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쏘는 것은 죄 고전15:56~57 영어 편역, 출처
Thoughts on the Last Battle by Charles Spurgeon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를 일부 발췌, 편역했습니다. 출처를 보세요.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쏘는 것’은, sting 즉 독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라는 구절도, The sting of death is sin,
'사망의 독침은 죄요' 로 번역할 수 있고,
이 문장을 도치하면 ‘죄는 사망의 독침이다’는 뜻이죠.
즉 죄를 자꾸 지으면, 결국 사망의 독침을 맞다가.. 나중에 치사량이 이를 수 있다.. 라는 뜻도 되겠습니다.
‘오 죽음이여, 네 독침(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죄에 있습니다.
오 무덤이여, 네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죄에 있습니다. 고전15:56
이 질문에, 이어지는 57절에 그 대답이 나오는데,
‘그것은 죄에 있다’고, 바울은 자신이 묻고, 자신이 답합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바울은 ‘죽음’이란 우울한 현실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작정 비웃지 않습니다.
기독 신자에게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이렇게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사망의 마귀도, 이기는 권세가 있고, 쏘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을, 아주 무서운 괴물처럼 묘사합니다.
화살이나 총보다 무서운 어떤 ‘쏘는 침’이 있다니까요.
물론 바울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구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이렇게 죄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마치는데요.
▲제 스펄전이 이런 본문을 선택해서 설교하려 할 때,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주 웅장하게 선포하고 있는데,
제 스펄전의 설교가, 그런 바울의 진의를 그대로 다 표현할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사실 저는 이같이 거창한 주제를, 그 깊이를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깨달은 만큼만 설교하겠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전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먼저 ‘쏘는 것’, 즉 독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죽음을 마치 무서운 용이나 괴물처럼 묘사합니다.
입에서 뭘 쏘아대는, 뿜어내는 용을 생각해 보세요. ‘사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망이 뭘 쏘아댄다고 합니다. The sting of death is sin.
비극은, 자연인은 도저히 그 사망이 쏘는 독침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연인은 다 죽는 것입니다.
이 사망이 쏘아대는 독침에서 피할 수 있는, 어떤 지푸라기 같은 도움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다 맞아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지요.
모든 사람은, 결국 이 돌아올 수 없는 문을, 통과하게 되는데요.
이 용의 심장을, 칼로 찌를 사람은, 전설에는 나오지만 실제로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망’이란 괴물은, 정말 무섭습니다. 자연인에게 압도적인 괴물입니다. 주1)
사람은 절대 사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망이 독침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독침은 제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이 가진 독침 (그 머리에 뿔이 뾰족하게 나 있다고 연상할 때)
그건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 괴물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의 무기가, 무력화 되었으니까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사망의 독침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다.’ "the sting of death is sin."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55~56
이 말씀은, 사망이 ‘죄’를 통해서, 권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짓고, 거침없이 지을수록.. 사망이 내게 크게 역사하고,
내가 죄를 적게 지을수록.. 사망이 내게 역사할 힘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성도가 경건한 삶을 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사망 권세를 가진 마귀가, 그 성도를 어떻게 공략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사망’은,
1)우리 육체의 죽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2)‘생명’의 반대 개념으로서, 우리의 날마다의 삶에서
쉽게 말하면 ‘지옥 같은 삶, 사망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생으로 옮겨진 성도,
그래서 복음에 순종해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칠 수 있는 거죠.
전혀 두려울 게 없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안 믿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면 마음 편히 죽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죄를 지어서 그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물론 지옥으로 가지요.
그럼 신자도 죽는데,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게 아니라,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고생 그만 하고, 천국에서 ‘쉬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같은 죽음이지만, 그 본질이나 결과는 아주 다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부르실 때처럼, 성도들도 때가 되면 불수레를 보내주실 겁니다.
에녹에게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셨듯이 창5:24
똑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비신자에게 죽음은, 슬픔, 불행, 비극, 형벌, 죄값을 치름이지만
신자에게 죽음은, 영광, 안식, 기쁨, 상급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빨리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게 해 주소서!’
▲그런데 지금 여기서 주로 논하는 것은, ‘임종의 죽음’보다는,
‘우리 일상의 죽음 같은 삶’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사망의 독침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히려 사망의 독침을 무력화시키는, 생명과 평안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죄를, 식물에 비유해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먼저는 씨가 뿌려지고, 그 다음에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나중에 열매가 맺게 되죠.
