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5:3~5, 롬12:17~21 스크랩, 출처
※매우 깊은 설교입니다. 끝까지 정독하실 것을 추천합니다/편.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참 제가 자신이 없어지는 이유는
‘과연 내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게 제가 선뜻 ‘예’라고 대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세상에서 겨우 지탱하는 것도 힘들다..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너무나 우리와 거리가 먼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목사님,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일단 좀 미루어 놓고,
세상에서 생존survive하는 믿음만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 정말 짓밟히고 있고,
손가락질과 놀림을 당하는 현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런 현실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얼마나 매일매일 이 믿음 지키기 위해,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투쟁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관심이 없으신가보다..
어찌 하나님은, 성경에 이렇게 나하고는 상관없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요.
왜냐면 이 본문 말씀을 한 번 들어보세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일5:4
정말 제가 세상을 이긴 적이 있습니까? 내가 정말 세상을 이기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해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길수도 있고/질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럼 저는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닌가봐’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b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입니다. 요일5:5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죠? (회중들) 아멘!
바로 그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을 지금 이기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과연 뭘까요?
‘세상을 이긴다’고하는 말은, 세상에서 정말 잘 나가고, 성공하고, 세상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무엇인지,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이 세상 임금,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리는 마귀를 이기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은 악한 자에 처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본질적으로 만연하는 악을 이기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악,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까?
롬12:14~21절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직면해야 되고, 피할 수 없는 세 가지 대상이 나오는데,
핍박, 악, 원수입니다. *아래에서 나중에 자세히 살핍니다.
대표로 한 구절만 먼저 살펴보면,
롬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핍박과, 악과, 우리에게 원수처럼 대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도 있고/아니면 우리는 세상에 굴복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경건한 성도는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너무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A집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그 집사님에 대해서, 제가 나름대로 잘 아는 분입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그 분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자기를 때린답니다.
왜 때리느냐고 물었더니, 교회에 다닌다고.
욕설하고, 핍박하고..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제가 남편의 매를 맞아가며, 핍박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딸아 이만하면 됐다. 여기까지가 네가 감당할 몫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남편을 떠나면, 이 남편의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성도님들보다 못 하구나.
이 분이 나보다 훨씬 더 나은 분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핍박이라는 이슈는 다루기가 참 쉽지 않고,
이게 좀 피상적으로 치우치기 쉬운 이유는, 대다수 성도들은 핍박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고,
우리가 핍박을 당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안 살아서
'징계성 핍박'을 당하는 경우가,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적이 있나요?
우리가 다시 한 번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핍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기독교 신앙의 실상을 가장 철저하게 테스트하는 시금석이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 이 기독교 신앙의 reality를 가장 철저하게 테스트하는 시금석은
"핍박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롬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예수 믿는 길에서 핍박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핍박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핍박은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핍박은 필수과목입니다.
성경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딤후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우리가 정말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예수님처럼 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왜 내게 지금 핍박이 없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나는 왜 이렇게 신앙생활이 편안한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안락하고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 합니다.
자기가 적당히 타협하고 살기 때문에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는,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적 기독교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미국이라는 상황과 문화에 의해서 다시 재조명된 기독교입니다.
또 우리가 한국에서 자라면서, 한국화된 기독교입니다.
문화에 철저하게 젖어있는 기독교이지, 성경이 말씀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독교는, 지금 저희가 살펴보려고 하는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입니다.
그게 뭐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으리라!'
행14장에도 보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면, 핍박은 반드시 있다'고 말씀합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까? 정말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환난은 반드시 겪는 것입니다.
성경이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살후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얻으려면, 고난/핍박/환난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했으므로 예수님처럼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제 동의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는 핍박을 받을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수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좀 마음이 정리되시죠?
‘OK! 핍박은 내가 받아야 되겠구나’
여기까지는 동의가 다 되시죠?
그러면 여러분, 따라서 해 보세요.
“나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실 것은, 자기가 잘못해서 핍박받는 것은 제외하고요.
그런데 성경은, 다음과 같은 "더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시는데요..
◑1. 핍박을 당하면,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데, 정말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데
핍박은 필수적으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거기까지는 우리가 동의가 되는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너희를 핍박할 터인데, 너희가 핍박을 당하면,
어떻게 올바르게 반응을 해야 되는지를 말씀해 줍니다.
