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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개혁과 미래

LNCK 2016. 1. 14. 11:03

한국교회의 개혁과 미래               마6:31~33, 삼하12:5~7                출처

 

손봉호 박사 / 에방겔리아 대학에서 특강 (미국 CA소재)
  

 
 
제가 이 자리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먼 나라(미국)에 오셔서, 복음사역을 위하여 여러분께서 수고를 많이 하시는데,
 
지금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로 염려스런 점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관심을 갖고서, 어떤 미래의 전망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 한국교회의 훌륭한 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좋은 면을 알아야, 그 점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욕심도 갖게 될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 선교학 교수였던 카리카울이라는 분이
원래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있다가, 자유대학교 선교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분이 1970년대 한국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한국교회를 말하기를,
“한국교회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입니다.”
 
이 평가는 정확합니다. 사실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만큼 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가장 잘 알려진 모습입니다.
 
“한국교회는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입니다.”
이 말도 사실입니다. 물론 모든 나라의 교회들이 다 전도를 합니다만
우리 한국교회만큼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읽는 교회입니다.”
이것도 사실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그대로 필사하는 사람까지 있으니까요.
하여튼 성경 다독, 정독 등, 성경을 참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금도, 세계에서 한국교회만큼 많이 하는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한국교회만큼 열심히 하는 나라도 많지 않고요,
그 외에도 주일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그래서 소득의 1/10정도가 아니라,
많이 내는 분들은, 적어도 소득의 1/4정도는 헌금하는 것 같아요.
 
저도 집사람에게 한 번 물어봤어요.
우리 집에도 가장 큰 지출 항목이 헌금이었습니다.
 
제 주위를 살펴보면,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분들은, 헌금도 많이 드립니다.
대개 1/4, 1/5은 헌금을 하는 것 같아요.
세계 어느 나라 교회도, 이만큼 헌금하는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교회 봉사도 참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또 선교도 열심히 합니다.
 
지금 한국 선교사들이 약 2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전체 숫자는 미국이 제일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교인 숫자, 교회 숫자 비율로 비교하면,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국제구호활동이 대단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구호단체들,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국제기아대책기구, 컴패션..
이런 것들이 다 기독교 구호단체들입니다.
 
제가 재작년에 아프리카 말라위에 갔는데,
구호활동으로 온 한국인들이 거기에 얼마나 많은지, 제가 참 감사드렸습니다.
보니까 너무 흐뭇했습니다.
 
말라위는 과거에 영국식민지였는데,
한국 사람들이 그 나라를 도운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참 잘 하는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실 국내복음화도 상당히 성공했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인구의 1/5을 전도했다는 것은, 사실 대단합니다.
 
그리고 지식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경제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크리스천이 많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국회의원의 약 1/3이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인구의 1/5이 개신교인인 반면에, 1/3이 국회의원이라면
비율로 볼 때,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기독교인이 많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장관, 판사, 교수 이런 분들을 보면, 기독교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불교신문이 그렇게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한국에 쓸만한 직장의 70%를 개신교인이 가지고 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과연 우리를 칭찬한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질투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좌우간 다른 종교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은, 결과적으로 별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다른 종교들이, 기독교를 부러워하고, 존경해야지요.
 
그런데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우리도 좋아한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거든요.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
옳기는 옳지만,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지만 못 하는 것,
그걸 한국 기독교가 했더라면 존경할 터인데,
 
자기들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개신교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들은 시기합니다.
즉 개신교가 세속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 명예, 권력 등 모든 인간이 다 추구하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다 추구하는 그런 가치를 우리 한국교회가 상당히 많이 갖고 있으니까,
불교인들이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권력입니다.
11분의 역대 대통령 중에도, 그 중에 네 분이 개신교인입니다.
이승만, 윤보선,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 등 *최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따님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구 비율로 보면, 월등하게 많습니다.
인구비율은 20%인데, 그 비율에 비하면, 많습니다.
 
그 외에도 과거에 대법원장, 국회의장, 대학총장 이런 분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많았습니다.
 
▲제가 우리 교포 여러분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지성인들, 말하자면 대학교수나 학자들 중에 상당수는
교포교회가 전도를 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뭐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미국 같은데 오면,
 
저도 1962년도에 미국에 유학을 왔는데요,
그때는 우리 교포가 많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괜히 외롭다고요. 김치도 먹고 싶고요.
그러니까 교회를 찾아갑니다.
교회에 한인들이 모이고, 김치도 먹고 하니까,
주일날 예배 드리러도 가지만, 김치 먹으려고 교회도 갔습니다.
 
