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경이라는 책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는 책이지 사람으로 총명을 가져다 주는 책은 아닙니다. 많은 책들이 사람으로 총명하게 하지만 오직 이 책은 당신들에게 지혜를 얻게 합니다. 저는 지혜를 구할지언정 총명은 구하지 않을 겁니다. 총명하면 혹시 많은 돈을 벌수도 있지만 지혜는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방법는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약을 먹듯이 매일 10절씩 읽으면 마귀가 가까이 하지 못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성경은 많이 읽지 않는데 성경연구 자료를 많이 읽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빨리 성경을 보고 주해를 읽는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라고 하였을 가요?
먼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할 것은 성경이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복수형이지 단수형이 아닙니다. 그리스어의 biblia의 의미는 책의 집합체이고 전집류이며 총서(갖가지 책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여러 책 집합체로서의 성경은 시편, 잠언, 역사서, 선지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한 권한 권 깊이 연구하며 읽어야 합니다. 현재의 성경은 심각하게 파손되었는데 이는 성경에 장 절을 표시한 것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본질을 체득하지 못하도록 변질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요한 복음 3:16절을 설명한다고 하면 저는 대개 더 많은 량을 히스기야 3:16절을 말합니다. 혹은 아무렇게나 성경의 장 절을 택하고 그리고 그 후 회중들이 열심히 찾아서 히스기야 3장16절을 찾는데 하지만 성경에는 이 책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의 녹음 설교를 얼마간 들은 후 저에게 질문합니다. “다윗 당신은 성경 선생으로서 성경을 강의 할 때 왜서 성경의 장 절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요”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이는 하나님이 종래로 성경에 장 절을 나누어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눈 것은 하나님이 말씀이 하나님의 본 뜻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이 이와 같이 구절 구절이 나누고 번호를 단 것이 있습니까? 이런 방법이야 말로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원본 성경은 많은 책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매 권 책의 저작 유형, 목적, 그리고 저작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탄생”이라는 책 한 권을 출판하였는데 출판이 후 저는 놀라서 까무러칠번 하였습니다. 책의 내용은 분명 거듭남과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 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대영도서관에서 이 책을 “분만”과에 분류해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만약에 지금도 이 책을 공공도서관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부인과에서 찾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고 할 때 예술분야를 요리분야에서 찾지 않으며 소설을 컴퓨터분야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문장의 일부를 끊어 본의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앞뒤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또 당시에 본문이 기록될 때의 배경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냥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정합니다.
한 성경 구절이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그럼 이곳에서 말하는 모든 일(범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 일가요? 저는 항상 회중들에게 물어 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가요? 그들은 대답합니다. “간증하고 치유하고 기도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이 반드시 자신의 수입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나는 풍요함에 처할 줄도 알고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요즘 저는 모 교회에서 3분의2의 성도들이 빚을 지고 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이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받은 수입을 적당하게 나누어 사용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퇴직금으로 사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본의와 다르게 제멋대로 해석한다면 성경의 본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구절이 포함된 원문이 그의 중요한 배경이 될 때 온전하게 원문의 뜻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먼저 사복음서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복음서는 어떻게 보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역사서, 서신서, 선지서가 있는데 4권의 책은 매우 특별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이 책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합니다. 그럼 무엇을 복음서라고 할 가요? 이는 전기도 아니고 당연히 자서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전기가 아닌 원인은 매 복음서는 각각 약 1/3의 분량을 들여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전기들은 이렇게 많은 량의 페이지를 주인공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아무리 요란스럽(장렬하)게 죽는다 해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복음서는요? 제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가장 적합하게 비유를 들고자 합니다. 바로 뉴스입니다. 복음서는 마치 뉴스와 같이 사람들이 읽으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읽은 것을 곧 바로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참 좋습니다. 혼자서 복음서를 큰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은 매우 큰 수익이 생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읽어주어도 많은 도움과 이익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개인 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성경 읽어 주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이는 내가 설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글자 글자마다 전심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설교는 설교마다 그렇게 잘 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일종 특수한 문체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한가지 일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뉴스로 만들어 세상에 보도 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뉴스입니다.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감에 따라 그때 예수님에 관하여 보고 들었던 사람들은 점점 적어지게 됩니다. 이들은 죽거나 혹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교회는 점점 왕성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주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하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지고 반면에 이 뉴스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많아집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가요?
