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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예레미야 P2 / David Pawson

LNCK 2015. 12. 18. 11:57

 

◈예레미야 P2               영어녹취록                       출처보기

      

지난 시간 복습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레미야서의 남은 부분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인데요,
그의 메시지는, 다른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매우 비슷했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배도>한 것에 대해, 설교를 했고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면, 여러분이 평안으로부터도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삶의 안정도 동시에 잃게 되고,

삶의 불안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사람은 선한 삶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지만,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해서 악행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롬1장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이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시면,

사람이 하나님을 포기하면, 하나님도 사람을 포기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해서 내버려두시면,

그 사람의 가장 악한 본성이 표출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각종 악이 만연하게 되지요.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의 자신의 상태보다, 훨씬 더 악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그 손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셨으면, 훨씬 더 안 좋게 되었겠죠.

 

제가 신문에서 사람들이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기사를 읽을 때,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만약 그런 환경이 주어지고, 그런 압박이 주어질 때, 은혜가 없으면 장담 못합니다.

 

사회에는 사람도 있지만, 짐승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남자나 모든 여자도, 짐승같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손을 우리에게서 떼시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레미야서에서 배도하고, 하나님을 포기한 백성들을 보는데요.

그들이 하나님을 포기하니까, 하나님도 그들을 내버려두셨습니다. 손을 떼셨습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이 된 거죠.

 

2. 그의 메시지의 두 번째 중점은, 역시 다른 선지자들의 예언과 같은 내용인데,

그 신앙의 배도가 재앙(징벌)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배도를 다루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계속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항상 부정적인 예언만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의 예언을 주의 깊게 읽지않아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미래의 일도 내다보면서,

자기 백성의 궁극적 회복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3. <궁극적 회복>에 관한 예언을, 제가 일부분만 읽어드릴게요.

제가 강의할 때, 시간 관계상 성경 본문을 잘 읽지 않는데요.

바라기는 여러분이 각자, 강의 전이나 후에, 직접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레미야의 예언인 새언약에 대해서, 읽어보겠습니다.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회에서 사람들은 보통 여기까지만 읽습니다.

저는 계속 읽기를 원합니다.

 

35.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36.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찐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37.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35~37

 

 

하나님은, 언약에서 하나님 쪽의 준수사항을 반드시 지키시겠다고 보증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존재해 있고요.

 

오늘날 세계지도에, 이스라엘 이란 이름이 다시 등재된 것도,

하나님이 그 언약을 신실히 지키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에도, 이스라엘 땅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국 땅에 함께 계신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치는 않습니다. 현실은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하시기를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비취는 동안, 그들은 이 땅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니까요. 31:35~36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궁극적인 회복입니다.

거기에는 매우 귀중한 약속들이 있는데요.

 

만약 여러분이 앞장 렘30장을 읽어보시면, 거기에 다 이런 내용입니다.

내가 그들을 고향으로 다시 데리고 오겠다.

그들이 다시 돌아올 때는, 즐거워하며, 노래하며, 춤을 추며 돌아올 것이다.’

 

때때로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에, 제가 거기 있을 때가 있습니다.

51일인데, 4만명의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춤을 추는 가운데, 제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기들을 나무 아래에 두고서 춤을 추었는데,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거리를 춤을 추며 다녔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아래서 다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매우 흥분된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70년이 차면그렇게 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그때 그는 70년이 거의 다 찼다는 것을 깨닫고는, 매우 흥분되었습니다.

왜냐면 예레미야가, 포로기는 70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25:11~12, 29:10

그리고 70년이 거의 찼기 때문입니다.

 

그게 확실한 것은, 그 땅은 그동안 안식기간을 가졌고,

그 땅에서 잡혀 나온 세대는 그동안 거의 다 죽었고, 그래서 그들은 되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그들의 자녀가 돌아올 것이요, 즉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그 자녀들은, 그들의 고국 땅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렘30장의 전체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겠다.’

 

이 말은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 집으로 데려오겠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또 약속하시기를, 새로운 리더, 새로운 왕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왕은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요. 사람들은 그분을

선한 목자, 의로운 가지, 메시야 왕, 다윗의 나무에서 솟아난 한 가지, 생명의 샘으로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장차 오실 왕을, 이런 아름다운 명칭으로 부르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약속하시기를 이 사람이 오셔서, 왕의 보좌를 회복하실 것이다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궁극적인 회복의 약속이었습니다.