그렇게 다니면서 조금씩 감화를 받아서, 나중에 아주 좋은 신자가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한국에 소위 지성인 전도는, 교포 교회, 특별히 미국,
그 외에도 독일, 영국에 있는 교포교회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제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달란트를 주셨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느 조사에 보니까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전 세계에 191개국에 나가 있답니다.
참 대단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에 진출해 있는 민족이 한국민족이랍니다.
 
대개 우리는 중국 사람이 많이 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국인은 130개국에 나가 있답니다.
 
그리고 174개국에 한국교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도 우리 교민들이 나가면 교회를 세운다는 얘기입니다.
모이면 교회가 되니까요.
 
특히 미국같은 나라는, 유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신앙인이 되어서, 한국에 돌아와서
지역 교회에서 크게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 학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세계관 학술 동역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 전에 <기독 학문 연구회> 혹은 <기독 대학 설립 동역회>
이런 두 개의 학자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4년 전에 이 두 모임이 합쳐서 <한국 기독교세계관 학술 동역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합쳐진 이후부터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 회원이 약 2천명이 있는데, 그 중에 교수만 약 5백명입니다.
 
아마 전세계에서 기독교인 학자들의 모임으로서는, 이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2천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기독교 학자들의 모임은, 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학술지를 발간하는데요,
우리나라에 “한국연구재단” 이란 기관이 있는데, 거기서 학술지를 모두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 재단에서 인증하는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라야,
정식으로 인정을 받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과 지성>이란 학술지는, “한국연구재단”의 인증을 받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가 ‘한국연구재단’의 인증 학술지에, 등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학술지 <신앙과 지성>에 발표하는 논문은,
모든 대학이 정식 학술논문으로 인정해 줍니다.
그것이 교수진급에도, 채용에도 다 유효한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습니다.
 
저는 이것이 큰 성취로 생각하는데요,
왜냐면 그 전에는 기독교 학자들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가령 경제논문/정치논문을 쓰면,
정치학회 학술지, 경제학회 학술지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너무 특정 종교에 편향되어 있는 논문이기 때문에,
그 학술적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받아줍니다. 그리고 대학도 그걸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신앙과 지성>이 ‘한국연구재단’의 인증을 받은 학술지이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 기독 학자들이, 마음 놓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문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 <신앙과 지성> 편집위원들에게 '항상 퀄리티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고 있는데요,
 
‘한국연구재단’에서 몇 년 만에 한 번씩 리뷰(재심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 학술지의 논문의 질이 떨어지면, 나중에 탈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조심해서, 그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 교포교회가 학자들이, 한국 전도에 아주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외도 한국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나의 독립에, 개화에 아주 크게 공헌했습니다.
 
한국의 현대 교육을, 기독교가 도입했고,
한국의 현대 의료제도, 현대 복지제도..기독교가 도입했습니다.
 
박종삼 목사는 원래 치과의사였는데,
옛날에 자선사업, 복지활동에 거기에 눈을 뜬 분이고,
숭실대학교에 우리나라 최초로 '복지학과'를 설립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지전문가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며칠 전에 그 분을 만났더니, ‘복지란 본래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말씀하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나라도 이제 복지에 관심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정부 예산의 1/3이 복지예산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규모입니다.
 
   과거엔 국방, 교육에 예산을 많이 편성했지만,
   지금은 복지 예산이 전체 예산의 1/3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분야가 되었습니까. 이것도 사실은 기독교가 시작했습니다.
 
저는 (밀알) 장애인 사역을, 약 30년 전부터 같이 협력해서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도 기독교가 시작한 것입니다.
 
▲또 호스피스 운동도, 이게 가톨릭이 먼저 시작했지만
적어도 호스피스의 독립된 시설을 갖고 있는 단체는, 기독교입니다.
샘물 호스피스 병원(용인시 백암면)은 정부가 다 인정하고,
가장 모범적인 호스피스 병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요,
 
전국에서 의과대학에 간호학과 학생들이 전부 우리 호스피스 시설에 와서 실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모든 선한 일, 아름다운 일,
모든 좋은 일을 우리 기독교가 시작했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 물론 지금 많이 부족하고 결점이 있지만
그래도 외국의 평가는 괜찮습니다.
 