이렇게 죄는 먼저, 자기 마음속의 소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혹은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들어오거나 시작됩니다.
일단 그 ‘죄의 씨’가 뿌려지면, 그걸 회개치 않고 내버려두면
그게 가만히 있지 않고, 점점 자라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큰 죄라도, 그게 처음에는 아주 작은 씨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가만 놔두면, 나중에 그게 산처럼 아주 커지게 됩니다.
물론 택하신 자녀는, 그렇게 커지기 전에, 하나님이 징계하시겠죠.
엘리야가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서, 큰 비가 올 것을 예견했는데,
비유하자면 죄도 꼭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만한 작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면, 작은 구름이 뭉치고 모이면, 새카만 구름이 되어 하늘을 뒤덮게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늘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살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폭풍우같은 비가 내리게 되는데요,
죄의 결과 consequence of sin를 감당해야 되는 때이죠.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것은, 죄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상은 사형 받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의 죄과가 다 처리된다고 할까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우리가 죽어도,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도,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니까요, 그것도 영원히!
그러니 이만저만 밑지는 장사가 아닙니다.
살아서도, 사망의 독침을 맞고서, 사망의 그늘 아래서 살다가,
죽어서도, 만약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용서받지 못하고 죽었다면
영원히 또한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그게 달콤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 씨앗부터, 그 싹부터, 그 떡잎부터 잘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성은, 죄를 지으면, 그보다 더 큰 죄를 짓기가 더 쉽습니다.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기 보다는요.
계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 말씀이, 천국과 지옥의 상태를 말씀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던 사람은, 지옥에서도 계속 더러운 상태로 살고,
세상에서 의롭게 살던 사람은, 천국에서도 계속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살아갈수록, 빈익빈처럼 더 큰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신자들은 부익부처럼 점점 더 회개하고
점점 더 거룩하게 되어서, 결국 천국에 가는 거죠.
지금 죄의 유혹을, 마음 단계에서, 소원 단계에서부터, 싹 단계에서부터 잘라야 함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 그러면, 그게 더 커져서, 그때는 자르기가 더 힘들다니까요.
그리고 그 열매까지 거두게 되면, 그건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히 거두게 됩니다.
가장 좋은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늘 성결한 삶을 살되
자칫 죄를 짓게 될 때, 마귀가 사망의 독침을 쏘아대려 할 때,
그 중대성을 깨닫고, ‘아 저 친구가 독화살을 쏘려는 구나! 맞으면 최소 사망이구나!’
이걸 깨닫고, 떡잎부터 잘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방치하고 가만 놔 두었다가는, ‘사망의 삶’을 살다가, 영원히 사망하게 되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여기서 ‘욕심’도 ‘성적 욕망, 정욕 lust'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로 정욕 lust이라고 번역한 영어성경도 있습니다. NIV는 desire로, KJV, NASB는 lust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은혜의 방편으로, 설교로, 성령으로
우리가 늘 범죄하지 않도록,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상태가 더욱 더 악화되어갈 것입니다.
경제 생활이 점점 어려워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기 속에, 죄가 점점 더 장성해 가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요.
그리고 사탄이 계속 ‘사망의 독침’을 날리고 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중대성, 심각성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저기 국립 미술관에 가면,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서 들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저 스펄전은, 그 그림 감상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메두사는,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 모두를 돌로 만들어버리지요.
아무리 용맹한 자라도, 자기 힘만 의지해서 나갔다가는
그 메두사(마귀에 비유) 앞에서, 돌처럼 굳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마귀는 정말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메두사처럼요.
그를 무찌르기 위해서 갔다가, 쳐다보았다가, 자기가 먼저 돌이 되어버리지요.
사망의 마귀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7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살펴 봅니다.
다만 이 단락에서 요지는,
마귀가 사망의 독침을 쏘아댄다는 것,
내가 죄를 짓게 될 때, 그 죄를 이기기보다는
마귀는 나를 마비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죄의 위험성, 그 독침의 위험성에 경각심을 깨닫고,
은혜의 방편에 따라서,
그 죄가 침입하려 할 때, 떡잎부터, 싹부터 잘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주1) 지금 ‘사망이 과연 마귀냐?’
사망이 마귀라는 주장이 있고,
사망도 마귀 중 하나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영향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관련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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