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3 내 증인이 되리라 - 이재훈목사 - YouTube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행1:1~2 15.09.13스크랩, 출처
◑사도행전적 교회는, 조직화되지 않았고, ‘유기적’이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적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가?’ 논의 하기 전에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을 바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마16장에 나타난 그 교회의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시대의 문화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 역사하셨던 성령의 역사, 그 사도들의 증거, 사도들의 그 삶의 모습이
오고오는 모든 시대에, 시대와 문화를 바뀌었을지라도,
동일하게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꿈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으로, 온전히 변화되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시작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만든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믿는 사람들’이라고 불려졌을 뿐입니다.
혹은 ‘제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도’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형제들’,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규정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도 헹 11장의 안디옥에 이르러서
거기서 믿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평가요, 별명과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또 그렇게 사용되지 않았어요.
신약 전체에서 3번밖에 나타나지 않죠.
‘우리가 함께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자’ 라면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 시대에 더 많이 불려졌던 것은, 역사가들에 의하면
주후 약 200년대 까지는, 유대인들은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사렛 도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별명으로 불려졌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함께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나사렛 도당’이란 표현이 더 많이 쓰여 졌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을 뿐입니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그 도를 좇는(따르는) 사람들’
사울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예루살렘으로 잡아가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이었죠.
‘기독교’라는 말 자체도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기독교라는 단어 자체도, 주후150년 경에, <폴리캅의 순교사화>라는 책에
처음으로 기독교라는 단어가 등장할 뿐이지, 사도행전이 쓰여진 그 시대에는
‘기독교’라는 단어 자체도 쓰여지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한 ‘교회, 기독교, 그리스도인’ 이런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지도 않았고, 불러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그들은 어떤 조직체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정해진 틀이나 제도도 명확하지 않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어떤 조직체라기보다는, 유기체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동체, liquid, 용액 같은, 물과 같은 정형화되지 않는,
그저 흘러가는, 어떤 운동이었고, 영향력이었습니다.
조직체를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을 배치해서
자금을 동원해서, 사회를 향해서 어떤 이념을 실천하는 운동이 아니라,
liquid처럼 그냥 흘러가는, 그 성령의 생수가 흘러가는..
그러한 놀라운 영적인 물결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행전적 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교회 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고 정형화되고,
또 우리가 익숙했던 모든 교회의 문화, 직분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라는 한 분을 빼놓고는, 모두가 다 변화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입니다.. 라는 결정과 결단을 할 때, 우리는 사도행전적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유동적/유기적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liquid church처럼, 사도행전적 교회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구비율을 따져도 유대사회에서도 아주 소수였고, 로마제국 전체를 봐서도 아주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도당’이라고 불렸던 것은, 하찮게 여기고, 비꼬고,
그들을 무시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죠.
‘저 사람들은 이상하게 살아가고, 어리석게 살아가고,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지도 않았고, 재물이 풍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조직을 만들 통신이나 선전도구도 없는, 아주 미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소수의 사람들이
2백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는, 로마제국을 뒤집어엎는 엄청난 운동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요?
사회학자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사도행전의 역사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교회 역사가 없이는, 세계역사도 해석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나 역사가들은, 그들이 마치 조직화해서 운동을 일으켜서
로마제국을 뒤집어엎는 기독교로 공인받기 위해서, 그들이 로비를 하고,
열심히 해서 마치 공인을 받은 것처럼 이해합니다만..
그런 글을 쓸 수는 있어도, 그건 진실이 아니죠.
그렇게 미약하고 미천해 보이고, 소수의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이,
어떻게 로마제국을 뒤집어엎는,
행17장에 보면 ‘세상을 뒤집는/뒤흔드는/요동치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가요?
그것은 사도행전의 역사만이,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줄 뿐입니다.
3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를 공인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죠.
그것은 정치적인 결정이었죠.
그러나 아쉽게도 교회가 공인 받고, 세력화되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는 하나의 도구가 되면서,
세상적인 조직, 세상적인 가치관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교회는 영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중세시대로 들어갑니다.
중세 암흑의 시대 Dark Age는 바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를 공인한 AD313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거죠.
교회가 유동체로서 존재할 때는, 엄청난 영향력을 사회에 미쳤는데,
세상적인 조직화, 세력화가 되었을 때는, 오히려 영적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교회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로마제국을 뒤집어엎을 만큼 영향력이 있게 된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후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만해지고, 그리고 세상적인 권력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교회가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이지,
그렇게 영향력이 있기 까지 초대교회에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바람직한 모습이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그 소수의 사람들이 그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고
오늘 이 시대에 저희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된다면,
한국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로 되돌아간다면,
한국사회는 분명히 변화될 것이고, 변혁될 것이고,
세계역사에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만드는, 그러한 영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념이나, 그리고 정치조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교회다운 교회로 돌아갈 때, 사도행전적 교회가 될 때,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인줄 믿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쓴 글이,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들이 무엇을 전했는가가 나타나 있습니다.