답은 뒤로 미루지 말고 이 사건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기 전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종이에 기록해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수의 일생에 관한 첫 번째 자료 입니다. 신약성경을 펼쳐보면 처음에 4개의 복음서가 등장합니다. 그럼 왜 4복음서입니까? 만약에 한 부이면 얼마나 편안할 가요? 제가 믿건대 사복음서를 읽어 본 사람은 사복음서에 중복되는 곳들이 매우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왜서 사복음서일가요? 왜서 하나님이 네 사람을 불러 공동으로 하나의 복음서를 만들지 않았을 가요? 각각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부분을 책으로 쓴 후 그것을 하나의 복음서로 편집하지 않았을가요?
이전에 한 사람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전 저는 크로부라는 저자를 매주 좋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리에 그분의 팬이 있는가요? 제가 길퍼드(영국)에 있을 때 houyouqi가 “길퍼드의 범죄사건”라는 책을 좋아 했습니다. 내용은 의 모살사건입니다. 크로부는 성공회의 기도를 주관하는 사제입니다. 그는 서레이 길퍼드에 있을 때 정탐소설을 씁니다. 그는 철도에 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취미입니다. 그는 사복음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려고 결심하고 그리고 결국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는 크로부의 종합 복음서입니다. 얼핏 보면 이는 매우 총명하고 뛰어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책을 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좋게 생각했고 또 많은 시간을 절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권의 책을 보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보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후에 발견한 일인데 4권을 하나로 만드는 일은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어떤 일들은 반복해서 설명하는데 바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두 번 걸쳐 창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역대기와 열왕기 상하는 두 번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럼 여기서는 4개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을 설명할 가요? 이는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부동한 각도에서 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볼 때만이 전체적인 부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옥에 간 일은 없지만 듣는데 의하면 그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 앞면과 측면의 사진을 찍는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것을 제가 한 개월 전에 어느 누구에게 말했더니 감옥에 있었던 한 분이 이것을 수정해 주었습니다. 죄인을 부동한 각도에서의 세 장의 얼굴 사진을 찍어 이것을 합쳐 완제품을 만들어 그 후 확실한 증거 자료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저는 제일 좋아하는 비행기는 콩코드 여객기입니다. 저는 이 여객기의 모양을 감상하기 좋아합니다. 이 여객기는 지면에 정지하여 있을 때 조차도 마치 하늘에서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그의 설계와 매우 연관되어 있으며 정말 어떤 언어로 이 설계를 설명할 수 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가요?
제가 능히 그것이 ‘Delta’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면 사람들은 삼각형 모양을 생각합니다. 이는 그리스의 자모”d’ 혹은 삼각형, 그러나 이렇게 보면 무슨 모양일가요? 만약에 콩코드여객기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면 적어도 4,5장의 사진을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 그의 모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여객기는 어떤 각도로 보든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4명의 사람에게 계시를 주셔서 세상 사람을 대신하여 옆에서 관찰하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 네 사람이 예수를 서로 다르게 경험합니다. 때문에 비록 한 분의 예수님이지만 그들은 부동하게 표현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복음서를 구분합니다.
사복음서
마가-인자 / 마태-유대인의 왕 / 누가-세상의 구세주 / 요한-하나님의 아들
세 단계
1, 예수님의 행한 일(마가), 2, 예수님의 언론(사)(마태, 누가), /예수님의 인품(요한)
두 개의 각도
1, 저자의 관점-보는 방법: 무엇을 보았는가? 어떻게 이해 하는 가?
2, 독자의 관점-목적: 누구를 위해 썼는가? 왜 썼는가?
