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때문입니까 눅9:51~56 11-04-03 출처
◑16세기 스페인에서 살았던 아빌라의 테레사
(Teresa of Avila, 1515-1582) 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직후에, 스페인에서 수도원 개혁에 헌신했던 여성 지도자입니다.
비록 루터가 추진한 개혁교회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가톨릭교회 안에 머물면서 ‘수도원의 개혁만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믿고,
수도원의 개혁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연애소설을 탐독하는 등 신앙적인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테레사의 10대 청소년 시절은 이성관계와 사치,
변덕과 반항으로 뒤엉킨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수녀원으로 보내진 그녀는
수녀원에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수녀가 되어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수녀원은 너무나 세속화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서원한 수녀들은 수녀원 안에 머물며
경건과 기도에 힘쓰기 보다는 수녀원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세상의 다른 여인들처럼 머리에 쓰는 베일을 어떻게 하면 예쁘게 쓸 수 있는지에 골몰했고,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보석으로 된 예쁜 장신구를 착용하는데 관심을 쏟았습니다.
수녀들은 경건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돈을 통하여 신망과 인기를 얻으려했습니다.
수녀원의 접견소에는 세속화되어버린 수녀들을 만나기 위해서 방문자들이 줄을 이었고,
젊은 남성들이 참가한 파티가 자주 열리곤 했습니다.
그런 모습에 염증을 느낀 테레사는 수도원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모든 개혁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녀 역시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교회 지도자들에게서조차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세 가지 일
- 기도하는 일, 시를 쓰는 일, 그리고 찬미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썼다고 하는 시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Nada te turbe 어느 것에도 마음 흔들리지 말라
nada te esperante 무엇에든 걱정하지 마라
todo se pase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나니
Dios no se mude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시나니
La paciencia 인내함으로
todo lo alcanza 모든 것에 이르라
Quien a Dios tiene 하나님을 지닌 자
nuda le falta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Solo Dios basta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하리로다
이 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애송되었고,
특별히 수도자들에게는 최고의 갈망이요 기도의 제목이 되어왔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이것보다 더 멋진 신앙고백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기도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십니까?
하나님만 계시면 내 삶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중심에 늘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거하신다’는 뜻을 가진 동사가 둘이 있습니다.
‘파로이케오’(paroikeo)라는 단어와 ‘카토이케오’(katoikeo)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파로이케오’라는 단어는 ‘나그네로 어떤 집에 잠시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카토이케오’라는 단어는 ‘주인으로 그 집에 영구히 거주하면서 그 집을 다스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의미로 하나님을 모십니까?
‘파로이케오’처럼 하나님을 손님으로, 나그네로 모시고 내가 필요할 때에만 나타나셔서
나를 도우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하며 살고 있진 않습니까?
그런 신앙에서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이 나올 수 없습니다.
‘카토이케오.’ - 내 삶에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임재하셔서 나를 다스리실 때
우리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향하신 예수님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주인이 아닌 손님처럼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신 후,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본격적인 발걸음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5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은 십자가를 위한 길입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가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늘나라로 되돌아가시는 길목입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후에는
부활로 승리하시고 다시금 하늘보좌가 있는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과 십자가만 바라보고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신 후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는 것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51절에서 “승천하실 기약이 다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얼굴을 향하였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루살렘만을 바라보며 가셨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유혹이 와도 흔들리거나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만을 바라보며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그것으로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납니다.
다시는 갈릴리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이제 지나가는 사마리아도 마지막으로 지나갑니다.
더 이상 이 길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예루살렘만을 바라보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제부터 닿는 곳마다 인생의 마지막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발걸음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 가운데 몇 명을 먼저 그 마을로 보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 마을에 머물고 싶다’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심을 거부했습니다.