영국에서 발간하는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세계20위라고 발표했습니다.
일본이 23위이고, 미국은 21위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앞서 있다고 평가했는데요,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시민 사회 civil society'
요즘 그게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하죠.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어 있는가?’
거기에 따라서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평가하는데,
우리 한국은 확실히 시민사회가 상당히 활성화 되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보다는 압도적으로 앞서있고요. 일본은 시민사회가 별로 없으니까요.
정치학자들은 ‘일본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의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3~4년 전에 <시빌 소사이어티>라는, 논문을 외국 잡지에서 읽어보니까
“지금 세계 모든 나라가 다 시민사회 civil society로 나아가고 있는데,
아랍 국가들, 중국, 그리고 일본이 거기서 예외이다”라는 것을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사람이 쓴 논문인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은, 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한국교회의 좋은 점, 자랑스러운 점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그 반대 측면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앞으로 개선할 점
 
▲제가 한국 교계에서 비판 많이 하기로 알려져 있어서,
목사님들에게도 제가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제가 목사 킬러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저는 목사님들을 너무 존경하기 때문에,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겁이 나서, 제가 목사 안수도 지금까지 못 받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지금까지 목사 안수를 못 받고 있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목사 직임은 제게 너무 무섭고 큰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평생 안수를 못 받고,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권했지만,
 
제가 미국에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M.Div.(목회학 석사)를 마쳤거든요.
그래서 가르칠 자격은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어느 목사님이 제게
‘손박사님은 목사 고시를 안 봐도 통과시켜 줄 터이니, 안수를 받으세요’ 그럽디다.
 
그러나 제가 ‘목사 직임이 너무 두려워서 못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신 교단에 윤봉기 목사님이라고, 경주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나중에 서울중앙교회에서 목회하신 분이 계십니다.
 
저는 평생 그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윤목사님은 워낙 경건하고, 그 신앙이 워낙 철저하고
그 삶이 워낙 확실하기 때문에,
그 분이 제게, 목회자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그분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그 분은 저보다 너무 높으니까, 이게 제게 평생 콤플렉스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목사 킬러가 아닙니다.
다만 엉터리들이, 이런 훌륭한 목사님들의 명예를 다 떨어뜨리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점을 자숙하고, 지적하다보니까 목사 킬러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는데요
 
▲다만 제가 한 가지, 목회자들이 싫어하는 일을 저지른 게 있는데,
그건 <목회자 납세 운동>입니다.
 
저는 30년 전부터 목회자도 세금 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에도 다 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최근에 지금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다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처음부터 세금을 자진해서 내었습니다.
 
제가 아주 가난한 목사님들이 세금을 내야한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면세점’이 있는데, 어떤 분이 조사해 보니
우리나라 목회자들 70~80%는 세금을 안 내도 되는, 면세점 이하의 소득이랍니다.
 
나머지 한 달에 1~2천만원 사례를 받고, 그 외 많은 부수입이 있는데도
세금을 한 푼도 안 낸다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1억 이상 연봉자들이 세금을 몇 % 내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세금 내야, 그 돈으로 길닦고 학교 짓고 합니다.
목회자들도 그 길로 차 몰고 다니고, 그 학교에 자녀들 보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세금을 안 내고, 가난한 노동자들 세금 낸 것을 가지고
그걸 가지고 목회자들이 혜택을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건 근본적인 정의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목회자들, 생활에 힘든 목회자들에게 세금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의호식하고, 그렇게 사치하게 사는 분들이
면세의 혜택을 보는 것은, 사회 정의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조금 더 많은 목회자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존경하는 목회자들은, 다 지금 세금을 자진 납부하고 있습니다.
이게 좀 더 빨리 이뤄졌더라면 좋을 뻔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요즘 여러분이 다 들어보셨지만, 위기라 그럽니다.
그 위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사회로부터 인정을 못 받는다는데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재작년에 국민 1천명 대상으로
여론조사기관과 합쳐서 ‘개신교를 신뢰하느냐?’ 등 종교 신뢰도를 여론조사했습니다.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은 19.4%
가톨릭을 신뢰한다는 사람들은 약35%
불교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은 31%정도였습니다.
 
