 친구처럼 곁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인내하심으로 비로소 대화가 되는 인간이라는 창조물을
1년이 다가기 15분전에 얻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감격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하나님은 140억년의 (오랜) 시간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담은 자연이라는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오래 참음 끝에 작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삼척에 가면 환선굴이라는 석회동굴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석회암 바위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샹들리에처럼 펼쳐져 있는 절경도 있고, 폭포형태의 석주도 있습니다.
거대한 동굴 광장에서는 갖가지 모습을 한 만물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에그프라이’라 하여 마치 계란을 프라이한 모양의 석순도 있습니다.
이 석회동굴이 이런 모습을 형성하는 데는 5억 3천만 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바위들은 수만 년에 1mm씩 꼴로 자란 결과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수만 년에 1mm라는 것이 상상이 갑니까?
너무 답답할 정도의 속도인데, 오래 참음 끝에 이 놀라운 작품을 이루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성품 또한 오래 참으심입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곧 심판하실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쉽게 내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셨던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고전16:22, 계22:20)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이유를 ‘오래 참으사’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십니다.
얼마나 참으실까요? 몇 천 년도 더 참으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시간관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 년이라고 생각하는 시간도 하나님에게는 단 하루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수천 년의 시간도 수일처럼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2-23)
주님은 인간의 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으십니다.
오늘도 묵묵히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 하나님의 이 오래 참으심의 성품을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다릴 줄 알고 또 성질내지 말고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지 못하는 현대인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변화된 시간관념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의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흐릅니다. 우리의 시간은 일주일 단위로 흘러갑니다.
무슨 요일인지는 알아도 몇 일인지는 좀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이 계절 단위로 흘러갔습니다.
씨앗을 뿌릴 때, 열매를 거둘 때, 쉬어야 할 때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계가 없으면 답답해 살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중국여행을 갔을 때 답답해 죽을 뻔 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식당이나 여행지 그 어느 곳에서든, 시계를 좀처럼 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시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한 집안에 시계가 몇 개씩 있고, 곳곳에는 대형 시계들이 즐비합니다.
우리 손목이나 핸드폰에도 시계가 있고, 어떤 때는 초 단위까지 재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산성’이란 것도 시간당 노동량입니다.
그것에 따라 우리의 임금이 책정되기 때문에 시간은 곧 금입니다. 그러니 일분일초도 아깝습니다.
이처럼 시간에 쫓기다 보니 우리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단 1초도 기다리지 못하고 꾸물대고 있는 앞차를 향해 빵빵 댑니다.
보행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이 아까운지 연신 핸드폰을 만지며 무언가를 합니다.
조금이라도 파란 신호등이 늦게 떨어지면 짜증을 냅니다.
아이들과 놀거나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무언가 손해 본 것 같고,
자신의 가치가 하락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한 일회용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자신이 예정한 시간을 넘기면 몸을 꿈틀대기 시작하고
연신 시계를 보기 시작합니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의 주술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처음 시계가 발명되었던 것은 베네딕트 수도회에서였다고 합니다.
수도사들이 기도와 노동 시간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제 우리가 발명한 도구의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시간은 채찍을 마구 휘두르는 엄한 감독관처럼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 영혼이 평화를 잃어버린 것은 시간에 끌려다니기 시작하고부터입니다.
이제는 바삐 움직이는 데서 잠깐 멈춤이 필요합니다.
시간에 매여 욕망을 좇는 삶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느리게 한 번 걸어 보십시오. 거리, 지나치는 사람들, 계절의 변화,
이름 모를 들꽃들에 주목해 보십시오. 느낌이 새로울 것입니다.
가끔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외치는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 들여서 음식을 만들거나, 농작물을 길러 보십시오.
인생의 새로운 기쁨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시계가 없는 곳에서 한 번 지내보십시오. 하루가 얼마나 길고
또 시계 없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평안한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횡포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좀 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자연이나 인생이나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우리 생각보다는 천천히 흘러갑니다.
실은 느린 것이 자연스러운데 우리가 너무 빨리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실족하거나 불안해 빠질 것입니다.
기도란 것에 대해서도 헨리 나우웬은 “쓸모없게 되는 이상한 시간”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기도가 유익한 이유는 기도가 가장 지혜로운 투자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멍하니 보내는 한 시간은 시간이 금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자 우리 영혼에는 평화가 주어집니다.
너무 많은 것들로 사실 우리 영혼은 피곤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시간의 횡포로 하나님을 위협하지 않고 있습니까?