 

4.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메시지의 중점은, 다른 선지자들도 예언한 내용인데,

그들의 <대적들이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다른 모든 나라들도,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이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바벨론을 벌주시리라고 언약하셨습니다.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라

 

하박국이 특별히 이 점을 잘 지적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보복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들은 이렇습니다.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혹은 앗수르,

게달, 하솔, 엘람, 그리고 무엇보다 바벨론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날에 바벨론이 다른 강한 나라에 의해 정복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를 알죠. 바로 바사(페르시아)입니다.

 

바사의 바벨론 정복으로, 유다가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고레스는 매우 관대한 통치자여서,

바벨론에 사로잡혀 왔던 모든 민족들을, 어느 나라든지, 다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고레스인데, 매우 흥미로운 정책을 펼쳤습니다.

제가 예레미야서를 강의 하는 중에, 역사를 뛰어넘어서 더 미래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내용은 아닌데요, 다른 성경책에 나옵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했고, 매우 인간적인 통치자가 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잡혀왔던 민족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가 고국에 돌아가거든, 너희가 섬기는 신의 신전을 세우고,

거기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해 다오.’

그는 포로로 잡혀온 모든 민족들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성전을 다시 세울 권한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마도 고레스는, 모든 다른 나라들이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이방 신전을 세울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왕의 전체 칙령에 따라, 유대인들도 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세우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열방을 향해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암몬, 모압, 애굽, 바벨론 등

예레미야서의 후반부에 보면, 이스라엘을 공격했거나, 이스라엘에 불친절했던

각각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복수를 하시는 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라, 바벨론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머물면 안 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대다수가 귀환하기를 바랬지만, 그들은 1백만 중에서 약 5만명만 귀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란과 이라크 땅에 머물며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매우 험난한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는 것은, 우리도 그 나라에 태어나서,

그 나라에서 사업을 다 일으켜 세웠는데, 그걸 다 버리고,

아브라함이 옛날에 그 땅에서 떠났던 것처럼, 떠나는 것은

자기 모든 사업을 다 버리고, 한 번도 보지도 못한 땅으로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 제가 다시 원래 강의로 되돌아갑니다.

 

 

이제 예레미야서의 전체 형태와 구조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09:48~

 

다른 선지자들과 공통적인 그의 메시지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책의 전체 형태를 보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좀 복잡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연대순서로 배열된 것도 아니고, 주제별로 쓰여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어떤 패턴을 볼 수 있는데요.

아래가 그 패턴인데, 아주 간단합니다.

      

 

 

 

 

1장은 서론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설명하는데요,

그는 아직 십대 청소년이었고, 그는 얼마나 수줍음을 많이 탔으며,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하던 청소년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약간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2~45장은, 범죄하는 나라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자기 나라 남유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보응과 징벌이 지금 곧 닥칠 것이다. 지금 막 다가오고 있다.

그 때가 주전 605~607년 사이였는데, *바벨론 1차 침공 시점, 다니엘이 포로됨.

 

이 예언은 주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감정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는지, 하나님의 후회와 분노,

그리고 하나님의 갈등하시는 마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의 현재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부모들도, 그런 똑같은 갈등을 느끼지요.

 

그는 명확히 예언했습니다.

바벨론이 앗수르를 무너뜨릴 것이고, 애굽도 패망시킬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유다의 연약한 왕들의 최후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큰 나라 애굽과 조약을 맺으면

애굽이 우리를 앗수르나 바벨론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계속 말하기를 아니다. 바벨론이 너희가 의지하는 애굽도 쳐부술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과 조약을 맺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유다는 종종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외부 나라들과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내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평화를 얻는 길이 아니다

 

    제 파슨이 놀라는 것은, 그 과거 역사가

    오늘날 중동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과거 자기 대적이었던 자들과 평화 조약을 맺으려 했지요.

 

그때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그 조약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폭력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런 일을, 오늘날의 중동뉴스에서도, 우리가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2~20장 사이에 나옵니다.