◑친 사마리아 사고를 가지신 예수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오래 전부터 불화와 반목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왜 사마리아와 유대인들 사이가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되었는지는 열왕기하 17장에 나와 있습니다.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후에
이방 사람들을 강제로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마리아에 살게 되면서,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주해 온 이방인들 사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혼혈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피가 섞인 백성이 되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싫어했고,
심지어 멸시했습니다.
그 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 지방으로 오거나
반대로 남쪽 유대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려면
가운데 위치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면 가깝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해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 가지 않았습니다.
멀리 요단강 건너편으로 돌아서 왕래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는 것도 싫고,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의 땅으로 들어가셨고,
사마리아인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고, 사마리아 고을에 들어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마을에 들어와 머물기를 요청받으셨습니다.
다른 유대인들 같으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길을 가다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게 상각하던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들어가서 먹고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걸린 사마리아 사람을 고쳐주시기도 했습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님은 친(親) 사마리아 사고를 가지셨고,
실제로 친(親) 사마리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거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평소 같았으면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다는 것 때문에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정황으로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데, 예수님이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하러 왔노라’
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물었겠지요.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 때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말했겠습니까?
단언컨대 제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9:2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마음에 새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 예루살렘에 가까이 갔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십자가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큰 영광을 얻기 위해서 가시는 길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냐?’고 묻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답했을지는 자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 당하시기 위해 올라가신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러셨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증오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자기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자기들을 품어주셨던 예수님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 제자들의 말대로라면 -
영광과 권세를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말입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권력을 탐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영접하지 않겠다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만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보고와 요한이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 사마리아 마을을 멸해버리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망각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그 배은망덕한 놈들을 당장이라도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어떤 고대 사본에는 55절이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러 왔지,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는 말씀이 이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사마리아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도 하늘의 복음과 생명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멸해야 한다면,
십자가가 코 앞에 다가와 있는데도
서로 높은 자리를 차기하기 위해서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제자들 또한
버림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렇거니와
제자들 또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때로 잘못된 정보로 인해 누군가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바른 이해와 판단력을 갖추지 못해서 누군가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해서 여전히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이나 똑같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화 낼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를 냅니다. ‘저런 못된 놈들’이라고 화를 냅니다.
자기들이 잘못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해를 했는데도,
자기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화를 냅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심스럽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구로 인해 분노가 일어났는가 하고 말입니다.
분노의 원인을 내 자신이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내가 한 잘못이나,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질책하려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야고보서 1:19-20)
그렇습니다.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왜 화날 일이 없겠습니까?
그럴지라도 조금만 참아보면 화낼 일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어떤 부부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상담을 통해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의사는 이 부부에게 처방을 내려주었습니다.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주면서 “만약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드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3분 동안 입 안에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러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부부는 의사 말대로 화가 나면 물약을 입에 넣고는 3분을 기다린 후에 삼켰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얼마 후에 약이 다 떨어지자 부부가 다시 의사를 찾아가서 약을
더 조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부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물에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머금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분노가 가라앉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3분만 참아보십시다. 그러면 화가 가라앉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1분만 참으면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분노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분노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화를 낸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화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고, 자기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생각해 봅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들이 오해를 하든/안 하든,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갑니다.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셔야 하는 메시야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자기들의 생각과 너무 다르다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맙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각으로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그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자주 분노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 버립니다.
여기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각이 뒤틀려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 기준의 잣대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분노만 일어날 뿐입니다.
잘못 판단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받아들지 않겠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지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조용히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인들 왜 화가 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화를 내실 수도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 마을로 들어가서 ‘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화가 나는 상황을 피해 가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순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 대신 당신이 모든 화를 다 당하시며 참으신 결과로 지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화를 내실 일이 많이 있었음에도 참으셨습니다.
불법 재판을 하는 대제사장이나 로마 총독에 대해서 분노하며 항거하실 수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에 누구의 뒤를 따르려 하십니까?
내 생각과 다르다고 주님을 배척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이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냈던 제자들의 모습을 닮아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닮고 배워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묵묵히 참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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