개신교의 신뢰도가 아주 낮았지요. 이건 참 심각한 현실이었습니다.
 
   약 30년 전만 해도, 한국교육개발원 원장이 제게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안 다니지만, 우리 아이는 제가 교회에 보냅니다.
   교회에 가야 사람이 되겠더라고요!’
 
   그 분은 교육개발원 원장이니까, 교육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전문가잖아요.
   자녀에게 인간 교육을 시키려면, 교회에 보내야 된다고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자녀를 교회에 보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약 50대 이상의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치고
어릴 적에, 또는 젊을 때 교회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 주일학교에 가서, 성경 배우고, 말씀 듣고 깨우쳐서
상당히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지금 사회의 지도층이 된 것이거든요.
 
그건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일평생 그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나중에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다 교회 바깥으로 나갔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는, 다 교회에 가서 배웠고
그것 때문에 그들이 지금 그 수준에 올라갔다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교회에 아이를 일부러 안 보냅니다.
‘저런 교회에 보내서는 자녀를 버리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저는 비신자들을 많이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언론이나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그들 중에 ‘한국에 사기꾼은 교회에 다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에 언론에 등장하는 여러 비리 사건에 연루된 분들도, 다 교인들입니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는 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되겠습니까.
   지금 교인 수도 줄고 있고, 교회 숫자도 줄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대교회는.. 군소 교회 성도들이 지금 대교회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endif]-->
대교회는 그들이 노미널(이름뿐인 신자)로 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자꾸 헌금하라, 봉사하라 그러죠.
 
그러니까 큰 교회에 가서 주일날 천원 헌금하고.. 이렇게 노미널 크리스천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회에 갑니다.
 
우리나라의 대교회는 지금 교인들을 노미널 크리스천으로 만드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교회는 모이는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교인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고요.
노미널도 당분간 하다가.. 더 이상 교회 출석을 관두게 되지요.
 
저는 교회의 분립개척을 늘 주장합니다.
제가 과거에 섬기던 서울영동교회가, 교인이 천명이 훨씬 넘어갔을 때
저희는 분립을 시켰습니다. ‘큰 교회를 만들지 말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 교회들이 생겨났는데요.
 
최근에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좋은 대안학교를 시작하려고
그 학교와 계약을 맺어서, 그 학교를 짓는데 교회가 좀 헌금을 하고
그 교회 강당에, 교회도 하나 분립시키기로 다 약속이 되었는데,
그 동네 주민들이 그걸 알고, 한사코 반대 데모를 합니다.
 
교회가 오면, 절대로 학교 못 짓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낮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전도가 잘 될 수 없지요.
교회가 가까이 오면, 주민들이 좋아해야 될 터인데요...
단면이긴 하지만,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왜 이럴까요? 간단합니다.
성공이 바로, 실패의 원인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속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세속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교회가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게 뭔고 하니, 물질, 권력, 인기,
이런 것들은 육적인 욕망의 충족에 불과합니다.
 
물질을 추구하기 위해서
수련하거나 훈련받거나 고상할 필요 없습니다.
가만히 놔둬도, 모든 사람은 다 물질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교회가 ‘축복’이란 이름으로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잘 믿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교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많이 벌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사기를 쳐서 감옥에 갔다 와도, 치리도 없고
다 장로가 됩니다.
 
그런 사기꾼들도, 교회에 돈만 내면 ‘축복 받았다’ 그러고 인정해 줍니다.
성경에 이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마6:31~32
 
참 크리스천은, 돈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돈이 없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도 잘 쓰면 필요하지요.
그러나 신앙의 양심까지 속여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
추구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래디컬하게 주장하기를 ‘한국교회가 돈을 무시하기 전에는
절대로 개혁될 수 없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교회는 돈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해야 됩니다.
 