"사람이 너희를 핍박하면, 너희도 그 사람을 핍박하라" 라고 말씀하지 않고
"만약에 너희가 핍박을 당하면, 오히려 축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또 반복해서 말씀하기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12:14
저와 여러분 안에는, 사람의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성에 따라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누가 나를 핍박하면,
그 핍박하는 사람을 나도 저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으로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본성대로 반응하지 말고,
왜냐면 우리가 본성대로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죄성에 찌들어있는 이 본성을 따라 사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사는 것의 결과는, 성경은 멸망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란,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저주하지 말라고 했느냐면(롬12:14), 우리가 저주할 것을 예상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로마서를 통해서,
"너희에게 핍박이 올 텐데, 그때 너희는 저주하고 싶을 것이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저주가 나갈 것이다.
그것은 본성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믿음은,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다.
저주하지 말고, 저주하다가도 멈추고,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러분, 이것이 가능합니까?
제가 한 번 실제로 당해보니까, 핍박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 은혜로 제가 '저주하지 않는 것'까지는 해 봤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인데, 사실 그것도 힘듭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핍박하면, 나도 한 마디 해 주고 싶지 않나요?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저주의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핍박하는 사람에게, 내가 잠잠할 수 있을 것인가요?
그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제가 잠잠히 있어보았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랬더니 그게 되더라고요. 핍박에 반응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있는 것이 가능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것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까지가 아니라, "축복하라!" 까지 도달하라고 명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압니다.
(만약에 모르시는 분이 계신다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를 적나라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내가 얼마나 악한 자인지 압니다. 아시죠?
내가 얼마나 구제불능인 것을 압니다. 얼마나 내가 불쌍한 자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행위대로 제게 갚아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예수님께 지우셨습니다.
제가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그 아들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내가 기억한다면,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저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주신 것을, 내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될 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저주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축복을 누리며 은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맞죠?
그런데 우리가 복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일한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나를 핍박한 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도 베푸셨으니, 나를 핍박하는 그에게도 베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나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기가 조금 더 쉽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원리인데요. 축복과 저주의 원리! 우리 모두는 다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의 권세는, 생명을 불러 올 수도 있고/사망을 불러올 수도 있고,
축복을 불러올 수도/저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면, 그 복이 자녀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축복하는 이유는, 그 축복이 그 상대방에게 임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저주할 때, 저주가 상대에게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했는데, 그 사람이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면, 그 복이 그에게 임하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니면, 그 복은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이 축복을 받을만하든, 받을만한 그릇이 아니든지에 상관없이
축복하는 것은 나에게 유익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저주도 똑같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저주했는데,
그 사람이 저주를 받을만한 짓을 했으면, 저주가 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주를 받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면, 그 저주가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가 저주받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이유는,
내가 저주를 당했는데, 나도 저주하는 것이 당연하다 same same 그렇게 생각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저주함으로 말미암아, 나도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약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너희는 저주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입은 사람을, 우리가 저주하는 것은,
은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미운 사람이건, 그 사람이 아무리 보기 싫은 사람이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정말 나쁜 사람이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약3: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우리 입은 하나인데, 쓴물과 단물을 함께 솟구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찬송한 입으로 저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을 우리가 축복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히브리서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나옵니다.
히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성경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믿음으로, 자기 믿음 때문에
궁핍도, 환란도, 핍박도, 그냥 이겨내는 것입니다.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히11:38
이 설교의 제목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즉 세상 마귀, 악을 이기는 사람인데,
그는 바로 원수를 용서하고,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히브리서 11장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크리스천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고요,
정말 자기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이러한 핍박과 환난과 궁핍을 그냥 감내하는 사람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환란과 핍박을 견뎌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진짜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기독교는
이것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까?
어쩌면 우리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2.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Do not repay anyone evil for evil be careful to do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everybody
'악을 악으로 갚지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누가 나에게 악을 행하면, 어떤 사람이 나를 악하게 대하면,
나도 당연히 악하게 대하게 된다는 본성을 전제로 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은 지극히 본성적인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합니다.
아니 내게 악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선하게 대할 일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악하게 대해야죠.
그런데 기독교는, 본성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본성을 거스리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나에게 악을 행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리라.’