 

21~45장에는, 좋은 소식이 나오는데,

이런 모든 부정적 상황을 지나서, ‘궁극적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깨달았습니다. 유다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모든 재앙이 이제 곧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유다가 궁극적으로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먼 미래의 희망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은 주로 산문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의 슬픈 감정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니까요. *그래서 산문

 

여러분이 이 차이를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시 상황을 말씀하실 때는, 자기 마음의 감정을 담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는 시어체

 

그러나 멀리 미래를 내다보실 때는, 단순히 자기 의도를 전달하십니다. *그래서 산문체

이런 때는 감정이 뜨거울 리도 없고, 감정적일 필요도 없죠.

 

장기적으로 보면, 바벨론이 유다를 포로로 잡아간 후에, 예루살렘은 황폐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되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이 깡그리 암울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제 이 책의 마지막인 46~51장에는,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그 나라들은 남유다에 적대적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들을 다루신다는 내용입니다.

 

적대적이었던 그들 주변국들이 심판을 당하게 될 때,

반대로 이스라엘에게는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공의의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52장은, 끝맺는 말인데, 이 무서운 유다의 국가적 재앙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서술합니다.

즉 바벨론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사건이, 마지막 52장에 그대로 적혀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갔는지, 또한 예루살렘은 텅 비어 황폐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가 요하난을 따라 애굽에 내려간 내용은, 그 앞에 나옵니다. 43:5~7

 

 

예레미야 예언의 3가지 독특성                            14:02~

 

지금까지 예레미야가 예언한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요.

그건 다른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만 발견되는, 그의 예언의 3가지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말했다기보다, 엄격히 말하면 새로운 강조를 말한 셈인데요,

이것은 다른 선지자들이 말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레미야에게만 발견되는 독특한 예언의 내용입니다.

 

1. 첫째, 그는 <영적인 삶>에 대해, 큰 강조를 두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선지자로 불립니다.

왜냐면 그는 이렇게 말한 유일한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식은, 소용 없다기 보다, 차라리 안 드리는 것보다 드리는 게 더 나쁜 것이다.

만약 너희 마음의 진정성이 거기에 담겨져 있지 않을 때는, 그렇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희생 제사 시스템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고요.

 

그러나 예레미야가 희생 제사 시스템 전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제사가 나쁜 게 아니라, 제사는 드려야했지요.

그가 말한 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형식적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그 속에 감춰진 너희들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영적인 행위를 수행하더라도, 그 속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는 너희 몸이 할례를 받든지/안 받든지 그게 문제가 안 된다.

너희는 마음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죠.

 

이것은 마음의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성령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이죠.

 

당시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경건성을 나타내는 길은,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지요.

 

오늘날에도 전문적인 제사장, 성직자, 목회자, 교구목사들이

가장 관심 갖는 것은, ‘얼마나 많은 숫자가 교회에 와서 예베를 드리느냐입니다. *외적인 것

 

여러분들도, 예레미야 당시와 지금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종교의식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성도의 경건한 삶입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는 것이, 경건한 삶의 대체물이 될 수 없습니다.

 

새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모으는 것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는 일에 대체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신자의 영적이며, 경건한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놀라우리만큼 큰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늘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그들이 성전을 잃어버리고, 제사를 못 드리는 날이 올 때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바벨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성전이 아니라, 회당에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시나고그(회당)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나고게에서 온 말인데,

함께 온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함께라는 뜻이고, ‘고게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당이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을 뜻합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입니까?

 

바벨론에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제사장은, 그런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사장들은 성전과, 번제단과, 제사에 관련된 직무와 연관되어 있었잖아요.

*그런데 바벨론엔 성전 자체가 없었어요.

 

그러나 더 앞을 내다보면,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셨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이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제사장 없이, 제사 없이, 성전도 없이,

그러나 사람들은 회당에 함께 모여서 3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드리고/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에 대한 기초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약성도들은 성전이 없습니다. 번제단도 없습니다.

제사장 복장도 없습니다. 분향도 없고요, 제사장도, 제사도 없습니다.

 

신약교회는 상이 달랑 하나 있습니다. *성찬용

우리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읽고 또한 공부합니다.

 

그 바벨론의 회당 예배 형식이, 나중에 신약의 크리스천 예배 형식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셨습니까? *바벨론 포로도, 다 하나님의 뜻이었지요. 긍정적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마치 기독교인들의 회당과 같았어요.