▲서울영동교회가 처음 개척되었을 때,
개척교회 당시 목회자를 모실 형편이 안 되어서,
제가 당시 대학교수로 월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처음에 약 6개월만 설교하려고 했는데,
교인들이 저를 놓아주지 않아서, 2~3년 제가 계속 설교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회계집사가, ‘오늘 헌금이 이렇게 들어왔습니다.’며 제게 보고하러 왔습니다.
제가 ‘보고하지 마세요. 나는 교회에 헌금이 얼마 들어오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제직회 때 공식통로를 통해서, 제가 교회에 헌금이 얼마가 들어오는지 알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에 헌금이 얼마 들어오는지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누가 십일조를 했는지, 누가 얼마를 했느니’
일체 그런 일로 휘둘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장로를 선출하고 취임식을 할 때도,
    거기에 따른 일절 (장로 임직) 헌금을 갹출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꼭 하고 싶어하는 장로가 있으면,
    무명으로 헌금을 드리도록 권고를 드렸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취임하는 장로님들에게
    성경주석을 한 질씩 선물로 드렸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은 저 한참 뒤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돈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다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either or이지 both 가 아닙니다.
 
돈이 무서운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유혹입니까.
저는 한국 크리스천들이 부디 돈의 우상을 섬기지 말았으면 .. 소원합니다.
 
▲그런데 ‘돈의 우상’이 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이 지금 물질주의 천지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상이라는 것은, 구약시대에 온갖 우상들이 있었습니다만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endif]-->
실제로 우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무나 돌로 우상을 깎아 만들어도,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우상에게, 그게 무슨 신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우상이 되는 것이죠.
단순히 무슨 모양을 조각해서 만들었다고,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도, 다른 음식과 아무 다를 게 없다.
그걸 먹는다고 잘못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나는 먹지 않겠다.’
 
우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상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우상을 두고서 놀립니다.
‘산에 나무를 잘라서, 반은 밥 짓는데 쓰고, 반은 우상을 만드는구나.’
그것 자체가 무슨 신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그걸 대단하게 생각하면, 그게 우상이 되는 셈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상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다.
 
옛날 클린턴 대통령이 출마할 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It is the economy, stupid!"
 
무슨 말입니까? ‘뭐 대통령 선거 연설, 뭐 뭐 다 필요없어, 경제야 경제!
내가 경제를 일으키겠다고 하면, 표가 들어와!’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대통령 선거운동 할 때, 한 참모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우리 후보자가 뭘 내 걸면, 제일 효과적이겠습니까?’ 묻기에
제가 대답했습니다. ‘문화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면 우리 한국 문화를 창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창달: 막힘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뻗어감
 
그러자 그 참모가 비웃듯이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걸 내걸었다면, 당장 떨어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문화니, 다른 것 다 소용 없습니다. 오직 경제!
과거 어느 때보다, 온 인류가 지금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적인 ‘돈의 우상’을 이길 힘이, 우리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아니면, 이 ‘돈의 우상’을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마땅히 돈의 우상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너무나 정확한 말씀입니다.
    
    약 30년 전에, 남산 근처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어느 집사가 백만원을 헌금 했습니다. 그 때는 큰 돈이었죠.
 
    그러자 목사님은, 그게 너무 감격되어서, 흥분되어서
    교인들에게 자꾸 그 집사 칭찬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집사가 간이 커져서, 교회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하자
    교회가 풍비박산이 되고, 결국 목회자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치과교수 한 분이, 임시당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가 회계집사보고, 백만원짜리 수표를 만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백만원 수표를 만들어오니까,
    그 아무개 집사를 당회실로 불러서, 백만원짜리 수표를 그에게 던졌습니다.
    ‘주워가시라고’
    그랬더니 주워가지도 못하고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요!
목회자들이 그런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교회에 오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뭐 유명한 배우가 오더라도, 못 본체 하고,
혹시 유명 정치인이 인사차 오더라도, 별로 무관심해야 합니다.
 
지금 목회자들이 그런 것에 너무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너무 그 사람들을 높여주니까, 이 분들이 간이 커져서
결국은 교회의 영적권위를 우습게 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도리어 당합니다.
 
교회의 간증 자리도 너무 쉽게 개방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자꾸 세속화되는 겁니다.
 
▲돈은 상대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경쟁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가치란 것이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비경쟁적 가치’가 있습니다. *경쟁적 가치와
 
가령 사랑, 관용, 자비, 지혜.. 이런 것들은 비경쟁적 가치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아무리 사랑을 많이 베풀어도,
그게 다른 사람에게 아무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로 ‘난 제로섬’입니다. *Non zero sum
 
그런데 돈은 ‘제로 섬’입니다. 경쟁적 가치입니다.
내가 많이 가져버리면, 다른 사람은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도, 인기도 그렇습니다.
내가 너무 인기가 있으면, 다른 사람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을 수 밖에요.
<!--[if !supportEmptyParas]--><!--[endif]-->그런데 돈은 더합니다.
 