간단히 말하면 4개의 부동한 각도에서 예수님을 보지만 우리의 학교에서는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두 방면에 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저자에 관하여 보고자 합니다. 미안하지만 제가 너무 많이 넘기면서 강의 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가운데 있는 부분을 보기 원합니다. 이전에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는데 세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우선 한 사람의 일생 생활에 관하여 기록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했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그 사람이 살면서 무슨 말을 하였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출판하게 되는 것은 그의 편지 혹은 그의 삶 가운데서 했던 말들을 편집 편찬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인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의 개성 그리고 그가 일을 하게 된 동기, 좋아했던 것과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복음서가 바로 이 세 단계의 요구를 만족시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한 일, 행위, 기적,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심이 있고,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가르침 혹은 그가 한 말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곳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보다 많으며 그러므로 책의 량도 많아 집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모두 마가복음의 기초에 의해 더욱 많은 소재들을 추가했으며 요한복음은 비교적 적게 예수님의 일생 그리고 행한 일과 가르침을 기록합니다. 요한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나누기를 원하는데 이는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며 우리로 그의 성격과 그의 내재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럼 오늘 저와 여러 분이 함께 세 번째 부분을 보기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측면에서 복음서를 연구 합니다. 하나는 저자의 관점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고 그는 어떻게 본 것을 이해하는가 입니다. 요한복음 저자의 관점이 기타 세 명의 저자와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보다 더욱 선명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는 성경을 보는 한 각도에 불구합니다. 복음서를 연구 함에 있어서 다른 각도가 있는데 이는 독자의 각도에서이며 독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쓴 것이며 왜 썼는가? 저자는 마음 속에 있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우리에게 자기가 무엇을 보았으며 나아가서는 일종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독자를 위해 쓴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꼭 저와 독자의 각도에서 모두 관찰해야 하며 저자의 관점과 글을 쓴 목적, 그는 누구를 위해 기록했으며 무엇을 가르치는가? 우리는 이후 성경을 읽을 때 이 기초 위에서 연구해야 하며 오늘 우리는 이 두 관점을 가지고 마태 복음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세 개의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마 이 단어에 대해 다 알 것입니다. 공관이라는 영어의 단어는 synoptic인데 이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syn’은 함께라는 뜻이고 “optic’는 관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3개의 복음서는 동일한 관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동일한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요한복음은 독단적인 관점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여러 분은 무엇이 서로 다른 관점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요한 복음과 다릅니다.
먼저 마가복음을 보기로 합시다. 아마 마가복음은 흥미진진한 뉴스와 같습니다. 뉴스와 같은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해서 하나의 뉴스를 보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곧 바로 예수님의 사역에 관하여 기록합니다. 그는 신중하게 예수님의 사역을 2년 반과 후 반년으로 나눕니다. 이는 마가의 시간의 구조 개념 입니다. 후에 마태와 누가도 이 시간의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약 30개월의 시간을 예수님은 북방의 갈릴리에서 전도 사역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개방적인 지역입니다. 반면에 남쪽 지역은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지역입니다. 사람들의 너그러움이 없고 까다롭고 별난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남쪽에서는 배척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입니다. 북쪽에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곳은 오직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절벽에 밀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북쪽에서는 그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수 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남쪽에 온 후에는 시끄러운 것들이 꼬리를 물고 다닙니다. 이러한 시간의 구조 속에서 마가는 점차적으로 이야기를 클라이맥스로 올려놓았습니다. 클라이맥스는 남쪽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북방에서의 시간은 느긋느긋하고 유유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쪽에 오기만 하면 긴장감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절정에 오르기도 하지만 마가복음은 이야기가 천천히 흐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몇 페지를 할애하면서 급하게 몇 개월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2년 반이라는 시간을 몇 페지만을 할애하여 기록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배에 오른 후 곧 바로 다른 곳에 도착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트기 배”를 타고 간 것 같습니다(ㅋㅋ). 매 사건마다 급하게 돌아갑니다. 여러 분이 주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뉴스 보도는 듣는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듭니다. 그 후 해마다의 이야기가 달마다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그리고 매일 일어난 일이 상세하게 기록됩니다. 마지막 하루에 와서는 매 시간마다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행열차가 천천히 감속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역에 도착해서는 마지막으로 십자가 앞에 와서 멈추는 그런 느낌입니다. 마가복음이 그리고 있는 구조는 모두 십자가를 종점에 두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천천히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한 면으로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한 면으로는 이야기를 천천히 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문 저작의 뛰어난 부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마가복음은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읽기 적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도와 우리가 믿는 기묘한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주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마가복음을 뒤로 하고 마태복음을 보기로 합시다. 마태복음의 시간 구조는 역시 마가복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는 편폭(문장의 길이) 입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은 크게 많아집니다. 