‘즉시 이루어주십시오’ 하며 말입니다.
시간이 아까운 듯 결재 서류 처리하듯이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의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전통을 따라서 아침 기도와 저녁기도만 제대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삶의 여유와 함께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주님께 바치는 것 여기서부터 오래 참음의 훈련은 시작됩니다.
▲TV나 영상이 갖는 위험성은 바로 그 속도에 있습니다.
인생은 천천히 흘러가는데 영화나 드라마는
너무 빠른 속도로 하루가 지나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과 대비될 때 우리는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이런 영상 매체를 멀리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자는 봄부터 눈물로 씨를 뿌린 자들입니다.
수령이 오래 된 큰 나무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나이테를 키우고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연에는 비약이 없습니다. 오래 참음이 자연을 만든 비결입니다.
◑오래 참음은 기다림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욕구가 없을 때는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불편함을 느끼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필요가 생길 때
비로소 자연만물이나 인간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어떤 때는 고통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따뜻한 태양만 내리 쬐면 사막이 됩니다.
비도 오고 추위도 있어야 땅이 단단해지거나 기름진 토양이 됩니다.
▲찰스 코우만 여사의 일화입니다.
그녀가 나비의 변태를 관찰하는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태를 하기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통과해서 나와야 합니다.
그 과정은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납니다.
이를 지켜보던 코우만 여사가 답답하기도 하고, 그 나비가 안쓰럽기도 해서
가위로 고치 구멍을 더 크게 내주었다고 합니다.
코우만 여사의 도움으로 나비는 쉽게 구멍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나비는 창공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땅 위에서만 기어 다녔던 것입니다.
스스로 그 구멍을 빠져나는 고통의 과정에서 날개가 단련되고,
창공을 날아오르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충분한 조건이 될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부당하게 개입하면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에서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서
사랑의 15가지 속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첫 시작이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열두 번째는 ‘모든 것을 참으며’이고, 그 마지막이 ‘모든 것을 견딘다’입니다.
사랑은 참고 또 참으며 견딜 때 이루어집니다.
▲오래 참는 데는 성령님이 제일인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가장 잘 참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성령님이십니다.
죄와 욕심과 완고한 고집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평생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오래 참으시기에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떠나신다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의지 훈련의 일종이거나 율법이 아닙니다.
속은 끓고 있는데 성질 죽이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래 참아야 되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래 참는다는 것을 ‘기다림’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내 마음과 내 기대대로는 더딘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을에 피는 꽃을 봄에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하여 성급하게 자라지도 않은 나무를 자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곧 믿음입니다.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꽃 피고 열매 맺을 때가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자녀들이 더디게 성장하고,
지금 비록 가슴을 아프게 할지라도 참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위대한 사람으로 세울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문제아가 결국은 효도하는 자식이 될 것입니다.
자녀가 속을 썩이기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그 기도의 에너지가 우리 자녀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부 중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아 지옥 같은 가정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헛돌거나 충돌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서로 맞아 들어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닳고 닳다 보면 서로에게 맞추어지고, 언젠가는 딱 맞아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참지 못하고 갈라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6-37)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신다 말씀합니다.
우리 생각에 지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 하나님은 가장 빠른 길로 오고 계십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금강석처럼 굳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서로에게 맞추기 위해 자신을 깎고 연마하려 않고, 상대방만의 변화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결국 서로에 대한 변화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때부터는 참는다가 아니라 견딘다란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헤어지는 것도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이겠지만
부부관계가 이렇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입니다.
서로의 상처나 모난 것들이 깎이고 연단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갈 수 있는 절대적 기회를 서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견딜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이나 성장은 결국 오래 참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듬고 깎이는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 인격은 미완성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사회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오래 참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어떤 때는 역사가 후퇴하는 것 같고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더 관영하는 것 같습니다.
평등보다는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하나 됨보다는 분열과 갈등으로만 치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나눔보다는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상들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끝내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믿고 나아갑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로마서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그래서 우리는 어둠과 혼돈과 무질서를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분노해서 스스로를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비온 뒤에 땅이 단단해지듯 그런 어둠들이
오히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 굳건히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39)
오래 참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가 오래 참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돌지만
확실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바로 오래 참음의 열매를 소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침묵과 거절을 통해, 부활로 들어간다 / 허운석 (0) | 2016.03.08 |
---|---|
무엇 때문입니까 (0) | 2016.02.01 |
실패와 책임 (0) | 2015.11.16 |
물위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 (0) | 2015.08.13 |
오직 은혜 (0) | 2015.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