모든 하급 가치는, 다 경쟁적 가치입니다.
이건 모든 인간이 다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모든 인간은 경쟁적이고요.
 
하여튼 돈, 권력, 명예.. 이런 것을 갖기 위해, 자꾸 다른 사람들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런데 경쟁적인 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유혹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기기 위하여, 부정한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가페적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되고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수단을 사용할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서 비도덕적 행동이 생겨나는 겁니다.
사랑을 위하여, 자비를 위하여, 지혜를 위하여, 속일 필요도 없고, 사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기를 치고, 거짓말도 합니다.<!--[if !supportEmptyParas]-->
 
그래서 도덕적 수준이 낮아지는 이유는, 이런 하급 가치를 너무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전세계에서 경쟁심이 제일 강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평소에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최근에 우연히 어느 잡지에 보니까
영국 잡지 가운데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이 쓴 책 <Korea the impossible country>에
그런 내용을 똑같이 썼습니다.
 
그 책에 보니까,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심이 강하다.’
영국 사람이 봤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야, 내가 관찰한 것과 같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경쟁심이 강하다’는 말은,
‘한국의 차세 (此世, 이승) 중심적 세계관 때문에 그렇다’ 라고 제가 분석합니다.
 
왜 한국인이 이렇게 경쟁심이 강한가 하면,
유교 국가의 공통된 특징이, 경쟁심입니다.
 
모든 유교국가는 경쟁심이 강합니다. 지금 보세요,
아시아에서 경제가 그래도 많이 발전한 나라가 홍콩, 싱가폴, 대만, 한국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이 다 유교입니다.
 
제가 최근에 베트남에 가 봤더니,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요.
곧 베트남도 이 대열에 들어설 것으로 생각합니다.
베트남도 유교전통을 가진 나라입니다. 옛날에 한문을 쓰던 나라입니다.
 
유교는, 차세 중심적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고, 내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차세 중심적 세계관은, 종교학에서 독일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어가 있습니다.
   Diese-seite keit 영어로는 this side ness, 번역하면 ‘이 세상적이다’입니다.
 
   초월세계를 인정하면 ‘옌사이테 Jenseits’가 되고 next world
   이 세상만 전부이면 ‘디제사이테 Diese-seite’가 되는 겁니다. this world
 
한국인의 유교적 세계관은 전적으로 차세(현세) 세계관입니다.
이 차세중심적 세계관에서는, 이 세상에서 출세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승리해야 되는 것이, 삶의 제일 목적이 됩니다.
 
유교국가가 다 그렇습니다만,
전세계에서 한국인이 가장 경쟁심이 강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입시학원 같은 것을 보십시오.
저는 한국에서 ‘지나친 사교육을 줄이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도 있는데요.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이란 시민단체도 있습니다. 거기에 제가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한국의 사교육이 지금 심각합니다. 물론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돈을 너무 쓰기 때문인데요.
결국 부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를 강화시키는 겁니다.그래서 사회계층간 차별을 더 심화시킬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사교육이 있는지 보십시오.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폴, 한국 등 모두 유교국가들에만 있습니다.
 
이렇게 경쟁심이 강한 민족성에다가,
우리 문화가 세속화 되어서
돈, 권력, 명예.. 이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리니까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일합니다.
그 이유가, 그 부지런함 그 자체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한 동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부자되고, 더 높아지고.. 즉, 건강하지 못한 동기이지요.
 
동시에 그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거의 꼴찌에 가깝습니다.
지난 해 미국의 유명한 여론조사기관인 Pew Search Center에서 조사한 결과에 보면,
한국은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47점인데,
미국이 65점, 이스라엘이 75점, 네덜란드는 95점입니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보다도 한국이 더 불행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필리핀보다 우리가 얼마나 더 잘 삽니까? 그런데도 왜 더 불행할까요?
 
나보다 더 돈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경쟁심으로, 불행하게 느끼는 거지요.
나보다 더 지위가 높고, 나보다 더 권력이 큰 사람이 있으니, 삶에 만족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인이 경쟁심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도덕적 수준이 낮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하니까
경쟁이 강하면, 그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져야 되는데,
운동경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fair play이지요.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fair play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쟁심은 강한데 fairness가 없으니, 사회는 엉망이 되고 사람은 불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만 하니까
fair play는 더 안 이루어지고, 악순환이 벌어지는 거지요.
 