왜냐하면, 대제사장도 필요 없고, 성전 제사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모든 율법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어요. 그 성소 휘장이 없어졌고, 성소도 없어졌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모든 성전제사가 다 수명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희생제사 의식을, 지금 우리는 드리지 않으며, 드려서도 안 됩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구약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어요.

 

제사장의 모든 자잘한 도구들과, 복장과, 향과, 번제단 등

이런 것들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요.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함께 모여서 하는 일은,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배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기본 형식입니다. *이게 바벨론 포로 때 회당에서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하고 있었던 일을,

지금 우리가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면 사실 지금 우리도, ‘포로기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그걸 알고 계셨나요? 우리는 모두 다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들입니다. *천국을 벗어난 나그네, 포로 벧전2:11

우리는 디아스포라 들이고요, 지금 흩어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지나가는 자 나그네 들입니다.

그리고 진짜 성전은, 저 위에 하늘에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성전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휘장 가운데로 들어가셨고,

자신이 지성소의 영단번의 제사를 드리셨고,

그래서 지금 모든 교회는 바벨론의 회당과 같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사실의 현실적 적용은 아주 중요한데,

왜냐면 기독교 교회가 받는 유혹은, 교회의 처음 시작 때부터 계속해서

구약의 성전 제사로 되돌아가려하고, 제사장이 되려하고,

번제단과, 분향과 제사장 복장을 다시 갖추려는 유혹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예레미야는, 심지어 유대인들을, 그 모든 외적 형식의 제사 제도로부터

자유하게 하려 했던, 그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선지자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 제사가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바벨론에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회당에 함께 와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읽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독특하게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영적인 선지자로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spiritual prophet

 

그는 모든 외적인 의식 준수로부터 사람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그 모든 외적 형식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 외적인 의식을 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지요?

그는, 성전과 각종 기물이 없어도,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미래를 내다보았던

유일한 선지자였습니다.

 

2. 두 번째 예레미야의 독특성은, 그는 새언약을 강조한 것입니다.

새언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각각으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더 이상 큰 단체로, 그룹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새언약을 맺으시되, 각자 개인과 맺으시고, 이스라엘 전체와 맺지 않으십니다.

이 점은, 새언약에서 한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내용이 새언약에 나와있습니다. 각자 개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믿는 개인은)’

 

예수님도 이렇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셨죠. ‘사람(개인)이 나를 따르려거든, 너희는 각자..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개인이 강조되었는데, 그런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자기들을 단체로보신다고 여겼어요.

성경에 내 백성이(단체 개념)’ 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죠.

 

그러나 그게 이제는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 이스라엘을 단체로 징벌하시지만,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새언약으로 개인적으로 대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로 생생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새언약을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찾아서 읽어드릴게요.

 

그 날에는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자녀들의 이가 시리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로 죽을 것이다.

누구든지 신 포도를 먹는 사람은, 자기 이만 시릴 것이다.” 31:29~30

 

이것은 정말 완전한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구약에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은 그들을 단체로 대하셨는지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 세대의 죄가 자손 3대와 4대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버지가 지은 죄가 자녀에게 내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죠. 20:5

 

,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으면, 자녀들의 이가 시린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언약에서는, 하나님은 각자의 죄를 개인적으로 대하십니다.

신약성경은, 그 사실을 강조하고, 그래서 개인적인 언약입니다.

각각의 세대는 따로 각자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각각

 

제가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으십니다.

새언약에서는 손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대를 각각 대하시니까, 손자 없고 아들만 있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녀에게 뭘 물려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손자가 없고, 우리는 자녀가 없음.

비록 세상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에선 하나님이 각각을 대하십니다.

*천국에는 하나님-, 그 세대만 있지, -자녀세대 관계는 없습니다. 물론 알아보기야 하겠지요.

 

그래서 지금부터 그 관계를 염두에 두시면 좋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를 받을 때, 새언약에서는, 각자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 각자는, 자기 자신이 주님께 대한 개인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단체로 거듭나지도 못 합니다.

각자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광범위합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에 이어서, 똑같은 강조를 했습니다.

이 점을, 예레미야와 똑같이 예언한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고, 아무도 예외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신약성경에도 이렇게 나오죠.

심판의 날에, 우리는 단체로 심판대에 서는 게 아니라,

가족 단위도 아니고, 교회 단위도 아니고,

각자는 개인적으로 심판대 앞에 서고,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예레미야가 최초로 예언했습니다.