행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썼습니다. 사도행전도 누가가 썼습니다.
의사인 누가가 그 의사의 섬세한 관찰력으로, 역사가적인 면모를 발휘한 책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편(눅)과 후편(행)입니다.
그 두 편 다 모두 데오빌로 라는 로마의 귀족층이었던 한 사람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이 사람의 신분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 최고 존칭을 씁니다. ‘데오빌로 각하여’ 이렇게 각하의 수준으로 불렀기 때문에,
아주 고위층인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쓴 책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그 두 책을 합치면, 어마어마한 분량과 어마어마한 사건들,
우리는 누가복음과 이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의 역사를 다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후 2세기 이전에 일어난, 수많은 교회의 사건들을
우리는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것이 후대에 교회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자신이 이 책을 출판해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유명한 어느 작가처럼
‘로마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써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수많은 시간동안 연구해서 발표한 그런 책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 쏟아 부어서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책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인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이런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담겨있는 책이기에,
이 책이 모든 사람에게 읽혀지는 성경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렇게 한 영혼을 향한 이런 열정을 가지고,
이렇게 아주 디테일하게. 오고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묵상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남길 수 없는 것이죠.
여러분,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없다면,
열방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열방을 향하여 나가겠다는 사람은, 자기 가까이에 있는 한 영혼에게 쏟아 붓는
열정을 체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진정성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작은 한 사람에게 한 일/봉사/ 헌신/ 기도가
어쩌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존귀한 일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무엇을 기록했습니까?
행1:1~2절은, 누가복음을 간단히 요약한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일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한 모든 것이,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하신 사도들을 통해,
명령하신 그 내용들을 누가복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첫 번째 정체성을 나타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수공동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예수행전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분부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행한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1. 사도행전적 교회는 오직 <예수공동체>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Christianity is not a religion but relationship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누구와의 관계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어떤 종교가 그 종교의 창시자가 살아있다고 말합니까?
부처가 살아있다고 말합니까? 아니죠.
공자님도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공자를 섬기는 게 유교가 아닙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 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모든 훌륭한 위인들은 죽음으로써 그 인생이 점점 소멸됩니다.
살아있을 때는 영향력이 있었지만, 죽고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점점 감소되죠.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 이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그 영향력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이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록입니다. 예수공동체!
사도행전적 교회는, 언제나 모든 영광이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그리고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고,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은,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기록입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존귀히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단지 예배 때만 불려지고, 우리 언어에만 회자되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시고, 경배의 대상이 되시고,
우리 전파와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시는 예수님이 되셔야 합니다.
보통 교회를 보면, 예배 드릴 때는 ‘예수 우리 왕이여’ 라며 은혜롭게 찬양하는데,
회의 시간에도, 그렇게 예수님을 더욱 높이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대화 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이 활발히 살아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의 전 존재 속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교회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인 것입니다.
◑2. 사도행전적 교회의 두 번째 정체성은 <성령공동체> 입니다.
(첫 번째 정체성은 ‘예수공동체’였고요, 세 번째는 ‘증인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세례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 물세례를 받았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정결함을 받았다는 증거이죠.
죄용서 받고, 구원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물세례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으면, 확신과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유는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의 조건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교회의 한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교회의 지체가 되는 조건입니다.
한 교회가 과연 사도행전적 교회냐/아니냐는
그 회중 가운데, 성령의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몇 명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 교회의 목회자나 리더십들이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하면,
절대로 그 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사역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 시대의 문화, 어쩌면 세상적인 가치관,
세상적인 문화에 그냥 존속하는 하나의 종교집단으로서는 존재할 수 있어도,
교양과 문화를 가르치는 그러한 종교체계는 될 수 있어도, 사도행전적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약속된 성령님을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하고,
사모하고, 소망하는 모든 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나에게 그 확신, 능력을 체험하는 그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모함이 있는 모든 영혼에게, 성령의 세례는 반드시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사도행전에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는 있지 않다’는 이론은,
더 깊은 연구와 고려를 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출생하신 것이 단회적 사건인 것처럼
성령님이 역사 속에 오신다는 차원에서는 단회적이죠.
또 오순절에 나타난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뜨거움 속에서 물세례를 받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 세례가 같이 임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물세례는 몇 십 년 전에 받고, 성령 세례는 수 십 년 후에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이 세 가지 형태가 다 나타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장관) 경우에는, 빌립이 전도했을 때
이사야의 말씀을 풀어주었을 때, 성령의 세례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세례를 받겠다고 그래서, 물세례는 성령세례 후에 받죠.