교회가 이걸 극복해야 됩니다. 이걸 고쳐야 할 터인데
교회가 그걸 오히려 받아들이는 겁니다.
소위 번영신학이란 이름으로요.
외국의 신학자들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은
success philosophy, prosperity theology라고 그럽니다.
 
돈 많이 번 사람을 보고는 ‘(잘 믿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인정해 줍니다.
그게 여러분, 우리 (고신)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단도, 말은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번영신학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실제로 목회현장에서는, 주된 흐름이 번영신학일 것입니다. 안 그런 교회도 있지만요.
우리가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 봅시다. 정말 개혁주의에 충실합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설교할 때도, 말씀 한 구절 읽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저는, 고려신학교에서도 성경에 대한 강조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좀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 제목이 ‘기둥 같이 되자’인데,
갈라디아서에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2:9 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그 구절을 본문으로 읽고는,
1대지, ‘기둥은 쪽발라야 된다’ 말은 맞지요.
2대지, ‘기둥은 튼튼해야 된다’
그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지만, 그러나 설교는 아닙니다.
그 본문이, 그렇게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한 번은 라디오 설교를 들었는데
제목이 ‘입상적 기독교’ 우리 기독교는 서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일어나 함께 가자’ 그 구절이 본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일어나야 합니다.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성경을 인용하다니요. 이건 성경해석이 아니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을 끌어와서 쓴 것이지요.
 
그것은 exegesis(강해)가 아니고, (ex: ~로부터 끌어냄)
Ixegesis가 되는 셈이지요. (I : 내 말을 주장함)
 
그렇게 하니까 기독교의 진리가 다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세상적인 기준, 세상적인 가치로 설교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어느 유명한 목사님은,
‘설교 준비’에 대해서 책을 쓴 것을 보니까
“주석을 버려라”고 썼는데, 주석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분의 진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한 주장입니다.
얼마나 거만합니까. 우리 기독교가 2천년 역사를 통해 내려왔는데
교부시대의 전통부터, ‘역사적 기독교’가 주석에 담겨 있거든요.
 
저는 그분들의 글을 읽으면 너무 놀랍습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하고, 얼마나 많이 토론을 했고,
2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엄청나게 똑똑한 신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고 고쳐서 나온 것이
정통 교리입니다.
 
성경주석은, 단순히 그 주석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과거에 그 구절에 대해서, 다른 신학자들이 해석한 것을 전부 조사해서
정리해서 내 놓은 것이 주석이므로, 적어도 좋은 주석이라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준비할 때, 반드시 주석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뭔데,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다 팽개쳐 버리고
‘자기가 직접 성경을 딱 읽어서 깨닫는 데로 설교하겠다.’
그것은 굉장히 교만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준비해서는 안 되지요.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니까, 온갖 세속적이며 세상적인 것이
성경의 이름으로 설교가 되고,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계속 들으니까
지금의 한국교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한국교회는 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정통 신학, 정통 신학!’ 이렇게 늘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는, 정통신학이 많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의 권위로 전하는 사람도.. 많이 안 보입니다.
 
대신에 목회자 자신의 생각이, 설교가 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 헌금이 늘어날지..’
<!--[if !supportEmptyParas]-->
(중략) <!--[endif]-->
 
▲물론 한국의 여기 저기 순수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의 전통적인 복 사상이, 많이 그대로 있습니다.
소위 정통적인 교회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한국교회가 완전히 망해야(뒤집어져야), 새싹이 나오지 않겠나..’
 
교회에 들어와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무 것도 없었을 때,
마치 초대교회처럼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한국교회가 그랬습니다.
교회당에 나가도, 덕 보는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만, 교회에 나왔고
정말 순교적인 사명을 가진 분들만, 목회를 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관심 있는 분들은, 목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깨끗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교회가 이제 완전히 망해서(뒤집어져서)
기독교인이 되는게 덕볼 게 아무 것도 없고,
적어도 세속적으로 덕볼 게 아무 것도 없게 될 때
그럴 때 한국교회는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겠나..
제가 “인간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정말 개혁되겠나?’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물론 제가 그걸 바라는 것은 아니고,
‘지금이라도 고치자’는 취지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종교개혁의 그 정신,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것 밖에 방법이 없잖습니까.
 