 

이어서 에스겔이 따라서 똑같이 예언했고,

신약성경 전체는,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예레미야의 독특성은, 그가 취한 정치적인 면인데요.

다른 어떤 선지자들보다도, 심지어 이사야보다도,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많이 말했습니다.

 

왜냐면 그 때는, 이스라엘이 패망할 때이고, 나라가 사라져버릴 참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 강대국에 붙었다, 저 강대국에 붙었다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

애굽이 강한 나라이지만, 애굽이 너희를 보호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바벨론이 애굽도 물리칠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그는 말하기를 바벨론을 대항해서 싸워서 좋은 것이 없다.

왜냐면 너희가 만약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올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패배할 것이다.”

*당시 남유다는 친애굽 정책을 펴고 있었고, 그래서 바벨론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정치적 조언으로는, 바벨론에 항복해라.

바벨론에 협조해라. 항복을 하되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협상해라.”

*처음엔 회개하라하다가, 나중엔 항복하라로 메시지가 바뀌죠, 회개를 안 했으니까요.

 

물론 남유다의 마지막 몇몇 왕은 항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반역이다.

이스라엘을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는 항복하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이 도성을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예레미야는 만약 너희가 바벨론을 대항해서 싸우려 한다면,

도시 전체가 파괴될 것이다. 그건 큰 재난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론과 화친해라. 그들에게 협조해라

 

이렇게 말해라. ‘우리가 바벨론을 원한다. 너희의 통치 아래에 살아도 상관없다.

그러나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협상하자.’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그의 정치적 조언은 기각되었습니다.

마지막 연약한 왕들은 차례로, 그의 조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반역자로 불렸고,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종'으로 오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요. 27:6, 43:10 '내 종'

 

   1939년도에, 누가 '아돌프 히틀러'를 하나님의 종으로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패할 바에야 히틀러에게 협조하십시오.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협상하십시오.’

   그렇게 말했다간, 갑자기 처칠이 수상이 되었는데, 만약 그렇게 조언했다가는 봉변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기 힘든 말이었겠죠.

왜냐하면 그것은 바벨론 편에 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권했는데,

그것은 그가 자기 어깨에 멍에를 메는 퍼포먼스를 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멍에를 메고서, 그는 예루살렘 성을 두루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바벨론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침공하기 전에, 그것은 아주 무서운 메시지였는데,

왜냐면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은 바벨론의 점령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건 마치 영국이 2차대전 직전에 채널 제도를 독일에게 점령당한 것과 같지요. *영국과 독일 사이에 위치한 섬

정말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요.

 

이것들이, 예레미야의 예언 중 독특한 점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학대              26:36~

 

그런데 바벨론 왕이 점령했을 때, 그는 예레미야를 공로자 명단에 넣었어요.

 

그것을 본 다른 유대인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 상상이 되십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말하기를 예레미야야, 일어나라. 당신은 우리를 도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는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학대를 더 당했습니다.

여러분이 설명 안 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학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먼저는 자기 고향에서부터 였습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첫 번째 시도는, 자기 고향 친척 마을인 아나돗에서

발생한 점은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을 이사 가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고향 친척들은, 그를 암살하여 했습니다.

왜냐면 그의 예언활동이, 자기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예레미야), 이제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 화나게 하며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체 가족들은 매우 화가 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 가족들을, 왕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를 죽이려 계획을 꾸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도 별로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지금 너를, 더 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훈련시키고 있다.’

*네가 지금 보행자와 다녀도 피곤하겠거든, 장차 어찌 말과 경주하겠느냐. 12:5

 

예레미야에게 전혀 위로가 안 되는 말이지요.

지금 저는, 앞으로 닥칠 더 큰 박해에 대비해,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서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반역자로 낙인찍힙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로부터도 거절당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거짓선지자들이니까요.

 

그는 제사장들로부터도 거절당합니다. *그는 제사장이면서 선지자

왜냐면 그는 제사장 직과, 성전과, 제사에 대해서, 대적하는 듯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들로부터도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반역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도 거절당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계속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 그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1~2

 

한 번 이상, 그는 겨우 도망쳐서, 간신히 자기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 바스훌에 의해 구타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20:1~2

그는 빛이 거의 안 드는 지하감옥에 던져졌습니다.