추가된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 성령으로 잉태, 박사들이 어린 예수에게 경배한 이야기 즉 성탄 이야기입니다. 이런 내용은 마가복음에는 전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약30살 때부터의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는 거슬러 올라가 더 많은 내용을 강화합니다. 그러므로 더 앞부분의 시간의 내용이 추가됩니다. 마태는 큰 수정을 하게 됩니다. 조금 있다 우리가 더 나아가 하나 하나씩 토론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을 개정하여 다른 하나의 면을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마태는 길 잃은 양 이야기의 앞 뒤에 전혀 다른 내용을 추가하고 길 잃은 양은 죄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성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많은 사건들을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는 많은 양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묶어서 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총 5편의 설교 가르침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제일편인 산상수훈입니다. 그리고 다른 4편의 가르침 설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특색이기도 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기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누가는 사실 이야기를 적어가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함께 기록하여 갑니다. 마태는 반면에 다섯 개의 가르침을 다섯 개의 주제로 만듭니다. 잠시 후 더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는 이렇게 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이 말들을 할 때는 부동한 시간과 부동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마태는 이것을 한데 묶어서 다섯 개로 나눕니다.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모세율법은 다섯 개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성경의 첫 5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 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다섯 권의 책, 모세 오경, 예수님의 다섯 가지 가르침. 이는 마태가 이것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을 가요? 마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율법이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율법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잠시 후 또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마태는 가르침과 행동(삶)을 서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기록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기록합니다. 이것이 반복으로 다섯 번 기록합니다. 마치 샌드위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의 구조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매 한편의 가르침 후에는 꼭 예수님의 행적이 있고 이것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과 행동을 함께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고 듣게 하는 것이 마태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우리들에게 직접 예수님의 행한 일들을 보게 하고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리고 그의 행한 일들을 보게 합니다. 가르침과 그이 행적들이 서로 반복하면서 다섯 층의 샌드위치가 되게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기록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기록합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이 구성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을 때 한가지 특징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로 유태인의 특징들이 많이 두드러지게 표현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는 아마 유대인들을 마음에 두고 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우리가 관찰할 것은 유대인들은 신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번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하여 “야훼”라는 이름을 부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뜻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들을 어떻게든지 한번 말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합니까”고 물으니 그들은 “야” 한 글자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저에게 하는 말이 “당신이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하늘이라는 말로 신의 이름을 대체합니다. 그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도왔다” “하늘이 복을 주기를 원한다”. 때문에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찾을 수 없지만 누가 복음에는 곳곳에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에 관해 기록할 때 그는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천국이라는 단어는 유대인으로서는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유대인의 연감에서 우리는 절대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항상 괴상만 문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G”라는 글자에 건너끔 그리고 작은 문자”d”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유대의 연감을 보게 되면 거의 통상적으로 “G-d”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신의 이름으로 대체 합니다. God를 그들은 완전하게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망령 되는 죄를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하여 마태는 천국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독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이에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가 인용한 구약 성경은 기타 복음서보다 많습니다. 마태가 글을 쓰면서 즐겨 강조 사용한 것이 있는데 이는 ”이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려 하심이니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 속에서 약 13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는 미가,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서를 사용하는데 저자는 마음을 들여 구약을 인용합니다.
비록 마태복음은 제일 처음 쓰여진 복음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약의 처음에 있는데 이는 기타 복음서보다 구약과의 관계가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연속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구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구약을 읽은 후 마태복음을 읽게 되면 구약에 나오는 예언들이 마태복음에서 성취 됨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총 29곳에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구약 성경을 인용한 곳은 121곳이 됩니다. 여러 분이 이 수를 기록하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1입니다. 마태는 구약성경에 대해 바삭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크게 고심하면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이는 이미 일찍 선지자들이 예언 한 것 이라고 합니다. “유대 베들레헴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니라(미5:2, 마2:5,6). 때문에 마태는 베들레헴에 관하여 특별히 강조합니다.