우리는 복을 비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악하게 대하는 사람, 우리를 욕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똑같이 반응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을 비는 그 부르심이, 저와 여러분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희한한 부르심입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냐면,
여러분, 누가 나에게 악하게 대하는 것은, 나도 당연히 악하게 반응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나도 악하게 반응함으로써, 그 악에 동조하라’는 것이 마귀의 의도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악에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악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악에 동조해서, 악에 무릎꿇어서, 그 악과 한 패거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악을 이길 것이냐, 악을 정말 우리가 이기기 원한다면, 악으로 반응하지 말고, 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그 악이(마귀가), 선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악을(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벧전2: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우리가 선을 행하므로, 거기에 따르는 고난을 받지만
그것을 참으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고, 거기에 따르는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을 인내해서 참으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요!
너무나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벧전2:21
이것도 말도 안 되는 부르심입니다. 이런 부르심은 노 땡큐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면, 그건 난감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To this you were called, because Christ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follow in his steps.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먼저 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본example을 만들어주셔서, 우리로 따라오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악하게 대한 자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선을 배풀어라.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을 일이 생기면',
여러분, 인간 본성은 원수를 꼭 갚고 싶고, 보복하고 싶습니다.
앙갚음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류 역사는 서로 원수를 갚고 또 보복하고, 또 원수 갚고 보복하는
그 역사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절대 원수를 우리가 갚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원수 갚은 것이 우리의 잡job이 아니랍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보복하고 우리가 원수를 갚으면,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판장이 되는 셈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일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우리는 원수를 갚을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의인이라면, 정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가 원수를 갚을 자격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나도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나도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 내가 원수 갚을 자격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제게 정말 원수같은 그런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이 제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아마 갑절로 갚을 것입니다. 원통하고 분통 터져서 그렇게 배로 갚아줄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해코지 한 것보다, 더 이상으로 갚아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내가 갚게 되면,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다.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롬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원수는, 미운 정도가 아닙니다. 그 정도를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원수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가 쫄딱 망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를 오히려 먹이고 마시우게 하랍니다.
이 구절의 해석이 난해합니다. 대부분의 주석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람 머리 위에 숯불을 갖다놓으면, 타 죽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그 미운 원수, 더 잘해 주면,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부으실 진노를
그 머리 위에 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가 미운 만큼 잘 대해 주면, 심판 때 받을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서,
마침내 그를 인정사정없이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런 해석보다, 저는 아래의 해석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원수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원수를 선대하는 것은,
원수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함으로써, 그를 회개하는데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에서 언제나 ‘숯불’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회개케하는 정황에서 쓰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불이 아닙니다.
정말 원수가 미워 죽겠는데, 그 원수가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을 보고,
그러나 그 원수에게 내가 오히려 선한 일을 베풀 때, 그 원수가 충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게 원수같은 짓을 했는데, 너는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가 있니?'
자기 자신이 부끄럽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오히려 원수가 회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원수까지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맞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 원수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살후1: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바로 그 순간까지, 우리가 해야될 일은, 원수가 어려움에 처할 때, 오히려 그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벌에 그 원수가 처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크리스천의 부르심은, 이 세상의 악을 이기는 부르심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절대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악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본성을 거스려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악이 아니라 선입니다.
오직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악을 이깁니까? 어떻게 세상을 이깁니까?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할 때, 우리는 악을 이깁니다.
우리를 악하게 대하는 자에게, 우리도 악하게 대하지 않고, 선한 일로 대할 때, 우리는 악을 이깁니다.
원수를 갚아야 마땅할 그 사람, 그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오히려 그 사람을 먹여주고, 마시게 해 주고,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악을 이깁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정말 악을 이기게 되는데,
1) 첫 번째로 내 안에 있는 악을 이기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악이라는 본성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악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내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있는 악을, 내가 정복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상대방의 원수 안에 있는 악을 이깁니다.
내게 원수같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악을 선으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 그 대적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그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것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그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과 수치와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3) 세 번째는, 악 자체를 이깁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대할 때,
그것은 우리가 입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백번 외치는 것보다 더 파워풀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갈지어다' 라고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대할 때, 사탄은 굴복하고 그냥 물러갑니다. 악 자체를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말도 안 되는 이런 부르심으로 부르셨을까요?
어떻게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합니까? 어떻게 우리를 악하게 대하는 자를 선하게 대합니까?
어떻게 원수를 우리가 오히려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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