 

4번 투옥되었는데 다른 경우에는 그의 손과 발에 칼(형틀)이 채워졌습니다.

자기 목에 쇠로된 칼(형틀)이 채워진 적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진흙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거기는 목이 좁은 플라스크 모양의 깊은 우물인데, 물을 증발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지요.

당시 그들은, 그런 우물을 만들어, 물을 저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에 물이 거의 메마르면, 바닥에 젖은 진흙이 남게 되지요. 

그래서 빈 우물(물저장고), 땅속에 묻힌 플라스크처럼,

지상에 뚫린 작은 구멍이 하나 있고, 바닥에는 4~5피트 높이의 물컹한 진흙으로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 가시면 여전히 이런 우물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사다 꼭대기에는 이런 우물이 많습니다.

마치 유사(젖은 모래)처럼 되어있고, 그 바닥에는 물이 차 있지요.

 

그들은 그를 그 진흙구덩이 우물에 던졌습니다.

물컹한 진흙이 그의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그 어두운 곳에서, 그렇게 지내는 것을,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햇빛은 머리위 천정의 좁은 구멍을 통해서 겨우 비취고요,

당신이라면, 앉을 수도 없는 그곳에서, 계속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거기서 계속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흙 속에서 익사하니까요.

 

그를 구해준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이스라엘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이 밧줄을 내려주며 말했습니다. *구스 사람 에벳멜렉

이 밧줄을 겨드랑이 아래에 끼라, 내가 끌어당겨 올릴 게

외국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 우물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왕에게 탄원해서 허락 받음  38:10

 

그는 종종 숨어서 지냈지요.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조언을 듣기 원하는 사람도, 예루살렘에 아주 조금은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애굽으로 피난가게 되는데,

바벨론이 애굽까지 왔을 때, 거기서 그는 죽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한 설명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호하죠.

 

그는 생전에, 자기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천년 이상 지금까지, 계속 그를 말해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눈물의 선지자                          30:23~

 

이런 모든 이유로,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립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의 삶에 불행은 한 개가 아니라 계속해서 닥쳤습니다.

다음 시간에, 애가에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운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그 책을 울면서 눈물로 썼는데, <예레미야애가>입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서만 살펴봐도, 그의 불행한 삶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그가 기도할 때, 자신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자기 속마음을 다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깊이 상처받은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하소연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개의치 않는, 피부가 두꺼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고, 그는 자기 가족들로부터, 자기 동료들로부터,

자기가 배신자라고 여겨질 때, 깊이 상처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이 그를 대적했거든요,

모든 제사장들과 왕들도 모두 그를 대적했습니다.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요.

 

외로움으로, 사람들은 크게 고통 받습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도 컸지만, 영적인 고통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올무에만 걸린 것만 아니라, 하나님이 치신 올무에도 걸렸다고, 느꼈습니다.

*고난의 연속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난으로 내 모시니까요.

 

그건 정말 큰 상처였고, 진짜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다른 선택은 주지 않으신 것 같이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이 상황으로 부르셨고, 고통의 상황 속에 자기를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역을 계속 하라고, 그를 올무에 옭아매신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상황을 거부하면서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그런 외로움과 거절 받는 상황에서 나오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고통당함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그렇게 심하게 다루신 것 중에, 가장 기막힌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레미야야, 너는 결혼을 하지 마라.

왜냐면 네가 결혼하면, 너는 네 자녀들이 굶어죽는 것을 봐야 할 것이다. 바벨론이 침공할 때!’

 

그가 결혼하지 않는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일부(행위 설교)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자녀도 갖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내 자녀들이 태어나서, 이 고통스런 현실을 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반드시 침공해올 것이라는 뜻

 

그것은 대단히 능력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가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결혼을 사용하셔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기를, 창기와 결혼해서

거기서 얻는 경험으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불성실한 아내로 인해, 생생한 경험을 했겠죠.

 

에스겔에게도 네 아내가 내일 갑자기 죽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울어서는 안 된다.’

 

저 파슨도 제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생존하고 계시는 듯

저도 울지 않을 것입니다.

 

에스겔도 그런 가족의 이력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계속 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선지자들도, 다들 자기가 증거하는 메시지를,

자기 삶으로 반영하고 나타내도록 하나님께 지시 받았는데요.