한번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무리들 중에서 누군가 “이 사람이 메시아 인가요?”고 질문하니 다른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고 하면서 왜냐하면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 했습니다. 나는 매우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침묵을 하고 있다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당신이 할 수 있나요? 저는 큰 소리로 반박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분명히 유다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상세하게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볼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난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왕이면서 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태는 상세하게 이것을 설명하고 예수가 죄가 없는 분이심을 거듭 강조하여 말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유대인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마태는 또 강조하면서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온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의 난제 입니다. 이 성경 구절은 말하기를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이 성경 말씀은 나에게 죄책감을 주는데 이는 내가 지금 율법의 말씀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모세의 율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지어는 한 유대인의 가족이 이를 돕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혼합재료로 된 옷을 입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엘은 저의 수호 천사 입니다. 하지만 한 유대인 가족이 나로 범죄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말하는 일점일획은 무엇 일가요? 이는 우리가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또 다른 율법은 만약에 집에 해로운 질병이 있으면 이웃을 위해 집을 불로 태우라고 하였지 사람을 찾아가 집을 소독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 이웃을 위해 집을 태워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만약에 당신의 집을 확장 공사하여 베란다를 설치하려면 꼭 난간을 추가 설치해야 합니다. 이는 만약에 이웃의 아이가 올라가다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괜찮은 규정인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건축의 규정, 옷의 규정, 그리고 화장실의 규정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데 아니라고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율법과의 몸부림치는 가운데 있어야 함을 가르치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의 독자들에 대해 매우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이방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들은 유대인의 관념을 뛰어 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방인들에게도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와서 어린 예수께 경배하는 일입니다. 이 박사들은 이방인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밖의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을 주님을 제자화 하라고 합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쓴 책은 아닙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들었는데 이는 유대인 만을 위한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책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한 유대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1장을 읽고 곧 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믿어 집니까? 일장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모두 족보의 기록입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칭찬할 만한 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직 길고 지루하기만 족보 이야기 입니다. 즉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이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족보의 이야기 입니다. 마태복음의 일장이 바로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이 족보를 통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족보가 그를 설득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유대인은 족보로 한 사람의 내력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사람은 마태복음의 일장을 읽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보건대 족보는 그 존재의 목적이 됩니다. 마태복음의 일장은 전부 유대인의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무엇이 고난 일가요? 이것은 저주이고 축복의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저주와 축복이 함께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매번 갈릴리 해변에 갈 때마다 예수님의 저주에 대해 생각이 납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티베리야 해안에 있는 호텔에 주숙 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에는 가지 않았는데 사람들로부터 그곳이 물에 잠겼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헬몬산의 눈이 녹았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의 수위가 상승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호텔이 물에 잠기는 일이 일어난 것 입니다. 본래 건조한 갈릴리 호수는 적어도 4년이 지나야 이런 수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물이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이래도 티베리야 호텔에는 주숙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나요? 예수님 시대 약 25만 명이 되는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4개의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25만 명은 당시 사람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오늘날 여행자들이 그곳에 가서 하는 말이 “매우 아릅답다 입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경치들을 예수님도 보았을 것입니다. 푸르싱싱한 산맥들이 낭만적입니다. 일찍 이 호수주위에서 살던 25만 명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에 갔을 가요? 그리고 그 도시들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가버나움아 화가 있을 지어다. 벳세댜야 화가 있을 지어다. 고라신아 화가 있을 지어다. 지금 이 도시들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오직 티베랴만이 이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존재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은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태복음 중 예수님은 유대인을 저주합니다. 그는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자는 화 있을 진저, 사람에게 랍비라 아버지라 칭함을 받는 자에게는 화 있을 진저“ 마태복음23장 전체에 걸쳐 유대인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마태는 적어도 아주 성실한 신문기자 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을 상대고 기록했지만 그는 정직하게 예수님이 어떻게 유대인을 바라보는가 하는 관점으로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이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는 유대인입니다. 왜서 마태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칠 가요? 이는 그가 이것을 기록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할 때 입니다. 유대인은 교회와 아주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주후 85년 마태복음이 완성 되었을 때 주후 85년에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 났습니다. 그때 유대 기독교인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고 그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이때부터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제가 기억하건대 한번은 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모세가 만약에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감히 말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한 유대인이 무신론자가 될 수 있고, 불가지론자가 될 수 있고, 혹은 불교신자 등등은 되어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는 예수님에 대해 믿었습니다. 엘리야도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들로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나요? 이는 유대인 신도와 이방인 신도 사이에 엄청난 분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에도 큰 갈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교회에는 유대인들 뿐이었습니다. 사도와 성도들은 모두 똑같이 유대인입니다.
마태는 이 책을 특별히 유대인들을 생각하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막 분열이 생기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기록했을 가요? 두 개의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유대인들에게 교회의 문은 영원히 열려져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였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이므로 그들은 모두 자신의 동포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문은 항상 그들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마태는 그들에게 교회는 영원히 그들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유대인들이 돌아와 메시아 믿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기교교인들의 조상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유태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과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때문에 한 면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을 거부하지 말 것을 말하며 다른 한 면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포기하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함께 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주역을 맞고 있습니다. 먼저 잠간 휴식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계속해서 마태복음이 기독교인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방인의 한명일뿐 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이곳에 있는 여러분도 아마 거의 이방인일 것 입니다. 저는 가끔씩 사람들에게 유대 기독교인으로 오해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외모 때문입니다. 이 코는 유전 때문입니다. 비록 저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저는 마태복음을 매우 좋아합니다. 저는 마태가 전하는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나누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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