이 경우에는, 성령의 세례가 물세례보다 먼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물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뜨거움 속에서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지식적으로 고백함으로 예수는 믿었지만,
그래서 물세례를 받았지만, 그 확신과 능력으로 임하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10~20년 오랜 시간을 거쳐서, 그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점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못하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주의해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으면,
내가 아직 체험을 못해도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들 중에서도 일부는, 성령세례가 없다고 주장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는데요.
혹시 자기가 체험을 아직 못해서, 그렇게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도, 사모할 때, 곧 받게 되겠지요. 그때가 언제든지 큰 상관은 없어요.
▲성령의 세례 없이는, 사도행전 교회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저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두가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그런 성령의 세례 받은 사람들이 될 때,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공동체로서, 저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사도행전적 교회는 <증인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은 '증인행전'입니다. 증인이란 무엇입니까?
증인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다.’ 하며, 팩트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때로는 어떤 희생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증인이죠.
▲법정에서 사실을 말하는 증언의 위력이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때로는 그 증인이 법정에 나오지 않기 위하여,
온갖 술수와 음모도 자행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사실임을 고백합니다.
성경의 예수님이, 신약에 나타난 모든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언하는 겁니다.
성경의 예수님이 사실임을 증언할 때, 나타나는 모든 희생과
그리고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의 힘’입니다.
진실이 살아있기 때문이요,
사실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사건은,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거기에서 사도행전적 교회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만약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이념이나,
또 우리가 만든 어떤 조직의 이념을 전하면, 우리는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뜻, 아무리 가치 있는 가치를 붙잡아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실패하는 것이, 사람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의 운동력은 끊이지 않습니까?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까지,
이 증인들의 고백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줄로 믿습니다.
▲불에 던지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면 살려주겠다고 해도,
내가 불에 타 죽을지언정,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던 사람이,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러분, 똑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면, 한 사람은 변절하고, 한 사람은 목숨을 내걸고 지킵니다.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초대교회도 배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단도 있었고요.
왜 그들이 배교했을까요? 왜 그들이 이단에 넘어갔을까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결코 배교할 수 없고, 결코 변절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실을 사실대로 증언할 수 있는, 담대한 용기는,
사실에 기초해서, 성령을 받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우리가 증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이 증거를 끊이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증거는, 온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증거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었던 시대는, 땅의 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밝혀졌고, ‘땅 끝’이라는 해석이 묘연해 졌습니다.
사람마다 땅 끝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땅끝이 어디인가가 규명되지 않아요.
예수님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땅 끝’이라 그러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까지만 말씀하셨기에 다행이지,
만일 사마리아를 넘어서 어느 지역으로 유럽으로 가든지,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이든지, 지역 이름이 하나만 더 나왔어도
그 외 나머지 지역은 다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까지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 다 ‘땅 끝’입니다.
즉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지역이 다 ‘땅 끝’입니다.
지구상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곳이 다 ‘땅 끝’입니다.
땅 끝까지 우리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우리 집만 바라보는 성도가 아니라
언제나 땅 끝을 바라보는 교회가,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땅끝 교회입니다.
땅끝을 바라보는 교회!
땅 끝을 향하여 증언하는 교회가,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마치는 말 / 우리는 사도행전과 동시대의 사람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일깨워 줍니다.
행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은 승천하셨지만, 그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공동체가 된 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은 죽은 자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살아있는 분의 이야기이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에 오셔서 좀 끝내시지, 왜 이렇게 두 번에 걸쳐서 오시나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한 번에 오셔서, 역사를 끝내셨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고, 심판에 이르렀을까요?
그러나 한 번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고
십자가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증언을 맡겨주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림으로써, 모든 민족이 구원 받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기간이요, 구원 받을 만한 은혜의 기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기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도행전 시대에 살았던 성도들과,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시대는 같은 시대입니다.
다른 시대가 아닙니다. 2천년의 시대가 지났어도, 지금은 같은 (종말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를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왜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냐?’ 라는 당시 사람들의 질문에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8
하나님의 계산법이죠.
천년을 하루 같이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의 길이가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우리는 수 천 년이 지나서,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제는 안 오시나보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천년이라는 기간을 하루 같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깊은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지금 며칠이 지난 것입니까?
수 만 일이 아니라, 이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하루가 천년같이 여겨지면서
하루하루를 천년같은 시간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는, 소수의 사람만 아시게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오십니다.
처음 오실 때는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구름타고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너무나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능력있는 모습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BC와 AD로 역사가 나눠 졌지만
다시 오실 때는, 역사의 The End 끝이 올 것입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때까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때까지!
예수공동체로, 성령공동체로, 증인공동체로
주님 앞에 온전히 쓰임 받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불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예수 공동체 삼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주시는 성령 공동체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거하는, 증인 공동체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명,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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