 

그들은 삶으로 자기 메시지를 드러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감정을, 선지자들을 통해 그 백성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매우 외롭다고 느끼고, 자기가 하나님의 올무에 빠졌다고 느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10:23

 

가장 마음을 찢는 메시지는, 그가 이렇게 부르짖을 때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게 희망이 전혀 없는 임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널리 인용되는 그의 부르짖음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죠,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그 가련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시는 선포하지 않으리라

그러다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포를 중단할 수 없다. 그것은 내 뼈속에서 불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토해내야 한다.” 안 그러면 속에서 불이 타서...

 

그것이 바로, 그가 느끼는 바, 자기 안에 있는 올무였습니다.

그건 자기에게 선택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위하여 불타고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그가 다시는 선포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는데,

보니까 어느 듯 자기가 거리에 나가서, 다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선포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강하게 압박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겁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마치 올무에 붙잡히듯이 가졌던, 선포에 대한 강박관념을 이해할 필요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가 이렇게 말할 것이 확실합니다.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중요한 일이었어!”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레미야는 그렇게 가치 있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올무에 붙잡아 매신 것 같았고,

자기를 코너로 몰아서, 강제로 선포하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일을 했었어야 했던 일이지요. *그가 했습니다.

 

그의 기도생활은 독특합니다. 지금 그걸 살펴볼 시간이 없군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예레미야의 기도들을 읽으신다면,

1~20장에 7편이 계속 이어서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정직하게 토로해서 기록하였어요.

그는 아주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다 표현했어요.

 

여러분도 기도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다 아시니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 진실이 아닌 것을 미사여구로 왜 말씀드리겠습니까.

기도는 자기 속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있는데, 제가 우연히 남아공 헤라리 라는 곳에서

부쳐온 한 자매님의 편지를 받았어요.

 

혹시 이 이야기를 들어서 아실지 모르지만, 그녀는 심한 자동차 사고를 겪었어요.

수 년 동안 그녀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밤에 그녀가 자기 침실로 가서 자는데,

3시간 동안이나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 3시간동안이나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했는데,

왜냐하면 자동차 사고 이후의 수년 동안에, 자기가 겪은 고통 때문이었지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자기 발이 카페트에 걸려서,

마침 바로 침대로 쓰러졌고, 무의식이 되었습니다.

 

깨보니 아침이었어요. 밝게 비치는 태양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자기 눈을 비추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죽어서 천국에 온줄 알았어요. *모든게 눈부시게 밝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두려워졌어요.

내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보냈는데..’

 

조금 있다가, 그녀는 그게 햇살인줄 비로소 깨달았어요.

자기 팔과, 다리를 만져보니,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어요. *천국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달음.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는 침실에서 이리 저리 달려보았어요.

그리고 길에 나가서도, 달려 보았어요.

그리고 길에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하기 시작했어요. 자기가 고침 받았다고요.

 

그녀는 자기를 수술했던 의사에게 찾아갔어요.

의사는 당신은 오늘 아침에 광채가 나게 보이시는군요.”

 

그녀는 , 예수님이 저를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의사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당신을 고쳐주셨습니까?’ 

그런데 제가 3시간 동안, 주님을 저주했거든요!’ *저주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솔직하게 기도하라는 뜻

 

하나님은 우리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하박국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논쟁하십시오.

물론 당신은 하나님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와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솔직하라는 뜻

 

하나님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직접 알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고 난 후에, 하나님은 인내하며, 당신이 바로 되도록, 부드럽게 교정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예레미야의 일생을 연구하면,

그는 일생을 늘 불행하게 살았고,

늘 하나님에 의해 올무에 붙잡힌 느낌으로 살았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심

 

늘 혼자 고립되어, 외로움 가운데 살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했고,

그런 자기 인생을 동반해줄 아내조차 없이 살았습니다. 모든 게 고난이었죠.

 

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가 불행하다고 하나님께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그 삶을 헤쳐 나갔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자기 삶이, 예레미야와 같이 고난의 연속이라고 느끼신다면,

여러분도 하나님의 올무에 잡히셨다고 생각되신다면,

사람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대우한다면, 나는 다시는 선포하지 않으리라고 느끼신다면,

예레미야의 한탄의 기도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 길을 어느 틈엔가

다시 계속 가고 계시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였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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