정말 순수하게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이 옳다면 옳은 거고, 성경이 그르다면 그른 것이고
 
그리고 참 순수하게 성경말씀을 받아들여야지,
내가 편견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주석을 읽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요즘 너무 큐티 하면서, 자기가 은혜 받은 대로 말씀을 전하는데,
그게 너무 주관적인 해석이 되고, 객관적 해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은혜 받은 것, 주관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큐티 책도, 주석을 많이 조사해서 나오는 책들이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경주교회에 어느 시골 전도사님이 오셔서
   자기가 성경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좀 과장되게 표현한 것 같아요.
 
   그 분이 순수하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데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릎을 탁탁 치면서 읽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이 제 생각과 똑같은지요!’
 
   제가 그때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야,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생각이 저 시골 전도사 생각과 같아서는 되겠나?’
 
   물론 그분이 의도하신게 있겠지요.
   성경말씀이 너무 좋으니까,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지금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아요. *무조건 개인적으로 은혜만 받겠다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 신학생들은, 성경 연구를 깊이 있게 많이 해서
성경이 어떻게 우리 인간의 마음과 생각에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다.
맞으면 성경이 아니지요. 우리 마음과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달라요.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같으면, 성경이 필요없지요.
하나님께서 계시로 가르쳐주실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계시종교라 그러고 개혁주의라 그러는데
하나님의 생각, 성경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 성경의 생각에, 우리 생각을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때, 과거에 우리가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자꾸 우리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했던 게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을 해야지요.
그래서 조금 이런 움직임이, 힘들지만 일어나서
한국교회가 말씀으로 개혁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환란을 통해서, 진짜 뒤집어져서 개혁됩니다.
 
아직까지 형식적이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말들은 하는데,
그게 형식으로만 그치지 말고, 그게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에 충실히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강의) 마지막으로,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저도 너무너무 잘 압니다.
우리가 그걸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 조심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을 항상 생각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성경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다윗만큼 뛰어난 분이 많이 없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감수성이 강합니까. 그래서 시편도 많이 썼습니다.
그의 신앙이 얼마나 철저했습니까.
 
그런데 그 다윗이, 밧세바 사건 때 그렇게 무식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불의한 부자 이야기를 예를 들어 말하니까
다윗이 펄펄 뛰면서 ‘그런 나쁜 자는 당장 처벌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삼하12:5~7
 
그 구절을, 저는 늘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도 다윗처럼 될 수 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윤리운동을 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쓴소리를 많이 하니까
‘너는 다윗처럼, 다른 사람을 흉이나 보면서,
내 자신의 들보는 못 보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가 한편으로는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애를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다윗처럼 잘못할 수있다’는 것을
이 두 가지 노력을 같이 해야,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문화와 접하면, 비판적인 의식이 더 생깁니다.
문화는, 접촉을 많이 하면 할수록, 발달된다는 그런 이론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 세계 문명을 보면, 문명이 발달된 곳은 다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그 이유는, 고대사회에서는 배가 제일 좋은 교통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항구에서 다른 문화와 접촉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이 문화가 발달이 되는 겁니다.
 
산골짜기에는 다른 문화와 접촉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발달이 늦어졌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비행기가 있어서, 꼭 항구가 아니라도 됩니다만
과거에는 모두 항구에서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이 많으면 많을수록
건전한 비판의식이 생기면서, 거기서 창조적인 능력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여러분은 다른 문화(미국)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한국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유리한 조건에 있습니다.
 
좀 더 객관적이 될 수 있고, 좀 더 창조적이 될 수 있고, 좀 더 건전하게 비판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잘 이용해야지, 너무 한국 것만 생각하고, 한국 책만 읽고.. 그래서는 미국 문화를 모르고,
미국 신학과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발전이 늦어지겠죠.
 
그래서 미국문화에 대해서도,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건전한 비판적이 되어서
좀 더 창조적이고, 개혁적인 미래의 지도자들이 나오도록
여러분들에게 기대를 겁니다.
 
제가 사실은 다른 제목으로 준비를 해 왔는데,
여기에 와서, 이 제목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제 기억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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